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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역 북한군 전차 하역대(북한군의 남침 사실을 증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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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선(京元線)은 원래 서울에서 원산(강원도, 현재 북한 땅)까지 연결된 철도 노선으로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京仁線)과 함께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대표적인 철로였다. 그러나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지금은 서울 용산역에서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역까지만 운행되고 있다.
이 경원선의 중간쯤에 위치한 경기도 연천역은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경원선의 38도선 이북에 있는 역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한 역으로써 북한 지역에 속하였다. 그러나 휴전 이후에는 남한 지역에 속한 역이 되었는데, 이곳에는 ‘전차 하역대’와 ‘급수탑’이 남아 있다.
연천역 급수탑(給水塔)은 1914년 경원선 전 구간이 개통되던 당시에 세워진, 물을 공급하기 위해 탑처럼 높이 쌓은 건물이다. 증기기관차는 동력을 얻기 위해 물이 필요했으므로 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는 급수탑이 필요하였는데, 연천역 급수탑은 1967년까지 운행하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탑으로, 원통형과 상자형 두 개가 남아 있다. 이 2개의 급수탑과 우물 1개는 ‘연천역 급수탑’이란 이름으로 2003년 1월 28일 등록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으며, 근대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하역대(荷役臺)는 짐을 싣고 내리기 위한 받침대 또는 플랫폼(Platform) 같은 것을 말하는데, 전차 하역대는 전차(戰車)를 빠르게 싣고 내리기 위한 시설을 말한다. 북한군은 6‧25전쟁 이전 북한에서 가장 남쪽에 있던 역이었던 이곳 연천역에 전차의 하역을 쉽게 하고자 전차 하역대를 설치하였다. 이는 북한군 후방에 배치되어 있던 탱크와 중장비 등을 열차를 통해 이곳 연천역으로 이동시키고자 함이었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2일 ‘전투명령 제1호’에 따라 38도선 일대로 병력을 집결시켰다. 제4사단은 진남포(鎭南浦: 평안남도 남서쪽 끝에 있는, 대동강 어귀의 항구도시)에서 기차로 이동하여 6월 21일 신망리(新望里: 현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상리) 일대로 집결하였다. 또 제105전차여단 전차 1개 대대는 열차를 이용하여 연천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렇게 전쟁 준비가 이루어졌으며, 1950년 6월 25일 막강한 병력과 전차를 앞세워 북한군은 남침하였다. 이에 연천 지역을 방어하던 국군 제7사단 제1연대는 북한군 제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의 1개 전차대대의 공격을 받고, 방어전투를 하게 되었다.
연천역 전차 하역대는 북한군이 사전에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즉 북한군의 남침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적지라고 할 수 있다. 연천읍 급수탑 또한 총탄 흔적 등이 남아있어 6‧25전쟁 당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연천역은 전적지로서의 관리‧보존과 함께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에 적절한 근대문화유산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차탄리 34-418 [도로명 주소: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연천로 273-7 (차탄리, 연천역)]
현재 상태 훼손 / 북한군 전차 하역대와 급수탑은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있으나, 대체로 전쟁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연천역사(驛舍: 역으로 사용하는 건물)는 1958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북한군은 1950년 3월부터 군사 시설이나 장비를 크게 늘리는 가운데 5월 중순부터는 남침을 위한 본격적인 부대 정비와 이동을 시작하였다. 5월에는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가 열렸으며, 북한 민족보위성(民族保衛省: 북한군의 최고사령부로, 현 인민무력부. 우리의 국방부에 해당)과 소련 군사고문관들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최종 점검에 들어갔다.
민족보위성에서는 매일 군 우두머리회의가 열렸으며, 6월 10일 전방 각 사단장과 여단장을 평양으로 불러 모아 비밀리에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전군에 6월 23일까지 방어하는 것처럼 거짓으로 꾸민 공격 준비 자세를 취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따라 6월 11일부터 북한군은 두 개의 군단으로 재편성되었다. 그리고 새로 편성된 2개 군단의 통제 아래 그때까지 후방에 있던 북한군 전투사단들은 부대별로 훈련하는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 1950년 6월 11일부터 38도선 북쪽 10∼15㎞의 공격 출발 지점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38도선에 가까이 있었던 부대는 걸어서 이동하였으며, 먼 곳에 있던 부대는 기차를 이용하였다. 제4사단은 서쪽 진남포에서 기차로 이동하여 6월 21일 경기도 연천 신망리 일대로 집결하였으며, 제105전차여단 전차 1개 대대는 열차를 이용하여 연천역으로 이동하였다.
전투사단의 이동과 함께 예비사단도 각각 지정된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며, 각종 지원부대도 해당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독립부대인 제549부대와 유격부대인 제766부대는 동해안에서 해상 침투 준비에 들어갔다. 북한군의 이동은 1950년 6월 23일까지 명령대로 완료되었다. 작전 계획대로 2개 군단으로 재편성되고, 공격 시작을 위해 7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이 이동을 마쳤다.
이렇게 남침을 위한 전투부대의 전방 이동 등 만반의 준비가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민족보위성은 단계적으로 전투명령을 각 전선의 사령부에 전달하였다. 우선 6월 18일부로 각 사단장 앞으로 전달된 ‘정찰명령 제1호’에는 공격 직전 적(국군) 주력 부대의 위치 파악은 물론 작전 수행을 위한 정보를 단계별로 어떻게 수집해야 하는지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정찰명령에 이어 부대 이동이 거의 완료될 무렵인 6월 22일에는 공격명령인 ‘전투명령 제1호’가 전방 공격 출발 지점에서 대기 중이던 북한군의 각 사단에 전달되었다. 6월 23일 12시까지 이른바 “이승만 군대를 무찌를 수 있는 모든 공격 준비를 갖추라.”는 내용이었다. 이 명령은 모든 침공 준비 완료와 함께 6월 22일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Joseph V. Stalin)으로부터 침략을 위한 최종 승인을 받아낸 평양의 소련 군사고문단이 민족보위성에 내린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은 최종적으로 스탈린에게 6월 25일 모든 전선에 걸쳐 총공격을 할 것이라고 알렸다. 스탈린은 즉각 김일성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계획한 대로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일제히 38도선을 넘어 남침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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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6‧25전쟁 직전 남북한 상황

