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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 - 이상룡 생가(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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去國呤
山河寶藏三千里
冠帶儒風五百秋
何物文明媒老敵
無端魂夢擲全甌
己看大地張羅網
焉有英男愛髑髏
好佳鄕園休悵惘
昇平他日後歸留
더없이 소중한 삼천리 우리 산하여
오백년 동안 예의를 지켜왔네
문명이 무엇이기에 늙은 원수 불렀나
까닭 없이 꿈결에 온전한 나라 버리네
이 땅에 그물이 쳐진 것을 보았으니
어찌 남아가 제 한 몸 아끼랴
고향 동산에 잘 머물며 슬퍼하지 말지어라
태평성세 훗날에 다시 돌아와 머물지니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이듬해인 1911년 1월 초, 이상룡(李相龍, 1858 ~ 1932)이 독립운동을 위해 가족을 이끌고 중국 만주로 망명가면서 쓴 ‘거국령(去國呤)’이다. 이상룡은 만주로 망명하여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서로군정서 등을 이끌며, 서간도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國務嶺; 지금의 국가 원수)에 올라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이상룡의 고향은 경상북도 안동이다. 안동은 ‘한국정신문화의 수도’이자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할 정도로 유교문화를 비롯한 전통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339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온 것과 함께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나온 지역이다.
안동시 안동역(驛)에서 안동호(湖) 방향으로 오르다보면 오른쪽에 낙동강이 흐르는 가운데 법흥교(法興橋)와 이어진 법흥동 육거리에 다다른다. 이곳을 조금 지나 왼쪽 철길 따라 가리개로 길게 가려진 뒤편에 여러 채로 지어진 한옥이 보이는데, 이 한옥이 임청각(臨淸閣)이다. 근처에 국보 제16호인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옛 안동 신세동 칠층 전탑)있으며, 또 임청각에서 분파한 고성 이씨 탑동파 종가집이 있어 여행 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임청각은 이상룡 선생과 그 후손들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1911년 고향 산천을 떠났던 이상룡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32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후손들은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옮기지 말라”는 선생의 뜻을 받들어 광복을 맞을 때까지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며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끈질기게 항일운동을 펼쳤다. 이에 그의 유해는 오랜 동안 돌아오지 않다가 고국을 떠난 지 79년(광복된 지 45년)만인 1990년 9월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모셔졌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으며, 그의 후손 가운데 많은 분들에게도 건국훈장 애족장․독립장 등이 수여되었다.
또한 임청각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5월 25일에는 이상룡과 그 후손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임청각을 현충시설로 지정하여 그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 20
현재 상태 변형 / 안채와 사랑채는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나, 일제강점기 중앙선 철로가 놓이면서 대문과 행랑채 일부가 없어졌다.

