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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다리(포로들이 다리를 건너 자유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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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馬는 달리고 싶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 월정리역(月井里驛) 안내판에 쓰여 있는, 유명한 말이다. 그런데 달리고 싶은 철마(鐵馬: 기관차)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관광지(임진각평화누리)에도 있다 임진각에는 두 대의 기관차가 전시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부서져 있는 철마는 원래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동장리 장단역(長湍驛)에 파괴된 채 있던 증기기관차를 이곳으로 옮겨와 전시하고 있다. 달리지 못하고 부서진 채 있는 모습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전라남도 목포에서 평안북도 신의주에 이르는 1번 국도 가운데, 서울에서 시작하여 파주까지 이어지는 고속화도로인 통일로(統一路)를 따라 계속 달리면 북녘땅에 닿겠지만,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된 지금은 임진각에서 끝맺게 된다. 임진각을 중심으로 조성된 임진각관광지 일대에는 망배단, 평화의 종, 임진강 지구 전적비, 미국군 참전기념비, 경기도평화센터, 평화누리공원 등이 있다. 또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가 전시되고 있으며, ‘자유의 다리’가 세워져 있다.
6‧25전쟁과 관련하여 널리 알려진 다리로는 자유의 다리, 돌아오지 않는 다리, 죽음의 다리 등이 있다. ‘죽음의 다리’는 장단역에 있는 다리로 이곳에서 북한군에게 미군들이 죽임을 당하여 그리 불렀으며,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판문점에 있는 다리로 이곳을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뜻에서 그리 불렀다. 그리고 ‘자유의 다리’는 휴전협정에 따라 이루어진 포로 교환과 관련이 있는 다리이다.
6‧25전쟁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끝내려는 노력은 1950년 12월과 1951년 3월 등 여러 차례 있었으나 그때마다 공산군 측의 반대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주도권을 국군과 유엔군에 빼앗긴 공산군 측은 휴전협상을 통한 정치적 타협 방법을 찾게 되었다. 이에 소련이 제안한 휴전협상을 미국이 받아들임으로써 1951년 7월 10일부터 휴전협상을 위한 본회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휴전회담은 쉽게 합의되지 않았다.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와 포로 교환 문제에 대한 양측의 견해 차이가 커 회담이 여러 차례 중단되기도 하였다. 중단된 회담이 다시 이루어지기를 반복하면서 회담 시작 25개월, 전쟁 시작 37개월 만인 1953년 7월 27일 미국과 중국, 북한 대표가 서명함으로써 정전협정이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
휴전협정이 맺어진 이후 가장 먼저 포로송환(送還: 포로나 불법으로 입국한 사람 등을 본국으로 도로 돌려보냄)이 추진되었다. 유엔군 측은 포로송환 때 양쪽 포로들이 귀환(歸還: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거나 돌아감)할 수 있도록 파괴된 임진강철교에 나무로 된 임시 다리를 설치하였다. 이 다리를 통해 1953년 8월 5일부터 1953년 9월 6일까지 1개월에 걸쳐 12,773명의 유엔군 측 포로가 남쪽으로 귀환하였는데, 그래서 이 다리를 ‘자유의 다리’라 불렀다.
“자유를 찾아 건너온 다리!”
자유의 다리는 비록 건축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으나, ‘자유로의 귀환’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소중한 사적지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경기기념물 제162호로 지정(1996년 12월 24일)되어 보존되고 있는데, 자유의 다리가 있는 이곳에서는 많은 이들이 전쟁의 아픔을 달래거나 통일을 향한 염원을 꽃피우고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1325-1 [도로명 주소: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임진각로 177 (임진각관광지)]
현재 상태 원형 보존 / 자유의 다리는 전쟁 당시 원형이 잘 보존된 편이다. 다만, 나무로 되어 있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썩어가고 있다.

