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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펀치볼 전투지(한‧미 해병, 양구에서 펀치볼을 빼앗다)

도입

강원도는 북한과 38도선을 맞대었던 지역으로 6‧25전쟁 초기 방어전부터 북진과 후퇴를 거듭하며 휴전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고지전(高地戰; 전략적으로 유리한 높은 곳의 진지를 빼앗기 위한 전투)을 비롯한 치열한 전투가 자주 일어난 지역이다. 그 가운데,
도솔산 전투(1951.06.04. ~ 06.20.),
대우산 전투(1951.07.08. ~ 07.31.),
피의 능선 전투(1951.08.18. ~ 09.05.),
백석산 전투(1951.08.18. ~ 10.28.),
펀치볼 전투(1951.08.31. ~ 09.20.),
가칠봉 전투(1951.09.04. ~ 10.14.),
단장의 능선 전투(1951.09.13. ~ 10.13.),
949고지 전투(1951.11.17. ~ 11.18.),
크리스마스고지 전투(1951.12.25. ~ 12.28.)는 강원도 양구군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낯선 이름도 있지만, 적어도 한두 개쯤은 들었을 만한 전투이다. 이런 전투의 흔적과 아픔이 곳곳에 남아있는 양구군에는 ‘해안면’이라는 지역이 있다. 해안이라면 바다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이곳의 해안은 ‘海岸’이 아니라 ‘亥安’이다. 이곳은 뱀이 많았는데, 한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돼지[亥]를 키웠더니 뱀이 사라져 편안(便安)해졌다는 데서 온 말이라고 한다.
강원도 양구군 동면사무소 앞길을 북쪽으로 달리면 금강산으로 이어지지만, 그 길은 끝까지 달릴 수 없다. 동면사무소에서 해안면 방향으로 꺾으면 왼쪽 길옆에 모자처럼 생긴 나지막한 야산이 바로 보인다. ‘펀치볼지구 전투전적비’가 있는 곳이다. 1951년 8월 29일부터 10월 30일 사이 펀치볼 일대에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 북한군과 싸우다 희생된 한국과 미국 해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용감히 싸운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8년에 세운 비석이다.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단기 4284년 8월 29일부터 10월 30일까지 서화리, 가칠봉, 피의능선, 1,211고지, 무명고지 일대를 중심으로 한 이 지구 전투에서,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용감히 싸워 적을 물리친 국군 제3,제5사단 및 해병 제1사단의 장병들이여! 또는 미 제2,제7,제25,45사단 및 제1해병사단의 용사들이여! 인류와 평화의 반역자 북한 괴뢰 제2군단이 평화롭던 이 강산을 피로써 물드리게 되고 조국의 가쁜 숨이 경각을 다툴 때에, 임들의 몸이 방패가 되어 우리 민족을 살렸고, 임들의 흘리신 피는 조국애의 일편단심으로 이 나라를 건졌도다. 여기 임들의 빛나는 충성과 영용무쌍한 투혼을 천추만대에 전하고자 이 돌을 깍아 세우나니, 비록 이 비석은 모래알이 될지라도 임들의 그 위대한 공훈은 해와 달로 더부러 길이 빛나리라.
단기 4291년 3월 15일 육군 제3군단 세움


