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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영남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3․1운동 만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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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개가 곧고 깨끗하다 한 것은 차라리 타고난 목숨을 끊을 수 있다는 뜻이요. 방법이 있는데도 방관하는 것은 잘못된 폐단을 영구히 버려두는 일일 것입니다. 이제 하늘의 명과 사람의 뜻이 서로 만나게 되어 나라의 독립을 울부짖게 되었으니, 이천만 동포가 모두 희생이 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젊은이들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오로지 썩은 조종(朝宗)을 깨끗이 쓸어내고 만민이 법을 반드시 바로잡고자 하는데, 조상이 다르다 하여 생각이 같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들 일본은 더욱 무력으로 가로막아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으니 엄숙하신 하나님이여! ……

밀양에서는 3월 13일의 읍내 시위를 시작으로 4월 초순까지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밀양의 만세시위를 이끌었던 전홍표는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는데 그 즈음 위와 같은 내용의 ‘하늘에 고하는 글[告天文(고천문)]’을 짓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일제의 무력적 병합과 무단 통치 그리고 일제의 폭력적 진압을 목격하면서 전홍표는 조선을 해방시키는 방법은 오로지 무장투쟁이라고 천명하고 국외로 망명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192 [도로명 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347]
현재 상태 변형 / 당시의 시장은 확장된 형태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여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조선인 가운데 세력이 크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을 끌어들여 면(面)의 운영자로 임명하여 말단 행정 구역인 면(面)의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당시 면장은 헌병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법령이나 서류를 전달하고, 세금을 내도록 독려하며, 사람들의 이동과 움직임을 보고하는 등 식민지배체제의 기초적 역할을 하였다.
일제 강점기 농민들에게는 각종 세금과 같은 일제의 수탈이 큰 부담이었다. 이 시기 농민들은 토지세, 호세(戶稅), 토지에 대한 부가세, 시장세, 연초세(담배세), 주세, 각종 조합비 등 여러 종류의 세금을 내야만 했고, 지주와 마름의 수탈도 고통스러웠다. 따라서 농민들이야말로 식민 지배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식민지 조선에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의 개최, 미국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 선언, 러시아혁명의 성공 등 변화의 물결이 몰려들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민족 사이에서는 미국 등 승전국들의 도움을 받아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아졌다. 이에 더하여 1919년 1월 22일 고종 황제가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이것이 일제의 독살 때문이라는 소문이 널리 유포되어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고종 황제에 대한 추모와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
3․1운동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주요한 종교 교단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종교계 지도자들은 독립이라는 민족적 대의명분 앞에서 교단과 종파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민족적 대연합을 달성하였다. 1919년 3월 1일 종로 태화관과 탑골공원에서 각각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뒤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는 각 지역에서 매일 평균 10회 이상씩 일어났다. 3월 1일에 시작된 만세운동은 중앙에서 점차 지방으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확대되어 5월 말까지 전국 거의 모든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총 시위 건수로는 2천 회가 넘었고, 참가 인원으로는 연인원 2백 만 명이 넘었는데 이는 전체 인구 1천 9백만 명 가운데 10%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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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밀양 만세시위의 기획

밀양에는 일찍이 일합사, 연무단 등의 비밀결사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으며, 동화학교, 정진학교 등이 설립되어 민족교육을 담담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길러진 항일 독립 의식이 3․1운동으로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만세시위는 치밀한 사전 준비와 계획 아래 조직적으로 추진되었다. 시위의 중심은 윤치형, 윤세주 등과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 기독교인과 농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었다.
밀양의 3․1만세시위는 윤세주와 윤치형을 통하여 기획되었다. 서울에서 3․1만세시위를 경험한 두 사람은 귀향한 뒤 전홍표를 찾아가 서울의 시위 상황을 보고하고 밀양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상의하였다. 두 사람의 제의에 전홍표는 적극 찬성하였고 시위 계획과 실행 방안을 제시하였다. 준비과정에서 시위의 규모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음력 2월 7일(양력 3월 8일) 밀양 장날을 기해 시위를 전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시일이 너무 촉박하므로 그 다음 장날인 13일로 거사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윤치형과 임무를 나눈 뒤에 윤세주는 김병환, 정동찬, 김소지, 박만수, 이장수, 최종관, 박소종 등 10여 명의 선후배 및 동창, 친구들을 끌어들여 연판첩에 서명토록 하고 수차 회합하며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들은 밀양면과 부북면사무소에 들어가 몰래 꺼내온 등사판을 들고서 읍내 뒤편 아북산으로 올라가 병풍을 쳐놓고 밤 세워 독립선언서 수백 매를 찍어냈다.
또한 김악이, 이복수 등 여성 기독교인들의 조력으로 종이 태극기도 수백 폭 만들어서 선언서와 함께 윤세주의 집에 감추어 두었다. 윤세주의 세 살 아래 장조카인 윤차암(후에 태선으로 개명하였음)이 당시 공립간이농업학교에 다니면서 밀양소년단장이기도 했는데, 그가 12일 밤에 단원들을 동원하여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여러 곳에 은밀히 날라다 전달해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 질문1 최초로 밀양의 만세시위를 계획했던 두 사람은 누구인가요?
  • 질문2 밀양의 만세시위가 3월 8일에 일어나지 않고 13일에 시작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밀양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등사기로 독립선언서를 찍었던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4 감추어 두었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여러 곳으로 날라다 주었던 인물은 누구였나요?

