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본문영역

  • 도입
  • 역사적 배경
  • 읽기
  • 시각자료
  • 모둠활동

주요사적지 배움터

정환직·정용기 집터 - 충효재(산남의진의 父子 의병장)

도입

몸이 간들 마음이야 변할소냐.
의가 무거우니 죽음은 오히려 가볍구나.
뒷일을 누구에게 맡길까.
새벽에 홀로 앉아 말을 잊었노라.
- 정환직의 절명시


대한제국 말기 아버지와 아들이 의병장이 되어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을 펼친 집안이 있었다. 아버지의 명을 받아 아들이 먼저 의병장이 되어 의병 부대를 조직해 일본군과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일본군과의 전투 중에 아들이 전사하고, 그 뒤를 이어 아버지가 의병장이 되어 일본에 맞서 싸웠다. 아버지 역시 전투 중 일본군에 사로잡혀 결국 총살당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정환직이었고 아들의 이름은 정용기였다. 우리나라 의병 항쟁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아버지와 아들이 의병장으로 활동한 경우이다. 도입의 처음에 등장한 시는 아버지인 정환직이 일본군에 잡혀 총살당하기 바로 전날에 쓴 시이다. 죽음을 당하기 전에 지은 시이기 때문에 절명시라고 한다.
이처럼 의로운 아버지와 아들이 이끌었던 의병 부대의 이름은 산남의진이었다. 산남은 문경새재 이남의 경상도 지역이고, 의진은 의병을 의미한다. 산남의진은 경상도 지역의 의병 부대 중 가장 규모가 컸으며, 활동 범위도 가장 넓었다. 또한 일본군에 맞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던 부대였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은 왜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을까?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626 [도로명 주소: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별빛로 1538-5]
현재 상태 정환직·정용기 부자의 집은 불에 타 없어지고, 이들을 기리기 위한 충효재가 자리 잡고 있다.

1904년부터 일제에 강제로 합병된 1910년까지의 기간은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전개되었던 시기였다.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미국, 영국,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1905년 11월 일본의 특명전권대사로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이 거처하고 있던 궁궐을 일본군으로 포위하고, 외교권을 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내용의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조약의 승인을 거부하며 의견을 내지 않고 결정을 대신에게 위임하였다.
결국 1905년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군 사령관과 함께 대한제국의 8명의 대신들을 일일이 부르며 조약 체결에 찬성할 것을 강요하였다. 반대한 대신은 끌려 나갔으며,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이 조약 체결에 찬성을 하였다. 이들을 을사오적이라 부르며, 이들이 찬성한 조약을 을사늑약이라 한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기 때문에 을사조약이라는 표현보다 ‘억지로 하다’는 의미의 을사늑약이라고 한다. 을사늑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 외무성이 갖고, 내정은 통감부가 관할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가적 주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고종은 최익현, 정환직 등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지시하고,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대한 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해산된 군인은 전국 각지의 의병에 합류하였고, 이들의 합류로 의병들의 전투력과 조직력이 강화되었다.
의병 항쟁은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1월의 단발령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소위 을미의병이라고 불리는 초기 의병,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일어난, 을미의병이라 불리는 중기 의병,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7월의 정미 7조약 체결로 군대 해산이 이루어짐으로써 봉기하게 된, 정미의병이라 불리는 후기 의병 등 크게 3기로 전개되었다. 특히 정환직·정용기 부자가 이끌던 의병은 중기 의병과 후기 의병에 걸쳐, 경상도 지역의 의병 항쟁 중에서 규모와 활동지역이 가장 크고 넓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읽기