이곳을 참배하였다가 펀치볼로(路)를 따라 올라가면 펀치볼이 나온다. 펀치볼은 정식 이름은 해안분지(亥安盆地)이지만, 이곳을 내려다본 모습이 마치 ‘화채 그릇(Punch Bowl)’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안분지보다 펀치볼로 더 알려진 이곳은 가칠봉(1,242), 대우산(1,178), 도솔산(1,147), 대암산(1,304) 등 해발 1,100m 이상의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인데, 남북 길이 11.95km, 동서 길이 6.6km에 면적은 44.7㎢로 여의도의 6배가 넘는다.
6‧25전쟁 당시 펀치볼 일대에서는 적지 않은 전투가 벌어졌다. 펀치볼 전투는 국군 제1해병연대와 미 제1해병사단이 1951년 8월 30일부터 9월 1일 사이에 북한군 제1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펀치볼 북동쪽 고지들을 빼앗기 위해 벌인 전투이다. 현재 펀치볼지구 전투전적비는 양구군 동면 월운리(또는 팔랑리)에 세워져 있고 직접 찾아갈 수도 있으나, 펀치볼 전투가 실제 치러진 지역은 DMZ 안에 있어 접근이 쉽지 않다. 최근 양구군 해안면 후리 양구 전쟁기념관이 있는 곳에 ‘양구 도솔산펀치볼지구 전투위령비’가 세워져 이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를 기념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강원도 양구군 동면 팔량리 1471-5 일대
현재 상태 원형 보존 / DMZ 안에 있어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6‧25전쟁은 한반도에서 북한군과 국군 사이에 벌어진 단순히 전쟁이 아니라 세계전쟁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즉각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과 주한 미국대사관에 보고되었다. 또한, 미국의 주도 아래 6월 26일(뉴욕 시간) 유엔 안보리(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군의 침략을 무찌르기 위해 모든 지원을 제공하자”는 내용의 ‘6‧26결의안’(우리 시간으로는 6‧27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한국에 파견되었다.
유엔군이 파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낙동강까지 거침없이 밀고 내려왔으며, 전세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부터이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과 국군은 9월 28일 서울을 되찾고, 계속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 10월 19일에는 평양으로 들어갔으며, 10월 말에는 압록강과 두만강 근처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중국군이 10월 25일부터 대대적인 공격[1차‧2차‧3차 공세(攻勢)]을 하는 바람에 국군과 유엔군은 밀려 후퇴하게 되었고. 1950년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에서마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오산‧평택까지 물러난 유엔군과 국군은 전력을 회복하여 다시 올라갔으나, 즉각 반격에 나선 중국군의 4차 공세(2월 공세)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유엔군과 국군의 강력한 공격에 북한군과 중국군은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3월 14일 다시 수도 서울을 되찾았으며, 3월 24일에는 38도선 이북까지 밀고 올라갔다.
봄이 되자 중국군은 다시 총공격을 시작하여 춘계 대공세(春季大攻勢)가 이루어졌다. 중국군은 1951년 4월 하순과 5월 중순에 참전한 이후 최대 규모의 병력인 50만 대군을 동원하여 두 차례의 춘계 대공세를 전개하였다. 1차 춘계 공세는 4월 22일부터 4월 30일, 2차 춘계 공세는 5월 16일부터 5월 23일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1차 춘계공세는 5차 공세(4월 공세)에 해당하고, 2차 춘계공세는 6차 공세(5월 공세)에 해당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의 춘계 대공세는 모두 성공하지 못하였다.
중국군의 공세가 끝났을 무렵 공산군 측과 유엔군 측 양측은 서로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가 따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무력으로 전쟁을 끝내려는 것보다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유엔군 측에서는 유엔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미국이 전쟁 이전 상태로 휴전할 것을 결정한 데 이어, 공산군 측에서도 모스크바 조‧중‧소회담을 통해 “38도선의 경계선을 되찾는 조건에서 휴전이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휴전회담이 이루어졌다.
1951년 7월 8일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전선은 큰 전투 없이 어느 정도 조용한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잠잠하던 전선은 1951년 8월에 이르러 다시 격렬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양측 대표는 군사분계선 설정에 대하여 협의하고 있었는데, 유엔군 측은 당시 전선을 기준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고, 공산군 측은 38도선을 주장하였다. 양측의 강한 주장에 휴전회담은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러자 유엔군 측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제한된 범위에서 공격작전을 실시, 높은 고지를 점령하여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고지전이 펼쳐졌다. 이때부터 휴전협정이 최종 맺어질 때까지 고지를 서로 차지하려는 국지전(局地戰; 한정된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여러 전선에서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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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휴전회담과 고지전