읽기자료 2

영남 최초의 만세 시위

치밀한 준비 끝에 3월 13일 밀양장터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그날 오후 1시 경에 윤세주와 동지들은 내일동 장터의 김병환의 쌀가게 앞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독립만세’라고 크게 써넣은 깃발과 태극기를 펴들고 “대한독립 만세!”을 외치니 삽시간에 군중이 모여들었고, 종이 태극기와 등사본 독립선언서가 재빨리 배부되어 군중들 손에 쥐어졌다.
1시 30분경이 되어 장터 앞 큰 길에 운집해 있는 1,000명 이상의 주민들 앞에서 윤세주가 독립선언서를 꺼내들고 우렁찬 목소리로 낭독했고, 그와 동지들의 선창에 따라 주민들은 일제히 “대한독립 만세”를 삼창했다. 김소지가 나팔을 불며 고무했으며, 주민들은 ‘독립만세’를 써 넣은 깃발을 앞세워 각자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밀양읍내 거리를 누볐다.
거리를 행진하자 시위 군중은 거의 3,000명 가까이 늘어났으며 함성은 그칠 줄을 몰랐다. 행진 도중 시위대의 일부는 밀양공립보통학교 교정으로 들어가 운동장을 내달리며 만세를 외쳤고, 유리창 문을 열고 교실 안으로 태극기 수십 매를 던져 넣으며 학생들을 선동하였다.
예상치 못했던 만세시위에 놀라고 기세에 압도당한 내일동의 헌병분견소에서는 부랴부랴 부산의 헌병분대로 응원을 청했다. 부산 헌병분대에서는 헌병수비대원 10여 명을 보내 밀양 헌병분견소의 병력에 합세하였다. 병력이 증파되자 헌병들은 시위대열 속으로 뛰어들어 무차별로 폭력을 행사하고 총검을 휘두르며 진압에 나섰다.
격렬하게 전개되던 시위는 오후 5시가 되어서야 끝났고 군중들은 해산했다. 이날 시위로 시위현장에서만 80여 명이 체포되었고 그 가운데 7명이 주동자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처음 시위를 계획하였던 윤세주와 윤치형은 재빨리 몸을 피하는 바람에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 질문1 밀양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된 날짜와 시간을 말해보시오.
  • 질문2 밀양장터 만세시위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인물은 누구인가요?
  • 질문3 만세 시위 현장에 모인 인원은 최대 얼마였나요?
  • 질문4 밀양장터 만세시위로 체포된 사람은 모두 몇 명인가요?
  • 질문5 시위 주동자로 지목된 사람의 수를 말해보시오.