읽기자료 1

경상도를 대표하는 의병장, 정환직

정환직 의병장은 1844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용모가 준수하고 어려서 총명해 12살에는 지방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 의술을 배웠으며, 1887년 북부도사를 시작으로 44세의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갔다. 1888년 의금부 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삼남참오령에 임명되어 동학군 진압에 나섰으며 그 해 겨울 황해도의 동학군을 평정하였다. 1899년에 삼남검찰 겸 토포사가 되어 삼남으로 내려갔다가 그 해 8월에 상경하여 시종관으로 근무하였다. 그해 11월 20일 밤 종묘에 불이 나자 군사를 불러 불길 속에서 고종 황제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케 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정환직에 대한 고종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1900년에 원수부위임 겸 삼남관찰사에 제수되었다가 그해 겨울 도찰사에 임명되었다. 그 후 일제의 국권침탈로 국운이 기울어가자 세상를 비관하고 관직에 물러날 것을 청하니 황제가 중추원의관에 임명하고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1905년 일제의 강권에 의하여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고종은 그에게 밀지와 군자금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전하였다. 그 후 정환직은 관직을 사직하고 아들 정용기에게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키도록 하니, 이 의병 부대의 이름은 산남의진이고 그 수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산남의진은 경상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활발한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신돌석 의병진을 돕고자 진군하던 아들 정용기 의병장이 1906년 일본군에 사로잡혔으나 정환직의 노력으로 정용기 의병장은 다시 풀려나 의병대를 재정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07년 9월 1일 정용기 의병장은 죽장면 입암에서 일본군과 교전 도중 전사하였으며, 의병의 대다수가 전사하였다.
아들인 정용기 의병장이 전사하자, 정환직은 2대 산남의진의 의병장에 올랐다. 동쪽으로는 포항, 서쪽으로 신령, 북쪽으로는 청송 등지의 일본군을 공격해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이 당시 일본군은 정환직을 의병장 중 가장 강경한 백발노인이라 불렀다. 그러나 정환직 의병장 역시 일본군의 추격에 1907년 12월 11일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군이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까지 반일의 뜻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영천의 남쪽 교외에서 정식 재판 절차도 없이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 질문1 정환직 의병장의 생애를 다음 빈 칸에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2

충효심이 강하고 다재다능했던 정용기

정용기 의병장은 1862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격이 활달하고 도량이 넓으며 힘이 장사였으며, 재주가 뛰어나 가난한 살림에 정식으로 배우지 못했어도 학생이 출중하고 글씨, 그림, 시 등 예술에도 재능이 뛰어났다. 정용기 의병장이 15살 되던 해 큰 흉년이 들었을 때, 부모를 잃은 고아 수십 명이 거리에서 울고 방황하였다. 그는 마을 빈집 한 채를 수리하고 고아들을 집단으로 수용한 후 마을의 부자들을 찾아가 고아 돕기를 간청하니 모두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협조하였다고 한다. 또한 신분 차별이 심한 사회에서 상민들에게 인자하게 대하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으며 생활이 청렴하였다.
아버지인 정환직이 벼슬길에 나서자 정용기 역시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머물면서 국운이 점차 기우는 것을 보고,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만민 공동회의 활동에 적극 참여해 종로 등지에서 수많은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아버지인 정환직은 정용기에게 “아비는 한 번 죽음으로써 고종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니 너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의병을 일으킬 뜻을 전하자 정용기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고향인 영천에 내려와 산남의진을 조직하고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906년 신돌석 의병진으로부터 동해안을 따라 올라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전진하던 중 관군의 속임수에 빠져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버지인 정환직이 적극적으로 주선해 석방되었고, 이후 1907년 7월 다시 산남의진을 조직해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1일 일본군과의 교전 중 전사하였다. 뒤이어 아버지인 정환직이 아들의 뒤를 이어 산남의진의 의병장에 오르게 된다. 아들과 아버지가 의병장을 서로 이어받으며 오랜 기간 동안 항쟁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부자의 빼어난 충효 정신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정용기는 충효심이 뛰어난 의병장이기도 했지만 시, 글씨, 그림, 음악 등에 빼어난 예술가이자 문학작가였다. 그는 67수의 한시와 다수의 상소문 등을 남겼으며, 3편의 가사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가 남긴 3편의 가사는 모두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이 담겨 있으며, 의병을 모집하는 내용을 담기도 하였다.

  • 질문1 다음은 정용기가 1907년 4월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창작한 권세가라는 가사의 일부이다. 밑줄 친 ‘오적’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써봅시다.

    “개같은 저 왜놈들이 자칭 문명 자랑하고
    예의 조선 우리국을 제임의로 처단하니
    문명종사 전복되고 억만생명 어육이라
    어느 놈의 소위런고 오적놈들 주사로다
    이놈 이놈 이지용 아이놈 이놈 이근택아
    ……
    궁흉극악 이완용과 염치없는 민영기야
    애잔하고 가련하다 우리문명 마다하고”

읽기자료 3

검단동이 충효동이 된 이유는?

