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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국도를 따라 오산에서 병점‧수원 방향으로 경기대로(大路)를 가다 보면, 왼쪽에 있는 경부선 철도 오산대역을 지나 세마역(옛 죽미역)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고개를 넘어야 한다. 거꾸로 세마역에서 오산대역 방향으로 가다 보면, 고개 정상 양쪽 산에 기념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둘 다 이름이 ‘유엔군 초전기념비’인데, 길옆으로 훤히 보이는 게 1982년 세워진 유엔군 초전기념비이고, 건너편 산속에 있는 것이 1955년에 세워진 유엔군 초전기념비이다.
새로 세워진 유엔군 초전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북괴의 이리 떼 38 선을 넘으니
자유수호 위해 유엔은 일어나다.
폭력엔 폭력을 다짐하고
급히 달려온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
앞장서 죽미고개에 서고
한국군 제 17연대 이에 따르니
한‧미 연합 작전의 서막은 열리다.
혈전 6시간 15분 피바다 이루고
화선은 낙동강으로 이어지네.
한 품은 고혼 이곳에 잠드니
혈맹의 우의 어찌 잊으랴.
유엔군 초전기념비(初戰記念碑)는 6‧25전쟁에 참가한 유엔군이 처음 전투를 치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유엔군 자격으로 가장 먼저 참가한 미국이 이곳 오산에 배치되어 물밀 듯이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을 맞아 첫 전투를 벌인 곳이 바로 이곳 죽미고개(죽미령) 일대이다.
1950년 7월 1일 부산에 도착한 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미 24사단 21연대 1대대와 52포병대대)는 7월 2일 대전을 거쳐 7월 4일에는 평택 북쪽으로 이동, 7월 5일 새벽 3시경 죽미령 일대에 배치되었다. 아침 7시 북한군 전차가 내려오는 것을 목격한 스미스 중령은 8시 15분경부터 포사격을 하였으나 큰 타격을 주지 못하였다. 오전 10시쯤에는 33대의 전차를 앞세운 10km에 달하는 긴 행렬의 북한군 트럭과 보병이 나타나자 이들을 향해 박격포와 기관총 등을 쏘아댔지만, 끊임없이 밀려오는 북한군을 더는 막아낼 수 없었다. 결국, 스미스 부대는 오후 2시 30분경 후퇴를 결정하고 안성으로 철수하였다.
비록 전투에서 승리하지는 못하였지만, 처음 사격을 시작하여 철수 때까지 6시간 15분 동안 적이 내려오는 것을 늦추고, 미 제24사단 중심 병력이 전투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었다. 무엇보다도 죽미령 전투는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벌어진 첫 전투로, 승패와 관계없이 유엔군의 참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북한군은 미군이 참전하지 않거나 참전해도 그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 아래 남침하였는데, 1950년 6월 25일 남침한 지 10여 일 만에 미군의 참전을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현재 이곳 죽미령 정상에는 스미스 부대원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2013년에는 ‘유엔군 초전기념관’을 세워 죽미령 전투를 통해 6‧25전쟁의 아픔을 되돌아보고 나라 사랑의 정신을 되살리며 평화를 위한 상호 이해와 협력 의식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문화와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경기도 오산시 외삼미동 산 70-6 일대 [도로명 주소: 경기도 오산시 경기대로 742 (외삼미동, 유엔군 초전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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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훼손 / 고개를 중심으로 수원과 오산 양방향으로 현재 적지 않은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을 중심으로 하는 동서 냉전 체제가 이어지면서 미국과 소련의 대립은 깊어만 갔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어 전쟁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북한군의 남침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국군은 있는 힘을 다해 방어하였으나, 적의 공격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였다.
황해도 옹진반도 지역에서는 국군 독립 제17연대가 1개 연대로는 감당하기 힘든 넓은 지역을 어렵게 방어하다 26일부터 배를 타고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국군 제1사단이 방어하던 개성‧문산 지역에서는 북한군 제203전차연대의 지원을 받는 제1사단과 제6사단이 전쟁 당일 개성을 점령하고 임진강까지 내려왔다. 이에 국군은 임진강 철교를 폭파하고 후퇴하려 하였으나, 명령이 전달되는 과정에서의 혼란과 기술 부족으로 철교 폭파에 성공하지 못하고 26일 철수하였다.
