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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8 서울 환도식 터(옛 중앙청)

도입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북한군을 몰아낼 발판을 마련한 유엔군과 국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격을 거듭하였다. 한강을 건너 서울 시가지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유엔군과 국군은 북한군의 결사적인 저항에 맞닥뜨렸다. 6·25전쟁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나 한반도에서 차지하는 서울의 위상으로 보나 북한군 또한 서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시가지 곳곳에 설치된 북한군의 바리케이드를 뚫고 1950년 9월 27일 아침 6시경 한국해병대 제2대대 6중대 1소대원들이 중앙청 옥상 밖에 태극기를 닮으로써, 인천 상륙 이후 전개된 서울수복작전은 가장 중요한 고비를 넘어섰다.
이어서 중앙청에서는 서울 수복을 기념하는 환도식(다시 수도로 돌아온 것을 기념하는 행사)이 열렸다. 중앙청 대회의실에서 서울탈환 환도식이 거행된 것은 1950년 9월 29일 정오(낮 12시)였다. 이곳은 지난날 조선총독부 대회의실이었고, 한국 정부 수립 후에는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던 곳이다.(현재 중앙청은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건물이 철거되었고, 2001년 흥례문이 복원되었다). 6월 27일 아침에 100여 명의 국회의원들이 ‘100만 시민과 더불어 수도를 사수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이 자리에는 이승만 대통령, 임병직 외무부장관 등 정부 각료와 맥아더 사령관을 비롯한 유엔군 장성 등 50여 명이 참석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38도선 상의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남침을 시작한 지 3일 만인 6월 28일 새벽, 서울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미아리 고개가 돌파되었고 이어 한강 철교와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이날 날이 밝으면서 서울은 북한군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당시 전력이 북한군의 절반에 불과했던 한국군은 북한군의 기습공격의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유엔군의 참전 지원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은 상대적으로 크게 떨어진 전력으로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지 못하여 전쟁이 일어난 지 한 달여가 지난 1950년 8월 1일에는 낙동강선까지 후퇴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부터 마산-왜관-영덕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방어에 힘썼다. 북한군은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기울여 낙동강을 건너기 위한 공격을 시작하여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공격을 실시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선의 마산·창녕·왜관·다부동·영천·기계·안강·영덕·포항 일대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결사적으로 막아냈다. 결국, 낙동강 방어작전에서 북한군은 무리한 작전으로 큰 손실을 입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전력 보충과 증원부대의 도착으로 전쟁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낙동강선 방어에 성공한 유엔군은 한꺼번에 전황(전쟁이 진행되는 상황)을 역전시키고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펼쳤다. 