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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주 생가 터(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의 한 주역의 탄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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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결전을 맞으러 가자
생사적 운명의 판가리로
나가자 나가자 굳게 뭉치어
원수를 소탕하러 나가자
총칼을 메고 현전의 길로
다 앞으로 동지들아
혁명의 깃발 우리 앞에 날린다
다 앞으로 동지들아


석정 윤세주는 경남 밀양 출신으로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에 참여하면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바친 인물이다. 그는 중국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하던 중 중국 군관학교에서 청년투사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한국인 학생들을 위해 군가풍의 항일가요를 작사하였다. 제목은 ‘최후의 결전’이었다. 폴란드 노래 ‘바르샤바 혁명행진곡’의 단조를 장조로 바꾼 다음 이 가사에 맞춰서 부르게 했다. 학생들은 너무나 좋아하며 노래를 배워 애창하였다. 얼마 후 조선의용대가 만들어지자 의용대의 노래로 애창되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880 [도로명 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해천길 22-1]
현재 상태 없어짐 / 당시 가옥은 없고 현재 생가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밀양에서 대규모 시위를 주도했으며, 독립신문 밀양지국을 운영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고 감옥생활을 했다. 감옥에서 나온 후 만주로 망명하여 류허현[柳河縣; 유하현] 고산자(孤山子)에서 신흥학교(新興學校)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9년 11월 9일에 지린성[吉林省; 길림성] 파호문(巴虎門) 밖의 화성여관(華盛旅館)에서 김원봉(金元鳳), 황상규(黃尙奎), 곽재기(郭在驥) 등과 조선독립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무장항일투쟁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제1차 목표로 일제요인 암살과 조선총독부, 도양척식회사 등 주요기관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연말에 국내에 보내졌다. 그러나 부산과 밀양에 반입된 폭탄과 무기 등이 일경에게 발각되어, 선언문 등과 함께 압수되었으며, 이에 그는 동지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나와 그는 민족문화사업에 참가하여 표면적으로는 중외일보 기자와 경남주식회사 사장으로 일하다가 1932년 다시 중국 난징[南京; 남경]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조선민족혁명당 간부를 제1기생으로 수료하고, 정치철학 교관으로 근무하였으며, 1934년 3월에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결성하게 됨에 그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독립운동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1935년 4월에는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한 군사간부들에게 사회과학을 교육하는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1936년 8월 민족혁명당이 창립되자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 등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38년 10월 중국 한구(漢口)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조직되자, 그는 한문반(韓文班) 주편위원(主編委員)에 임명되어 기관지 『전고(戰鼓)』를 편찬, 발행하였다. 1942년 5월 타이항산[太行山]에서 마전반격전(痲田反擊戰)에 참전하였다가 동년 6월에 전사하여 타이항산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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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의열단의 창립과 윤세주

윤세주는 20세인 1919년 밀양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일제 경찰이 체포령을 내리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일제는 궐석재판을 열어 그에게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1920년대 민족해방운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3․1운동은 윤세주에게도 새로운 생애의 출발점이었다.
중국으로 망명한 윤세주는 지린[吉林; 길림]에서 같은 마을 선배인 김원봉과 다시 만났다. 이 당시 김원봉은 신흥무관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몰아내기 위한 방법이 무장투쟁밖에 없다는 데에 뜻을 모았지만, 독립 전쟁을 치르기 위해 곧바로 무장 부대를 조직할 수 있는 여건이 못 되었다. 그리하여 1919년 11월 9일 김원봉의 주도 아래 암살과 파괴 활동을 통해 조선인의 항일 의식을 고취하고 민중적 무장 투쟁의 기폭제로 삼을 목적에서 의열단을 결성하였다. 이날 윤세주는 심하게 앓아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창립단원으로 참여했다. 의열단의 단장으로 김원봉이 추대되었고, 그들은 이 자리에서 ‘공약10조’를 결의하였다.

1.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천하기로 함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4. 단체의 의(義)를 앞세우고 단원의 의(義)를 급히 함
5.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매월 한 차례씩 사정을 보고함
7.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부르면 반드시 응함
8. 죽음을 피하지 아니하며 단체의 뜻을 끝까지 따름
9. 하나가 아홉을 위하여, 아홉이 하나를 위하여 헌신함
10. 단체의 뜻을 배반하는 자는 처단하여 죽임


아울러 이들은 ①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③ 대만 총독, ④ 매국적, ⑤ 친일파 거두, ⑥ 적의 밀정, ⑦ 반민족적 친일 관리와 지주 등을 의열단의 ‘일곱 가지 처단 대상[7가살(七可殺)]’으로 규정함으로써 구체적인 암살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파괴 대상을 ① 조선총독부, ② 동양척식주식회사, ③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의 중요기관 등 일제 식민통치 및 수탈기관으로 하였다.
의열단이라는 명칭은 공약 제1조의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천하기로 함’이라는 구절에서 ‘정의(正義)’의 ‘의(義)’와 ‘맹렬(猛烈)’의 ‘열(烈)’에서 따온 것이다.
의열단의 계획이 추진되자 윤세주는 황상규, 김상옥 등과 자금조달의 임무를 띠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는 서울과 밀양을 오가며 동지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등을 파괴할 계획을 세우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1920년 6월 16일 동지들과 거사 계획을 논의하던 윤세주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7년 2월 7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나왔다.

