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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2가에 ‘아르누보센텀’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곳은 예전에 ‘대한증권거래소’ 건물이었는데, 이 대한증권거래소 건물은 ‘국방부 정훈국’ 사무실로 사용되던 곳이기도 하다.
정훈(政訓)은 군인을 대상으로 한 교양 교육과 이념 교육, 군대나 전쟁 등과 관련된 선전과 대외 보도 등에 관한 일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인데, 국방부 정훈국(政訓局)은 대한민국 군대의 일반 교육을 비롯하여 정훈 교육 및 사상 교육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고 대한민국 국군의 언론과 홍보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국방부 조직의 하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국방부 정훈국에서는 휴가나간 장병들을 소집하기 위해 지프(Jeep) 5대를 마련하여 장병들에게 “즉시 자신이 소속된 군대로 돌아올 것”을 알리는 길거리 방송을 하였다. 이처럼 전쟁 기간 국방부 정훈국은 장병들의 정신 교육은 물론 대북 방송, 심리전, 학도병 모집, 홍보 등의 각종 업무를 담당하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여 잘자라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피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이 노래는 1950년 10월에 발표되어 널리 불렸던 「전우야 잘자라(전우여 잘있거라」라는 노래 가사 일부이다. 이 곡은 유호가 작사하고, 박시춘이 작곡, 현인이 노래한 것으로, 6‧25전쟁 당시 전투에서 사망한 전우를 위로하면서 애국심을 불어넣고, 적을 무찌르며 앞으로 나아가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곡을 작곡한 박시춘은 6‧25가 터지자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 2소대장으로 전쟁터를 다니며 위문 공연을 하였으며, 「제1훈련소가」를 비롯한 많은 군가(軍歌)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전쟁 기간 작가나 예술인, 연예인들이 국방부 정훈국에 소속되어 글과 신문, 사진, 노래, 춤, 그림, 영화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이바지하였다.
국방부 정훈국이 있던 대한증권거래소 건물은 역사적 가치가 있어, 문화재 관련 기관에서는 이 건물의 보존을 결정하였지만, 확실한 행정조치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2006년 건물 소유주가 옛 건물을 허물고 주상복합건물인 명동아르누보센텀을 새롭게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2가 199-40 아르누보센텀 [도로명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7길 21 (을지로2가, 명동아르누보센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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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멸실 / 옛 국방부 정훈국은 옛 대한증권거래소 건물에 있었다. 문화재 당국에서 이 건물의 보존을 결정하였지만, 소유주가 2006년 옛 건물을 허물고 주상복합건물인 명동아르누보센텀을 새롭게 세웠다.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많은 갈등과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공격당한 대한민국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6월 27일 정부를 대전으로 옮겨야 했다. 비록 7월 1일 유엔군이 부산에 처음 도착하여 전쟁에 참여하였으나, 북한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계속 밀리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에 7월 16일 대전에서 대구로, 8월 18일 대구에서 부산으로 임시수도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의 우세한 병력과 강력한 공격에 밀려 8월 초 낙동강까지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이제는 더 물러날 수 없다”는 각오 아래 낙동강방어선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아 9월 중순까지 약 1개월 반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면서 유엔군의 수를 늘리고 장비를 보충하면서 반격을 준비하였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바뀌어 낙동강방어선에서도 국군과 유엔군은 총반격하게 되었다. 이에 빼앗긴 지 3개월만인 9월 28일 서울을 완전히 되찾았으며, 도망가는 북한군을 쫓으면서 38도선을 넘었다.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차지하고, 10월 말에는 압록강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북한군을 돕기 위해 참전한 중국군이 10월 25일부터 대대적으로 공격해 내려와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2월 4일에 평양에서 철수하였으며,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을 버리고 후퇴하였다.