동두천‧포천‧의정부 지역은 국군 제7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북한군 제104전차연대의 지원을 받는 제3사단과 제5사단이 공격해와 25일 오전에 포천이 점령당하고, 저녁에는 동두천까지 쳐들어와 의정부마저 위태로웠다. 의정부가 넘어가면 곧바로 서울이 위험해짐으로 육군본부는 서울 부근에 주둔한 부대뿐만 아니라 후방에 있는 부대들까지 의정부 지역에 투입해 적의 진격을 막으려 하였다. 이에 따라 대전의 제2사단, 대구의 제3사단, 광주의 제5사단에 이동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6월 26일 13시경 의정부가 북한군에 점령당하였으며, 27일 오전에는 북한군이 서울까지 밀고 내려왔다.
춘천‧홍천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은 북한군 제2사단과 제12사단을 맞아 소양강을 중심으로 3일 동안 적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그러나 “서부전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육본은 시흥으로 철수하므로 제6사단은 사단장의 판단에 따라 철수하면서 중앙선을 중심으로 중부전선에서 지연전을 전개하라.”는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에 따라 6월 28일부터 원주 방향으로 철수하였다.
동해안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8사단은 북한군 제5사단과 38경비 제1여단 등을 맞아 전쟁 시작 후 바다로 쳐들어온 북한군에게 강릉을 빼앗기고 이를 다시 찾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6월 27일 대관령을 넘어 철수하였다.
이렇게 물밀 듯이 내려온 북한은 전쟁을 일으킨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였으며, 6월 30일부터는 한강을 건너려 하였다. 그들은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경부선 철교를 차지할 목적으로 국군 복장을 한 편의대를 노량진 방면으로 침투시켜 국군을 어지럽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전차 지원 없이 한강을 건너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한 듯, 밤중에 철도 선로반원과 시민들을 강제 동원해 몰래 한강 다리 복구 작업을 하기도 하는 등 한강을 건너기 위해 애썼다. 이렇게 북한군은 파괴된 한강 다리를 고치고, 서쪽과 동쪽으로 남침한 사단들이 서울에서 만나서 남쪽으로 진격하기 위한 준비를 새롭게 하기 위해 4 ~ 5일을 서울에서 머물렀다. 이 사이에 유엔에서 유엔군 파병이 결정되었으며,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유엔군이 부산으로 상륙하여 오산 지역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7월 3일 새벽, 어느 정도 복구된 철교를 이용해 북한군 전차 4대가 강을 건넜으며, 이어서 뒤따른 병력이 영등포 방면으로 이동하고, 또 열차를 이용해 13대의 전차와 그 뒤를 따르는 병력이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노량진과 영등포 일대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영등포 지역은 한강 남쪽 기슭의 교통 중심지로, 전체 한강방어선을 지키는 여부가 결정되는 곳이었다. 따라서 수도사단 병사들은 북한군의 계속되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7월 3일, 북한군의 전차와 중심 부대가 한강 남쪽에 출현하게 되자 김홍일 소장은 철수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한강방어선의 국군은 또다시 부대별로 흩어져 일부는 안양으로, 일부는 과천으로 철수하였다.
한강방어선이 무너진 상황을 보고받은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은 미군이 지원해줄 시간을 벌기 위해 현재의 전선에서 적의 진출을 최대한 늦추도록 하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이어서 7월 4일에는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평택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수원에 집결한 각 부대는 평택으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7월 4일에는 수원마저 북한군에 점령당하였다.
국군의 힘만으로는 적을 물리치기 어려운 상황에 때마침 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유엔군 자격으로 처음 참전한 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이곳에 도착하였다. 이제 전쟁은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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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유엔군의 참전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하자 한국 정부는 즉시 이 사실을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과 주한 미국대사관에 통보하면서 유엔과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의 남침행위를 즉각 중지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전쟁이 시작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는 뉴욕시간으로는 6월 24일 토요일 오후 3시(우리보다 13시간 늦음)였다. 서울과 도쿄로부터 긴급 보고를 받은 애치슨(Dean G. Acheson) 미 국무장관은 즉시 미주리 별장에서 휴식 중인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때 미국은 한국전쟁 문제를 유엔을 통해 해결하려는 입장 아래 즉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구하였다.