  • 질문1 윤세주가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 이유를 설명해보시오.
  • 질문2 윤세주가 의열단의 창립에 참여하면서도 창립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의열단이 처단해야 할 일곱 가지 대상을 말해보시오.
  • 질문4 ‘의열단’이라는 명칭이 정해진 까닭을 설명해보시오.

읽기자료 2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의 활동

감옥에서 나온 후 고향으로 내려간 윤세주는 밀양청년회 상무집행위원 겸 체육부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그 해 12월에는 신간회 밀양지회가 만들어지자 총무간사를 맡았다. 1928년 7월 밀양청년회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사임하고 신간회 지회활동에 전념했다. 하지만 1930년대 일제의 식민 지배 정책이 강화되고 신간회마저 해산되자 윤세주는 다시 중국으로 떠났다.
그가 중국에 다시 도착했을 때, 의열단의 투쟁노선은 개별적 폭력투쟁에서 조직적·집단적인 무장투쟁 노선으로 바뀌었다. 의열단이 1932년 10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얻어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자, 윤세주는 교관이 되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10여살 아래의 후배들과 더불어 1기생 26명 중의 한 사람으로 입학했다. 이 때 이육사도 윤세주의 권유로 이 학교에 입학했다.
1933년 윤세주는 간부학교 졸업식을 맞았다. 졸업생에게는 다음과 같은 사명이 주어졌다.

1. 널리 동지를 획득하여 조선과 만주 각지에 의열단 지부를 조직한다.
2. 노동자, 농민, 학생층을 기본으로 하층에서 상층으로 조직을 확대 강화하고 사상통일과 실력양성을 기하여 민중의 총동원에 노력을 경주한다.
3. 2기생을 모집한다.
이 외에 각 개인에 따라 특별사명이 부과되었다.


의열단 창립단원으로 국내활동의 경험과 탄탄한 사회과학 소양을 쌓고 있던 윤세주는 졸업 후 간부학교의 교관으로 뽑혀 1933년부터 2기생 교육에 나선다. 윤세주는 조직론, 한국민족 해방운동사, 의열단 운동사, 유물사관, 정치경제학 등 사회과학 과목을 맡았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강의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김원봉과 함께 졸업생에게 공작임무를 지도하는 포괄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제 윤세주는 ‘의열단의 2인자’, 또는 ‘의열단의 정신’으로 불릴 만큼 그 역할과 위상은 대단했다.

  • 질문1 고향에서 활동하던 윤세주가 다시 중국 길에 오른 배경을 설명하시오.
  • 질문2 윤세주의 권유로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한 문학가는 누구인가요?
  • 질문3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교관으로서 윤세주가 강의를 맡았던 교과목을 말해보시오.

읽기자료 3

민족혁명당 창당

1932년 11월 상하이에서 의열단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 한국혁명당, 조선혁명당, 조선의열단, 한국광복단동지회 등 5개 단체 대표들이 모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만들었다. 이 단체는 “일체의 반일혁명세력의 단결과 통일”을 바탕으로 “직접 군사적 행동”을 전개하기 위해 만들어진 민족협동전선이었다. 각 단체의 협의 기구인 대일전선통일동맹의 가맹단체를 해산하고 단일조직으로 통합하려는 노력이 한창이던 1934년, 윤세주는 대일전선통일동맹 중앙집행위원회 6인 상무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대일전선통일동맹에 소속된 5개 단체는 1935년 7월 마침내 민족혁명당을 결성했다. 통합의 주도권은 가장 많은 청년활동가를 양성한 의열단이 행사했다. 새로운 단일당으로서의 민족혁명당은 첫째 일본의 침략 세력을 박멸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완성할 것, 둘째 봉건세력 및 일제의 반혁명세력을 숙청하고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할 것, 셋째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탈하는 경제 제도를 폐지하고 국민생활상의 평등제도를 확립할 것 등의 3대 원칙 아래 활동을 시작했다. 윤세주는 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서 김원봉과 함께 서기부에서 일하였고, 한글판 기관지 『민족혁명』의 편집책임을 맡았으며, 또 다른 기관지 『전도(前途)』의 편집에도 참여했다.
윤세주는 1935년 10월 김규식이 뒤를 이어 민족혁명당의 훈련부장에 취임했다. 훈련부는 당원훈련과와 민중훈련과로 편제되었다. 시급한 것은 당원의 훈련이었다. 광범위한 민중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는 대중 곳곳의 생활현장에 파고 들어가 대중 속에서 일할 일꾼들을 키워내야 했다. 윤세주는 훈련부의 명의로 팸플릿을 작성하였다. 여기에는 ‘① 언론․행동을 규율화한다. ② 연구를 계통화한다. ③ 생활을 집중화한다. ④ 당을 절대 신앙한다. ⑤ 혁명적 인생관을 양성한다.’는 다섯 가지 목표를 제시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청년당원과 함께 조․중 연대를 모색하면서 선전활동과 당원 확보에 주력하였다. 그해 말 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은 통일전선체로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을 만들었다.

