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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151고지 전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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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함께

산과 계곡들, 어깨를 맞대고 전투하는 장면을

생각하는 것은 아름다웠다.

 

...중략....

 

조국은 우리의 것이다.

전쟁에서 죽은 터키인이여, 이곳에서 네게 인사를 보내노라.

 

너는 아나톨리아에서, 나는 부산에서.

너는 터키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나는 전 세계를 위해 목숨을 바쳤노라.

 

- 부산에서 자고 있다 -



 

이 글은 부산 UN기념공원에 잠들어 있는 6․25전쟁 당시 파병되어 순국한 터키병사들의 묘비에 새겨진 시이다. 터키는 6․25전쟁 당시 5천 명 규모의 여단 병력을 파병해 1,005명이 사망하고, 2,147명이 부상했으며, 234명이 전쟁포로로 잡혔다.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냈다. 특히 용인 151고지 전투에서는 백병전(白兵戰: 칼이나 창, 총검 따위와 같은 무기를 가지고 적과 직접 몸으로 맞붙어서 싸우는 전투)으로 중국군의 공격을 막아내어 1951년에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1952년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역사적 배경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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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비참하고 끔찍한 전쟁을 경험한 세계 각국은 국제평화와 안전유지를 위한 안전장치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그 결과 1945년 10월 24일 51개국을 회원국으로 하는 국제연합(UN: The United Nation)이 만들어졌다. 
유엔과 한국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인 1947년부터이지만,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대대적인 남침을 시작한 한국전쟁이었다. 이들의 침략으로 한반도의 평화가 파괴되자 유엔은 미국의 주도적인 역할 아래 이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적극적인 대응을 결정하였고, 유엔 창설 이후 처음으로 한국전쟁에 유엔군을 파견였다.
이때부터 미국을 주축으로 전투부대를 파견한 16개국과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한 5개국은 휴전이 조인될 때까지 유엔의 깃발 아래 한국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들 유엔군은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십자군으로서 아주 먼 곳에 있는 한국에 참전하여 생소한 기후풍토에 시달리면서도 열심히 싸웠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피를 흘렸거나 목숨을 잃었다. 
터키는 한때 중립을 표방하기도 하였으나 중동 및 발칸반도가 세계열강이 서로 다투는 장소가 되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연합군 측에 가담하여 친서방정책으로 선회한 국가로서, 유엔의 대한민국 군사원조 결의안을 적극 지지하였다.
터키군의 참전은 터키 국민의 적극적 동조를 얻는 가운데 파병이 진행되었다. 이때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은 무려 지상군 1개 여단이었다. 이 규모는 한국전에 참전한 16개국 중 4번째로 많은 숫자였으며, 1950년 10월부터 1963년 7월 27일까지 14,936명을 파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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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북한군의 침공을 받게 되자 한국 정부는 즉시 이 사실을 유엔 한국임시위원단과 주한 미국대사관에 통보하면서 유엔과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의 남침행위를 즉각 중지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미국도 한반도 사태를 유엔을 통해 해결하려하였다.
6월 25일(뉴욕 시간)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를 소집하고, 미국이 제출한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어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북한이 유엔의 결의안을 준수할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빠른 시기에 한국 정부가 무너질 수 있다.”는 비관적인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에 따라 유엔 안보리는 “그들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지원을 제공하자.”는 내용의 ‘6·26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미국의 지상군 투입을 법적 또는 명분상으로 합법화하는 역할을 제공하였으며, 미국 이외에 유엔 회원국들과 자유우방(友邦)이 한국에 필요한 원조를 제공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이 같은 6·26결의에 따라 미국의 육·해·공군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가하였다. 미군의 참전에 이어 자유진영 32개국이 유엔의 결의를 지지했으며, 7월 중순에는 지지하는 나라가 52개국으로 증가하였다. 그 후 한국을 돕기 위해 16개국이 전투부대 파병을, 5개국이 의료 또는 시설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유엔에 통보하였다.
유엔 안보리는 유엔 회원국이 한국에 파견하게 될 부대의 지휘체제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월 7일,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제안한 유엔군사령부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가결했다. 그 같은 결의는 유엔이 최초로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군 지휘 기구를 설치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결의에 따라 미국은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를 초대 유엔군사령관에 임명했다. 이에 따라 맥아더 원수는 도쿄에서 유엔군사령부를 공식적으로 창설하고, 극동군사령부의 참모진들을 유엔군사령부 참모로 겸임 발령하였다. 결국, 미 극동군사령부가 한국 작전 임무를 추가로 부여받아 유엔군사령부가 된 셈이었다.
그 같은 일련의 과정 끝에 미국은 유엔군 작전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유엔군사령부를 통해 모든 유엔군의 지휘 및 통제를 담당하게 되었다.