오산‧평택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대규모 공중폭격을 발판으로 반격에 나섰다. 3월 14일 다시 서울을 되찾고, 3월 24일에는 38도선까지 올라가 5월 중순경에는 강원도 철원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북한군과 중국군도 끈질기게 저항하여 이제는 서로 밀고 밀리는 전투가 계속되면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 소련의 1951년 6월 23일 휴전협상 제안을 미국이 받아들임으로써 1951년 7월 8일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휴전은 생각만큼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 인민군 사이에 휴전협정(정식 이름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 간단히 정전협정)이 맺어짐으로써 마침내 전쟁은 정지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된 이래 1953년 7월 23일 정전협정 체결로 전쟁이 정지되기까지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친 것은 물론 산업시설과 집이 파괴되어 삶의 터전을 잃는 등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기간에 군인은 물론 민간인 누구라도 전쟁과 상관없이 지낼 수는 없었으며,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전쟁에 참여하거나 휩쓸리게 되었다. 그리고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전쟁과 관련된 전투 상황을 파악하거나 각종 소식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정부와 군대가 전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국민에게 전달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읽기
읽기자료 1
국방부 설치와 조직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정부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부 조직 가운데 군대를 운영해나가는 부서를 조직하고, 이를 바탕으로 군대를 세우는, 즉 군대를 창설하는 일이었다. 이에 미 군정청이 발표한 <미 군정법령 제28호>에 따라 1945년 11월 13일 미 군정청 안에 국방사령부(國防司令部)가 조직되었다. 국방사령부는 중앙청(서울 종로구 세종로.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였던 건물을 해방 후에 바꾼 이름)에 위치한 군정청 별관에 두었다
국방사령부 아래에는 군무국(軍務局)과 경무국(警務局)을 두었는데, 군무국은 다시 육군부와 해군부를 두어 군대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고, 경무국은 경찰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 군정은 1946년 3월 29일 <미 군정법령 제64호>를 발표하여 경무국을 분리 독립시키면서 국방사령부를 국방부(國防部)로 바꾸고, 그 아래에 군무국만을 관리하게 하면서 군무국 밑의 육군부와 해군부는 그대로 두었다.
그런데 1946년 5월에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 측은 미 군정이 한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국방부라는 기구를 조직하고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항의하였다. 이에 한국 측에서는 대한제국 때의 군사기구인 통위영을 본떠 1946년 6월 9일 국방부를 통위부(統衛部)로 바꿈과 동시에 군무국을 폐지하였다. 하지만 미 군정청은 국방의 개념을 국내 치안으로 바꾸기로 결정, 6월 15일 <미 군정법령 제86호>를 발표하여 국방부의 이름을 치안 목적의 국내경비부(國內警備府)로 변경하였다. 그럼에도 한국 측에서는 국방의 뜻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그대로 통위부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청사(廳舍: 관청의 사무실로 쓰는 건물)는 서울 중구 남산동 2가(현 퍼시픽호텔 자리)에 두었다.
1948년 5‧10총선거에 따라 국회의원이 선출되고 이어 7월 17일, 법률 제1호인 <정부조직법>에 따라 정부 11개 부서의 하나로 국방부가 설립되었다. 8월 하순에는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에 임시로 사용할 「군사안전에 관한 협정」이 맺어져 우리나라 국군 전체를 지휘하는 권한인 군 통수권이 미군에서 우리 정부로 넘어왔다. 국방부 청사는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현 외환은행 본점,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자리)에 위치해 서쪽을 국방부가, 동쪽을 육군본부가 사용하였다.
