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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도 집 - 향산고택(국권피탈에 단식으로 항거한 순국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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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권신들이 권력을 다투느라 다른 나라 사람을 끼고 나라에 화를 불러온 것은 이미 30년 전에 그 기미가 보였는데도, 당시 저는 신하로서 한 번도 싸우지 않았으니, 이것이 신의 죄입니다. 을사년에 변란이 일어났을 때 신은 병상에 누워 있어서 대궐 계단에 머리를 부수며 을사오적과 이 일을 바로 잡기 위해 죽기로 다투지 못했으니, 이것이 신의 죄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지위와 칭호를 잃었는데도 신은 홀로 편안히 즐기고 있으니, 이것이 신의 죄입니다.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던 신하로서 원수의 백성 되는 것을 기꺼이 하고 무지몽매하게 부끄러움을 모르니, 이것이 신의 죄입니다. 신에게 이 네 가지 죄가 있어 천지간에 용납되지 않는 바 이에 이 날부터 먹지 않고 목숨을 다하는 것이 만분의 일이라도 성은에 보답하는 것 입니다.”
- 단식에 즈음하여 황제에게 올린 유소(遺疏) -


눈을 들어 바라보니 산하가 달라졌네.
언제나 임 앞에 나아갈까 하늘 우러러 호소하네.
아, 부끄럽구나. 필부의 이 모습
티끌만큼의 작은 보답도 이룰 길이 막혔네.
가슴 속에 아픈 피 끓어서 자자지니
이제는 이 마음 허허로이 밝아진다.
다음날 날개 펴서
하늘나라 날으리라.
- 절명시 -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안막동 119 [도로명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퇴계로 297-6]
현재 상태 원형보존, 원래의 위치에서 1976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나 옛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이만도는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 하계리에서 퇴계 이황의 후예로 태어났다. 1866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典籍)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875년에 지평․병조정랑이 되었으며, 1876년 집의가 되었다. 이 때 일본과의 수호조약 체결을 반대하여 격렬한 상소를 올린 최익현을 변호하다가 파직되었다. 다시 양산군수로 복직되었을 때에 양산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자 구휼미를 방출하고 조세를 감면했으며 가렴주구가 심한 관찰사를 면박하여 사과를 받았다. 1882년에 공조참의에 임명되고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하고 고향에 내려가 학문에 몰두하였다.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만행이 자행되자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부장(副將)에 아들인 이중린을 임명하여 안동의 의병대장 권세연과 연합해서 항일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에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자, 통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만행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조약에 찬동한 을사 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여 마침내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자 이 소식을 듣고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으로써 항거하기로 하고 유서를 지어놓고 단식을 시작해서 24일 만에 절명하여 순국하였다. 해방 후 정부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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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퇴계의 11대손으로 출생

이만도는 본관이 진성(眞城)이다. 퇴계의 11대 손으로 조선 유학의 최고봉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른바 3대 문과 집안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만도의 가계는 조부 때부터 시작된다. 할아버지 이가순은 순조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응교에 올랐고, 생부 이몽용도 철종 7년(1856)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에 오른 명망 높은 관인(官人)이었다. 이만도도 문과에 장원 급제를 하고 동생까지도 문과에 급제하여 가문의 전통을 이었다.
이만도는 헌종 8년(1842년)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에서 아버지 이몽용과 어머니 송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부가 세상을 피할 뜻을 가지고 정착한 이래로 이곳에 터전을 잡았던 것이다
이만도는 어려서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장하였다. 이만도가 태어난 다음해에 양아버지이자 작은 아버지가 요절하고,그 이듬해에 조부가 타계하자 일시적으로 집안이 곤궁해졌다. 그래서 11살 되던 해에 춘양현 도심촌으로 이사하였고,14살 때는 생활의 방편을 마련하기 위해 원래의 고향인 예안으로 돌아왔다.
이만도의 일생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은 1856년 생부(生父)의 과거 급제였다. 아버지의 등과 이후 이만도는 과거 공부에 신명을 바치며 집안일도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이만도는 1859년 18세 때 혼인 했다. 부인은 당대 최고의 양반가로 칭송 되던 봉화 닭실 마을의 안동 권씨로,장인 권승하는 동생 권연하와 함께 이름 높은 학자였으며 아버지와는 오랜 친구이기도 하였다. 이만도는 부친의 명으로 혼인 이듬해부터 1866년 관직에 나아갈 때까지 처가를 출입하며 장인 형제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 질문1 이만도는 누구의 자손인가요?
  • 질문2 이만도가 14세에 고향인 예안으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이만도가 혼인한 집안은 어디인가요?