경상북도 안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 발상지(1894년 안동 의병을 독립운동의 최초 역사로 기록됨)라고 할 정도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 국민회의 의장인 일송 김동삼 선생, 저항시인 이육사 등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는 물론 339명의 독립유공자(대구 128명, 서울 308명)가 나온 지역이다.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분 이외에도 독립운동가가 690명이나 된다는 사실은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볼 때, 안동은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할 만한 곳이다.
이 같은 안동의 독립운동 정신을 소중히 여겨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옛 협동학교(1907년 설립된 근대식 중등교육기관) 자리에 국가지원을 받아 2007년 ‘안동독립운동기념관(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하여 기념하고 있다.
19세기 후반, 서양 세력이 우리나라 가까이 나타나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는 가운데 조선 침략을 꾀하던 일본에 의해 1876년 조․일조호조규(강화도조약)가 강제로 맺어지면서 우리는 개항을 하게 되었다. 이후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개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개화파가 등장하였으며, 조선에 교육을 비롯한 각종 근대 시설이 보급되었다.
한편, 일본은 침략의 야욕을 더욱더 드러내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을사늑약),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차례로 맺어가면서 조선(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였다.
이에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 등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독립협회와 보안회(일본의 황무지 개간을 반대한 항일운동단체), 신민회 등 많은 애국단체나 계몽단체들이 활동하였다. 또한 해외에서도 민족학교를 세우고, 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등 다양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경상북도 지역에서의 의병항쟁은 1894년 안동 갑오의병을 시작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공포되자 유림(儒林)들에 의한 의병항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안동을 비롯한 각 지역에서 의진[義陣: 구한말 일제 침략에 맞서 의병들이 일어나 조직한 진영(陣營). 의병진(義兵陣)이라고도 한다]이 꾸려지고, 연합의진이 꾸려져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경상북도 지역에서의 후기 의병항쟁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활발하게 펼쳐졌다. 이 시기 경북지역의 의병항쟁은 전기 의병과는 달리 개인 의병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신돌석은 1906년 3월부터 1908년 11월까지 일월산과 동해안 일대를 주 무대로 활약하였고, 이강년은 경북․충북․강원도의 접경지대와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경상북도 지역은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유림의 활동이 강했던 지역인 만큼 계몽운동 또한 유림들이 주도하였다. 그리고 일부의 위정척사 유림이 신교육을 수용하고 계몽운동으로 전환했다는 것이 경북지역 계몽운동의 큰 특징이기도 한데, 이상룡, 류인식, 김동삼, 허위, 이승희, 김창숙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주요 교육기관으로는 협동학교, 백학학원 등이 있다.
경북지역의 민족주의운동은 1910년대 비밀결사운동과 1920년대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운동 등이 있다. 1910년에 들어와 일제에게 완전히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국내에서는 대부분 비밀결사의 형태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경상북도 지역에서의 3․1만세운동은 3월 8일 대구에서 시작하여 5월 7일 청도군 매전면 구촌동시위까지 두 달 동안 계속되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은 1919년 3․1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을 계기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920년에 들어와 지역마다 청년단체를 비롯한 각 단체들이 조직되었고, 이들에 의한 사회운동이 활발해졌다. 청년회와 신간회, 근우회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에 들어 사회주의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경상북도 지역에서도 사회주의운동이 확산되었는데, 1930년대 들어와서는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으로 전환하였다.
한편 경상북도 지역 출신들은 해외에서도 줄기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고령의 김상덕, 성주의 이승희, 영천의 이원대․이진영, 상주의 권준, 구미의 박희광, 안동의 김동삼․김만수․김원식․이상룡, 문경의 박열․천세헌, 영양의 남자현․엄순봉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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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이상룡의 항일무장투쟁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은 1858년 경북 안동에서 이승목(李承穆)과 부인 권씨 사이의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영남학계의 거유인 서산 김흥락(金興洛)에게 공부하며 이름 있는 가문의 후손이자 정통 유학자로서 손색없는 학문적 수업을 닦았다. 당시 제국주의 열강은 조선에 서서히 침략의 촉수를 뻗쳐오고 있었으나, 임청각의 서재에 묻혀 지내던 청년 이상룡은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95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와 단발령 공표(을미개혁)에 항거하여 외숙인 권세연(權世淵)이 1896년 의병을 일으키자 청년 이상룡도 이에 참여하여, 행동하는 위정척사 유림의 전형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 항일독립운동에 발을 내딛었다.