원래 이 작전은 1950년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고 난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가 북한군이 남침을 계속하면 앞으로 인천을 통한 상륙작전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분석에서 출발하였다. ‘크로마이크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계획은 당시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미 제10군단은 한국군 2개 연대를 포함한 미군 2개 사단 3만여 병력으로 구성된 상륙부대를 통합 지휘하여 미 제7함대를 주축으로 한 유엔 해군 함정 260척의 지원을 받으면서 9월 15일 새벽 2시 그린비치, 레드비치, 블루비치에 대한 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다음날 새벽 목표지역에 성공적으로 상륙작전을 완수한 미 제10군단은 인천 일대에서 저항하는 북한군을 모두 휩쓸어버린 후 곧이어 서울탈환작전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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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인천상륙작전을 펼친 다음날인 9월 16일 아침, 인천상륙의 선봉이자 주력부대였던 미 제1해병사단 소속의 3개 연대가 각각 역할을 나눴다. 제5연대는 경인국도의 북쪽을 택하여 서울로 진격하고, 제1연대는 경인국도의 남쪽을 택하여 서울로 진격하며, 제7연대는 예비병력으로 당분간 인천 수비를 맡는다는 것이었다.
9월 20일 경인국도의 남쪽으로 향했던 미 해병 제1연대는 한강을 건너기 전 영등포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은 영등포 시가지에 대한 맹폭을 명령했다. 9월 21일 새벽 6시 30분 1,800발의 폭탄을 퍼부었고 제1대대와 제2대대는 각각 영등포의 서북과 서남을 향하여 공격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북한군의 저항은 필사적이었다.
왼쪽을 담당한 제1대대는 안양천 제방을 넘을 수 없었고, 오른쪽을 맡은 제2대대는 안양천을 건너는 데 1만 85명의 사상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강을 건넌 후 적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영등포 시내 중앙부에는 북한군이 거의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제1대대장 호킨스 중령은 예비부대였던 A중대로 하여금 그 틈을 찌르게 했다. A중대장은 3개 소대 모든 병력을 이끌고 안양천을 단숨에 건너 영등포 중앙부를 향해 돌진했는데 시내에는 북한 병사가 한 명도 없어서 중대는 한 발의 총격도 입지 않았다.
A중대는 곧바로 시내 중심부를 향하여 전진, 약 600m 정도 진입하여 중앙 십자로에 다다랐다. 그러나 왼쪽에서 진격해 오게 되어 있던 B중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A중대장은 자신의 중대가 북한군이 배치된 틈 사이로 들어와 적진의 한복판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A중대는 적진으로 계속 돌격하여 적의 후퇴로를 차단하고자 하였으며 서울 방면에서 진출한 수십 명의 매복 북한 병사를 사살하기도 하였다. 정오 무렵에는 시내의 동쪽 끝 경부국도 주변에 있는 둑에 벙커를 마련하여 진지(언제든지 적과 싸울 수 있도록 설비 또는 장비를 갖추고 부대를 배치하여 둔 곳)를 만들었다.
A중대는 진지 공사를 하면서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는데 오후 늦게 소규모의 북한군 부대가 상황을 살피기 위해 공격을 해왔다. A중대는 어렵지 않게 이들을 물리치고 적의 탄약고도 함께 폭파하였다. 이어서 5량의 북한군 전차가 나타나 둑의 남쪽에서 5회에 걸쳐 85mm 대포와 기관총으로 맹공격을 해왔는데, 대원들은 벙커 안에서 바주카포로 대응하여 2량의 전차를 파괴하며 적을 물리쳤다.
밤이 늦어지자 북한군의 야간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오후 9시경부터 한밤중에 걸쳐 함성을 지르면서 네 차례나 공격을 반복하였다. A중대는 그때마다 화력을 집중하여 물리쳤다. 새벽이 되어 날이 밝고 보니 바로 A중대의 진지 앞에는 275구의 시체와 50정 이상이 화기가 흩어져 있었다. 결국, 미 해병 제1연대는 영등포 일대의 적을 완전히 소탕하였다. 이어서 영등포에서 여의도를 거쳐 서강 쪽으로 한강을 건넜다.

