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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리 전투지(영국군, 한국에서 중국군의 공격을 막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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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사무소에서 왼쪽 감악산을 끼고 양주‧의정부 방향으로 향하다 보면 설마리 계곡에 들어서는 길목 오른쪽에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이 보인다. 이곳은 1968년 영국군 전적지로 꾸며져 내려오다가 2013년과 2014년에 추모공원으로 새롭게 꾸며져 각종 시설물이 세워져 있다.
추모공원 안쪽, 설마천 너머로 가기 위해서는 다소 화려하게 세워져 있는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이 다리가 ‘글로스타샤교’이다. 글로스타샤교에는 태극기와 영국 국기인 유니언잭이 새겨져 있고, 돛대 모양 등이 조각되어 있고, 흔히 보는 다리와는 좀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다리는 6‧25전쟁 당시 참전하여 설마리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한 글로스터 부대의 고국인 영국에 있는 다리와 똑같이 만든 다리라고 한다. 이 다리를 건너면, 큰 바위에 돌을 붙여 쌓은 듯한 ‘파주 영국군 설마리전투비’(영국군 전적비)가 있다. 이곳에는 여러 개의 비문과 비석이 함께 있는데, 맨 앞 표지석처럼 세워져 있는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기념비는
한국 정부의 자혜스러운
도움으로 건립되었다.
글로스타샤 연대 제1대대는
이 기념비가 또한
그들에 못지않게 자유를 사랑하고
그들과 또 다른 영국 연방군에
종군중 산화한 용맹스러운
한국인을추모 하리라.
간절히 비는 바이다.


1951년 4월 중국군 36개 사단과 북한군 1개 군단 등 30만 대군이 대대적인 총공격(춘계 대공세)을 해왔다. 그 가운데 중국군 주력인 제63군 3개 사단 4만여 명과 영국군 중심의 영연방군 제29보병여단 사이에 임진강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임진강 전투 또는 적성 전투라고도 부르는 이 전투에서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는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감악산 계곡에서 후퇴할 길마저 막힌 채 중국군에 포위되어 서로 치고 막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영국군은 적군보다 50분의 1밖에 되지 않은 병력으로 4일간이나 버텨가며 싸웠다.
총 652명 가운데 생존자가 67명에 불과할 정도로 많은 희생을 당한 영국군 글로스터 부대의 설마리 전투는 중국군의 공격을 늦추고, 유엔군이 군대를 다시 짤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마련하는데 이바지하였다. 무엇보다도 중국군이 서울을 다시 점령하려는 공격을 막아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설마리 전투는 6‧25전쟁 당시 영국군이 펼친 가장 대표적인 전투이자 세계 전쟁사에도 기록된 전투였다.
자유 수호를 위하여 싸우다 가신 영국군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영국군이 한국을 떠날 때인 1957년 설마리에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1968년 이 일대가 공원으로 꾸며져 내려오는 가운데 설마리전투비는 2008년 10월 1일 등록문화제 제407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해마다 기념식이 이루어졌는데,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영국군 참전용사들을 초청하여 임진강 전투 기념식을 함께 치르고 있다. 1999년에는 한국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도 이곳을 찾아 추모하기도 하였다.
이곳 추모공원 일대는 설마리전투비를 포함한 고지 일대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전투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사적지이다. 한편,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사무소 앞에는 영국‧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뉴질랜드 등 영국 연방 4개국이 참전한 것을 기념하는 ‘영연방 참전기념비’가 세워져 있기도 하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산 110
현재 상태 원형 보존 / 설마리 전투지는 전쟁 당시의 능선이 그대로 남아있다. 주변에는 영국군 설마리전투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도로공사로 일부 변형되기도 하였다.