6월 25일(뉴욕시간)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를 소집하고, 미국이 제출한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때 소련은 불참한 가운데 9개 나라가 찬성하고, 1개 나라가 기권하였다. 유엔은 이 결의안을 통해 침략 중지를 요구하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북한군이 결의안대로 따를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유엔 안보리의 결의를 무시하였으며, 침략을 중지하지도 않았다.
6월 26일(뉴욕시간)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북한이 유엔 결의안을 따를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생각보다 빨리 한국 정부가 무너질 수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에 유엔 안보리는 “북한군의 침략을 무찌르기 위해 모든 지원을 제공하자”는 내용의 ‘6‧26결의안’(우리 시간으로는 6‧27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우리 시간으로 6월 27일은 우리 정부가 수도를 서울에서 대전으로 옮긴 날이기도 한데, 이 6‧27결의안에 따라 북한에 대한 군사적 간섭이 가능하였고, 한국에 파병할 수도 있었다. 즉 미국이 지상군을 투입해도 되는 합법적인 근거가 되었으며, 유엔 회원국들과 자유 진영 국가들이 한국에 필요한 지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이미 트루먼 대통령은 6월 26일 미 태평양 사령관에게 전투 준비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으며, 맥아더(Douglas MacArthur) 사령관은 6월 27일 전방지휘연락본부를 수원에 설치하기도 하였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따라 6월 30일 미국은 미국의 육‧해‧공군을 한국전선에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전선에 투입하게 된 미 지상군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제7사단, 제1기병사단, 제25사단, 제24사단 등이었는데, 그중 선발대(제24사단 제21연대 1대대)를 부산까지 비행기로 이동하고, 나머지 부대는 바다로 이동하게 하였다. 맥아더는 미 제8군 사령관 워커(Harris Walton Walker) 중장에게 한국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일본 규슈[九州]에 머물던 미8군 제24사단의 선발대로 제21연대 제1대대장 스미스 중령(Charles B. Smith)이 이끄는 특수임무부대[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가 7월 1일 부산에 도착, 유엔군으로서는 가장 먼저 한국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한편, 미군의 참전에 이어 자유 진영 32개국(國)이 유엔의 결의를 지지했으며, 7월 중순에는 지지하는 나라가 52개국으로 증가하였다. 그 후 한국을 돕기 위해 16개국이 전투부대 파병을, 5개국이 의료 또는 시설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유엔에 통보하였다. 또한 전쟁 물자를 지원한 나라가 20개국이었는데, 6‧25전쟁 기간 총 40개국이 우리나라를 지원하였다.
그리고 유엔 안보리는 유엔 회원국이 한국에 파견하게 될 부대의 지휘 체제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월 7일,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제안한 유엔군사령부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의 요지는 “유엔군사령부의 설치 및 사령관의 임명권을 미국에 주며, 유엔기(旗: 깃발) 사용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미국은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초대 유엔군사령관에 임명하였으며, 맥아더 장군은 일본 도쿄[東京]에서 유엔군사령부(United Nation Command)를 공식적으로 창설하였다. 미국은 유엔군 작전의 모든 권한을 받아 유엔군사령부를 통해 모든 유엔군의 지휘 및 통제를 담당하게 되었다.
- 질문1 북한군이 남침을 일으킨 사실을 보고받은 미 국무장관과 대통령은 어떤 방식으로 한국전쟁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지 말해 봅시다.
- 질문2 1950년 6월 26일(뉴욕시간) 유엔에서 한국에 파병할 것을 결정한 결의안을 보통 무슨 결의안이라고 하는지 써봅시다.