  • 질문1 인천상륙작전을 마치고 서울을 향해 진격한 부대 가운데 영등포지역 공격에 성공한 부대는 미 해병 ‘몇 연대 몇 대대 무슨 중대’였나요?
  • 질문2 미 해병대가 영등포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영등포의 어느 방향을 공격했기 때문인가요?

읽기자료 2

인천상륙작전을 펼친 다음날인 9월 16일 아침, 인천상륙의 선봉이자 주력부대였던 미 제1해병사단 소속의 3개 연대가 각각 역할을 나눴다. 제5연대는 경인국도의 북쪽을 택하여 서울로 진격하고, 제1연대는 경인국도의 남쪽을 택하여 서울로 진격하며, 제7연대는 예비병력으로 당분간 인천 수비를 맡는다는 것이었다.
9월 20일 경인국도의 남쪽으로 향했던 미 해병 제1연대는 한강을 건너기 전 영등포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은 영등포 시가지에 대한 맹폭을 명령했다. 9월 21일 새벽 6시 30분 1,800발의 폭탄을 퍼부었고 제1대대와 제2대대는 각각 영등포의 서북과 서남을 향하여 공격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북한군의 저항은 필사적이었다.
왼쪽을 담당한 제1대대는 안양천 제방을 넘을 수 없었고, 오른쪽을 맡은 제2대대는 안양천을 건너는 데 1만 85명의 사상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강을 건넌 후 적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영등포 시내 중앙부에는 북한군이 거의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제1대대장 호킨스 중령은 예비부대였던 A중대로 하여금 그 틈을 찌르게 했다. A중대장은 3개 소대 모든 병력을 이끌고 안양천을 단숨에 건너 영등포 중앙부를 향해 돌진했는데 시내에는 북한 병사가 한 명도 없어서 중대는 한 발의 총격도 입지 않았다.
A중대는 곧바로 시내 중심부를 향하여 전진, 약 600m 정도 진입하여 중앙 십자로에 다다랐다. 그러나 왼쪽에서 진격해 오게 되어 있던 B중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A중대장은 자신의 중대가 북한군이 배치된 틈 사이로 들어와 적진의 한복판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A중대는 적진으로 계속 돌격하여 적의 후퇴로를 차단하고자 하였으며 서울 방면에서 진출한 수십 명의 매복 북한 병사를 사살하기도 하였다. 정오 무렵에는 시내의 동쪽 끝 경부국도 주변에 있는 둑에 벙커를 마련하여 진지(언제든지 적과 싸울 수 있도록 설비 또는 장비를 갖추고 부대를 배치하여 둔 곳)를 만들었다.
A중대는 진지 공사를 하면서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는데 오후 늦게 소규모의 북한군 부대가 상황을 살피기 위해 공격을 해왔다. A중대는 어렵지 않게 이들을 물리치고 적의 탄약고도 함께 폭파하였다. 이어서 5량의 북한군 전차가 나타나 둑의 남쪽에서 5회에 걸쳐 85mm 대포와 기관총으로 맹공격을 해왔는데, 대원들은 벙커 안에서 바주카포로 대응하여 2량의 전차를 파괴하며 적을 물리쳤다.
밤이 늦어지자 북한군의 야간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오후 9시경부터 한밤중에 걸쳐 함성을 지르면서 네 차례나 공격을 반복하였다. A중대는 그때마다 화력을 집중하여 물리쳤다. 새벽이 되어 날이 밝고 보니 바로 A중대의 진지 앞에는 275구의 시체와 50정 이상이 화기가 흩어져 있었다. 결국, 미 해병 제1연대는 영등포 일대의 적을 완전히 소탕하였다. 이어서 영등포에서 여의도를 거쳐 서강 쪽으로 한강을 건넜다.

  • 질문1 행주 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서울 서쪽으로 진입한 부대는 어느 부대들(‘미 해병 몇 연대’와 ‘한국 해병 몇 대대’)이었나요?
  • 질문2 북한군이 서울 방어를 위해 병력을 집중하고 있었던 곳은 어디였나요?
  • 질문3 견고하기만 하던 서울 서벽의 북한군 방어진지가 하나씩 무너지게 된 까닭은 전선에 어떤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나요?