“1908년 가을의 어느 날 영천군 자양면 검단동에서 향회가 열렸다. 정순기 등 노기등등한 유생들이 각자의 비밀을 감추고 입론하는 언변은 준엄하기만 했다. 검단동의 이름을 충효동으로 고치자는 것이다. 1908년이면 나라가 거의 망해가고 있던 때였는데, 그때에 정환직·용기 부자 의병대장의 순국을 기려 그가 출생한 마을을 충효동으로 하자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주장이 너무 엄중하여 일제와 이미 그의 앞잡이가 된 관청에서도 막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한국근대사의 격랑 속에서 충효동이 탄생하였다. 일제는 그 전 해인 1907년 8월에 검단동에 있는 검계서당과 정환직 의병장의 본댁을 불태우면서까지 산남의진의 기세를 꺽으려 했지만 충효동의 이름은 막지 못하였다. 집을 태우고 사람을 죽일 수 있어도 그 얼과 혼은 빼앗지 못하는 표본이 아니던가”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에는 충효리라는 동네가 있다. 정환직·정용기 부자의 충과 효를 기리기 위해 원래 검단동이라는 동네의 이름을 충효동으로 바꾸고, 이들 부자의 묘 주변에 충효재라는 건물을 지었다. 일제 시대에는 충효재라고 부르지 못하고, 충효사립학교라 위장 간판을 걸었다. 당시는 일제가 농촌진흥운동의 일환으로 학교의 건립을 권장하던 때라, 그것을 역이용한 것이다. 충효재라는 이름과 현판은 8․15 광복 후에 걸었다.

  • 질문1 우리 동네에 독립 운동가나 순국 선열이 있는지 조사해 보고 그들의 나라 사랑의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는지 찾아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시각자료

시각자료 1

고종황제 밀조비(짐망화천지수전세비). 정환직 의병장이 고종 황제의 밀조를 받아 의병을 일으킨 것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다음은 충효재 마당에 있는 ‘고종황제 밀조비’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하려는 일본의 야욕이 노골화 되고 있을 때, 고종은 정환직에게 “경이 화천지수를 아는가?”라고 말씀하시며 조용히 짐(朕)·망(望)이라는 두 글자의 밀지를 정환직에게 주었다. 고종의 주변이 온통 일본의 앞잡이들로 항상 감시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지령을 내린 것이다. 고종의 밀명을 받은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에게 “아비는 한번 죽음으로써 황제(고종)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니 너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의병을 일으킬 뜻을 전하자 정용기는 아버지 대신 자신이 의병을 일으키는데 앞장서기로 하였다.

* 화천지수란?
춘추전국 시대에 제나라 환공이 여러 나라의 집중공격을 받아 체포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봉추부라는 장군이 환공과 옷을 바꾸어 입고, 환공을 돌아 보면서 “내가 목이 마르니 화천의 맑은 물을 떠 오라(화천지수)”고 명령하였다. 이에 환공은 물을 뜨러 가는 척 하면서 도망을 치게 되어 위기를 극복하고, 봉추부가 환공 대신 붙잡히게 되었다.

  • 질문1 고종이 정환직 의병장에게 비밀 지령을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질문2 화천지수의 고사에 나오는 각 인물과 사건은 정환직이 의병을 일으킨 계기 중 각각 무엇을 비유하는지 빈 칸에 적어봅시다.



시각자료 2

산남의진발상기념비

다음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에 있는 ‘산남의진발상기념비’이다.

  • 질문1 다음 자료를 읽고 산남의진발상기념비가 경상북도 영천이 아니라 포항에 위치한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일본군은 죽장면 입암리에 주둔하고 매현과 통하는 두 산골 언덕에 매복하고 있었다. 입암에 일본군이 왔다는 정보를 입수한 산남의진에서는 정찰부대를 파견하였다. 정찰부대는 일본군이 매복한 줄 모르고, 그 지역을 통과해 일본군 몇 명만을 만나 공격하니 일본군이 도망치고 말았다. 결국 나머지 부대가 이동을 하다 입암리 입구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았다(1907년 9월 1일). 정용기, 이한구, 손영각 등 40여 명의 의병이 일시에 순국하였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모둠활동

모둠활동 1
정환직·정용기 의병장에 대한 가상 다큐멘터리의 스토리보드 만들기
* 스토리보드 : 다큐멘터리나 영화 등의 제작을 위해 작품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주제의 흐름을 주요 장면별로 그려 놓은 것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31232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1  전화: 041-560-0405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21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