이상룡의 현실에 대한 자각과 현실 참여는 1905년 을사늑약을 맞아 1만5천금을 투자하여 가야산에 군사기지를 설립하고자 하는 계획으로 계속되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후 이상룡은 무기의 열세, 근대적 군사훈련의 부족 등으로 인한 의병의 한계를 깨달으며 구국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이상룡은 인근 지역의 유인식, 김동삼 등 혁신적 성향의 유림들과 함께 1907년 협동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09년에는 애국계몽단체인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를 만들어 애국강연, 회보발간 등을 통한 자강운동에 뛰어들었다. 또한 대한협회 중앙본부가 점차 친일적 성향으로 기울자 본부에 통렬한 비판을 하면서 구국계몽운동이 갖는 본래적 모습을 지키고자 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맺어질 무렵 국내 최대의 항일비밀조직인 신민회(新民會, 1907)에서는 나라가 망한 사태를 맞아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해 해외에 독립군 기지를 세울 것을 추진하고 있었다. 주진수와 황만영을 통해 이 계획을 전해들은 이상룡은 이에 찬동, 서둘러 재산을 정리하여 문중 사람들 50여 가구를 이끌고 1911년 1월 중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이미 50살이 넘은 나이에 고향을 버리고 해외로 나간 산다는 것은, 그것도 독립운동 위해 해외로 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柳河縣 三源堡, 서간도)에 도착은 이상룡은 이회영, 이시영 등과 더불어 그곳에 새로운 생활의 터전이자 해외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되는 독립군 기지 개척을 시작하였다. 우선 동지들과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사장을 맡아 벼농사를 보급하는 등 이주기반을 마련하였다 경학사는 단순히 이주민의 자치단체만은 아니었다. 이주민이 경제적 안정과 법적 지위 보장 등에 힘쓰는 한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세우고 군사교육을 통해 조국광복의 전위대(前衛隊)를 담당할 독립군을 기르고자 하였다. 경학사는 거듭된 흉작과 토착민들의 반발 등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민단(扶民團, 1912)과 한족회(韓族會, 1919)로 변천하며 한인사회의 토착화를 이루어 갔다. 그리고 신흥강습소도 신흥학교(신흥중학교, 1913),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1919)로 발전하며 군사교육기관으로서 수많은 독립군 장병들을 길러냈다.
3․1독립만세운동의 함성이 전 세계의 잠자는 양심을 두드리던 1919년, 한족회는 군사기구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였다. 이상룡은 군정서 독판(督辦)을 맡아 본격적인 무장항일투쟁에 앞장섰으며, 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이 이끄는 서로군정서는 일본 경찰서나 친일단체 및 친일파를 공격하고, 국내진공작전을 시도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나아가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의 한계를 알고 있었던 이상룡은 무장력을 갖춘 항일조직 결집에 총력을 기울였다. 1920년 초 베이징[북경(北京)]에서 조직된 군사통일촉성회에 참가하여 박용만, 신숙 등과 군사기구 통합의 방안을 협의하였으며 1923년에는 각 지역의 독립운동단체 대표 약 120명이 모여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한 국민대표회의에 김동삼 등 4명을 대표로 파견하여 각 독립운동 계열의 의견 조정과 단합을 위해 힘썼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기대와는 달리 임시정부에 대한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자, 국외 중립을 선언하고 대표들을 소환하여 독립운동계의 분열을 막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또한 선생은 국외독립운동의 요람이라 할 중국 동삼성 지역의 군사 통합에도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1922년 6월 동삼성 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시도하여 각기 개성이 다른 독립군 조직을 묶어 통군부(統軍部)를 조직하였다. 또 이를 다시 확대 개편하여 대한독립군단 등 이른바 8단(團) 9회(會)의 총 17개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의 궁극적 전위대인 독립군의 군세 확장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이처럼 이성룡은 당시 다양했던 외교론, 준비론, 실력양성론보다는 일관되게 산업교육 우선론과 독립전쟁론을 주장하였다. 조국광복운동은 결국 일제 무력과의 싸움이었고, 이를 위해 이상룡은 독립군 조직, 즉 무장력을 갖춘 항일조직의 결집에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룡은 이미 의병운동과 계몽활동을 통해 두 가지 독립운동 방안의 장단점을 터득하고 있었다. 즉 의병운동의 한계였던 근대적 군사력의 부족과 계몽운동의 한계인 힘의 부족을 절실하게 알고 있었으며, 이 두 가지의 통합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스스로 그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한편,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3년 소집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로 분립된 이후 자체 정비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결국 1925년 임시의정원은 미국의 위임통치안을 제안한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임시대통령에 박은식을 선임하였다. 박은식은 임시정부 지도체제를 대통령 중심에서 내각책임제에 해당하는 국무령제로 바꾸었으며 임시의정원에서는 당시 만주지역 독립운동 세력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상룡을 초대 국무령에 선출하였다. 이상룡은 이 소식을 듣고 임시정부를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곧추세우고 분열된 독립운동계에 활력과 연대감을 불어넣으려는 생각으로 1925년 임시정부 국무령을 맡았다. 이상룡은 우선 일본군과의 접전 속에서 항일운동의 전위에 위치하고 있던 중국 동삼성 지역의 김좌진, 김동삼, 오동진 등을 국무위원에 임명하여 임정이 다시금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기를 바랬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결국 뜻과 같이 이룩되지는 못하였다. 상하이와 간도(間島: 백두산 북쪽의 만주 지역 일대)는 각기 처한 독립운동의 상황이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이상룡은 임시정부 국무령직을 1926년 사임하고 간도로 돌아와 1928년 5월부터 전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해 만주 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 조직인 삼부(三府) 통합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국민부(國民府)로의 부분적인 통합을 이룬 채 1932년 5월 12일 중국 길림성(吉林省) 서란현(舒蘭縣)에서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75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후손들은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옮기지 말라”는 그의 뜻을 받들어 광복을 맞을 때까지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며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끈질기게 항일운동을 펼쳤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마지막까지 독립운동단체를 통합시키는 일에 온 힘을 쏟았던 선생의 유해는, 그의 유해는 광복된 지 45년 만인 1990년 9월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묘지인 대전 현충원에 모셔졌다. 현재는 국립 서울 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모셔져 있다.