북한군이 남한보다 훨씬 막강한 병력과 무기를 바탕으로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일으키자 국군은 쉽게 서울을 내주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국군을 돕기 위해 유엔군이 전쟁에 참여할 것을 결정하여 유엔군 중 미군의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가 7월 1일 부산에 도착, 7월 5일 경기도 오산 죽미령 일대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치렀으나 이들마저 패배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에게 거듭 패배하는 가운데 수도를 대전으로 옮기며 북한군의 남하(南下: 남쪽으로 내려감)를 늦추려 하였으나 북한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계속 밀려났다. 7월 16일에는 수도를 다시 대전에서 대구로 옮기고, 7월 20일에는 대전마저도 북한군에게 내주게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에는 낙동강까지 후퇴하였고, 8월 18일 수도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겼으며, 이제는 더 물러날 수 없다는 각오 아래 낙동강방어선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아 9월 중순까지 약 1개월 반 동안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런 가운데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쟁 상황이 역전되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허리가 잘린 북한군은 북쪽으로 후퇴하였고,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7일 서울로 진격하여 중앙청에 태극기를 걸었으며,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되찾았다(9․28서울수복). 나아가 국군과 유엔군은 도망가는 북한군을 쫓으면서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차지하였으며, 10월 27일에는 수도를 부산에서 서울로 옮겼다.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이 계속되면서 10월 말에는 압록강까지 올라갔으나, 북한군을 돕기 위해 중국군이 10월 25일부터 대대적인 공격[1차‧2차‧3차 공세(攻勢)]을 하는 바람에 국군과 유엔군은 밀려 후퇴하게 되었고. 1950년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버리고 다시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며, 수도를 다시 부산으로 옮겼다.
오산‧평택까지 물러난 유엔군과 국군은 전력을 회복하여 1951년 1월 24일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M.B. Ridgway) 장군의 지휘 아래 보충한 무기와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총반격을 하였다. 23만 명의 대병력이 동원된 서울재탈환작전이었다. 이에 다음날인 1월 25일 중국군이 즉각 반격에 나서 중국군의 4차 공세(2월 공세)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유엔군과 국군의 강력한 공격에 북한군과 중국군은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3월 14일 수도 서울을 다시 찾았으며, 3월 24일에는 38도선 이북까지 밀고 올라갔다.
봄이 되자 중국군은 다시 총공격을 시작하여 춘계 대공세(春季大攻勢)가 이루어졌다. 중국군은 1951년 4월 하순과 5월 중순에 참전한 이후 최대 규모의 병력인 50만 대군을 동원하여 두 차례의 춘계 대공세를 전개하였다. 1차 춘계 공세(4월 공세, 5차 공세)는 4월 22일부터 4월 30일, 2차 춘계 공세(5월 공세, 6차 공세)는 5월 16일부터 5월 23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두 차례의 춘계 대공세는 모두 성공하지 못하였다.
중국군의 공세가 끝났을 무렵 양측은 서로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가 따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서로 죽고 죽이는 전투보다 평화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끝낼 방법을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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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6‧25전쟁과 휴전회담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6‧25전쟁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끝내려는 노력은 전쟁이 시작된 지 6개월이 지난 1950년 12월부터 있었으나 이때는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직후라 공산군 측의 반대로 휴전협정이 맺어지지 않았다. 1950년 3월에도 정전 결의안이 다시 유엔에 상정되어 “현 상태에서 즉시 정전한다. 휴전 기간에 한국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한다. 외국군은 적당한 단계를 거쳐 철수한다. 대만 문제와 중공의 유엔 가입 문제는 미‧영‧중‧소 4개국이 협의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중국 측이 “협상 결과에 따라 휴전한다. 협상 개시와 동시에 중공의 유엔 가입을 인정한다. 협상 참가국은 미국‧소련‧영국‧프랑스‧인도‧이집트‧중국으로 하고, 협상 장소는 중국 영토 내로 한다.”는 주장을 내세움으로써 협상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6‧25전쟁의 전세가 크게 변하였다. 1951년 3월 북진을 계속하는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서자 중국군은 이른바 4월‧5월 춘계 대공세(春季大攻勢)를 실시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렇게 중국군의 춘계 대공세가 좌절되고,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긴 공산군 측은 휴전협상을 통한 정치적 타협 방법을 찾게 되었다.