  • 질문1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한 5개 단체를 모두 말해보시오.
  • 질문2 민족혁명당의 3대원칙을 말해보시오.
  • 질문3 윤세주가 편집책임을 맡았던 민족혁명당의 기관지는 무엇이었나요?
  • 질문4 민족혁명당 외에 조선민족전선연맹에 참여한 두 단체를 말해보시오.

읽기자료 4

조선의용대에서의 활동

1938년 10월 우한[武漢; 무한]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군사력으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다. 중국 본토에서 처음으로 독립적인 한인 무장부대가 만들어졌다.
창립 당시 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을 총대장으로 하고 박효삼과 이익성을 각각 1․2지대장으로 하여 편성되었다. 이 당시 윤세주는 의용대 본부에 배속되어 훈련주임과 한글판 기관지의 주간을 맡았다. 그러나 조선의용대가 건립된 지 한 달도 채 못 되어 우한의 방어선은 무너지고 조선의용대는 우한을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철수하는 마지만 순간까지 시내 곳곳에서 선전 작업을 벌였다.
조선 의용대는 창설 후 2년여 동안 벌인 활동이 다양했다.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에 대한 선전, 민간인에 대한 선전, 포로 심문, 적의 문건 번역, 선전간부 교육 등의 활동을 전개했고, 때로는 직접 전투에 함가하기도 했으며, 전투 중에 무장 선전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조선의용대의 작전 지역은 6개 전구(戰區) 13개 성(省)에 걸친 것으로서 의용대의 규모와 병력에 비해 지극히 광대한 것이었다. 조선의용대는 6만여 명의 간부를 훈련시켰고, 한․중문 소책자 5만 부 외 전단 51만 장, 표어 40만 장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그러나 조선의용대의 활동지역은 조선인이 거의 거주하지 않는 지역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한국 동포에 대한 직접적인 선전과 공작은 지극히 부진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조선의용대가 독자적인 무장부대가 아니라 중국군에 배속된 선전대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의용대로서는 심각한 역량의 분산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의용대 내에서 불만과 반성으로 나타났고 분산된 역량을 집중할 방안으로 화북지방을 주목했다. 화북지방에는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수많은 조선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1940년 11월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에서 종래의 선전 임무에서 벗어나 직접 전투에 참가할 것과 활동 지역을 조선인이 급속히 늘고 있는 화북과 화중지역으로 옮기고 적 후방에서 공작을 전개하자고 결의했다. 김원봉의 뜻과는 달리 북상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부분의 대원들이 북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를 바랐고, 또 조선의용대 내에 이와 같은 논의를 주도할 만한 핵심그룹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용대 제2지대 내에 건설된 중국공산당의 지하조직이 화북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국공산당의 한인당원들과 연락을 하면서 조선의용대의 북상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1941년 봄 제2지대를 시작으로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화북지역으로 북상하는 길에 올랐고, 뒤이어 1․3혼성지대도 이동하였다. 이 때 1․3혼성지대의 정치위원인 윤세주도 오랜 동지인 김원봉과 결별하면서 화북지방으로 이동하였다.

  • 질문1 중국 관내에서 처음으로 성립된 한인 무장투쟁 단체를 말해보시오.
  • 질문2 조선의용대가 결성된 후 2년 동안 벌였던 항일 투쟁의 활약상을 설명해보시오.
  • 질문3 조성의용대의 대원들이 화북으로 북상하려 했던 배경을 말해보시오.