6‧25전쟁 직전 우리 국군이 갖고 있는 병력과 장비는 북한 인민군보다 크게 부족하였다. 더구나 예비군도 없이 8개 사단 가운데 4개 사단은 38도선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에 배치되어 공산당 등이 일으킨 사건들을 진압하는 데 신경 쓰고 있었다. 이에 비해 북한 인민군은 6‧25전쟁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전투 준비가 완료되어 육군 총 10개 보병사단, 해군 3개 위수사령부, 공군 1개 비행사단으로 무장한 강력한 병력을 갖추었다. 남침 직전 북한 인민군 전체 병력은 19만 8,380명으로, 국군의 10만 5,752명에 비해 약 두 배나 되었다. 더욱이 당시 국군은 38도선에서 지키고 있던 부대의 전체 병력 가운데 3분의 1 정도가 휴가 또는 외출한 것을 고려한다면 실제 국군의 병력은 훨씬 더 적은 상태였다.
국군과 북한군의 무기 및 장비 차이는 병력의 차이보다 더욱 심하였다. 북한군은 국군에게는 단 한 대도 없었던 소련제 T-34 전차를 242대나 갖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국군은 적의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포나 항공기를 공격할 대공포도 제대로 갖고 있지 않았다. 국군이 갖고 있는 57㎜ 대전차포나 2.36인치 로켓은 성능이 약하여 정상적인 공격으로는 T-34 전차를 파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포병의 경우도 북한군은 국군을 크게 앞질렀다. 북한군은 122㎜ 신형 곡사포를 비롯해 총 552문의 곡사포와 120㎜ 박격포를 포함한 총 1,728문의 박격포를 갖고 있었다. 이에 비해 국군은 105㎜ 곡사포 91문과 81㎜, 60㎜ 박격포 등 960문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국군의 장비는 북한군에 비해 곡사포는 8분의 1, 박격포는 2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국군은 57㎜ 대전차포만 북한군보다 많아 북한군이 갖고 있는 것보다 4배나 많았지만, 그 성능은 적의 전차를 파괴시키기 어려운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북한군의 무기는 대부분이 소련으로부터 도입한 신형 장비로서 예비 분량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국군이 갖고 있는 무기는 모두 미군으로부터 들여온 것들로써 대부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사용하던 낡은 것들이었다. 그마저도 수리용 부품 등이 미국으로부터 제대로 보급되거나 도착하지 않아 장비의 15%가 사용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국군이 갖고 있는 차량(車輛)도 크게 부족하였다. 국군 8개 사단 전체가 갖고 있는 차량은 총 1,566대 정도였으나, 이 차량마저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은 40%를 넘지 못하였다. 육군 각 사단에 서류상 배치된 차량은 377대였지만, 실제 가지고 있는 차량은 52%에 해당하는 196대에 불과하였다. 이 같은 장비로는 전쟁이 일어나면 전방과 후방 부대 모두 전투는커녕 병력과 탄약마저 제대로 실어 나르기 어려운 상태였다.
항공기 부문에서도 국군은 고작 연락용과 훈련용 연습기 22대 외에 전투기는 단 한 대도 없었다. 이에 비해 북한은 항공기 총 211대를 갖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전투기는 170대나 되었다. 북한 공군과 우리 공군의 장비는 비교하기 창피할 정도로 큰 차이가 났다.
이렇게 북한 인민군은 전투력 면에서 우리 국군과 엄청난 차이가 있었으며, 국군보다 병력이나 장비 모든 면에서 크게 뛰어난 공격력을 갖추었다. 육‧해‧공군 모두에서 북한군은 국군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갖춘 막강한 전력을 바탕으로 1950년 6월 25일 남한을 침략하였다.