1950년 9월 15일 이루어진 인천상륙작전에서 성공한 유엔군과 국군은 반격을 계속하여 10월 말에는 압록강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북한군을 돕기 위해 중국군이 10월 25일부터 대대적인 공격[중국군의 공세(攻勢), 또는 대공세]를 하는 바람에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밀려 후퇴하게 되었다. 중국군의 1차 공세는 1950년 10월 25일부터 11월 6일, 2차 공세는 11월 25일부터 12월 15일, 3차 공세는 1950년 12월 31일부터 1951년 1월 14일(신정 공세) 사이에 전개되었다. 중국군의 공세에 밀려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였으며,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에서마저 물러나게 되었다. 이 1‧4후퇴와 함께 정부는 수도를 서울에서 다시 부산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오산‧평택까지 물러난 유엔군과 국군은 전력을 회복하여 1951년 1월 24일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M.B. Ridgway) 장군의 지휘 아래 보충한 무기와 공군의 지원을 받아 총반격을 전개하였다. 23만 명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어 서울재탈환작전이 이루어졌다. 중국군은 즉각 방어에 나서 1월 25일(또는 2월 11일)부터 2월 18일 사이에 4차 공세(2월 공세)를 하였다. 그러나 유엔군과 국군의 강력한 대응으로 북한군과 중국군은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3월 14일 수도 서울을 다시 찾았으며, 3월 24일에는 38도선 이북까지 밀고 올라갔다.
봄이 되자 중국군은 다시 총공격을 시작하여 춘계 대공세(春季大攻勢)가 전개되었다. 두 차례로 전개된 춘계 대공세는 중국군이 참전한 이후 최대 규모의 병력인 50만 명이나 동원한 대대적인 공격이었다. 1차 춘계 공세는 4월 22일부터 4월 30일, 2차 춘계 공세는 5월 16일부터 5월 23일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1차 춘계 공세는 5차 공세(4월 공세)에 해당하고, 2차 춘계 공세는 6차 공세(5월 공세)에 해당하였다.



<중국군의 대공세>
이렇듯 6‧25전쟁 기간 동안 중국군의 대공세는 총 6차례(또는 7차례) 이루어졌는데, 5차 공세(4월 공세)는 4차 공세(2월 공세)가 실패로 끝나고 점령하고 있던 서울마저 빼앗겨버린 중국군과 북한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한 대대적인 공세였다. 5차 공세는 중국군 약 27만 명과 북한군 약 3만 5천 명이 밀고 내려와 특히 한강 북쪽에 배치된 유엔군을 무너뜨려 5월 1일 노동절(May Day)에 맞추어 서울을 점령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5차 공세 당시 중국군과 북한군이 집중적으로 공격한 곳은 임진강 일대였다. 이곳은 미 제1군단 소속의 국군 제1사단, 영연방군 제29여단, 미 제3사단 등이 방어하고 있었다. 대규모 병력을 앞세운 중국군은 임진강을 건너와 유엔군과 국군의 후방을 하나하나 끊으며 공격해왔다. 당시 영국 제29여단의 왼쪽 지역을 담당한 글로스터 부대는 엄청나게 많은 중국군을 맞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일대에서 중국군에게 포위당한 채 싸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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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설마리 전투