- 질문3 한국을 돕기 위해 전투부대를 직접 파병한 나라는 몇 나라이며, 가장 먼저 유엔군을 파병한 나라는 어느 나라인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2
죽미령 전투
죽미령은 수원‧병점에서 오산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고개이다. 지금은 택 개발과 도로 정비로 완만한 고개로 변했지만, 1970년까지만 해도 구불구불한 도로와 경사가 지금보다 급한 고개였다. 또 도로와 철도는 반듯하게 고쳐지면서 6‧25전쟁 당시와는 많이 달라졌다. 6‧25전쟁 당시 경부선 철도는 1번 국도의 동쪽에 있었지만, 현재는 철도는 국도의 서쪽에 있다.
미8군 제24사단장으로서 주한 미 지상군 사령관을 겸하고 있는 딘 소장(William F. Dean)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비행기로 일본을 떠나 7월 1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2개 중대 406명으로, 장병 1명이 각각 M1 카빈 소총과 실탄 120발 및 C-레이션(전투식량) 2일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부산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고, 오후 8시경 부산에서 출발하여 다음날인 7월 2일 아침 8시경 대전에 도착하였다.
스미스 중령은 전방지휘소에서 동부사령관 처치(John H. Church) 준장에게 신고하고 오산 북방 5km 지점의 죽미령 지역을 살펴본 후 대전으로 돌아왔다. 7월 2일 밤, 평택과 안성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스미스 부대는 기차를 타고 올라가 평택과 안성에 각각 1개 중대씩 배치하고 대대지휘소는 평택에 설치하였다.
7월 3일 스미스 부대는 평택과 안성에 머무르면서 우리 측 공군기가 마침 평택역에서 보급품을 내리고 있던 화물열차를 적의 열차로 잘못 판단하여 폭격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였으며, 오후에는 수원에 있는 우리 편 군대를 우리 편 비행기가 잘못 판단하여 공격하다가 총에 맞아 잡힌 우리 편 조종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하였다.
수원마저 점령된 7월 4일, 평택에 있던 스미스 부대는 LST(상륙용 함정)을 타고 대한해협(현해탄)을 건너온 제52포병대대 일부와 합류하였으며, 오산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아 밤 12시경 출발하였다. 그런데 병력을 차로 이동하려 하였으나 운전사들이 달아나버려 운전사를 보충하느라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도로가 국군과 피난민들로 가득 차 스미스 부대가 오산 죽미령까지 가는데 2시간 30분이나 걸렸다.
7월 5일 오전 3시경 방어진지(陣地: 적과 싸울 수 있도록 설치해 놓은 곳)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는 왼쪽에 B중대를, 오른쪽에는 C중대를 배치하고 75mm 무반동총(소형 대포) 1정씩을 각 중대에 배치하여 보병진지를 갖췄다. 그리고 4.2인치 박격포를 B중대 뒤쪽에 예비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제52포병대대장 페리(Miller O. Perry) 중령은 보병진지 뒤쪽 약 2,000야드(약 2km) 지점에 A중대를 배치하여 포병진지를 갖췄다.
비가 내리는 7월 5일 새벽, 오산 북방 죽미령 지역에는 540명의 미군(스미스 부대의 보병장교 17명과 사병 389명, 페리 포병부대의 포병장교 9명과 병 125명)이 동트기 전 전투식량으로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치고 북한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7시경 수원 가까이에서 북한군의 움직임을 확인되었으며, 7시 30분경에는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이 수원 쪽에서 스미스 부대가 있는 죽미령을 향해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 확인되었다. 8시경, 8대의 북한군 전차가 가까이 달려오고 있는 것을 살펴보던 장교는 뒤쪽에 있는 포병진지에 연락하여 포 사격을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8시 16분, 105mm 고사포 사격을 시작으로 계속 포탄을 쏘아댔지만, 북한군 전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적 전차가 700야드(약 640m) 안에 들어오자 75mm 무반동총과 2.36인치 바주카포(60mm 대전차로켓발사기) 등 대전차 포탄을 쏘아댔다. 북한군 전차 2대가 멈췄다. 그러나 세 번째 북한군 전차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남쪽으로 향하고 뒤를 이어 총 33대의 전차가 보병진지를 통과하기 시작하였다. 시간은 9시경이었다.