  • 질문1 남침 직전 북한 인민군 전체 병력은 국군의 병력에 비해 약 몇 배나 되었는지 써봅시다.
  • 질문2 북한군의 신형 무기가 많았고 국군은 미국으로부터 들여온 낡은 장비가 많았다. 북한군은 신형 무기를 어느 나라로부터 구입한 것인지 써봅시다.
  • 질문3 국군에게는 단 한 대도 없었지만, 북한군은 242대나 보유하고 있던 소련제 전차의 이름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4 북한은 170대나 갖고 있었지만, 국군은 단 한 대도 없었던 것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2

6‧25전쟁과 연천역

막강한 장비와 병력을 바탕으로 1950년 6월 25일 전면적인 남침을 시작한 북한군은 경기도 연천역 등을 통해 전쟁 장비를 실어 날랐다. 당시 연천역은 38도선 이북지역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역으로써 북한에 속하였는데, 연천역은 북한군의 전쟁 장비를 이동시키는 데 유리한 곳이었다. 이에 6‧25전쟁 이전 북한군 제1군단에 소속 제105전차여단 전차 1개 대대는 열차를 이용하여 연천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이곳에 소련제 T-34 전차나 SU-76 자주포(전체 모양은 전차와 비슷함) 등과 같은 장비를 옮겨놓았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자, 북한군 제3사단에 제109전차연대를 배치하여 지원하게 하고, 제4사단에는 제107전차연대를 배치하여 지원하게 함으로써 각각 연천과 철원 일대에서 포천과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공격해왔다. 연천역은 전쟁 시작 전부터 전쟁이 시작될 때는 물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현재 연천역 승차장 서쪽에는 6‧25전쟁과 관련된 군대 화물을 남쪽으로 보내기 위해 1948년에 설치한 화물용 플랫폼인 하역대가 남아 있는데, 군대 화물을 옮기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연천역은 경원선의 가운데쯤에 위치한 철도역의 하나였으며, 1914년 9월 6일 개통된 경원선은 총 거리가 223.7㎞로써 원래 서울특별시 용산구에서 경기도 동두천시와 연천군을 지나 강원도 철원군과 안변군을 거쳐 원산시를 잇는 철로였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과 함께 경원선은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대표적인 철로 가운데 하나였다. 지금은 국토의 분단으로 서울 용산역에서 경기도 철원군 철원읍에 있는 백마고지역까지 94.4㎞만 운행하고 있다.
경원선의 가장 북쪽에 있는 역은 “철마는 달리고 싶다”로 유명한 월정리역(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이지만, 현재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바로 앞에 위치하고, 6‧25전쟁 당시 파괴되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다만, 월정리역은 철원안보관광개발사업의 하나로 1988년 복원되어 관광이나 교육용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백마고지역은, 민통선(民統線: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으로부터 남쪽으로 5∼20km의 거리를 동서로 잇는 민간인 출입 통제선.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 안에 있는 철원역을 대신하여 2012년 새롭게 세운 역이다. 이 백마고지역과 동두천역 구간은 통근열차가 운행되고 있는데, 동두천역과 백마고지역 구간은 아직도 철로가 하나뿐이다. 그래서 양쪽에서 달리던 두 열차가 중간쯤에서 만나 서로 비켜난 후에야 다시 달릴 수 있다. 두 열차가 만나 서로 비키는 곳이 바로 연천역이며, 연천군의 철도교통 중심지이나, 그러나 일반인이 탈 수 있는 열차가 통근열차와 일부 편성된 관광열차뿐이기 때문에 이용객은 많지 않은 편이다. 더욱이 동두천역에서 탄 관광객들 가운데에는 신탄리역이나 백마고지역까지 바로 가는 이들이 많으므로 연천역을 이용하는 사람은 적은 편이다.
그럼에도 연천역은 역사적 가치가 높은 역이다. 북한군이 전차를 이동시키기 위해 만든 전차 하역대 외에 근대문화유산으로써 등록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된 급수탑이 전해지고 있다. 연천읍 급수탑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경원선 전 구간이 개통되던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당시 운행하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탑처럼 높이 쌓은 건물이다. 경원선에는 중간 지점인 연천역에만 급수탑을 설치하였는데, 연천역 급수탑은 원통형과 상자형 2개가 전해지고 있다.
상자형 급수탑은 콘크리트로 만들면서 벽면에 줄눈을 그려 넣어 밖에서 보면 마치 벽돌을 쌓아올린 듯 보인다. 상자형 급수탑의 아래쪽에 만든 입구는 아치형을 하고 있는데,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그리고 높이 23m의 원통형 급수탑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다가 머리 부분에서 다시 넓어지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급수관 3개와 기계장치가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다. 또 탑 바깥에는 상자형 급수탑과 마찬가지로 6‧25전쟁 당시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비록 1950년대 디젤기관차의 등장으로 증기기관차가 제 기능을 다하고 사라졌지만, 이 연천역 급수탑은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증기기관차 관련 철도 시설물로, 연천역 전차 하역대와 마찬가지 그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 질문1 경원선은 ○○에서 ○○을(를) 있는 철도 노선이었는지 빈칸에 알맞은 말을 써봅시다.
  • 질문2 현재 경원에서 통근열차가 운행되고 있는 구간은 경기도 동두천역과 강원도 어느 역 구간인지 써봅시다.
  • 질문3 역사‧문화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는, 연천역에 전해지고 있는, 두 가지 종류의 시설물은 무엇과 무엇인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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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북한군의 소련제 T-34 Tank

