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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수 집터(일본군을 벌벌 떨게 한 덕유산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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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4월 무주군 주민들은 일제의 횡포와 굶주림 속에 허덕이면서도 성금을 모아 어느 항일의병장의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고 그 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충성을 다하여 보국하고 만백성을 구했도다.
나라 위한 의병대장 문태서비
그 이름 온 누리에 떨치니 그 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리!


무주군 주민들이 마음속 깊이 추앙하고 존경했던 이 인물은 의재 문태수(1880 ~ 1913, 일명 문태서) 항일의병장이다. 충(忠)과 의(義)를 실천한 구한말의 의병장은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덕유산 산악지대에서 일제에 맞서 치열한 항전과 뛰어난 전과를 올린 문태수 의병장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1905년 러․일 전쟁 이후 일제의 침략이 한층 격화되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문태수 의병장은 함양군 영각사를 거점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하여 전멸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경남, 전북, 충북, 경북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신출귀몰한 작전을 전개하여 일본군과 친일파들을 척결하였다.
문태수 의병장의 굽힐 줄 모르는 의기와 희생정신은 애국애족과 조국 근대화 사상의 싹을 틔웠고 해외 독립투쟁에도 영향을 주어 조국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가난한 인민을 보호하여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었던 덕유산의 호랑이, 의병장 문태수 의병장을 찾아가 보자.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1027·1028 일대
현재 상태 문태수 의병장 생가 복원

문태수 의병장은 1906년 덕유산 영각사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항일무장투쟁에 들어갔다. 무주 안성에서 일본군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려 첫 전투를 승리로 장식했으며 9월 하순 장수로 들어가 그곳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해 이들을 전멸하는 쾌거를 올렸다. 1907년 말 경기 양주에서 13도창의군이 결성되자 ‘호남의병대장’으로 서울 진공작전에 참여했고, 1908년 무주 헌병주재소와 장수 헌병주재소 및 관공서 등을 습격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장수 헌병대를 기습하는 등 최후의 항일전을 전개하다가 1911년 8월 밀고에 의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34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자결 순국했다. 문태수 의병장이 목숨을 걸고 의병 항쟁을 전개한 이유를 그 시대적 상황을 통해 알아보자.
일제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기회로 청․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1월에 망국조약인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하여 우리 민족의 격분을 샀다. 이 와중에 전국 도처에서 다시 일어난 의병이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선생은 여러 곳의 지사, 동지들을 규합하고 1906년 무주군 안성면에 있는 원통사를 거점으로 삼아 대일항전에 들어갔다.
그 후 일제는 1907년 헤이그 특사 의거를 계기로 한국 병탄을 결정하고 침략정책을 숨김없이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정미7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정권을 장악한 뒤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정규군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문태수 의병장은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항일의 신념을 더욱 굳히며 일제의 군과 경찰을 상대로 온 힘을 다해 항일전을 벌여 나갔다. 경남의 함양, 거창, 전북의 장수, 무주, 진안, 임실, 충남의 금산 등지를 오가며 덕유산과 적상산, 성수산 등의 산악지대를 무대로 일제의 군과 경찰을 상대로 영웅적인 항전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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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덕유산의 정기를 타고

문태수 의병장은 1880년 3월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신기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이고, 본명은 태진으로 알려졌으며 자가 태수 혹은 태서였다고 한다. 어려서 마을 서당에서 사서삼경 등 한학을 공부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추었으며, 17세 되던 무렵에는 장수군 계북면으로 이사하였다.
한편, 장성해 가던 무렵 대한제국은 일제의 침탈로 인해 나라의 운명은 날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나라를 근심하고 염려하는 참된 마음의 유교적 신념과 남달리 뛰어난 기개를 지녔던 문태수 의병장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금강산으로 들어가 박처사(朴處士)라는 병법 전문가를 만나 항일전에 필요한 전술·전략을 익히고, 항일투쟁의 거두인 면암 최익현을 만나 구국의 방책을 논의하였다.

  • 질문1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날로 기울어 가던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었을지 말해봅시다.
  • 질문2 문태수 의병장이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은 무엇일까요?

읽기자료 2

항일전의 선봉, 13도창의군 호남의병대장

문태수 의병장은 1906년 봄 무렵 덕유산 일대에서 산포수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전열을 정비한 후 무주군 안성면에 있는 원통사를 거점으로 삼아 대일항전에 들어갔다. 일본군 5명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리며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였고, 이 날의 승리로 명성이 원근 일대에서 자자하게 되었다. 또한 용장 박춘실이 거느린 부대와 명성을 듣고 찾아온 전성범을 규합하였고, 인근 각처로부터도 의병들이 많이 모여들어 전력이 크게 확충되었다.
1907년 문태수 의병장이 무주군 부남면으로 이동하여 주둔하자 일본군이 출동하였다. 그러자 문태수 의병은 기습하기에 유리한 부남면 고창곡에 의병을 매복시킨 후 출동한 일본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이후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자 문태수 의병장의 명성은 호남일대 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퍼져갔다. 이에 따라 휘하에 들어오는 의병들은 계속 늘어나게 되었다.
1907년 하반기는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올랐던 시기이다. 허위, 이인영, 이은찬 등 의병 지도자 사이에는 전국의병을 규합하여 하나의 지휘체계로 편제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그 결과 1907년 말에 전국의병의 연합부대인 13도창의군이 결성되었다. 문태수 의병장은 덕유산의 근거지를 박춘실과 전성범에게 맡겨 놓고 ‘호남의병대장’의 직함으로 정예병 100여명을 선발하여 예정된 집결지인 경기도 양주를 향해 북상하였다. 이 때 전국 각지로부터 집결한 의병의 규모는 총 48진에 1만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한 뒤 서울 진공작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연합부대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에는 전력상 한계가 많았다. 사전에 정보가 누출된 상태였고 지휘 계통을 세우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렵게 결성된 연합부대는 전력의 열세로 패퇴하고 말았다. 탁월한 용력과 지략으로 백전불패의 신화를 이어가고 있던 문태수 의병장은 서울 진공작전에서 처음으로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고 덕유산으로 귀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질문1 1907년 하반기에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인지 찾아 발표해봅시다.
  • 질문2 서울 진공작전을 전개한 연합부대의 명칭을 말하고 연합부대가 지녔던 전력상의 한계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을지 돌아가며 말해봅시다.
  • 질문3 다음은 당시 항일언론지였던 『대한매일신보』가 13도창의군 총대장 이인영이 서울을 향해 진군하자는 내용으로 발송한 격문을 보도한 내용입니다. 이 보도 내용을 통해 서울진공작전이 갖는 역사적인 의의를 말해 봅시다.