  • 질문1 유엔군이 6․25전쟁에 파병되도록 결정된 것은 유엔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나요?
  • 질문2 6․25전쟁 당시 유엔군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나라는 어떤 국가였으며, 왜 그 나라가 그런 지위를 가지게 되었을까요?

읽기자료 2

터키 정부는 1950년 7월 중순 유엔 사무총장으로부터 파병 요청을 받자 짧은 기간에 4,500명 규모의 군대를 보낼 것을 결정하고, 이를 유엔에 알려 유엔 회원국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터키군의 파견이 확정되자 터키 육군은 8월 3일 제28사단 소속의 제241연대와 제2기갑의 제2포병대대를 중심으로 전투부대를 조직한 후 터키 제8군단 제4관구에서 공병, 수송, 병기, 통신, 의무부대를 뽑아 지원부대를 구성함으로써 독자적으로 전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제1여단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9월 10일 제2기갑 여단장인 야지시 준장을 초대 여단장에 임명하는 등 지휘부도 구성하였다.
터키 제1연단은 병력이 급히 필요하자 9월 13일까지 각 병과별로 단기간에 보충교육을 받게 하였으나, 탄약 부족으로 실탄을 사용한 사격훈련은 실시하지 못하였다. 5,090명으로 편성된 여단은 14일 출병 준비를 위한 최종 점검을 마치고 20일 지중해의 항구도시인 이스켄테룬에 집결하였고, 간단한 환송식을 마친 다음 3개 제1제대로 나누어 기다리고 있던  미 수송선에 올랐다. 이리하여 제1제대는 25일, 제2제대는 26일, 그리고 제3제대는 29일 각각 터키에서 출발하였다. 
제1여단은 항해 도중에 파견된 5명의 미군 연락장교단으로부터 미국식 무기 사용법을 비롯한 사격술, 전술 및 보전협동작전 등의 교육을 받았다. 여단은 21일간의 긴 항해 끝에 10월 17일 부산에 도착한 후, 20일 대구에 있는 유엔군수용소로 이동하였다. 이때 여단은 한강 이남 후방지역에서 공비토벌작전과 주 보급로 경비임무를 수행 중인 미 제9군단에 배속되었다. 
여단은 불필요한 장비를 반납하고 지원된 신식 장비와 무기를 받아 이제 M-1소총으로부터 105mm 곡사포, 그리고 다수의 차량 장비까지 갖추게 되었다. 이후 여단은 대구-대전 간의 주 보급로를 경비하면서 실탄사격훈련은 물론 보존포협동작전까지 완료하고 출동에 대비하였다. 
장승천 전투, 고량포 전투, 네바다 전투 등에 참전하며, 1953년 휴전까지 세 차례에 걸쳐 5,000여 명이 교체되어 한국전에 약 15,000여 명이 투입되었는데 이는  참전국 중 4번째로 많은 수의 병력이었다.
휴전 후에도 터키군은 경기도 양주 백석면에 1개 여단 병력이 머물면서 서부 휴전선을 지켰으며, 1966년 7월 7일 16중대가 마지막으로 터키로 돌아갔다.

  • 질문1 6․25전쟁에 참전한 터키는 몇 번째로 많은 수의 병사들을 파병하였나요?
  • 질문2 터키군은 한국으로 오는 배 안에서 미군 연락장교들로부터 무엇을 배웠으며, 왜 미들로부터 배워야 했나요?
  • 질문3 6․25전쟁에 UN군으로 활동한 터키군은 어느 해에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하여 어느 해에 마지막으로 터키로 돌아갔나요?