  • 질문1 청년 이상룡이 항일독립운동에 발을 내딛은 것은 1896년 의병에 참여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때 의병이 일어난 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써봅시다.
  • 질문2 이상룡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1911년 세운 학교 이름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3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의 한계를 이미 경험한 이상룡이 주장한 독립운동 방식은 어떤 것이었는지 대답해 봅시다.

읽기자료 2

이상룡과 임청각

경상북도 안동 임청각은 이상룡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또한 그의 동생 이상동(李相東)과 이봉희(李鳳羲), 아들 이준형(李濬衡), 손자 이병화(李炳華), 조카 이형국(李衡國)과 이운형(李運衡), 이광민(李光民),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승목(李承穆)의 사촌 형제인 종숙 이승화(李承和) 등이 태어난 곳이 임청각이기도 하다.
원래 임청각은 조선시대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지낸 바 있는 이명이 1515년(중종 10)에 지은 집으로, 영남산(映南山) 동쪽 기슭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임청각은 중앙선 철도부설 때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되어 현재의 규모로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길에서 보면 철로 옆에 세워놓은 가리개인 맞담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모습의 한옥이 소위 말하는 99칸 집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성 이씨의 17대 종손 이상룡은 1911년 고향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대저택인 이곳은 팔아 돈을 마련하였는데, 당시 이상룡은 안동 명문가의 종손이라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임청각을 처분한 이후 후손들의 가세는 급격히 추락했다. 일제강점기엔 말도 못할 탄압을 받았으며, 광복 이후엔 "빨갱이"로 몰려 이승만 정부의 핍박을 받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종가 사람들이 학교 월사금을 내지 못해 거리로 내몰리는가 하면 일부 후손들이 고아원으로 가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상룡을 포함해 그 못지않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그의 후손들도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어 이상룡에게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으며, 이상동․이봉희․이준형․이병화․이형국․이운형․이광민․이승화에게도 건국훈장 독립장․애족장․애국장 등이 수여되었다. 이렇게 임청각은 한 가문에서 9명이나 되는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곳이 되었다.
광복 후 가문 사람들이 조끔씩 돈을 모아 임청각을 다시 찾기도 하였지만, 대저택을 관리할 힘이 부족하자 후손들은 2002년 임청각을 비롯한 주변 일대를 국가에 헌납, 임청각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하고 이를 국가에서 관리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이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률상 등기자와 헌납자가 같아야 헌납이 성립하는데, 임청각 등기가 다른 사람 이름으로 돼 있기 때문이었다. 이상룡 가족이 중국에 망명하고 있는 동안 1920년대부터 국내에 등기제도가 도입되면서 임시방편으로 집안 원로 네 명의 이름으로 임청각의 등기가 이루어졌다. 이상룡은 물론 그가 사망한 뒤 귀국한 아들과 손자도 일제 치하의 호적을 거부하였다(이상룡은 국적마저 없다). 심지어 이상룡의 아들 이준형은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수치만 더할 뿐”이라며 자결하였고, 이때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한 아들 이병화가 장례를 치른 후 형무소에 수감되면서 호적이 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결국 한국전쟁 중에 이병화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의 자손들은 고아원에서 자라야 했으며, 99칸 집을 두고도 수십 번 이사를 다녀야 했다. "집안에서 독립투사 한 명을 내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은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임청각이라는 이름은 도연명의 사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내 가에서 시를 읊는다(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라는 시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특히 임청각의 별당으로 사용된 군자정(君子亭)은 "丁"자 모양의 평면 누각형 건물로,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내부는 4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둘레에는 툇마루를 돌려서 난간을 세웠으며, 출입은 두 군데에 마련해 놓은 돌층계를 이용하게 되어 있다. 이곳 군자정에는 이상룡 선생님이 쓴 "거국령(去國呤)" 현판 등이 걸려있다.
현재가지도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인 임청각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5월 25일에는 이상룡과 그 후손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임청각을 현충시설(顯忠施設: 국가를 위해 공을 세우거나 희생하신 분들의 공훈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시설)로 지정하여 그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한편으로 가진 자가 모범을 보이는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본보기를 이상룡과 그 후손들이 임청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 질문1 이상룡 집안 한 가문에서 독립유공자가 몇 명이나 나왔는지 써봅시다.
  • 질문2 이상룡의 후손이 임청각을 국가에 헌납하고자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대답해 봅시다.
  • 질문3 임청각(臨淸閣)의 "臨淸"이란 말은 어디에서 따온 것인지 대답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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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그림L11-4] 석주 이상룡 거국음

