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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학학원(白鶴學院 ; 밀양 지역에 민족 교육의 씨를 뿌린 곳)

도입

1921년 영천군 화남면 안천리에 설립된 신교육기관이다. 이 학원의 설립은 면우 곽종석과 회당 장석영의 제자인 창산 조병건이며 창녕조씨 문중과 지역민들이 힘을 보탰다. 그 재원은 퇴계 이황과 그의 제자 황준량을 모신 백학서원의 재산이다.
백학학원은 초등 과정이었는데, 초등 졸업생들을 중등과정에 보내기 위한 예비교육 과정으로 보습과를 병설로 두기도 했다. 1924년 「백학학원생도 모집요강」을 보면, 제1학년 70명과 각 학년 보결생 약간 명, 중등학교 입학준비를 위한 보통학교 4학년 졸업 정도 학생 50명을 보습과에 모집하였다고 적혀있다.
백학학원은 영천 지역 민족교육의 산실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육사, 조재만, 이원대, 이진영 등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북 영천시 화남면 안천리 241 [도로명 주소: 경북 영천시 화남면 한천길 163-10]
현재 상태 훼손 / 집의 구조는 그대로이나 훼손되어 무너지기 직전이다.

일제 강점기 영천 지역에는 모두 24개교의 관립학교가 설립되었다. 일제는 이러한 각종 교육 기관을 통하여 우민화(愚民化)교육과 동시에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 정책을 강행하면서 황국 신민화에 충실한 신민(臣民)을 기르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당시 민간인들에 의해 세워진 사립학교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을 길이 없고 단지 1921년 대창면 직천리에 노정용(盧定容)이 세운 직천학원과 1922년 화남면 안천리 백학서원에 조병건(曺秉健)이 설립한 백학학원(白鶴學院), 그리고 1939년 은해사 백련암(銀海寺 白蓮菴)에 조계종 5개 본산(은해사, 동화사, 기림사, 금용사, 고운사)이 힘을 합해 세운 오산 불교학교(五山佛敎學校)가 고작일 뿐이다. 이마저도 대창면 직천리에 세워진 직천학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관련 자료를 발견하지 못해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또한 오산불교학교는 도첩(度牒: 승려 신분증)을 가진 자에 한하여 입학이 허용된 관계로 일반인들에게 아예 입학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3․1운동 직후인 1920년대에 실제적으로 일반인들이 입학할 수 있었던 사립학교는 백학학원 뿐이었다. 이는 바로 당시 백학학원이 민족 교육의 요람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러기에 민족적 저항 시인 육사 이원록과 항일 독립 투사 백농 조재만 둥이 이 학원에서 배출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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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민족 교육을 위한 학교 설립

3․1독립 운동을 계기로 일본의 교육 방침에도 표면상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은 한국인의 교육 정도를 일본인과 같게 한다는 구호를 내세우게 됨에 따라 많은 학교가 각지에 세워지게 되었다. 당시 인근에 신학문 교육 기관이 없어 대부분 지역 청소년들이 신학문을 접할 수 없게 됨을 늘 안타깝게 여기던 조병건은 백학서원 유생들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문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그리하여 신학문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절대로 일본을 물리칠 수도 조선의 독립도 기약될 수 없다는 신념아래 창녕 조씨 문중과(특히, 조한승은 백학학원 건립에 만 여 평의 전답을 지원하였다) 지역민들의 협조 아래서 백학학원을 개창 하였으니 이것이 영천 지역에서는 민간이 세운 신학문 교육기관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초대 학원장인 조병건은 조선이 개항되던 해인 1876년 화남면 삼창리(현고리)에서 조경승의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곽종석(郭鍾錫), 장석영(晦堂 張錫英)선생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나고 천성이 선행하여 세상 사람들의 사표가 됨으로 인근은 물론 멀리서 몰려든 문하생이 백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백학학원이 개교할 당시에 백학서원 유생 대중들이 극렬히 반대했다는데서 아직도 많은 유생들이 이곳에서 유학을 공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질문1 백학학원이 설립된 배경을 설명해보시오.
  • 질문2 백학학원의 설립자는 누구인가요?
  • 질문3 초대 학원장에 취임한 조병건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말해보시오.
  • 질문4 백학학원이 설립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어려움은 무엇이었나요?