1951년 6월 23일 유엔 주재 소련 대표 말리크(Y.A. Malik) 외무차관은 유엔방송을 통하여 38도선에 따른 휴전을 제안하였는데, 이 제의에 중국이 동의함으로써 협상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미국 또한 소련의 휴전협상 제안을 받아들여 리지웨이(M.B. Ridgway) 유엔군 사령관으로 하여금 휴전협상을 추진하도록 지시, 리지웨이 사령관은 1951년 6월 30일 라디오방송을 통해 회담을 원산 앞바다에 있는 배(덴마크병원선)에서 하자고 하였다. 이에 대해 공산군 측은 7월 2일 북경방송을 통해 회담 장소를 개성으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이리하여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 쌍방의 연락장교회의를 통하여 절차 문제를 합의함으로써 1951년 7월 10일부터 개성시 고려동 내봉장(來鳳莊)에서 휴전협상을 위한 본회담이 시작되었다. 10월부터는 회담 장소를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에 있는 판문점(板門店으)로 옮겼으며, 38도선이 아닌 전선(戰線)을 기초로 한 휴전협정이 진행되었다.
문제는 군사분계선을 어떻게 긋느냐가 중요하였는데, 1951년 11월 27일 군사분계선 설정 협정이 조인(調印: 서로 약속하여 만든 문서에 도장을 찍음)되었다. 내용은 “①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전투를 계속한다, ② 현재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고 이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씩 4㎞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한다. ③ 위의 군사분계선 및 비무장지대는 30일 이내에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에만 유효하다. ④ 만일 30일 이내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지 않으면 군사분계선은 휴전협정이 조인될 당시의 접촉선으로 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12월 27일까지의 임시 휴전 기간에 휴전협정은 물론 아무런 협정도 맺지 못하고 결국 전쟁은 계속되었다.
또 중요한 문제는 포로 교환에 관한 것이었는데, 유엔군 측은 포로 개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한국‧북한‧중국 또는 대만을 선택하게 하는 이른바 ‘자유송환방식’을 주장한 데 비하여 공산군 측은 모든 중국군과 북한군 포로는 무조건 각기 고국에 돌려보내야 한다는 이른바 ‘강제송환(자동송환)방식’을 내세웠다. 이에 대한 양측의 입장이 강하여 협상이 중단되기도 할 정도로 포로 교환 문제는 아주 민감한 문제였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공산포로들의 폭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사건이 계속 일어나기도 하였다.
군사분계선과 포로 교환 문제로 어렵게 회담이 진행되는 가운데 1953년 6월 18일 유엔군 측이 붙잡아둔 반공포로 27,000여 명을 한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석방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구실로 공산군 측은 또다시 회담을 중단시켰으나, 유엔군 측이 한국군으로 하여금 휴전협정을 지키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공산군 측에 약속함으로써 회담이 재개되었다. 그리하여 7월 22일에는 군사분계선이 확정되고, 7월 23일에는 비송환 포로들을 비무장지대에서 중립국송환위원단에 보내졌으며, 7월 27일에는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조인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개최된 제159차 본회의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W.K. Harrison) 중장과 공산군 측 대표 남일(南日)이 3통으로 만들어진 휴전협정서와 부속 협정서에 각각 서명하였다. 이어서 클라크(M.W. Clark) 유엔군 사령관, 북한군 총사령관 김일성(金日成), 중국의용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각각 그들이 있는 후방 사령부에서 휴전협정서에 서명하였다. 다만, 대한민국 대표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에 반대했기 때문에 휴전협정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전문 5조 36항과 부록으로 구성되고 영문‧한글‧한문으로 작성되어 조인된 휴전협정의 정식 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북한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Agreement between the Commander-in-Chief, United Nations Command, on the one hand, and the Supreme Commander of the Korean People’s Army and the Commander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s, on the other hand, concerning a military armistice in Korea)」이다. 정전협정에 해당하지만, 영어를 보면 휴전협정(Armistice Agreement)이다.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정전협정보다 휴전협정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다.
159차례의 본회담과 500여 회가 넘는 소위원회가 열리면서 마침내 휴전협정이 맺어짐에 따라 전쟁 시작 3년 1개월, 회담 시작 2년 1개월 만에 6‧25전쟁을 매듭짓고 정전상태에 들어갔다. 군사분계선과 4km 너비의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었으며,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 감시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비록 전쟁은 정지되었으나, 국토는 휴전선으로 분단되었다.