읽기자료 3

1951년 1월 25일을 기점으로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유엔군이 중국군에 대하여 본격적인 반격 작전을 펴기 위하여 한강을 향해 북진하도록 명령했다. 이른바 선더볼트 작전이 이루어졌다.
이런 상황에 용인 151고지에서 터키 제1여단 제241연대 제1대대와 제3대대가 중국군과 1951년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터키 제1여단은 미 제1군단 제25사단에 배속되어 1951년 1월 24일 안성 송전리에 도착하였다. 터키 여단은 유엔군이 중국군의 공격을 평택-제천선에서 막아내고 다시 반격 작전을 시행할 때, 안성-송전선에 참여하여 1월 25일부터 김량장리(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및 151고지(현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를 목표로 공격을 하였다. 제1대대와 제3대대가 동백리 151고지를 목표로 공격하기 위해 오산 방면으로 이동, 작지리 주변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1월 25일 새벽, 공격을 시작한 제1대대와 제3대대는 선납재를 지나 고매리 주변의 185고지를 점령하고 계속 북진하여 최종 목표인 151고지로 향했다.
당시 중국군도 그 선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만들어 대응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터키 여단은 각종 지원 화력과 근접 항공지원을 요청하여 중국군의 진지를 돌격하는 가운데, 그들이 믿는 신을 찬송하는 ‘알라 후 아크바르(Allāhu Akbar; 신은 위대하시다.)!’를 외치면서 공격하여 김량장과 그 서쪽 151고지를 백병전으로 점령하고 중국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터키군은 총검에 의한 백병전으로 병사 1명당 40명의 적을 무찔러 ‘백병전의 터키군’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3일간의 전투에서 확인한 중국군의 시체가 397명 되었는데, 전사자의 대부분이 개머리판에 의해 턱이 깨지고 총검에 찔린 모습이었다고 한다. 당시 터키군이 151고지에서 크게 승리한 30분간의 백병전 상황은 외신기자들에 의해 전 세계로 알려졌는데, 이 전투는 이전에 군우리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떨어진 터키군의 명예를 크게 회복하는데 기여하였다.
1974년 국방부에는 이 전투에서 용맹함을 보여준 터키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현재의 영동고속도로 마성톨게이트 부근에 ‘터키군참전기념비’를 설치하고, 매년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

  • 질문1 151고지 전투에서 중국군의 시체가 397구가 되었는데, 전사자의 대부분이 개머리판에 의해 턱이 깨지고 총검에 찔린 모습이었다고 한다.’는 사실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이 전투는 어떻게 싸운 전투였을까요?

읽기자료 4

1952년 5월 터키군은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45-9번지에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서 이름을 딴 ‘앙카라고아원’을 설립하여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허기와 굶주림의 어린이들을 적극 도왔다. 터키군은 일요일이면 대형 살수차를 동원해 아이들의 목욕을 돕기도 하였으며, 또한 소질이 있는 아이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다닐 수 있도록 지원하기도 하였다. 1952년부터 1966년까지 14년 동안 운영되던 앙카라고아원은 터키 잔류중대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해체되었다.
이렇게 6․26전쟁에 참전한 터키군은 전투 이외에도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다음은 6․25전쟁에 참전한 터키군인과 그의 도움을 받던 앙카라고아원 아이와의 관계, 그리고 6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 사연을 소개한 신문보도 내용이다.