안동 임청각(臨淸閣) 군자정(君子亭)에 걸려있는 현판의 하나이다.

  • 질문1 제목이 ‘去國呤’라고고 쓰여 있다. 우리말로 어떻게 읽는지 써봅시다.
  • 질문2 이 글을 쓴 이는 누구라고 쓰여 있는지 찾아 써봅시다.
  • 질문3 이 글을 해석하면, “더없이 소중한 삼천리 우리 산하여
    오백년 동안 예의를 지켜왔네
    문명이 무엇이기에 늙은 원수 불렀나
    까닭 없이 꿈결에 온전한 나라 버리네
    이 땅에 그물이 쳐진 것을 보았으니
    어찌 남아가 제 한 몸 아끼랴
    고향 동산에 잘 머물며 슬퍼하지 말지어라
    태평성세 훗날에 다시 돌아와 머물지니”이 된다. 어떤 내용인지 설명해 봅시다.

시각자료 2

석주 선생 기념비

대구광역시 달성공원에 세워져 있는 비석이다.

  • 질문1 비석 앞면에 큰 글씨로 ‘李相龍救國記念碑’라고 쓰여 있다. 우리말로 읽고 써봅시다.
  • 질문2 비석 앞면 위쪽에는 ‘石洲先生’이라고 쓰여 있다. ‘석주선생’으로 읽는데, 여기에서 석주는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대답해 봅시다.

시각자료 3

임청각 전경

안동 임청각 별채로 사용하던 정자 모습이다.

  • 질문1 이 건물에는 ‘君子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건물의 이름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2 이 건물은 정면 3칸 옆면 2칸, 총 6칸 건물이다. 건물 형태로 보아 이 건물은 어떤 모양(一자, 丁자, ㄴ자. ㄷ자,ㅁ자 등)을 하고 있을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3 이 정도의 정자를 만들어 사용한 집안이라면 꽤 잘 나가던 집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잘 사는 집안이라도 조선시대에는 왕족이 아닌 평민은 총 100칸 이상의 집을 짓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면 왕족이 아닌 평민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집으로는 총 몇 칸 집이었을지 대답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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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우리나라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신 분으로 독립운동가 이회영(李會榮, 1867 ~ 1932)과 이상룡(李相龍, 1858 ~ 1932) 선생을 손꼽곤 한다. Noblesse Oblige의 뜻을 자세히 알아본 후, 이회영과 이상룡의 생애를 조사하면서 이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사례를 정리하여 부모님께 설명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방법으로는 크게 무장투쟁론, 준비론(애국계몽운동, 실력양성론, 자강운동), 외교론 등으로 나눠볼 수 있으며, 또 민족주의운동, 통일전선운동(민족협동전선운동, 민족유일당운동), 사회주의운동으로 구별해 볼 수도 있다. 이들 독립운동 방법의 장단점이나 특징에 대해 조사․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임청각 홈페이지를 방문하거나 인동 임청각을 직접 방문하여 보고 들은 것들이 사진과 함께 정리하여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 등의 SNS를 통해 임청각을 소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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