1951년 봄, 빼앗긴 서울을 다시 점령하기 위해 중국군은 춘계 대공세를 펼쳤다. 4월 22일부터 4월 30일 사이에 벌어진 5차 공세(4월 공세)에 중국군 36개 사단 약 27만 명과 북한군 1개 군단 약 3만 5천 명, 총 30만 명이 넘는 대군으로 밀고 내려왔다. 더구나 중국군 중심 부대인 제63군 3개 사단 4만 2,000명이 임진강에 집중적으로 투입되었다. 당시 이곳은 미 제1군단 소속의 국군 제1사단, 영국 제29여단, 미 제3사단 등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영국군이 중심인 영연방군 제29보병여단은 중국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펼쳤다. 이를 임진강 전투 또는 적성 전투라 한다.
임진강을 중심으로 벌어진 적성 전투에서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 770여 명(전투 초기 인원)은 적군보다 50분의 1밖에 되지 않은 병력으로, 4만여 명이나 되는 중국군과 정면으로 맞서 최후까지 죽음을 무릅쓴 전투를 펼쳤다. 이를 설마리 전투라 하는데, 설마리 전투는 1951년 4월 21일부터 26일까지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감악산(675고지) 계곡 일대에서 벌어졌다. 이에 ‘글로스터고지(253고지) 전투’라고도 부르는데, 본격적인 전투는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4일간 벌어졌다.
1950년 11월부터 참전한 영국군 글로스터(Gloucester) 대대는 중국군의 춘계 대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1951년 4월 파주 적성면의 임진강 언저리 148고지 일대에 배치되었다. 대대는 4월 21일 오후 10시경 중국군 정찰대가 임진강을 건너는 것을 발견하고, 조준 사격하여 4명을 사살하였다. 남은 중국군 정찰대는 대부분 부상당한 채 도망갔다.
그러나 다음날 가여울(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 일대에서 중국군이 임진강을 건너기 시작하면서, 설마리 모든 전선에서 전투가 크게 벌어졌다. 글로스터 대대는 조명탄 지원을 받아가며 중국군 제187사단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밤이 되면서 중국군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4월 24일 아침 글로스터 대대는 설마리로 들어오는 길을 막아버리고 설마리 고지에 집결하였다. 야간이 되자 중국군은 물밀 듯이 공격해 왔다. 대대는 중국군의 1차 공격을 무찌르고, 계속된 2차 공격 역시 밤새 승패를 가리기 어려운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막아냈다.
4월 25일 글로스터 대대는 여전히 설마리 고지를 지키는 가운데 유엔 공군 F-80 비행편대와 함께 중국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중국군의 전차와 차량이 나뒹굴고 집결 중인 병력이 무수히 쓰러져 갔지만, 영국군 피해 역시 더는 전투를 치를 수 없을 정도로 심하였다.
4월 26일 오전 6시 5분, 대대장 카느 중령은 탈출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대원들에게 소집단으로 편성하여 산악지형을 이용하여 포위망을 각자 뚫고 나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카느 중령을 포함한 병력 대부분은 탈출하던 중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63명만이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였다. 총 650여 명(마지막 전투지역에 있던 인원) 가운데 58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530여 명은 포로가 되었으며, 이들 중에는 180명의 부상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적에게 포로로 붙잡혀 있다가 30명이 추가로 사망하였다고 한다(파주 영국군 설마리전투비 앞에 있는 안내판 「설마리 전투 역사」에는 탈출 67, 사망 59, 포로 526명, 추가 사망 34명으로 쓰여 있다).
많은 희생이 따르긴 했지만, 영국군 글로스터 부대의 설마리 전투는 중국군의 공격을 늦추고, 유엔군이 군대를 다시 편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마련하는데 이바지하였다. 무엇보다도 중국군이 서울을 다시 점령하려는 공격을 막아내는데, 즉 4월 공세를 실패로 끝나게 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처럼 설마리 전투는 6‧25전쟁 당시 영국군이 펼친 가장 대표적인 전투이자 세계 전쟁사에도 기록된 전투로 전해지고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 설마리 감악산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파주 영국군 설마리전투비(영국군 전적비)’를 비롯하여 추모공원이 꾸며져 있는데, 무엇보다도 이곳은 설마리전투비를 포함한 고지 일대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전투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사적지이다.
한편, 추모공원이 있는 곳에서 양주 방향으로 설마리 고개를 조금 더 올라가면 6‧25전쟁 당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바친 감악산결사대의 호국영혼을 달래기 한 충혼탑(忠魂塔)이 세워져 있으며,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사무소 앞에는 영연방 참전비가 세워져 있다.
‘파주 영국군 설마리전투비’는 현재 세계 디자인계의 거장으로 알려진 산업디자이너이자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감독인 아널드 슈워츠만(Arnold Schwartzman)이 당시 설마리 전투에 직접 참전하여 살아남아 1957년 철수하면서 직접 디자인한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첫 작품인 설마리전투비를 세운 지 50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아 설마리전투비 건립 50주년 행사에 참석한 슈워츠만은 한국전을 다룬 다큐멘터리 단편영화 「조용한 아침의 나라」(The Morning Calm) 시사회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영국인 앤드루 새만(Salmon, Andrew)이 쓴 「마지막 한발」(To the Last Round, 2009)이라는 책에는 설마리 전투 및 임진강 전투가 잘 묘사되어 있다.