스미스 부대는 후방의 포병부대에게 적 탱크가 보병진지를 통과했다고 알려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페리 포병부대는 대전차 포탄이 아닌 고폭탄(高爆彈: 고성능 화약이 들어 있는 포탄. 주로 인명 살상용이나 진지 파괴용으로 사용)을 탱크에 직접 쏘기도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105mm 포(곡사포)가 북한군 전차의 바퀴를 명중시켰다. 북한군 전차는 멈추었으나, 그 안에서 튀어나온 북한군 병사 2명이 쏜 총에 페리 제52포병대대장이 부상당하였는데, 후송을 거절하고 지휘를 계속하다 결국 사망하였다.
33대의 북한군 전차가 페리 포병부대의 포병진지까지 통과(마지막 전차가 포병진지를 지나간 시간은 10시 15분경)하면서 4대가 파괴되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되고, 3대가 부서지는 가운데 나머지는 오산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오전 10시경, 계속 보병진지를 지키고 있던 스미스 중령은 북한군 전차의 뒤를 이어 약 10km에 달하는 긴 행렬의 북한군 트럭과 보병이 접근해 오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3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접근해오는, 약 4,000명 규모의 보병 행렬은 한 시간 이내로 미군의 방어진지까지 도달할 것으로 판단되었는데, 이들은 북한군 제4사단의 중심 병력이었다.
북한군 트럭이 1,000야드(약 915m) 전방에 접근했을 때 스미스 중령의 강력한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박격포, Cal 50 기관총 등이 불을 뿜었다. 미국과 북한군 수많은 병사가 쓰러져 가는 가운데 3대의 북한군 전차가 접근하자 전차포와 기관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이때가 11시 45분쯤이었는데,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양측 보병이 맞붙어 싸우는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오후 2시쯤 북한 인민군은 10배가량 되는 우세한 병력으로 삼면에서 공격해 왔다. 이에 스미스 부대원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불리해져 갔으며, 이미 죽미령을 돌아서 내려온 북한군에게 포위까지 당한 상황이었다. 포병부대와 연락도 되지 않고, 총탄도 다 떨어져 가 더는 싸울 수가 없었다. 오후 2시 30분경 스미스 중령은 결국 철수 명령을 내렸다. 우측에 있는 C중대를 먼저 철수시켰는데, 부상이 가벼운 병사들은 본대와 합류해서 철수했지만, 중상자들은 어쩔 도리가 없이 전쟁터에 남겨졌으며 그 후 상당수가 사망하였다.
B중대에 남아 있던 스미스 중령은 포병부대와 함께 오후 3시쯤 철수하였는데, 페리 중령과 합류한 스미스 중령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안성을 통해서 7월 6일 천안에 도착하였다. 다행히 북한군은 미군이 버린 무기와 탄약, 그리고 전투식량에 만족했던지 스미스 부대를 추격하지 않았다. 철수 명령을 제대로 받지 못한 B중대원은 며칠 후에 오산에 도착하기도 하고, 어떤 병사는 동해안에서, 어떤 병사는 서해안에서 조각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기도 했다.
미 스미스 부대가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한국군 제17연대 9중대는 오산 남쪽의 갈곶리에서 북한군을 맞아 싸웠으나 미군과 마찬가지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후 오산 지역은 1950년 7월 5일부터 9월 22일까지 2개월 18일 동안 북한군에게 지배를 받았으며, 북한군이 오산을 물러난 것은 9월 24일이었다. 죽미령 전투 이후 미 지상군은 7월 20일까지 15일간 평택-천안, 전의-조치원, 금강(공주-대평리), 대전에서 북한군 제3사단‧4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을 상대로 전투하였다.
죽미령 전투의 결과, 540명의 스미스 부대원 가운데 150명이 전사하고, 포병대대 소속 장교 5명과 사병 26명은 실종되었다. 북한군과 처음으로 치른 전투에서 미군의 피해는 적지 않았다. 미군이 가진 장비 대부분은 북한군의 손에 들어갔으나, 북한군 제4사단도 42명의 전사자와 85명의 부상자와 함께 전차 총 7대가 파괴되거나 부서지는 피해를 입었다.