국방부는 1949년 6월 30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2가(현 용산우체국 뒷면, 일제강점기 조선군사령부 자리)로 이전했다가 전쟁으로 수도를 부산으로 옮겼을 때에는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2동 수정초등학교로 옮겼다. 1953년 7월 30일 수도를 다시 서울로 옮겼을 때 후암동 청사(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옛 서울지방병무청)로, 다시 1970년 9월 1일 현 국방부 구청사(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 3가 삼각지)로 새로 지어 이사하였다. 그리고 2003년 10월 13일 구청사 뒤쪽에 신청사를 마련하여 국방부와 합참(합동참모본부)이 같이 사용하면서 군정(軍政: 군대에서 이루어지는 행정)과 군령(軍令: 군대에서 내리는 명령)이 한 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2014년 현재, 국방부 조직은 장관 1명과 차관 1명, 5실(기획조정실, 국방정책실, 인사복지실, 전력자원관리실, 군구조‧국방운영개혁추진실), 18관(군사보좌관, 장관정책보좌관, 군구조개혁추진관, 국방운영개혁추진관, 국방교육정책관, …)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국방부 소속 기관으로는 국립묘지 관리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국립서울현충원’, 『국방일보』와 국군방송(국방TV, 국방FM)을 제작하는 등 국방 정책과 군 활동을 홍보하는 일을 담당하는 ‘국방홍보원’, 국방부와 그 소속 기관의 정보화 업무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국방전산정보원’ 등이 있으며, 국방부 아래 바깥 기관으로는 징집‧소집을 비롯한 병무행정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병무청’, 방위력 개선 사업과 군수품 조달 및 방위산업 육성에 관한 사업을 담당하는 ‘방위사업청’ 등이 있다.
- 질문1 국방부의 처음 이름은 ‘국방사령부’였다. 국방사령부가 처음 조직된 때는 몇 년도인지 말해 봅시다.
- 질문2 미 군정이 국방사령부를 ‘국방부’로 바꾸자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 측이 항의하였다. 이에 미 군정은 무엇이라고 변경하였는지 써봅시다.
- 질문3 미 군정은 국방부를 치안 목적의 국내경비부로 변경하였지만, 우리는 국방의 뜻을 살리기 위해 이미 지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 이름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4 현재 국방부 소속기관으로 『국방일보』와 국군방송 등을 통해 국방 홍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은 어떤 기관인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2
국방부 정훈국의 설치와 활동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국방부가 조직되었는데 국방부에는 국방장관과 그를 도와주는 참모총장을 두었으며, 비서실과 제1국(군무국), 제2국(정훈국), 제3국(관리국), 제4국(정보국), 그리고 별도의 항공국으로 편성되었다. 제2국인 정훈국은 장병들의 사상 교육과 정신 무장을 위한 군사 업무를 맡아보았는데, 군인들의 정신전력(精神戰力) 향상을 위한 일반 교육(교양 교육)과 정훈 교육(政訓敎育: 이념 교육) 및 군사 선전, 대외 보도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국방부 정훈국은 대한민국 장병들의 정신 교육은 물론 대북 방송, 심리전, 학도병 모집, 홍보 등의 각종 업무를 맡아보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국방부 정훈국에서는 지프(Jeep) 5대를 동원하여 ‘북한이 남침한 사실’과 함께 휴가를 나간 장병에게 “즉시 자신이 소속된 군대로 돌아올 것”을 알리는 길거리 방송을 하고 다녔다. 이 방송을 들은 장병들은 곧바로 자신의 부대로 돌아가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이런 전쟁 초기 정훈국의 방송‧홍보 활동으로 시민들도 북한군이 남침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6‧25전쟁 기간 국방부 정훈국에는 문예중대를 비롯한 영화과, 방송과, 사진대, 미술대, 촬영대, 기자단, 작가단 등 각종 부서가 마련되었다. 작가나 예술인, 연예인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에 따라 정훈국에 소속되어 글과 신문, 사진, 노래, 춤, 그림, 영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쟁에 참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이바지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피난길에 올랐던 작가 조지훈, 서정주, 김송, 박목월 등은 ‘문총구국대’를 결성하고 정훈국에 소속되어 종군(從軍: 전투 목적 이외의 일로 군대를 따라 같이 다님)활동을 하였다. 육군종군작가단, 해군종군작가단, 종군문인단 등이 만들어져 많은 문인이 총과 칼 대신 붓과 마이크를 잡고 종군하면서 문학의 밤, 문인극, 시국강연, 시화전, 군가 작사 등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구상, 선우휘, 조지훈, 유치환 등은 국군을 따라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생생한 전쟁의 현장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1950년 9‧28 서울 수복과 함께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문예중대가 창설되어 많은 가요인들이 문관으로 종군하였는데, 작곡가 박시춘은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 2소대장으로 전장을 누비며 위문 공연과 ‘제1훈련소가’를 비롯한 많은 군가를 작곡하였으며, 가수 남인수는 정훈국 문예중대 소속으로 군 위문활동에 참여하였다.