읽기자료 2

관직 생활

이만도가 가장 열정적으로 관직생활을 한 시기는 1866년 과거에 급제한 이후부터 1876년 개항 이전까지 10여 년간이었다. 이만도는 1873년 11월에 대원군을 탄핵한 면암 최익현의 상소를 비판하다가 일시 면직되었다. 최익현은 그해 10월 올린 상소에서 대원군 정책을 정면으로 공격하면서 대신들은 의견을 내지 않고 인심은 연약해지고 인륜조차 무너졌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상소에 대해 이만도는 연명으로 최익현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친정(親政)을 도모하던 고종은 최익현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호조참판으로 승진시켰으며,최익현을 규탄하던 유생과 고관들을 처벌하였다.
1876년에는 개항을 둘러싸고 논의가 분분하였다. 전국적으로 개항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유생들이 연일 상소를 올려 개항불가를 주창하였다. 이때 최익현은 도끼를 어깨에 메고 상소를 올려 개항을 반대하였다.
이에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는 최익현을 탄핵하여 맹렬한 공격을 가하였다. 이만도는 “최익현의 상소는 비록 말이 지나치고 외람되기는 하지만 실로 바른 말이다.”라고 하면서 최익현을 두둔하였다. 이에 영의정 이최응이 강력히 반발하자 이만도는 모든 책임을 지고 일시 삭직당하는 곤경을 겪었다.
이만도는 1876년 9월에 양산 군수로 부임하였다. 양산 군수로 재직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크게 인심을 얻었다. 기근과 홍수로 생긴 이재민을 자신의 녹봉과 전곡을 풀어 구제하였다. 이만도는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두 달 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 질문1 1873년 이만도가 면직(免職)된 이유를 말해봅시다.
  • 질문2 1876년에는 이만도가 최익현을 두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이만도와 을미의병

이만도가 만년의 활동 근거지로 삼은 백동서당은 1893년 그의 나이 52세 되던 해에 세워졌다. 백동은 오늘날 경북 안동시 예안면 토계리로 할머니의 묘소 아래를 가리키던 지명이다. 이만도는 여기에 작은 집을 짓고 퇴계의 필적을 모아 향산(響山)이라는 두 글자를 걸었다.
그는 갑오개혁은 조선의 전통 문물제도를 훼손하는 일이라며 강력하게 규탄하였다. 아울러 일제의 야만적 범죄인 을미사변(1895)의 비보를 듣고 은둔하기 위해 일월산 아래 선영이 있던 광덕(현, 경북 영양군 청기면 행화동)으로 들어갔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적인 의병 봉기가 일어났다. 이만도도 을미의병의 지도자로 참여하였다. 이만도는 1894년 안동에서 의병을 선도한 서상철과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충북 제천에 거주하던 서상철은 1894년 일본군의 경복군 침입 직후에 선대의 세거지였던 안동으로 내려와 의병 궐기를 호소하는 포고문을 발송하였다. 서상철을 만난 이만도는 의병 봉기를 역설하는 서상철의 주장에 대하여 그 당위성을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으나 국왕의 명령이 없이 군사를 모집한다는 데는 주저하였다.
하지만 이만도는 국왕의 밀지를 받고 영남 지역의 항일투쟁 세력을 규합하는 임무를 띠고 내려온 이용호를 만나면서 생각을 바꿔 거를 결심하였다. 그런 가운데 이용호가 체포되자 이만도의 거사 계획은 중단되었다.