  • 질문1 임진강 전투(적성 전투) 및 설마리 전투는 중국군의 몇 차 공세 때 벌어진 전투인지 써봅시다.
  • 질문2 글로스터 대대는 대략 몇 배나 되는 중공군과 싸웠는지 써봅시다.
  • 질문3 설마리 전투의 결과와 의의를 각각 말해 봅시다.
  • 질문4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가 소수의 병력으로 50배나 많은 적군을 맞아 4일 이상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공중에서 어떤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는지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2

유엔군과 영국군의 참전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하자 한국 정부는 즉시 이 사실을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과 주한 미국대사관에 통보하면서 유엔과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의 남침 행위를 즉각 중지시켜 달라고 요구하였다. 미국은 한국전쟁 문제를 유엔을 통해 해결하려는 입장 아래 즉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구하였다.
6월 25일(뉴욕시간)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를 소집하고, 미국이 제출한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나, 북한은 유엔 안보리의 결의를 무시하였으며, 침략을 중지하지도 않았다.
6월 26일(뉴욕시간)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북한이 유엔 결의안을 따를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생각보다 빨리 한국 정부가 무너질 수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에 유엔 안보리는 “북한군의 침략을 무찌르기 위해 모든 지원을 제공하자”는 내용의 ‘6‧26결의안’(우리 시간으로는 6‧27결의안)을 통과시켰다.
6‧27결의안에 따라 북한에 대한 군사적 간섭이 가능하였고, 합법적으로 한국에 근대를 직접 보낼 수 있었다. 6월 30일 미국은 미국의 육‧해‧공군을 한국전선에 투입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유엔군으로서는 가장 먼저 한국 땅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미군의 참전에 이어 자유진영 32개국(國)이 유엔의 결의를 지지했으며, 7월 중순에는 지지하는 나라가 52개국으로 증가하였다. 그 후 한국을 돕기 위해 16개국이 전투부대 파병을, 5개국이 의료 또는 시설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유엔에 통보하였다. 여기에 전쟁 물자를 지원한 나라가 20개국이었는데, 6‧25전쟁 기간 총 40개국이 우리나라를 지원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당시 주한 영국사절이었던 홀트(Holt)는 “남북한 간에 전쟁이 벌어지면 남한은 북한에 밀리게 되고 하와이에 망명정부를 세우게 될 것”이라면서 “한국 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영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적인 의견을 내세웠다. 영국 군부도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자 영국 정부는 미국의 파병 요청에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한국에 파병하였다.
영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였지만, 미국이 제안한 ‘공산 침략 행위 정지 요청’과 ‘한국에 대한 군사 원조’를 지지함으로써 결의안을 통과시키는데 뜻을 같이하였다. 그리고 6월 30일 해군 항공모함‧순양함‧구축함으로 구성된 함대를 한국에 급히 파견하였다. 해군 군함을 파견한 이후 영국 정부가 지상군 파병을 검토하는 동안, 영국의 언론들은 일제히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 자세를 비난하였다. 이러한 영국 국내 여론과 미국의 군사 요청에 따라 영국은 7월 26일 예비 부대로 있던 제29보병여단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상황이 크게 불리해지자 8월 20일 홍콩에 머물고 있던 2개 보병대대를 급히 선발하여 6‧25전쟁에 먼저 투입하였다.
영국의 파병은 영연방 계열인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 등의 참전에도 영향을 주어 그들의 참전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는데,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영연방군은 유엔 참전국 중에서 두 번째로 전투부대를 한국에 파병한 국가이자 미국 다음으로 큰 규모의 지상군과 해군을 한국에 파견하였다. 영국은 전쟁 초기부터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함과 아울러 미국과 함께 공동으로 6‧25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갔다. 육군은 5개 보병 대대, 2개 야포 연대, 1개 기갑 연대 등으로 구성된 제27여단과 제29여단 2개 여단이, 해군은 영국 극동함대 소속 함정인 군함 33척과 지원함 25척이, 공군은 1개 수송기 중대가 참전하였으며, 240명의 해병 1개 중대가 참전하여 기습작전과 특수작전 임무를 수행하였다.
영국군이 치른 주요 전투로는 1951년 4월 22일 ~ 25일 글로스터 대대가 활약한 임진강 전투(적성전투) 및 설마리 전투가 유명하며, 그 밖에 낙동강 방어선 전투(1950년 9월 22일 ~ 23일), 정주‧박천 전투(1950년 11월 4일 ~ 6일), 고양전투(해피벨리 전투 1951년 1월 2일 ~ 3일), 신둔리 전투(1951년 1월 3일 ~ 4일), 가평 전투(1951년 4월 22일 ~ 25일), 제임스타운선 진출전(1951년 10월 3일), 후크고지 전투(1953년 5월 2일 ~ 28일) 등이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소 통계로는 6‧25전쟁 기간 동안 영국은 총 1,789,000여 명이 참전한 미국 다음으로 많은 56,000여 명이 참전하여 1,078명이 목숨을 잃고 2,674명이 부상당하였으며, 179명이 실종되고, 977명이 공산군 측에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 질문1 62‧5전쟁 당시 한국에 파병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한 6‧26결의안은 유엔의 어느 기구에서 결정된 것인지 말해 봅시다.
  • 질문2 유엔군의 자격으로 한국에 직접 전투부대를 파병한 나라는 몇 개국인지 써봅시다.
  • 질문3 62‧5전쟁 당시 한국을 돕기 위해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 파병하고, 또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견한 나라는 어느 나라인지 써봅시다.
  • 질문4 6‧25전쟁에 참전한 영국군이 참여한 주요 전투 두세 가지 정도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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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글로스타샤교