당시 미군들은 맥아더 장군이 말했듯이 “미국이 전선에 나타나면 북한군은 겁을 먹고 모두 도망할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전력은 생각보다 강하였으며, 미군은 이 전투를 통해 북한군의 전투 능력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북한군은 미군이 전쟁에 참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북한군은 미군이 참전하지 않거나 참전해도 그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 아래 남침하였는데, 1950년 6월 25일 남침한 지 10여 일 만에 미군의 참전을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죽미령 전투에서 미군이 큰 피해를 당하긴 하였지만, 스미스 부대는 북한군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6시간 15분 동안(8시 16분에서 14시 30분까지) 막음으로써 미국과 국군이 연합하여 북한군의 남하 속도를 늦추면서 방어선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 같은 죽미령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1955년 7월 5일 미군 제24사단과 장병들에 의해 죽미령 정상 한쪽 산위에 유엔군 초전기념비(구 유엔군 초전기념비)가 세워졌으며, 매년 7월 5일 이곳에서 기념식을 해왔다. 1981년에는 전적지개발계획에 따라 구 기념비 건너편에 넓은 땅을 마련하여 이곳에 1982년 새로운 유엔군 초전기념비(신 유엔군 초전기념비)가 세워지고, 1983년에는 유엔군 초전기념관이 들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질문1 유엔군 자격으로 한국전선에 가장 먼저 파병되어 부산에 도착한 미군 부대 이름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2 유엔군(미군)이 북한군을 맞아 가장 먼저 치른 전투는 몇 월 며칠 어디에서 치러졌는지 말해봅시다.
- 질문3 죽미령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죽미령 정상 양쪽에 세워져 있는 기념비의 이름을 써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1950년 7월 5일 벌어진 오산 죽미령 전투 상황이 그려진 지도이다.
- 질문1 오산의 위치와 수원 및 평택 방향을 표시해 봅시다.
- 질문2 현재 경부선 철도는 1번 국도의 왼쪽에 있다. 죽미령 전투가 치러질 당시에는 어느 쪽에 있었는지 찾아 표시해 봅시다.
- 질문3 북한군을 표시한 것과 미군이 배치된 곳을 각각 찾아보고, 또 한국군이 있던 곳을 찾아 표시해 봅시다.
- 질문4 보병연대인 B중대와 C중대 뒤쪽(후방)에 A중대가 배치되었는데, A중대는 보병부대가 아니었다. A중대는 ‘보병’이 아닌 ‘어떤’ 부대였을지 써봅시다.
시각자료 2

오산 죽미령 정상 한쪽 산 위에 세워져 있는 비석 모습이다.
- 질문1 비석 정면 중앙 아래쪽에 “(년도 생략) 7월 5일 이 자리에서 미 제24보병사단 소속 제21보병연대 및 제52야포대대 A중대로 구성된 스미스 전투부대 406명의 장병이 미합중국 군대와 공산침략군 간의 최초의 전투를 개시했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노라”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무엇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라고 밝히고 있는지 말해 봅시다.
- 질문2 이 비석의 이름이 왜 ‘유엔군 초전기념비’인지 질문1의 내용을 참고하여 설명해 봅시다.
- 질문3 이 비석은 1955년에 처음 세워졌다. 비석의 계단 맨 아래 오른쪽에는 성조기‧태극기와 함께 영어로 쓴 안내판이 붙어 있는데, 확대한 것을 사진 맨 오른쪽 아래 에 배치하였다. 여기에서 22ND는 22회라는 뜻이고, KSC는 ‘Korean Service Corps’의 약자로 한국근무단, 미 육군 한국근무단(현 미8군지원단)을 가리키며, CO는 중대(대대는 BN)를 뜻하는 군대용어이다. 이상의 설명을 바탕으로 이 안내판의 내용을 전부 해석하고 설명해 봅시다.
- 질문4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 전투는 몇 년도(질문1에서 생략된 년도)에 벌어졌는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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