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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를 사절함
병든 이 몸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았는데
어찌 알았으리, 달성의 옥에 갇혀 해를 넘길 줄
어머님 돌아가시고 자식도 죽어 집이 망했으매
노처와 자부의 울음소리 꿈결에도 소스라치네
기구한 사방득(謝枋得)은 도피한들 즐거운 곳 어디이며
강개한 문천상(文天祥)은 죽어도 영광을 얻었도다
인간의 운명 하늘에 매였으니
병든 이 몸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노라
병든 이 몸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았는데
어찌 알았으리, 달성의 옥에 신음하고 있을 줄
풍진 세상 실컷 맛보아 이가 시린데
야단법석 떠는 인심이 뼛골까지 오싹하게 하네
포로 신세의 광태(狂態) 어찌 욕되다 이르리오
바른 도리 얻어야 죽음도 영광인 줄 알리라
그대들의 구구한 변호 사양하노니
병든 이 몸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노라
이 시는 1927년 김창숙이 일제에 피체되자 변호사가 변론을 간청하자 변호를 거부하며 지은 시이다.
역사적 배경
| 현재 주소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504 [도로명 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2길 50-4] |
|---|---|
| 현재 상태 | 변형, 건물 구조는 그대로이나 몇 차례 수리하였다. |
김창숙의 본관은 의성이고, 호는 심산(心山)·벽옹(躄翁)이다. 김창숙은 1905년 을사오적을 처형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07년부터 성주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으며, 1908년 11월에는 대한협회 성주지회에 참여하였다. 1910년에는 사립 성명학교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통한 국권수호의 길을 모색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제1차 유림단 의거를 주도하였다. 그 뒤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하였으며,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침체에 빠지자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김창숙은 만주와 몽골의 접경지대에 황무지를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1924년 국내로 들어와 경상도 일원에서 유림을 대상으로 모금 활동을 펼쳤으나 목표로 삼은 금액을 모으지 못했다. 이것이 그가 주도한 2차 유림단 의거이다. 그는 이때 모금한 돈으로 1926년 12월 나석주 의거를 일으켰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일본총영사관 소속 경찰에게 붙잡혀 1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읽기
읽기자료 1
애국 계몽 활동
김창숙은 1879년 경북 성주에서 출생하였다. 27세까지 한주 이진상 문하의 유학자들에게 유학을 배우고 부친의 교육을 받으면서 유학자로서의 자기 인식을 갖추어 갔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김창숙을 비롯한 일부 유림들은 국권 회복을 위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김창숙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스승인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고종에게 올렸다. 1908년에는 대한협회 성주지회를 조직하여 계급과 신분, 구습의 타파를 주장하면서 혁신적 사고로 국권 회복을 꾀하였으며, 이로 인해 다른 유생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1909년 일진회가 한일합방론을 주창할 때에 “역적을 치지 않는 사람 또한 역적이다.”라는 격문을 돌리고 동지를 규합하여 중추원과 일간신문에 성토문을 보냈다. 이 사건으로 성주 헌병분견소에서 8개월간 갇히기도 하였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으로 모금된 단연금(斷烟金)을 기반으로 청천서당에 사립 성명학교를 세워 근대적 교육 체계로 무장한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김창숙은 국권피탈 뒤 “선비로서 세상에 산다는 것은 치욕이다.”라며 깊은 좌절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유교적 인생관과 근대 문명론 사이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후 김창숙의 독립운동에 중요한 소양이 된 학문적 축적과 한문 문장의 창달은 모두 이 시기에 기반을 닦은 것이다.
- 질문1 김창숙이 대한협회 성주지회를 조직하여 활동한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2 김창숙이 을사늑약과 국권피탈을 당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 활동했던 일들을 순서대로 써봅시다.