휴전회담은 전쟁이 일어난 지 1년이 조금 지난 1951년 7월 8일(본회담은 7월 10일)부터 시작하였다. 그런데 휴전협상에 대한 공산군 측과 유엔군 측, 양측의 협상 목표는 서로 달랐다. 유엔군 측은 군사협상을 통해 일단 휴전한 다음 유엔을 통한 정치적 방법으로 통일․민주․독립 국가를 세우는 데 목표를 두었다. 반면 공산군 측은 전선에 별다른 변화 없이 그냥 그대로이던 6월부터 방어 자세를 취하면서 전력을 회복한 다음, 8월 이후에 다시 공격하는 분위기로 바꾸겠다는 생각이었다. 즉 북한군은 휴전 자체보다 휴전회담을 자신들의 전력을 회복하는 기간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양측은 이와 같은 판단에 따라 휴전에 대비해 방어선을 강화하고 부대의 재편성․재배치를 통해 전력을 재정비하면서 휴전회담의 진전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때 병력에서는 공산군이 두 배 정도 많았지만, 화력이나 해군과 공군의 전력에서는 유엔군이 훨씬 강하였다. 휴전협상을 하면서도 유엔군 측은 협상이 안 될 경우나 유엔군이 요구한 협상 조건을 공산군 측이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다시 전투를 시작하였으며, 공격을 계속하여 적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였다. 공산군은 휴전협상 과정에서 부족한 전력을 극복하기 위해 전력의 수를 늘리고 전력 강화를 꾀하면서 빼앗긴 진지를 되찾아 군사력을 과시하거나, 휴전회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유엔군 진지 가운데 북쪽으로 나와 있거나 약한 곳을 공격하였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휴전회담 장소에서 말로 싸우는 ‘설전(舌戰)’을 벌어졌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전선에서 휴전되면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먼저 확보하기 위한 고지 쟁탈전이라는 ‘혈전(血戰)’이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휴전회담도 중지했다가 다시 하기를 거듭 반복하였다.
당시 유엔군은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전선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크게 확대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국지적인 고지 쟁탈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공산군 역시 비슷한 전술로 맞서면서 38도선을 중심으로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런 고지전은 휴전회담이 종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에 양측은 일정한 지역을 놓고 서로 수없이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전(攻防戰; 서로 공격하고 방어하는 싸움)을 계속하였다.
휴전협상은 1951년 7월 8일부터 시작하여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휴전협정)이 맺어지기까지 24개월 17일, 2년이 넘는 동안 진행되었다. 이 기간의 전투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의 포격전, 수색․정찰전, 고지 쟁탈전 등 대개 서로의 의지를 시험하는 국지적인 공방전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였으며, 전선의 변화는 20km 정도에 불과하였다. 다만, 휴전회담 초기에 펼쳐졌던 약 3개월간의 유엔군 공세와 휴전 직전 약 1개월간 중국군이 펼친 공세를 제외하면, 휴전회담 기간 중의 전투는 전선의 변화가 거의 없는 전투였다. 그럼에도 이 기간에 치러진 전투는 공산군 측과 유엔군 측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 질문1 휴전협상을 하게 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양측의 협상 목표에 대해 각각 말해 봅시다.
  • 질문2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에도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3 휴전회담을 시작한 이래 휴전협정이 맺어지기까지 어느 정도 기간이 걸렸는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2

펀치볼 전투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 6‧25전쟁이 큰 변화 없이 서로 국지적으로 치고받는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때를 이용하여 재빠르게 전력을 재정비한 북한군은 1951년 8월 펀치볼 지역의 지형을 이용하여 캔자스선(KANSAS LINE: 북한군의 공격을 무찌르고 방어에 유리한 지역을 설정한 주저항선으로써, 임진강∼화천호∼양양 북방을 잇는 선)을 지키고 있던 국군과 미군을 분리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미 해병대 제1사단(미 제1해병사단)과 한국 해병대 제1연대(국군 제1해병연대)는 오히려 강원도 양구 북쪽의 펀치볼을 확보하기 위해 1951년 8월 31일 가전리 일대(△924M-△1,026M-△702M-△660M)에 자리 잡고 있던 북한군 제1사단을 먼저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국 해병대는 장병들에게 적개심을 높이기 위해 924고지를 김일성고지, 1,026고지를 모택동고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북한군은 도로에 지뢰를 묻어두고 쉽게 무너지지 않을 방어진지를 설치해 놓았다. 한국과 미국 해병들은 지형상 불리한 조건을 무릅쓰고 계속 공격해 들어갔으나, 포탄과 총탄을 한꺼번에 퍼부어대는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한‧미 해병들은 사단 포병과 미 제1해병비행단의 항공 지원 아래 3주에 걸쳐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북한군 제1사단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1951년 9월 20일 목표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2,799명이 사살되고 557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한‧미 해병은 428명 전사하고 1,062명이 부상당하였다. 전투에서 패배한 북한군은 동부전선의 요지인 펀치볼에서 물러나 간무봉(1,161M) 방향으로 후퇴하였으며, 승리한 한‧미 해병은 해안분지 북쪽 헤이스선(HAYS LINE; 군단의 통제선으로, 가칠봉에서 서희령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진출하여 유리한 지형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국군 제5사단의 가칠봉 점령을 쉽게 하도록 하였으며, 중동부 전선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펀치볼 전투는 지형적으로 불리한 상태에서 지뢰밭을 뚫고 나아가는 등 치열한 전투 끝에 목표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 전투로, 당시 미국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특히 이 전투에서 한‧미 해병은 헬리콥터를 통해 보급품을 받으면서 전투를 계속할 수 있었으며, 부상병들은 헬리콥터를 타고 기지로 돌아가 신속하게 치료받을 수 있었다. 이에 헬리콥터를 비롯한 항공기를 이용하여 사람이나 우편물, 짐 따위를 옮기는 공중수송작전인 윈드 밀(Wind Mill) 작전, 또는 헬리본(Heliborne) 작전의 원형이 이곳 펀치볼 전투에서 처음 시도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 같은 펀치볼 전투를 기념하고 이 전투에 참여하여 자유와 평화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신 한‧미 해병들의 거룩한 넋을 기리기 위해 1958년 3월, 육군 제3군단에서는 양구군 동면 월운리(또는 팔랑리)에 ‘펀치볼지구 전투전적비’를 세웠다. 그리고 1999년 양구통일관과 전쟁기념관이 있는 양구군 해안면 후리에 ‘양구 도솔산펀치볼지구 전투위령비’가 세워져 이 일대에서 일어난 전투를 기념하고 있다.
한편, 양구군 동면 팔랑리 도솔산 정상에는 ‘도솔산지구 전투위령비’가 먼저 세워져 내려오고 있으며, 도솔산과 펀치볼 전투에 대해서는 『승리자는 말이 없다』(권주혁, 2010)라는 책에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 질문1 펀치볼 전투를 주도적으로 펼친 한국과 미국 군대는 육군‧해군‧공군‧해병대 가운데 어느 군대였는지 써봅시다.
  • 질문2 캔자스선(KANSAS LINE)은 무엇인지 설명해 봅시다.
  • 질문3 한‧미 해병이 펀치볼 전투에서 승리하는데 크게 이바지한 지원 방법은 무엇이었는지 3주간이나 걸친 전투를 계속할 수 있었던 점과 관련지어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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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양구 도솔산펀치볼지구 전투위령비 안내문-펀치볼 전투