읽기자료 2

백학학원의 교육 이념

1924년 백학학원 학생 모집안내문은 백학학원의 교육이념과 민족의식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사람이외다. 더욱 따뜻하게 입지 못하며 배불리 먹지 못하는 많은 사람 중의 조선 사람이외다. 기왕에 있어 따뜻하게 입지 못한지라 지금부터 잘 입어야 하겠으며, 지나간 날에 줄여온 창자인지라 지금부터 배불리 먹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면적 생활의 불안에서 보다 더욱더 내면생활의 헛 구멍이 있음을 보았나니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어른은 어른답게,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행해야 하는 윤리적인 생활에 이르기까지 허위, 시기, 배신이 자행됨은 그대로의 내면 공동화의 표현이외다. 이 번영한 외면 생활은 세간의 그것에 남을 부려서 시키게 되지마는 진실한 내면적 생활은 모든 세간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내면 생애의 충실로부터 외적 생활에 진전하려는 신조 아래 모름지기 백학학원의 언덕에 돌아와 시온촌(예루살렘 언덕이름, 천국의 뜻)을 건설하려는 이유이외다. 이어 백학학원의 운영을 담당하니 시온촌 생활에 있어서는 선도 악도 그 무엇도 개의치 않는 둥근상의 생애겠지마는 백학학원이야말로 그를 충실하게 하며 착하고 아름답게 하는 곧 바꾸어 말하면 선을 오로지 한 점에 있게 하는 영천의 백학학원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의 학원이 될 것이외다. 이제 학교 건물과 교구의 보완은 앞으로 계획에 의거하여 힘을 다해 준비하려니와 학교 제도의 정비와 강사 증빙으로 오히려 여유 있게 배정되었으며 백학학원의 터전은 이어서 완비 될 것이외다. 이것이 백학학원과 그리고 시온촌 운영의 닻을 감고 돛다는 새로운 출발이외다.”
대정 13년 (1924) 3. 17
학무위원 - 조병렬, 황보도, 정종원, 양주언, 권영호, 박계근, 정진소, 이병호, 이병문, 조계환, 이현순, 권영철, 양하언, 안용락
학원장 - 조병철
강사 - 이명석, 배신환, 서만달, 권정덕, 피인길, 김재소, 이원학


그리고 작은 글씨로 두 개의 문구가 적혀 있다.

“여러분은 웃으리다. 사람이 소나 돼지를 낳았다면, 그러나 먹이고 입히기만 하여 가르치지 아니한 자식을 성현은 무엇이라 일렀습니까?”
“가정은 땅에 퇴비가 된다면 학교는 햇볕과 바람이 되겠습니다. 아무리 기름진 땅에 잘 숙성된 퇴비를 준다 하더라도 햇볕과 바람이 없는 곳에 충실한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 질문1 백학학원의 학생 모집 대상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 질문2 안내문에서 가정과 학교를 각각 무엇에 비유하고 있는가요?

읽기자료 3

학교 운영과 의의

백학학원은 설립 이후 한 때 200여 명의 학생을 수용할 정도로 면민이 일치단결하여 경영하였으나, 1924년경부터 경영이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다. 1924년 3월부터 영천 지역에서 활동하던 사상단체 시온촌(時溫村)의 동인들이 이곳에 들어가서 농사를 경영하면서 학원을 맡아 경영하였다.
시온촌 동인들은 1925년 10월경까지 거의 2년 동안 수많은 곤경을 겪으며 백학학원을 경영하였다. 그러나 흉년으로 말미암아 학생은 60 ~ 70명으로 줄어들고 수업료도 2 ~ 3원에 불과하여 학원 경영이 곤란에 처하게 되었다. 시온촌 동인들은 활동사진순회극단을 조직하고 1925년 10월 15일부터 영천군을 비롯하여 대구, 경주, 청도 등지를 순회공연으로 환영을 받았다. 또 순회공연의 수입금은 학교 유지비로 보충하였는데, 대구에서는 대구노동공제회(大邱勞動共濟會), 용진단(勇進團), 여명사(黎明社) 등과 유지들로부터 많은 의연금을 받기도 하였다.
백학학원의 설립 시기는 명확하나 폐교된 시기는 현재까지 알 만한 근거가 없다. 신학문 교육기관으로 설립되어 백기만, 서만달 등이 교사들이 민족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그 결과 이육사, 조재만, 안병철, 이원대, 이진영, 조병화 등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민족 교육 기관으로 기능을 수행했다.