    “용병(用兵)의 요체는 그 고독을 피하고 일치단결하는 데 있은즉 각 도의 의병을 통일하여 궤제지세(潰堤之勢, 둑을 무너뜨리는 기세)를 타서 근기(近畿)에 범입(犯入)하면 천하를 들어 우리의 가물(家物)이 되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한국의 해결에 유리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읽기자료 3

대한제국 최후의 파수꾼

이후 문태수 의병장은 1908년 2월 격문을 발포하고 심기일전하여 항일전의 기치를 드높이 세웠다. 1908년에는 무주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적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외곽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의 반격으로 그만 체포되고 말았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도 문태수 의병장은 침착하게 대응하여 구사일생으로 적진을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무주에서 퇴각한 뒤 전열을 재정비하고 인근 부대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항일전을 지속하였다. 1908년 4월에는 장수를 습격하여 일제 주재소와 관공서 등을 유린한 뒤 유유히 무주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이후에도 1909년 경부선 연도에 있는 충북 옥천의 이원역을 폭파하는 의거를 감행하는 등 쉼 없이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문태수 의병장이 거느리던 의병은 일제의 군과 경찰의 탄압이 집중되는 가운데 적의 예봉을 피해 무주를 비롯해 장수, 거창, 함양 등지를 무대로 소부대로 분산하여 산발적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09년 하반기는 일제의 집중적인 토벌로 인한 전력고갈이 극심한 상태였다. 문태수의 의병진도 선봉장 박춘실이 체포되는 등 매우 위축되었다. 그러나 문태수는 이러한 악조건을 무릅쓰고 항일의 신념을 더욱 굳히며 국치 이후 1911년 8월 체포되는 순간까지 영웅적인 항일전을 지속하였다. 최후의 항일전은 1911년 장수 헌병대를 기습한 사건이다. 이 전투로 10여명의 일본군과 경찰을 사살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한 뒤 신속하게 덕유산 원통사를 향해 철수하였다. 하지만, 추격해온 일본군과 경찰의 파상적 공격으로 대부분의 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후 각지를 전전하며 피신하던 문태수 의병장은 1911년 8월 일시 고향을 찾았다가 사로잡으면 후한 상금을 주겠다는 일제의 꾐에 빠진 사촌 매부 임종두와 친구 조한기의 흉계에 속아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써 5년간에 걸친 문태수 의병장의 항일전은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체포된 후 안의 헌병 분견대를 거쳐 진주로 호송되었고 다시 대구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옥중에서도 문태수 의병장은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34세를 일기로 자결 순국하였다. 해방 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질문1 피신하던 문태수 의병장이 1911년 8월 잠시 고향에 찾았다가 체포되는데, 누구에 의해 어떻게 체포되었는지 써 봅시다.
  • 질문2 임종두와 조한기의 행동을 비판하는 글을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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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경남 함양 영각사 전경

경남 함양 영각사

  • 질문1 영각사는 문태수 의병장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영각사 입구에서 사진을 찍고,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찾아서 발표합시다.

시각자료 2

이원역 전경

문태수 의병장은 항일 의병이 위기에 몰리고 있던 상황에서도 1909년 경부선의 철도에 이어져 있는 충북 옥천의 이원역을 폭파하는 의거를 감행하는 등 쉼 없는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 질문1 문태수 의병장이 이원역을 폭파 의거를 전개한 목적이 무엇이었을지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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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문태수 의병장의 행장과 그 설명이다.



1) 문태수 의병장은 일본군이 마을 양민들에게 보복할 것을 염려하여 마을에서 잡은 일본군들이라도 마을 밖으로 끌어내 사살하였다.
2) 재물 탈취 등 양민을 괴롭힌 의병이나 도적을 엄격한 군율로 다스려 사살하기까지 하면서 양민을 철저하게 보호하였다.
3) 군량미나 군수 물자 등을 보급하는 데는 지방 호족들에게서 헌납을 받거나 일본인, 친일파, 세무서, 관청을 탈취하여 충당하였다.
4) 전북 무주 지방의 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신과 같이 믿고, 부녀자는 부뚜막으로부터 음식을 옮길 때 처음 것을 문태수 의병장에게 제공하여 그의 성공을 기원했다.


위의 내용을 보고 문태수는 의병이 백성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해야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둠 별로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무주군 주민들이 일제의 횡포와 굶주림 속에 허덕이면서도 송덕비(頌德碑)를 세운 사실을 예로 들어 설명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일본 군인과 경찰들이 문태수 의병장을 진주로 압송하던 중 안의읍에 잠시 머물렀을 때 일본 헌병은 문태수의 모습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른바 ‘폭도 행위(의병투쟁)’에 대해 비판을 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당시에 모여들은 군중들은 일제의 요구에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지 모둠별로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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