파주 영국군 설마리전투비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다리이다.

  • 질문1 보는 방향에서 다리 오른쪽에 새겨져 있는 국기는 어느 나라 국기인지 써봅시다.
  • 질문2 다리 한쪽에 ‘글로스타샤교(GLOUCESTER BRIDGE)’라고 쓰여 있다. 우리나라에 있는 다리 이름이 어째서 이렇게 지어졌는지 말해 봅시다.
  • 질문3 이 다리는 형태가 우리가 흔히 보는 다리와 다르다. 어찌 이렇게 만들어졌을지 이 다리와 관련 있는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와 연결하여 말해 봅시다.

시각자료 2

파주 영국군 설마리전투비 전경

파주 영국군 설마리전투비의 모습이다.

  • 질문1 기념비의 모습이 특이한 편이다. 전체 모양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설명해 봅시다.
  • 질문2 기념비 위 오른쪽에 있는 그림은 영국군 글로스터 부대를 상징하는 마크가 새겨져 있다. 위 왼쪽에 새겨진 마크는 무슨 마크인지 말해 봅시다.
  • 질문3 질문 1)과 2)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 기념비는 무엇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인지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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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2014년 설마리 영국군 전적지는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으로 새롭게 단장하였다. 6‧25전쟁 관련 국가수호 사적지를 어떻게 보존하고 기념해야 하는지 자신의 의견을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전쟁기념관(서울 용산)’이나 ‘유엔군 초전기념관(경기 오산)’, ‘자유수호평화박물관(경기 동두천)’ 등의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6‧25전쟁 당시 유엔군 자격으로 참전한 나라들의 파병 및 지원 규모 등을 조사‧정리하여 그 결과물을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6‧25전쟁 당시 유엔군 자격으로 참전한 나라에 어려움이 처했을 때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도울 수 있을지 친구들과 토론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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