  • 질문1 휴전을 반대해 오던 공산군 측이 1951년 휴전협상을 제안하고 이를 동의한 이유는 당시 6‧25전쟁이 어떤 상황으로 변해서인지 말해 봅시다.
  • 질문2 휴전협상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두 가지 문제는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와 어떤 문제였는지 써봅시다.
  • 질문3 미국‧중국‧북한군 사이에 맺어진 휴전협정에 대한민국 대표가 빠진 이유는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2

포로송환과 자유의 다리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맺어진 휴전협정에 따라 오후 10시부터 모든 전선에서는 전투를 중지하고 휴전선으로 철수하여 일제히 총성이 멎었다. 휴전협정(정전협정)의 주요 내용은 “①군사분계선을 설치하고, 양측은 군사분계선으로부터 2km씩 후퇴하여 완충지대로서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를 설치한다. ②군사정전위원회를 구성하여 휴전협정의 이행을 감시하며, 스웨덴․폴란드․스위스․체코슬로바키아 등 4개국으로 중립국감시위원회를 구성하여 군비 증강을 감시․조사하게 한다. ③양측이 억류하고 있던 포로를 송환할 것과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송환위원회에 인도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 휴전협정에 따라 유엔군과 북한군 양측은 포로송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휴전협정에 따라 포로송환위원회를 구성하고, 송환에 관한 사항을 준비하였다. 사전에 유엔군 측은 포로송환 때 양측 포로의 귀환을 위해 부서진 임진강 철교에 나무로 된 임시 다리를 설치하였다.
사실 휴전협정이 맺어지기 이전에 리틀 스위치 작전(Operation Little Switch)이란 이름으로 포로 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리틀 스위치 작전은 1953년 4월과 5월 총 10회에 걸쳐 아프거나 부상당한 포로들을 교환한 작전이다. 유엔군 측에서는 6,670명의 중국인과 조선인을 석방하였으며, 공산군 측에서는 미국인 149명을 포함한 684명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대규모 포로 교환은 빅 스위치 작전(Operation Big Switch)으로 진행되었다. 빅 스위치 작전은 휴전협정이 맺어진 이후에 이루어진 포로 교환으로, 1953년 8월 시작하여 같은 해 12월까지 진행되었다.
1953년 8월 5일 오전 9시, 판문점에서는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포로 교환의 막이 올랐다. 판문점 야외에 양쪽으로 각각 송환될 포로들을 맞이할 천막으로 세운 임시 막사[텐트(Tent)]가 마련되었으며, 국군 및 유엔군 간부들과 많은 장병이 이곳에 나와 있었다. 또 취재를 담당할 종군기자들과 함께 임시 막사에는 이동외과병원 의료팀과 군악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포로송환은 중립국감시위원단의 감독 아래 이루어졌다. 송환된 병사들은 정보막사(Intelligence Tent)에서 간단한 조사를 받고 막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남쪽으로 송환된 병사들은 비무장지대 남측 캠프인 ‘자유의 마을(Freedom Village)에 도착하였다. 다만, 남쪽으로 송환된 병사들을 맞이한 대표는 유엔군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휴전을 반대하고 휴전협정에도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판문점에서 직접 이들을 넘겨받을 수 없었다. 우리 정부는 송환된 우리 병사를 유엔군으로부터 다시 넘겨받아야 했다.
송환된 병사들이 완전히 남쪽으로 내려오기 위해서는 임진강 철교를 건너야 했다. 임진강 철교는 1906년 경의선 개통 당시 단선으로 다리가 하나였으나, 1943년 복선화되면서 상행선‧하행선 2개의 다리가 되었는데, 해방 후 하나는 철교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인도교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군이 후퇴하면서 폭파하려고 6월 25일과 27일 두 번이나 시도하였으나 실패, 이후 유엔군에 의해 폭파되어 다리의 기둥만 남아 있었다. 1953년 포로송환을 위해 유엔군 측이 임시 다리를 세웠는데, 임진강 철교 서쪽 다리 기둥 위에 철교를 복구하고 그 남쪽 끝에 나무로 된 임시 다리를 설치하였다. 풀려난 포로들은 판문점에서 차로 임진강 철교까지 와서는 걸어서 이 다리를 건너,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자유를 찾아 이 다리를 건너왔기에 이 다리를 ‘자유의 다리’라 부르고 있다. 다만, 1953년 포로송환 당시 정작 사용된 다리는 ‘현재의 임진강 철교 남쪽 끝에 연결된 나무다리’라기 보다는 ‘포로송환 당시 부서진 임진강 철교 옆에 철교와 나란히 나무로 세운 임시 다리’가 ‘원래의 자유의 다리’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1953년 9월 6일 포로 교환이 일단 완료되었다. 8월 5일부터 시작하여 9월 6일까지 1개월에 걸쳐 유엔군 측으로 귀환한 포로는 12,773(한국인 7,862명, 미국인 3,597명, 영국인 946명)명이며, 공산군 측으로 송환된 포로는 75,823명(조선인 70,183명, 중국인 5,640명)이었다. 그 비울이 1대 6이나 될 정도로 큰 차이가 났는데, 이는 유엔군 측은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들을 모두 송환했지만, 공산군 측은 많은 포로를 송환하지 않고 계속 붙잡아 두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쪽으로 귀환한 포로 가운데에는 장교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공산군 측은 포로송환에 불성실하였다.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도 있었으며, 제3국을 선택한 포로들도 있었다. 송환을 거부한 포로에게는 90일 동안 의사를 바꿀 기간을 줬는데, 이 기간을 통해 자신이 원하고 곳으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끝까지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와 공산군 측이 송환하지 않고 불법으로 붙잡고 있는 포로였다. 따라서 포로 교환에 관한 일은 9월 6일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북한군이 불법으로 붙잡고 있는 포로에 대한 송환 문제로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여하튼 북한군에 포로로 잡혀있던 국군과 유엔군은 자유의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돌아왔다. 현재 자유의 다리는 임진각관광지에 남아 있는데, 2000년 경의선 복원사업에 따라 도라산역과 이어진 ‘임진강 철교 남쪽 끝에 연결된,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 다리’를 자유의 다리라고 부르고 있다. 자유의 다리는 나무를 짜 맞추어 만들어져 있으며, 힘을 많이 받는 부분은 철재를 함께 사용하기도 하였다. 건축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지만, 역사적인 포로송환과 관련된 다리, ‘자유로의 귀환’을 상징하는 다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96년 12월 24일일 경기도 기념물 제162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자유의 다리가 있는 임진각관광지 일대에는 임진각 건물과 더불어 평화의 종, 임진강 지구 전적비, 미국군 참전기념비, 경기도평화센터, 평화누리공원 등 전쟁과 관련하여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각종 시설이 들어서 있다. 또 북한에 고향을 두고 온 이들이 모여 합동으로 제사를 지내는 망배단(望拜壇)이 세워져 있으며, 달리고 싶은 철마인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등록문화재 제78호) 화통(火筒: 기차나 배, 공장 따위의 굴뚝), 철도중단점과 미카(Mika) 증기기관차 등이 전시되고 있다.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화통은 원래 장단역 터(등록문화제 제77호)에 파괴된 채 남아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 질문1 1953년 7월 27일 맺어진 휴전협정의 주요 내용은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 질문2 휴전협정이 최종 맺어지기 이전인 1953년 4월과 5월 총 10회에 걸쳐 아프거나 부상당한 포로들을 교환한 작전을 무엇이라고 하는지 써봅시다.
  • 질문3 자유의 다리는 어떤 다리에 이어서 만들었으며, 이 다리를 통해 어떤 일이 이루어졌는지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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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휴전협정서