읽기자료 3

9월 26일 서울 시가지, 사대문 안의 적군 소탕은 서울 서벽을 쟁취한 미 해병 제1사단이 담당했다. 여기에서도 연대별로 공격 진로가 구분되었다. 미 제1연대는 삼각지에서 서울역·의주로·서소문·덕수궁 방면, 한국 해병 제1·2대대는 서울역에서 갈라져 남대문시장·한국은행·소공동 방면, 미 제5연대는 금화산을 출발하여 아현동·서대문 네거리로, 그리고 여기서 합류하여 새문안길·광화문·세종로·창덕궁길 쪽을 담당했다.
26일의 시가지 공격은 아침 9시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가지 전투는 결코 쉽지 않았는데 북한군이 시가전에 대비하여 철통같은 대비책을 마련했기 때문이었다. 북한군은 1,500m 간격으로 포대 속에 흙을 넣어 가슴 높이까지 쌓고 전면에 대전차 지뢰를 묻어놓은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그리고 길 양쪽의 건물을 방어시설로 만들어 바리케이드 전방으로 쳐들어오는 한․미 해병을 향하여 대포와 박격포를 쏘고 중기관총·따발총을 퍼부어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아군은 우선 항공기로 바리케이드에 폭격을 가한 후, 전차부대로 주변에 설치된 대전차포와 자동화기를 정리하고 공병부대가 접근하여 지뢰를 폭파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병부대가 바리케이드에 접근하여 적을 사살하였는데, 바리케이드 하나에 1개 대대가 1시간 이상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이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건축물이 파괴되고 불타게 되었다. 서대문과 독립문이 파괴되었으며, 세종로·도렴동 일대, 황학동 시장·남대문 시장, 남창동·북창동 일대는 물론 명동 일대도 파괴되었다. 여기에 도망가던 북한군이 서울 시내 주요 건물에 불을 질러 건물의 피해는 더욱 늘어갔다. 이들이 종로의 YMCA 건물, 충무로 입구의 중앙우체국과 그 맞은편의 한국은행, 서울역 등 중요 건물에 기름을 붓고 불을 놓음으로써 YMCA 건물, 중앙우체국 건물 등은 사실상 복구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9월 26일 저녁까지 미 제10군단이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의 절반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그날 저녁 무렵 미 해병 제1연대는 서울역·태평로를 거쳐 덕수궁 앞까지 진출했고, 한국 해병 제2대대는 한국은행·명동을 거쳐 대대본부를 조선호텔에 두었다. 마침내 27일 새벽 6시 10분 한국 해병대 제1연대의 박정모 소대장이 인솔한 4명의 해병대원이 중앙청 위에 태극기를 달았다.
서울 거리는 시체와 흩어진 기왓장 조각, 허물어진 건물더미, 앙상한 기둥과 벽체들, 폐허라고 밖에는 다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실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서울시와 경찰은 서울이 완전히 탈환된 28일 낮부터 업무를 다시 시작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공공시설을 빠르게 복구해나갔다.
총탄 자국과 화재로 얼룩진 중앙청 대회의실에서 서울탈환 환도식이 거행된 것은 1950년 9월 29일 정오였다. 식장에는 도쿄에서 도착한 맥아더 사령관을 비롯하여 이승만 대통령 부부, 선출된 각 부처 관리와 시민대표 그리고 서울을 탈환한 전투부대 지휘관들로 가득 메워졌다. 
역사적인 수도 서울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는 환도식은 의장대와 군악대도 없이 간략하게 치러졌지만, 식장의 분위기는 정숙하고 감격이 넘쳤다. 연단에 올라선 맥아더 사령관의 연설에 이어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식이 끝난 이날 오후부터 정부는 곧바로 업무를 시작하였으며, 이제 서울은 정부에 이어 정부에 소속된 각 기관과 피난민들이 속속 모여들어 수도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쟁에서 적의 침공으로 상실했던 수도를 되찾는다는 것은 어느 한 전투의 승리 또는 어느 한 지역의 회복과는 다른 특별한 의의가 있다. 북한군 남침 3일 만에 빼앗겼던 수도 서울의 탈환은 그만큼 우리 국민들에게 감격스러운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 질문1 서울 시가전에서 북한군이 유엔군과 국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대비한 방법은 무엇이었나요?
  • 질문2 1950년 9월 29일 중앙청에서 개최된 서울탈환 환도식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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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서울을 수복할 당시의 시가전 모습이다

  • 질문1 사진 왼편에 쌓아놓은 가마니는 ‘누가 무엇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일까요?
  • 질문2 사진에 보이는 모습은 읽기자료 3)에 설명된 내용을 참고하여 어떤 상황이라고 짐작되나요?

시각자료 2

왼쪽 사진은 625전쟁 당시의 모습이고, 오른쪽 사진은 오늘날의 모습이다

  • 질문1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어느 건물일까요?
  • 질문2 두 사진에 나타난 모습을 보아 당시 서울을 수복하면서 벌어진 시가전이 미친 피해는 어떠했을 것 같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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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빼앗겼던 수도를 되찾은 928 서울 수복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날이다. 다만, 서울 수복보다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수도를 빼앗기지 않는 일일 것이다. 우리 역사상에서 수도를 빼앗겼던 사례들을 찾아 역사신문 형태로 만들어 봅시다.

모둠활동 2
빼앗겼던 수도를 되찾은 9․28 서울 수복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날이다. 다만, 서울 수복보다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수도를 빼앗기지 않는 일일 것이다. 우리 역사상에서 수도를 빼앗겼던 사례들을 찾아 역사신문 형태로 만들어 봅시다.

모둠활동 3

위의 왼쪽 사진은 1950628일 국군이 서울에서 철수하면서 폭파한 한강 인도교의 모습이며, 오른쪽 사진은 19501019일 북한군이 대동강 이북으로 철수하면서 폭파한 다리 모습이다. 이처럼 625전쟁 과정에서 폭파된 다리를 중심으로 전쟁의 피해 상황을 조사해 봅시다.

모둠활동 4

사진은 서울 중앙청 주변을 보여주는 과거(왼쪽)와 현재(오른쪽)의 모습이다.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달고 서울 환도식이 거행되었던 중앙청은 1995815역사 바로 세우기의 목적으로 철거되었다. 그 이유는 이 건물이 과거 조선총독부 청사로 지어진 건물이었기 때문이었다. 1995년 당시로 돌아가 중앙청을 철거해야한다보존해야한다는 두 모둠으로 나누어 서로의 생각을 주장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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