읽기자료 2
파리 장서 사건
김창숙은 ‘척사위정(斥邪衛正)’에 입각한 의병전쟁에는 참여하지 않고 외교론적 측면에서 국제적 역학관계를 이용하여 독립주권의 회복과 보장을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김창숙은 일제강점기 국내 최대의 민족 운동이었던 3․1운동을 겪으면서 자신의 독립운동 방법을 실천해 나갔다. 그는 일제가 친일 유림을 동원하여 조작한 ‘독립불원서 사건’과 ‘3․1 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가 빠졌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하였다. 하지만 김창숙은 3․1독립선언이 민심을 고무시켜 국내적으로 큰 전기를 마련했으니 이제 필요한 것은 국제적 활동이라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각 종교 대표자들은 곧 구속될 것이니 불행 중 다행으로 남아있는 유림 대표가 국제 활동의 사명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김창숙은 전국 유림을 규합하여 파리평화회의에 장서를 제출할 것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반 보수적 유생들의 지역·학통·사색당파·사고의 차이 때문에 단합을 쉽게 이루어 낼 수 없었다. 결국 영남과 충청도 유림 130여명의 연명으로 된 장서를 작성하여 극비리에 상하이로 향하였고, 상하이에서 독립청원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파리에 가 있는 김규식에게 보내 제출하게 하였다. 또한 장서를 수천 부 인쇄하여 중국의 정계와 언론계, 외국의 대사관, 그리고 해외 각처 교포들의 거류지와 국내 각 지방 향교에 빠짐없이 우송하였다. 이에 500여명의 유림이 일제에 의해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제1차 유림단 사건’이다. 김창숙에 의해 주도된 제1차 유림단 사건은 유림이 독립운동에서 소극적 참여를 벗어나 국내 민족운동을 바탕으로 민족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컸다.
- 질문1 김창숙이 의병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김창숙은 제 1차 유림단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3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중국에서의 활동
김창숙은 상하이 망명 초기 경상북도를 대표하여 임시의정원에 관계하는 등 민주공화정의 국가 체제를 선포한 임정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실이 공개되자 신채호·박은식과 더불어 이승만과 그를 비호하는 임정 각료와 의정원을 비판하였다. 그에게 이승만의 행동은 반민족 행위였으며 유교적 가치관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그는 1923년 임시 정부의 방향 모색을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에 동의하고 임시 정부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갖게 되었다.
김창숙은 언론을 통한 한인 독립운동의 선전활동에도 주력하였다. 그는 1920년 박은식과 함께 『사민일보』를 창간하여 운영하였으며, 신채호, 박승병 등과 함께 『천고』의 간행에 참여하였다.
그는 유교라는 학문적 교양과 유림이라는 배경 아래 대중국 외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중국의 정치 지도자인 쑨원 등과 교류하면서 한국독립후원회, 중한호조회 등의 결성과 한국 유학생의 학자금을 조성하였다. 김창숙은 이와 같이 동양 평화를 위해 한․중의 혁명 세력이 단결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자 선전․섭외 활동에 노력을 기울였다.
- 질문1 김창숙이 이승만을 비판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2 김창숙이 중국에서 벌였던 언론 활동을 써봅시다.
- 질문3 김창숙이 전개한 대중국 외교 활동의 성과에는 무엇이 있나요?
읽기자료 4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금
1921년을 고비로 국내외의 독립운동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국제적 여건이 불리하게 전개되고, 우리 독립운동 진영 내부의 분열과 대립도 점차 심해졌다. 김창숙은 1925년 봄, 베이징에서 이회영과 일본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여 일제와 싸우기로 하였다. 만주와 몽골 접경 지역에 황무지를 얻어내는데 성공한 김창숙은 국내로 잠입하여 1925년 8월부터 1926년 3월까지 약 8개월에 걸쳐 유림과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계획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심지어 진주의 어느 부호는 김창숙에게 조선총독부에 협조를 권유하기도 하였다. 이에 김창숙은 “친일 부호들의 머리를 베어 독립문에 달지 않고는 우리의 독립이 달성되지 않을 것”이라고 분노하였다. 그 즈음 일제가 감시망을 좁혀오자 출국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김창숙의 국내 잠입 모금 활동 사실이 탄로되었고 이 일로 6백여 명의 유림이 체포되었다. 이것이 소위 ‘제2차 유림단 사건’이다.