한국전 참전 터키용사․5살 고아 ‘60년 만의 재회’



6․25전쟁 때 만났다 헤어진 터키군 슐레이만 소위와 다섯 살 한국소녀 아일라는 서로를 그리워한 지 60년 만에 눈물로 상봉을 했다.
MBC는 25일 오후 9시55분 한국전쟁 6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코레 아일라’를 방송한다.
1950년 터키군 슐레이만 소위는 북극성(터키 1차 파병여단) 대원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했다. 전투가 끝나고 후퇴하는 길에 다섯 살배기 전쟁고아 여자아이를 만나게 된다. 슐레이만 소위는 그에게 ‘아일라’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준다. 아일라는 터키어로 ‘달그림자’라는 뜻이다. 슐레이만은 1년 반 동안 부대 막사에서 아일라를 친딸처럼 키운다. 그러나 1952년 슐레이만 소위는 터키로 귀국 명령을 받게 되고, 아일라를 데려갈 수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없이 터키군이 세운 앙카라고아원에 맡기고 떠난다. 60년 세월이 흘렀지만, 슐레이만은 단 하루도 아일라를 잊지 못했다. 아일라를 위해 기도하며 딸처럼 그리워한 슐레이만. 이러한 사연은 터키한인회를 통해 제작진에 전해졌다. 제작진은 추적에 추적을 거듭한 끝에 주인공 아일라를 찾게 된다. 놀랍게도 그 역시 터키군 아버지를 찾기 위해 터키대사관을 방문하고,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에 참가하는 등 모든 노력을 다해왔다.
마침내 제작진의 주선으로 6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슐레이만과 아일라가 만났다.
제작진은 슐레이만이 빛바랜 사진 한 장과 ‘아일라’라는 예명만을 가지고 그녀를 찾아나서는 과정과 60년 만의 감동적인 만남의 순간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날 방송에서는 터키 현지 취재를 통해 슐레이만을 포함한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모습과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한국전쟁 관련 사진과 자료를 입수해 선보일 예정이다.
제작진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피어난 인간애를 조명하고, 과연 전쟁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점점 잊히는 한국전쟁과 그 시대적 상황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세계일보> 2010.06.23.(수)


  • 질문1 터키군이 6․25전쟁 기간 중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에 세운 고아원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신문에 보도된 터키군 슐레이만과 한국인 고아 아일라의 관계와 그들이 6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사연이다. 특히 터키인의 인류애를 통해 이제는 우리가 다른 나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 찾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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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 질문1 왼쪽 사진은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45-9번지에 세워져 있는 ‘앙카라고아원 기념비’ 모습이고, 오른쪽 사진은 6․25전쟁 당시 안카라고아원 학생들의 모습이다. 앙카라고아원은 오른쪽 사진에서처럼 ‘안카라 학원’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는데, 과연 안카라 학원은 누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세운 곳이었나요?
  • 질문2 전쟁 중에 유엔군들이 민간인들을 도운 사례가 적지 않지만, 막상 찾아보면 찾기가 쉽지만은 않다. 터키군과 같이 고아원을 세워 어린아이들의 성장을 도운 사례로는 에티오피아군, 미군 등에게도 있었다. 과연 어떤 사례인지 인터넷을 활용하여 확인 ․ 정리해 봅시다.

시각자료 2

  • 질문1 사진은 1950년 6월 27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회의에서 미국의 남한 군사지원안에 대해 손을 들어서 표결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과 미국이 유엔을 통해 한반도 사태를 해결하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질문2 유엔군의 지휘권을 미국 정부가 행사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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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지도는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 회원국이다. 21개국이 UN평화유지군 자격으로 참전하였는데, 각 국가가 어느 정도 규모로 참전했는지 유럽 국가(10개국)’기타 나라(11개국) 두 모둠으로 나눠 조사하여 발표해봅시다

모둠활동 2

625전쟁에 참여한 유엔 참전군 가운데 미국을 제외한 나라들의 활동상을 국가수호 국내사적지 조사보고서’(참고사이트: http://www.815book.co.kr)를 찾아 정리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터키인들은 625전쟁 당시 형제의 한국을 돕기 위해 스스로 군대를 지원한 경우가 많았다. 터키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고, 특히 터키와 우리나라 간 역사적으로 교류한 내용을 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625전쟁 이후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에 파병을 갔다. 그런데 해외파병에 대해서 서로 다른 주장이 적지 않았다. 한국군의 해외파병에 대해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 두 모둠으로 나눠 찬반토론을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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