6‧25전쟁 당시에 사용되었던 전차 모습이다.

  • 질문1 이 무기는 전차(戰車)라는 말보다 다른 말(영어)로 불리기도 한다. 무엇이라고 하는지 써봅시다.
  • 질문2 이 전차는 북한과 우리나라, 어느 편의 것이었는지 그 근거를 찾아 써봅시다.
  • 질문3 이 전차의 이름은 T-34이다. 이런 전차를 만든 나라는 어느 나라였는지 말해 봅시다.

시각자료 2

한국군 57mm 대전차포

6‧25전쟁 당시 57mm 대전차포 사용하고 모습이다.

  • 질문1 57mm 대전차포는 적의 어떤 무기를 파괴하기 위한 무기일지 말해 봅시다.
  • 질문2 이 무기를 사용하고 있는 군인은 북한과 우리나라, 어느 편 군인일지 써봅시다.
  • 질문3 대전차포 이외에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어떤 방법이 있는지 말해 봅시다.

시각자료 3

연천역 급수탑

경기도 연천역에 세워져 있는 등록문화재 제45호이다.

  • 질문1 원통형과 상자형으로 된 이들 시설물은 어떤 용도로 사용하던 것이었는지 말해 봅시다.
  • 질문2 이와 같은 용도로 사용된 탑을 흔히 ○○탑이라고 부르는지 빈칸에 알맞은 말을 써봅시다.
  • 질문3 이 같은 시설물이 역사‧문화적으로 갖는 가치에 대해 설명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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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전쟁기념관’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남북한 병력의 차이를 비교할 수 있는 자료를 조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6‧25전쟁의 시작에 대해서는 북침설, 남침유도설, 남침설 등 여러 견해가 있다. 이런 주장들을 조사‧비교한 후 정리하여 제출한 후, 6‧25전쟁은 북침이 아니라 ‘북한군이 남침한 전쟁’임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친구들에게 설명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연천읍 급수탑’처럼 철도 관련 시설물 가운데 급수탑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경우가 10개 정도 된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문화재검색을 이용하여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급수탑을 조사‧정리하여 그 결과물을 제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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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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