  • 질문1 이만도가 강화도조약에 반대했던 이유를 써서 발표해 봅시다.
  • 질문2 이만도가 서상철의 주장에 주저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이만도가 의병 봉기를 적극적으로 도모하기로 마음을 바꾼 계기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4

이만도와 을미 선성의병

선성의병을 선도한 것은 1896년 1월 13일에 발송된 「예안 통문」이었다. 경북 내륙지방에서 의병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나온 여러 통문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이 통문은 멀리 강릉, 정선, 평창 등 영동 지방의 각지 향교로 발송된 것이었다.
주창자 명단에 이만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선성 의병장을 맡았던 사실로 보거나, 또 진성이씨 문중이 주축이 된 정황으로 보아 이만도가 예안통문을 주창한 중심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통문의 요지는 국모 시해에 뒤이어 단발령까지 자행한 일제의 만행에 대항하여 인민들이 분발하여 결사항전의 각오로 의병을 규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만도가 의병장을 맡은 선성의진은 1896년 1월 23일경 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성의진이 결성될 즈음 안동의진이 관군과 맞서 싸우다가 크게 패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이에 선성의진의 의병들도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의진이 결성된 지 9일 만인 2월 1일에 선성의진이 사실상 해산된 것이나 다를 바 없게 된 것이다.
을미의병의 경우 명문대가의 후예가 의병장이 된 사례가 적고 명가의 문중이 집단적으로 의병을 일으킨 경우가 드물었던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하지만 이만도는 앞장서 의병을 일으켰다. 선성의진은 실제 전투 행위나 전력보다도 이후 각지의 의병 봉기에 영향을 미쳤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그리하여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부터 함창 태봉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병참 기지를 공격하기 위한 기반을 구축하였다.

  • 질문1 예안 통문의 의의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선성의진에서 이만도는 어떤 역할을 맡았나요?
  • 질문3 선성의진의 의의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5

선성 의병과 태봉 전투

이만도의 입산 뒤 이중린의 주도하에 진성이씨 문중이 주축이 되어 선성 의진은 재편되었다. 이만도의 큰아들 이중업도 가담하여 태봉 공략전에 나섰다. 여기에 영양 의병장 김도현이 가세하였다.
재편된 선성의진은 연합 의진에 참가하여 태봉 전투를 벌였다. 태봉은 일본군 병참 기지가 있는 전략 요충지였다. 앞서 서상렬이 이끈 호좌의진의 별동대가 3월 10일 안동으로 와서 경북 북부 지방 연합 의진의 결성과 태봉 공략을 합의하였다. 선성 의진은 이에 따라 3월 20일 예천으로 향하였고,26일에는 예천에서 행한 회맹의식에 참가하였다.
태봉 공격에는 선성의진이 선봉을 맡았고 풍기, 영주, 순흥의진이 그 뒤를 따랐다. 연합 의진은 태봉 주둔 일본군을 상대로 종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전력의 열세로 인해 저녁 무렵에는 수세에 몰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선성의진도 학가산 자락을 타고 회군하여 3월 31일 예안으로 돌아왔다.
의병의 활동은 일본군의 보복으로 심한 후유증을 가져왔다. 태봉 전투가 끝난 뒤 일본군은 의병을 추격하여 안동을 의병의 소굴이라고 여겨 민가에 불을 질렀다. 마침 바람을 타고 불길이 안동 도심으로 번져 1천여 호의 민가가 불타는 참극이 벌어졌다.
태봉 전투를 치르고 난 뒤 선성의진은 청량산으로 들어가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일본군은 의병을 추격하여 청량산 일대의 의병 본거지를 초토화시켰을 뿐만 아니라,의병의 주도 세력이 진성이씨 문중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5월 31일 상계에 있던 퇴계 종택에 불을 질러 가옥 일부와 서책들을 불태웠다. 이때 1차 참화를 입었던 퇴계 종택은 그 뒤 1907년 10월에도 의병을 지원한 연고로 인해 다시 잿더미로 변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 질문1 태봉 전투에 참여한 의진의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2 일본군이 퇴계 종택에 불을 지른 이유가 무엇인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6