1953년 7월 27일 조인된 휴전협정서에 각 대표가 서명한 내용이다.

  • 질문1 협정서에는 휴전협정 대신 ○○협정이라고 쓰여 있는지 빈칸에 알맞은 말을 써봅시다.
  • 질문2 이 협정이 맺어진 때와 이 협정으로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총성이 멎으며 모든 전투가 중지된 때는 각각 언제(몇 월 며칠 몇 시)인지 써봅시다.
  • 질문3 협정서에 총 5명이 서명하였는데, 모두가 판문점에서 서명한 것은 아니고 2명만 판문점에서 하였다. 이들 2명은 누구인지 찾아 써봅시다.

시각자료 2

자유의 다리 입구에 설치된 기념표지

임진각관광지 ‘자유의 다리’ 입구에 설치된 기념표지이다.

  • 질문1 표지석 중간쯤에 “여기까지 오기를 ○○년”이라고 쓰여 있는지 확인해 봅시다.
  • 질문2 표지석 맨 아래쪽에 몇 년 몇 월 며칠이라고 쓰여 있는지 써봅시다.
  • 질문3 질문1과 질문2를 바탕으로 6‧25전쟁은 몇 년 몇 월 며칠에 일어났는지 써봅시다.

시각자료 3

폭파된 임진강 철교의 복구 광경

폭파된 임진강 철교 옆에 임시로 다리를 세워 복구한 모습이다.

  • 질문1 부서진 임진철교 옆에 만들어진 다리는 무슨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써봅시다.
  • 질문2 이렇게 임시로 만든 다리는 무슨 용도로 만들었는지 말해 봅시다.
  • 질문3 만약 이 임시 다리가 1953년 포로송환 때 사용된 ‘자유의 다리’라고 한다면 이 다리는 현재 어찌 되었을지 말해 봅시다.
  • 질문4 파괴된 임진철교는 현재 복구되어 사용하고 있다. 북한의 어느 도시에 있는 공단과 연결되어 있는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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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포로 교환에 대한 입장이 자유송환방식과 강제(자동)송환방식으로 대립하여 휴전협정이 오래 걸리기도 하였다. 자유송환방식을 지지하는 측과 자동송환방식을 지지하는 측, 두 모둠으로 나눠 토론해 봅시다.
모둠활동 2
휴전(休戰)이나 정전(停戰)은 전쟁이 완전히 끝난 상태가 아니라고 한다. 전쟁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가 이루어져야 하는지 알아보고, 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자.
모둠활동 3
주변에 6‧25전쟁 당시 국군으로 참전하셨거나, 혹시 반공포로로 석방되셨거나, 공산군 측에 포로로 잡혔다 돌아오신 분이 계시면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 내용을 녹화하여 제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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