만화가 김성환은 1950년 서울 수복 후 국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국방부 정훈국 미술대 소속 문관이 되어 계몽 포스터와 주간만화지 「만화승리」를 제작하였으며, 1951년에는 육군본부 정훈감실의 「육군화보」 편집을 맡기도 하고 공산군의 춘계 공세 때에는 대응 선전물을 만들기도 하였다. 화가 이중섭은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단에 입단(1952)하여 활동하였고, 영화감독 김수용은 대학에 다니던 중 1951년 입대하여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활동하였다. 영화감독 정창화은 대구에서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에 입대하여 전선 뉴스를 찍었으며, 사진작가 임인식은 1950년부터 1952년 육군 대위로 제대할 때까지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으로 종군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작가, 예술인, 연예인이 정훈국에서 활동하였다.
이런 국방부 정훈국에서의 작가, 예술인, 연예인 활동은 6‧25전쟁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시인 김종삼은 국방부 정훈국 방송과 상임연출자로 활동(1955)하였는데, 이처럼 많은 작가나 예술인, 연예인이 국방부 정훈국에서 자신의 전문 분야를 바탕으로 전쟁에 참여하거나 이바지하였다. 최근 영화배우, 탤런트, 개그맨, 가수, MC, 음악 작·편곡자 등 연예인들은 국방부 국방홍보원의 ‘국방홍보지원대’에 소속되어 ‘현역앵커’와 ‘홍보지원대원(홍보병사, 연예병사)’ 등으로 복무하곤 하였다. 그러나 일부 연예병사의 불미스런 일이 계속 이어지면서 군대 이미지 실추는 물론 본래 취지와는 정반대로 일반 장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2013년 국방홍보지원대는 폐지되었다.
문화와 관련된 활동 이외에 국방부 정훈국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장병들의 정신 무장을 강화시키는 교육 활동이다. 정훈(政訓)은 정치 훈련, 즉 이념 무장과 국가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갖추어 정신전력을 강화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다양한 교양 교육 및 올바른 이념 교육을 추진하고, 정훈 교육을 담당할 정훈장교까지 육성하였으며, 1954년 육군정훈학교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1977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모든 장병의 자주국방 의식을 높이는 등의 정신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국군정신전력학교’를 설립(1977.09.05.)하였다. 국군정신전력학교는 1990년 ‘국방정신교육원’으로 이어졌으나, 반공 교육에 너무 치중한다는 비판이 있어 1998년 12월 김대중 정부 당시 군 구조의 개혁 과정에서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2013년 4월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장병 정신력 강화를 통한 무형(無形: 겉으로 보이지 않는) 전력을 극대화하고 통합된 정신 교육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국방정신전력원’이란 이름으로 재창설(2013.12.01.)되었다.
한편, 1950년 2월 정훈국장으로 임명된 이선근(李瑄根) 박사의 노력으로 1950년 7월 초 정훈국 안에 전사계(戰史系)를 두었는데, 이선근 정훈국장은 서울 수복 후인 1950년 10월 ‘전사편찬회’를 조직하여 「한국전란지」를 발간함으로써 혼란기의 기록을 정리하여 전쟁사 연구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1964년 8월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처음 만들어지고 몇 차례 기구 개편을 거듭하면서 현재 국방 기록에 관한 업무는 2000년 9월 1일 만들어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담당하고 있다.