1951년 8월과 9월에 벌어진 펀치볼 전투 상황을 표시한 지도이다.

  • 질문1 가전리, 김일성고지, 모택동고지, 간무봉, 가칠봉 등의 위치를 찾아 표시해 봅시다.
  • 질문2 캔자스선과 헤이스선을 각각 찾아 확인해 봅시다.
  • 질문3 미 해병과 한국 해병이 대체로 어떻게 배치되었는지 확인해 봅시다.

시각자료 2

양구 전쟁기념관 설명문-고지전과 군사분계선

고지전 벌어진 곳과 시기에 따라 달라진 군사분계선을 표시한 지도이다.

  • 질문1 강원도 양구 지역에 벌어졌던 고지전들을 찾아 표시에 봅시다.
  • 질문2 1951년 7월 1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의 기간은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무엇을 논의하던 기간인지 말해 봅시다.
  • 질문3 이 기간에 전선은 어떻게 이동하였는지 군사분계선을 통해 확인해 봅시다.
  • 질문4 휴전협상 기간 동안 거의 모든 고지전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이 공산군을 조금이라도 밀어붙일 수 있었던 요인 중에 하나는 미군의 육군‧해군‧공군 전력 중에 어떤 전력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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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양구 펀치볼 지역에 가면 을지전망대와 제4땅굴 등을 방문할 수 있다. 또 DMZ펀치볼둘레길을 걸어볼 수도 있다. 자기가 사는 곳에서 이곳까지 갈 교통편을 알아보고, 이곳에 도착해서 어떤 순서로 답사할 것인지 등 답사 계획서를 작성하여 부모님께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6‧25전쟁 당시 하나의 고지를 놓고 서로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전이 이루어지면서 양측 모두 큰 희생을 치렀다. 영화 「고지전」이나 고지전과 관련된 영상을 찾아 감상한 후 느낀 점을 친구들과 이야기해 봅시다.
모둠활동 3
펀치볼 전투에서 미국과 한국 해병대의 활동이 컸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있는 해병대나 해병대전우회를 찾아가 대한민국 해병대의 활동상에 대해 듣고 그 내용을 정리하여 친구들에게 전달해 봅시다.
모둠활동 4
해병대와 관련된 사진을 5장 이상 모아보고, 전투에서 해병대의 주요 임무는 무엇이며, 해병대는 주로 어떤 훈련을 하며, 해병대에 입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해병대에 관련된 조사 보고서로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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