읽기자료 5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조선의용대원들이 북상하기 이전 타이항산에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라는 청년조직이 1941년 1월에 이미 결성되었다.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화북 각지에 산재한 청년들을 동원하여 일치단결로서 위대한 민족해방운동에 참가시켜 투쟁케 하는 것”을 창립선언을 통해 자신의 사명으로 천명한 청년들의 대중단체였다. 주요활동으로는 통일전선 형성의 가교 역할, 전체 민족해방운동의 전투적 행동부대로서의 역할, 전체운동의 기간활동가를 육성하는 역할 등 세 가지 방면에 집중되었다. 그 중에서도 통일전선 형성의 가교역할은 화북조선청년엽합회의 주된 사명이었다.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국민당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의 일부분을 흡수함으로써 통일전선체로의 성격을 크게 강화했다. 윤세주를 비롯하여 박효삼, 양민산(김민산), 이춘암 등 열렬한 민족주의 투사였던 인물들이 적극적인 항일의 길을 찾아 화북지방으로 떠났다. 특히 윤세주는 김원봉과는 같은 마을 출신으로 중국으로 망명한 이래 김원봉의 오른팔과도 같은 존재였다. 화북조선청년연합회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간에는 공개적인 조직 관계는 아니지만 양자는 구성원들이 동일했다. 의용대원들은 그대로 연합회에 가입하고, 연합회원들은 역시 의용대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한편 화북조선청년연합회에서는 간부양성에 큰 힘을 기울였다. 북상해온 조선의용대원들의 화북지대로의 개편이 있은 직후인 1941년 8월 조선의용대 간부훈련반을 창설했고, 간부훈련반 얼마 지나지 않아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華北朝鮮靑年革命學校)로 확대되었다. 이 학교의 교장은 화북조선청년연합회 회장인 무정(武亭)이 맡았으며, 윤세주는 최창익 등과 함께 이 학교의 교사로 부임했다. 교사진은 간부양성을제1의 과제로 삼았던 화북조선청년연합회 답게 우수하고 경험이 풍부한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는 “조선출신 청년 군정간부를 양성하여 조국 조선의 독립에 헌신토록 한다.”는 목표 아래 16세 이상의 조선 청년 남녀를 대상으로 재학 중의 학비, 생활비 일체를 지급하고, 졸업 후에는 “조선독립운동에서의 적당한 지위를 부여”하거나 고급학교에의 입학을 알선했다. 이 학교에서 윤세주가 어떤 과목을 담당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그의 경력으로 볼 때 조선독립운동사를 담당하여 청년들에게 민족혼을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일본군과 여러 차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42년 5월 일본군이 주력부대 3만여 명을 동원하여 이른바 ‘5월 소탕 작전’을 획책하여 중국공산당의 타이항산 근거지를 공격하였다. 조선의용대도 팔로군(八路軍)을 도우며 분투하였다. 이 전투야말로 연안지대에 있는 전 독립운동세력의 운명을 결정짓는 싸움이었다. 조선의용대의 주요 임무는 비전투요원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때 윤세주는 연로한 김두봉과 그의 가족들, 폐렴으로 앓아 누운 진광화 등과 함께 뒷산 관목 숲에 숨어 있었다. 곧 일본 침략군에 발견되어 총격을 받아 쓰러진 뒤, 동지들의 애끊는 소망에도 불구하고 6월 3일 42세로 고난에 찬 생애를 마치고 말았다. 김원봉이 애도했듯이 윤세주의 죽음으로 “화북 동지들은 가장 우수한 영도(領導)의 인물을 잃었고. 전조선혁명진영은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 셈이다.”
윤세주의 삶은 그 자체가 민족해방운동사의 한 단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민족해방의 길을 저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어려움이 닥칠수록 굳센 발걸음을 내딛었고, 끊임없는 이론 학습과 자기 단련 속에서 올바른 민족 해방 운동의 길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 질문1 창립선언을 통해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자신의 임무로 천명한 내용을 말해 보시오.
  • 질문2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에서 윤세주가 담당했던 역할들은 무엇이었나요?
  • 질문3 김원봉은 윤세주의 죽음을 맞은 심경을 어떻게 표현했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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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조선의용대의 기념사진이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윤세주이다.

  • 질문1 조선의용대가 결성된 후 대원들끼리 앞으로의 투쟁 방향에 대해 서로 이야기했을 법한 내용을 대화 형식으로 써봅시다.

시각자료 2

독립운동 당시 윤세주의 모습이다.

  • 질문1 윤세주의 입장이 되어 여러분과 같은 청소년들에게 편지를 써봅시다.
  • 질문2 윤세주의 행적을 간단히 정리해보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장래 희망을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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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일제 강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한 무장 독립 투쟁, 실력 양성 운동 등 여러 활동을 찾아서 정리하고, 여러분은 어떤 투쟁 방식을 선택할지 생각해보고 모둠별로 토론해봅시다.
모둠활동 2
국외 중국과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 단체들을 조사해보고, 여러 갈래로 나뉘었던 단체들이 통합되어 나가는 과정을 도표로 만들어봅시다.
모둠활동 3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선정해보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하는지 모둠별로 토론하여 발표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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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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