국방부 정훈국은 1964년 11월 16일 여러 종류의 군 간행물을 하나로 통합해 일간신문 『전우』를 창간하였는데, 『전우』는 장병들의 정신 교육 교재로서의 성격을 띠기도 하였다. 『전우』는 1967년 1월 『전우신문』으로, 다시 1990년 3월 『국방일보』로 변경되었는데, 현재 국방부 소속기관인 ‘국방홍보원’에서 발간하고 있다. 『국방일보』는 정부 정책과 국방 정책, 군대 소식을 보도하고 장병 교육 및 대국민 홍보에 이바지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주요 내용은 국방 정책, 논단‧해설, 군사소식, 사회, 문화, 스포츠, 정신 교육, 병영 칼럼, 무기‧전쟁사 등이다. 또 국방부 정훈국에서는 1954년 9월 1일 군방송실 창설하여 국군방송을 시작하였으며, 1974년 2월 「月刊(월간) 정훈」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보급하기도 하였다.
장병들의 정신 교육(정훈 교육)은 물론 대북 방송, 심리전, 학도병 모집, 홍보 등의 각종 업무를 담당하였던 옛 국방부 정훈국에서 하던 일들은 현재 그 담당 업무가 나뉘어 국방부 국방정책실 부서인 ‘국방교육정책관’(교육훈련정책과, 문화정책과, 정신전력과, 인적자원개발과로 구성)과 국방부 소속 기관인 ‘국방홍보원’, 최근 부활한 ‘국방정신전력원’, 국방부 직속의 ‘군사편찬연구소’, 그리고 대통령 직속 기관인 ‘국가정보원’(국정원, 1999년 설립) 등에서 하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예전의 중앙정보부(중정, 1961 ~ 1981)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1981 ~ 1999)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 질문1 1948년 국방부 설립에 따라 조직된 국방부 정훈국은 어떤 일들을 하는 기관이었는지 써봅시다.
- 질문2 6‧25전쟁 당시 가수나 작곡가 연예인들은 대체로 국방부 정훈국 ‘○○중대’에 소속되어 종군하였는지 빈칸에 알맞은 말을 써봅시다.
- 질문3 오늘날 영화배우, 탤런트, 개그맨, 가수, MC, 음악 작·편곡자 등 연예인들은 ‘홍보병사’로 군 복무를 하였다. 보통 ‘연예병사’라고 부르기도 하던 홍보병사의 정식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써봅시다.
- 질문4 현재 국방부 소속기관인 국방홍보원에서 펴내고 있는 『국방일보』는 처음 어떤 이름으로 창간되었는지 써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6‧25전쟁 당시 정봉근이라는 분께 발급된 신분증명서이다.
- 질문1 증명사진의 모습으로 보아 이 분의 신분(또는 직업)은 무엇일지 말해 봅시다.
- 질문2 출생연도가 단기 4266년 1월 20일, 발행연월은 4283년 2월로 쓰여 있다. 서기 2014년은 단기로 4347년이다. 그러면 이 신분증명서가 발급된 해는 몇 년이며, 당시 이 분의 나이는 몇 살인지 써봅시다.
- 질문3 6‧25전쟁 당시 학도의용대(학도병)의 업무를 맡아보던 기관 국방부 어느 부서에서 했는지 이 신분증명서 내용에서 찾아 써봅시다.
시각자료 2

국군정신전력학교 설립 소식을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1977년 4월 8일 자)와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국방부 국군정신전력학교 설립
국방부 장관 직할로…9월초 개교
「자주국방」을 더욱 고취
초급장교 이상 장성급 대상
국방부는 전력증강계획의 일환으로 모든 장병에게 자주국방의식을 고취하는 등 정신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국군정신전력학교를 설치, 오는 9월초 개교할 계획이다. …(중략)… 박정희 대통령은 지난달 육사졸업식 유시를 통해 “전쟁의 승패는 병력의 다과나 장비의 우열보다는 오히려 정신전력에 좌우된 실증이 허다하다”고 정신교육의 강화를 강조했었다.
- 질문1 국군정신전력학교를 세우는 목적을 무엇이라고 밝히고 있는지 말해 봅시다.
- 질문2 국군정신전력학교 설립은 대통령의 지시사항이었다. 당시 대통령은 누구인지 써봅시다.
- 질문3 국군정신전력학교 설립에 관한 기사 내용에 따르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강조하고 있는지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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