  • 질문1 면민이 합심하여 운영하던 백학학원을 인계하여 운영하던 단체를 말해보시오.
  • 질문2 시온촌 동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학교 운영비를 마련하였는가요?
  • 질문3 백학학원이 배출한 독립 운동가들의 이름을 말해보시오.

읽기자료 4

백학학원 출신의 이육사와 조재만

백학학원이 항일 운동의 중심지이며 거점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후일 민족적 저항시인 이육사와 항일 독립투사 조재만의 항일은 백학학원의 교육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육사(陸史) 이원록(李原錄)은 1904년 4월 4일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출신으로, 1921년 18세가 되던 해 영천시 화북면 오동리 대지주 안용락의 딸 일양과 결혼하면서 백학학원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백농(白聾)조재만(曺再萬)은 1906년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과 신학문을 접하기 시작하였으며 1921년 대구사립 교남학원(嶠南學院)에 다니다가 백학학원이 설립되자 3학년에 편입하면서 이육사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이육사와 조재만은 당시 백학학원 교사였던 서만달 등으로부터 민족사상교육에 대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23년 이육사는 일본으로 건너가고 조재만은 대구보통공립학교 6학년에 편입하면서 서로 이별하였다.
그러다가 1925년 이육사와 조재만은 대구에서 장진홍, 이정기 등 9 명과 함께 항일독립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로 결심하였다. 드디어 1926년 12월 이육사와 조재만은 중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항일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조재만은 중국으로 건너가기 2개월 전인 1926년 10월 앞으로 활동에 있어 국내 조작과의 긴밀한 연계의 필요성을 느끼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백학학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재경 영천학우회라는 항일투쟁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후일 국내 활동의 거점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 때 백학학원 재학당시 선생이었던 서만달이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한다.
독립군관 학교 설립 기금 마련을 위해 이육사와 조재만은 국내로 잠입하였다. 이들은 조재만이 이미 조직하여 두었던 재경 영천 학우회를 중심으로 군관학교 기금 모금과 조직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7. 10. 18. 장진홍(張鎭弘)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의거가 일어났다. 이들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이육사는 대구에서, 조재만은 서울에서 체포 투옥되었다. 이 때 이육사의 수인 번호가 264, 조재만은 608번이었다. 이육사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출옥 후 1931년 이육사와 조재만은 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다시 북경으로 갔으나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조재만은 귀국하고 이육사는 남경에 남아 조선혁명군관학교(교장 김원봉)에 입학하여 제 1기로 졸업하고 제 2기생을 모집하여 보내라는 공작 임무를 띠고 국내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1933년 신조선지에 처녀작 「황혼」을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35년부터 그는 글과 시를 통해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을 일깨우는 민족적 저항 시인으로서 새로운 항일 운동의 길을 택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민족적 신념은 싸늘한 북경 감옥에서 죽는 그날까지 계속 이어져갔다.
1931년 중국에서 귀국한 조재만은 고향으로 돌아와 깨우치지 못한 지역민에게 신문화 보급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계몽 운동에 주력하였다. 자라나는 2세들에게 선진 과학 문명을 가르쳐야 함을 역설하고 문중과 지역민의 협조를 얻어 중등교육의 불모지인 고향에 백학학원의 민족정신을 계승하고 독립정신을 건학 이념으로 산동학원(현 산동중․영천전자고)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니 이것이 해방이후 설립된 영천 지역 중등 사학의 효시가 되었다.

  • 질문1 안동 출신인 이육사가 영천에 있는 백학학원과 인연을 맺은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조재만이 서울에서 백학학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조직했던 항일투쟁 비밀결사의 이름을 말해보시오.
  • 질문3 백학학원 출신으로 의열단이 세운 조선혁명군관학교의 1기생으로 입학한 학생은 누구인가요?
  • 질문4 현재 영천에 소재하며 백학학원의 건학이념을 계승하고 있는 학교는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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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1925. 10. 23. 동아일보에 보도된 신문기사이다.

  • 질문1 재정난으로 경영이 어려운 백학학원의 회생을 도모하는 모금을 위한 광고문을 작성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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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1920년대 일제 통치 정책의 분위기 속에서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안들을 모둠별로 토론하고 그 결과를 발표해봅시다.
모둠활동 2
백학학원이 배출한 대표적인 인물들인 민족적 저항시인 이육사와 항일 독립투사 조재만과 가상의 인터뷰를 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지를 모둠별로 작성하여 발표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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