- 질문1 1925년 김창숙이 국내에 잠입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김창숙이 벌였던 군자금 모금 활동이 지지부진했던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3 제2차 유림단 사건의 내용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5
김창숙과 나석주 의거
국내에서의 군자금 모금활동이 실패하자 독립운동기지 건설도 수포로 돌아갔다. 상하이로 돌아온 김창숙은 일제 식민기관의 파괴라는 의열 투쟁으로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1926년에 전개된 나석주 의거는 김창숙의 자금 지원으로 거행된 대표적인 의열 투쟁이었다. 나석주는 국내에 잠입하여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뒤 다시 권총으로 동척 사원 및 경찰 간부 등 일본인 여러 명을 쏘아 죽이고, 추격하는 일본 경찰과 교전 중 마지막 수단으로 자결하였다. 나석주의 장렬한 행동은 국내외의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충격과 함께 새로운 용기를 일으켜 주었다.
나석주 의거에 이르러 김창숙의 독립운동의 방향은 폭력․파괴․살해 등 적극적 투쟁을 통해 민중의 직접 혁명을 목표로 하는 의열단 활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김창숙은 임정 중심의 소극적인 독립 노선에 실망하여 그 대안으로 전개한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금 활동 실패, 제2차 유림단 사건을 통한 국내 기반의 상실, 그리고 신채호, 김원봉 등 혁명적 무장투쟁론자와의 교류를 통한 실천적 투쟁 정신의 고양 등을 계기로 직접적 의열 투쟁에 나서게 된 것이었다.
- 질문1 1926년 나석주 의거에서 김창숙의 역할을 말해봅시다.
- 질문2 나석주 의거가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 질문3 김창숙이 의열 투쟁에 뛰어든 이유를 글로 써봅시다.
읽기자료 6
끊임없는 투쟁
김창숙은 일제의 집요한 추적으로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이송되었다. 그는 옥중 투쟁을 통해 불구의 몸이 되면서도 일제의 회유와 협박을 이겨내고 불굴의 항일 의지를 과시하였다. 그는 ‘포로’로 자임하면서 변호인단의 변호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간수나 형무소장에게 결코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어 나온 이후에도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독립운동의 기상을 꺾지 않았다. 또한 일제 말기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불구의 몸으로 광복을 대비하여 여운형 등이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67세의 고령으로 광복을 맞이한 김창숙은 활발한 정치 활동을 벌였다. 해방 공간에서는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임시 정부 추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승만 정부의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치와 장기 집권 음모에 반대하는 반독재 투쟁 전선에 나섰다.
아울러 그는 광복 후 친일 유림의 척결과 건국 사업에 이바지하기 위해 유도회를 결성하였으며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질문1 출옥 이후 광복 때까지 김창숙의 활동 내용을 순서대로 써봅시다.
- 질문2 광복 이후 김창숙의 정치 활동 내용을 써봅시다.
- 질문3 광복 후 김창숙의 정치 활동의 최종 목표는 무엇이었을지 말해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장충단 공원에 세워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이다.
- 질문1 파리 장서 사건의 내용을 써봅시다.
- 질문2 파리 장서 사건에서 김창숙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말해봅시다.
시각자료 2
김창숙 공판 관련 1928년 4월 8일 『동아일보』 기사이다.
- 질문1 위의 신문기사를 보고 김창숙이 어떤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말해봅시다.
시각자료 3
아래 사진은 김구(왼쪽)와 김창숙(오른쪽)의 모습이다.
- 질문1 두 인물의 삶에서 공통점을 찾아 써봅시다.
시각자료 4
1962년 3월 1일에 찍은 김창숙의 가족사진이다.
- 질문1 김창숙의 복장으로 보아 무엇을 기념하기 위한 사진일까요?
모둠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