읽기자료 3

시위의 확산

살벌한 공기가 읍내를 감돌았지만 시위는 이튿날에도 다시 일어났다. 밀양고등보통학교 학생 160명이 일제히 궐기하여 교사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거리로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여기에는 2백 명 이상의 읍내 주민들이 호응했고 일부는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더욱 폭압적인 진압으로 시위는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고, 주동인물은 전날처럼 가차 없이 체포 대상이 되었다. 연이어 감행된 시위에 당황한 일제는 급기야 부산의 군용철도 엄호대까지 밀양으로 급파해서 철통같은 경계망을 펴도록 했다.
이틀간의 밀양 읍내 만세시위는 4월 초순까지 밀양지역 곳곳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의 자극제요 도화선이 되었다. 3월 15일에는 밀양유림회가 밀양강변 솔밭 광장에서 만세운동을 시작하여 거리로 나가자 기독교인 5천 여 명이 합세하여 만세를 불렀고, 3월 20일에는 안희원의 장례행렬이 읍내 장터를 지날 때 주민들 수천 명이 거리에서 또는 집에서 만세 소리를 외쳤다. 4월 2일 야간에는 밀양소년단원들 50여 명이 학교에서 시작하여 읍내 청년들과 합세한 뒤 만세를 불렀고, 4월 6일에는 부북면 춘화리에서 면내 3개 마을 주민 300명이, 4월 7일 장날에는 밀양면 30리 밖의 대룡각(臺龍角)에서 군중 약 3,00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단장면 대룡리에서는 장날인 4월 4일에 표충사(表忠寺) 승려들의 주도로 수 천 명 군중이 만세를 외쳤다. 그들은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격투극도 불사하는 치열한 항쟁을 벌였는데, 이날의 시위로 1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364명이 체포되었다.

  • 질문1 밀양장터 만세가 일어난 바로 다음날 시위가 일어났던 지역을 말해봅시다.
  • 질문2 헌병주재소까지 습격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승려들이 소속된 절은 어디인가요?
  • 질문3 헌병 주재소까지 습격하며 시위를 주도했던 승려들이 소속된 절은 어디인가요?

읽기자료 4

밀양 만세시위로 인해 처벌을 받은 사람들

3월 13일 밀양지역 만세시위로 기소된 주동자들에 대해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는 다음과 같이 판결하였다.
○ 징역 1년 6개월
윤세주(농업, 20세), 윤치형(농업, 27세) - 결석 공판
○ 징역 6개월
정동찬(농업, 22세), 김병환(미곡상, 30세), 김소지(농업, 22세), 박만수(농업, 23세), 이장수(농업, 23세), 최종관(농업, 21세), 박소종(농업, 23세)
○ 징역 4개월
건재호(고용, 22세), 설만진(음식점 영업, 26세), 정동준(농업, 22세)
○ 징역 3개월
윤보은(농업, 22세)
○ 태형
김상득(고용, 19세), 박작지(자동차수선직공, 23세), 엄청득(요리업, 22세), 노재석(농업, 20세), 김상이(농업, 22세), 윤방우(농업, 24세), 양쾌술(농업, 24세)
직업 분류별로 보면 농업 14명, 고용 2명, 미곡상 1명, 음식점 영업 1명, 자동차수선직공 1명, 요리업 1명으로 농업종사자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전홍표, 윤치형, 윤세주 등은 만세시위를 주도적으로 계획하여 일으킨 뒤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윤세주는 1920년 6월 의열단원으로 폭탄을 가지고 국내에 잠입하여 의거 장소를 물색하던 중 발각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는데, 이때의 형량은 밀양 만세시위와 관련하여 궐석공판에서 받은 징역 1년 6개월이 추가된 것이었다.

  • 질문1 밀양 만세시위로 인하여 일제가 처벌한 인원은 모두 몇 명인가요?
  • 질문2 전홍표와 윤세주 등은 처음에 어떻게 일제의 처벌을 면할 수 있었나요?
  • 질문3 밀양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이후 의열단에 가담하여 밀양폭파사건을 기도했던 인물은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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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밀양장터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 질문1 밀양장터에 모인 사람들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설득하는 짧은 문구를 만들어 봅시다.
  • 질문2 당시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던 밀양 사람의 입장에서 하루의 일정을 일기 형식으로 정리해봅시다.

시각자료 2

밀양의 3․1 만세시위를 재현하는 행사 사진이다.

  • 질문1 오늘날 밀양 사람들이 3․1만세시위를 재현행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봅시다.
  • 질문2 3․1 만세 시위를 재현하는 행사가 현재의 밀양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말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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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비폭력적으로 전개되었던 밀양 지역의 만세시위는 막바지에 이르러 폭력적인 모습을 띠기도 했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비폭력 시위와 폭력 시위의 방법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좋은 방법인지 모둠별로 토론하여 발표해봅시다.
모둠활동 2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던 밀양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의 행위를 변론하는 글을 모둠별로 작성해서 발표해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밀양의 만세시위를 계획하는 과정을 짧은 역할극 형식으로 재현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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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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