을사늑약 반대 상소

1896년 말 광덕으로 들어간 이만도는 이듬해 3월 다시 백동으로 나왔다. 그해 말에는 다시 광덕으로 들어갔고,1898년 봄에 또다시 백동으로 나왔다
1900년 겨울에 일시 광덕으로 들어갔던 그는 봄에 다시 백동 서당으로 나왔다. 이후 그는 1910년 순국 때까지 10여 년간 광덕과 백동을 근거지로 삼고 일정한 거처를 정하지 않은 채 인근 각지를 부단히 돌아다니면서 독립운동에 힘썼다.
이만도의 행적의 대부분이 조상의 선영이 모셔진 곳과 관련되어 있던 점으로 보아 고통스런 현실 세계에서 그를 지탱해 준 정신적 지주가 영예로운 선조들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만도는 을사늑약(1905)이 체결된 지 며칠 후에 그 비보를 들었다. 그는 즉시 을사 5적 처단과 조약 파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아들을 통해 올렸다. 그는 아들 이중업이 상소에 대한 답변을 받지 못하고 돌아오자 통곡하면서 자책하였다. 이후 이만도는 죄인을 자처하며 선조의 묘역을 찾아 전전하였고 집안일은 아들 이중업이 전담하게 되었다.

  • 질문1 이만도가 선영 주변을 전전한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2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이만도의 상소 내용은 무엇인지 상상해서 써 봅시다.

읽기자료 7

이만도의 순국

이만도는 경술국치를 당한 지 6일이 지난 9월 8일에 류필영을 비롯한 친구들을 통해 그 비보를 들었다. 소식을 접한 그는 날마다 선대의 묘소에 가서 통곡하였다. 비통하게 며칠을 보내다가 9월 17일부터 자진을 결심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단식에 임해 그는 자신의 입장과 각오를 밝혔다. 이만도가 순국에 대한 뜻을 처음 생각했던 것은 을미사변 때였고 그 뒤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도 다시 한 번 순국을 생각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그가 순국을 결행하지 않고 후일로 미룬 이유는 국권 회복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권피탈로 인해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고 더 이상 살아있을 가치도 명분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다만, 국권피탈 소식을 듣고도 약 보름간 자진을 결행하지 않았던 것은 순국을 결행하는 방도를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혀 그가 자진의 방법으로 단식을 결정할 때까지 상당한 고뇌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는 원래는 부모의 묘역에서 자진하기로 결심하였다. 죄인의 신분으로 안방에서 안락한 죽음을 맞을 수 없다는 각오에서였다. 그러나 족손 이강학의 간청으로 인하여 친척인 청구동의 이강호 집에서 단식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단식 24일 만인 10월 10일에 자정 순국하였다.
이만도는 성리학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특히, 조선 성리학의 종장인 퇴계 이황의 직손으로 그가 가졌던 성리학 체계의 효용성과 가치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침략은 그러한 신뢰를 파괴한 것이고 경술국치는 성리학적 가치와 질서에 대한 막다른 길목이었던 것이다. 그는 죽음으로써 국왕과 나라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자 하였다.
그는 자신이 결행하는 단식을 의리로 운운하는 지인들의 언행을 일체 배격하였고 장례와 관련된 의절에 화려한 수식이나 미화도 철저히 차단하였다. 또한 죄인인 자신을 일컬어 ‘선생’이라고 하는 호칭도 거부하였다.
이만도의 순국은 당대 및 후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가 자진하던 날 그의 삼종질이며 함께 의병을 일으켰던 이중언은 단식을 시작하여 27일 만인 11월 9일에 순국하였다. 1914년에는 그의 문인이었던 김도현은 부친상을 마친 즉시 영해 바다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또한 이만도의 아들 중업과 며느리 김락, 그리고 손자 동흠, 종흠 형제 등 일가가 모두 독립 운동에 나섰다.

  • 질문1 이만도가 순국을 처음 생각했던 때는 언제인가요?
  • 질문2 경술국치를 당하여 이만도가 자정 순국을 택한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3 이만도의 자정 순국의 의의를 말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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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안동댐 건설로 옮기기 이전의 향산 고택이다.

  • 질문1 이만도가 경북 안동시 예안면 토계리에 백동서당(향산고택)을 건립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2

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사진은 향산 이만도의 단식순국 과정을 일기식으로 기록한 청구일기 표지이다.

  • 질문1 청구일기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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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이만도의 입장에서 단식에 즈음하여 왕에게 올리는 상소문을 작성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이만도의 입장에서 단식에 임하며 유서를 작성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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