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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학생의거지 - 부산공설운동장(부산항일학생운동의 출발지)

도입

기념탑을 세우면서
부산항일학생의거는 1940년 11월 23일 당시 부산공설
운동장 현 구덕운동장에서 개최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에서 일제의 한국 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편파
판정이 도화선이 되어 발생하였다. 동래중학과 부산 제2상(고를)
중심으로 1,000여 명의 학생들은 격렬한 가두시위를 전개하고
심판장 일본군 육군 대좌 노다이의 관사를 습격하였다. 이 과정
에서 학생 200여명이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고 주모자로
지목된 학생 15명은 투옥되었다. 이 의거는 일제 말기 전시체
제하에 전개된 국내 최대 규모의 항일학생독립운동이었다.
만시지탄은 있으나 이제 선배님들의 드높은 애국심과 의연함에
깊이 머리 숙이며 그 숭고한 뜻을 이 탑에 담아 시민정신의 큰 뿌
리로 승화시켜 영원히 기리고자 한다.

2004년 11월 23일
부산항일학생의거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 강대민 삼가 짓고 김진희 삼가 쓰다


윗글은 2004년 11월 23일 부산어린이대공원에 세워진 부산항일학생의거기념탑의 비문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3가 210
현재 상태 변형, 운동장 건물은 후에 모두 신축된 것이다.

1940년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입장식은 전년도에 우승한 학교(동래중학교)가 먼저 입장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를 무시하고, 일본인 학교를 먼저 입장시켰다. 경기에서도 한국인 학교에 불리한 코스를 배정하거나 차별적 편파 판정이 계속되었다. 동래중학과 부산 제 2상업학교 학생들의 항의도 번번이 묵살 당하였다. 폐회식에서 노다이[乃台兼治] 심판장이 일본인 학교를 우승교로 발표되자, 판정의 부당함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항일의거 시작의 신호탄이 되었다. 두 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1,000여 명은 시가행진과 함께 노다이 관사를 습격하였다.
학생들은 영주동 노다이 관사에 도착하여 투석으로 외등과 관사의 유리창을 모두 깨어버렸다. 밤 10시경, 부산 헌병대는 각 경찰서에 급하게 명령을 내려 학생들을 현장에서 잡아들였다. 11월 24일 일제 경찰과 헌병들에 의해 학생 200여 명이 검거되었고, 주모자 15명의 투옥과 퇴학 21명, 정학 44명, 견책 10명 등 징계가 있었다. 특히, 김선갑, 김명수는 출옥 2주일 만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1920년 6월 부산공설운동장이 개설되었다. 1963년 5월 육상경기장과 야구장에 스탠드 시설 설치, 1971년 3월에는 구덕실내체육관이 건립되었다. 1982년 1월 구덕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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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일제의 황국신민화 교육

일제는 3․1운동 이후 한국에 대한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지배를 위해 교육을 통한 정신 개조를 강화하였다. 한국어, 한국의 역사, 한국의 관습 등을 해체하고 천황제 국가이념을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일제는 한국인을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어갔다. 또한 1930년대의 만주침략 이후부터 일제는 항일세력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과 황민화교육을 강요하여 조선에 대한 전시 지배체제를 강화하였다.

  • 질문1 3․1운동 이후 일제의 교육 방침은 어떻게 변화하였나요?
  • 질문2 일제의 황국신민화 교육이 강화된 시점은 언제인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2

부산 지역의 여건

부산지역은 과거부터 일본인들의 왕래가 빈번하였으며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수가 많았다. 아울러 일본인들의 경제적인 이익과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일제가 꼭 확보해야할 지역이었다.
일제는 1877년 1월 30일 ‘부산항조계조약’을 체결하여 행정권의 독점 행사, 군사 병참기지 사용 등을 통하여 부산 지역을 식민 정책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일본인에 대한 제도적 보호와 경제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부산이사청을 설치하였다.
부산거류지의 설정은 일제가 최초로 한국에 대한 외교정책을 구체화한 것이다. 이는 일제가 중국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을 차지해야 하고, 한국의 지배를 위해서는 먼저 부산 지역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부산지역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일본의 지배 정책이 집중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부산지역은 일제의 대륙 진출의 출발점이자 군수 물자의 수송기지였다.

  • 질문1 일제가 부산항조계조약을 체결한 목적을 써봅시다.
  • 질문2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이 부산지역에 집중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학생군사훈련(1940.11.21.∼11.22.)

만주침략과 중․일 전쟁 이후 1940년대, 일제는 부산지역의 소학교에서 고등교육기관까지 군사교육을 강행하고 중학교 이상의 학생들에게 군사 교련을 필수 교과목지정하여 교육시켰다. 학생들은 집총훈련, 행군, 야외연습, 방공연습 등의 군사 교육을 다른 지역보다 강도 높게 시행되었다. 이와 같은 지역적인 특수성으로 부산지역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다른 지역보다 강렬하였고 능동적이었다.
1940년 11월 21일과 22일 양일간에 걸쳐 경남 지방의 갑종(甲種) 중학생들을 동원하여 김해평야에서 합동 야외 훈련을 명분으로 모의 전투를 실시하였다.
1940년 11월 21일 부산병참기지사령관 노다이 대좌의 총지휘 아래 경남학도연합 군사대연습이 있었다. 경남의 중등학교를 동군과 서군으로 나누어 실시되는 모의 전투훈련이었다. 훈련 중 노다이는 보급품과 훈련 내용에 있어서 편파적인 민족차별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훈련 종합평가 시에도 일본인 학교를 격찬하였다. 노다이는 동래중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 두 학교만을 험악한 산지에 배치하고 행진할 때에는 산길을 우회시켜 휴식을 주지 않았으며 필요 없이 구보를 시키기도 하였다. 야영에서 일본인 학교와 차별하여 천막과 연료 등을 적게 주었다. 아울러 강평에서도 두 학교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고 일본인 학교를 칭찬하여 다음날 11월 23일 개최되는 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에서 한국인 학교 학생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자 하였다. 한국인 학생들은 노다이의 불공정한 행동에 분노하였다.

  • 질문1 학생들이 받은 군사훈련에는 어떤 내용이 있었나요?
  • 질문2 경남학도연합군사대연습에서 노다이는 어떤 방법으로 조선인 학생들의 체력과 사기를 저하시키려고 하였는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4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1940.11.23.)에서 터진 한국인 학생의 분노

2일간의 훈련을 마친 다음날인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가 열렸다.
경기 당일 날 대회 규정에 의해 경기장 입장은 전년도 우승교인 동래중학교가 선두에 입장하게 되어 있었으나, 이를 무시하고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와 마산중학교 순서로 입장시켰다. 동래중학교는 심판장 노다이에게 항의하였으나 묵살 당했다. 한국인 학생들의 민족적 차별에 대한 분노는 고조되었다. 경기에서 한국인 학생들이 담가(擔架) 운반, 줄 당기기, 행군경기, 턱걸이, 넓이 뛰기 등의 종목에서 전력투구하여 일본 학생들보다 단연 우세하였다. 이러한 결과에 당황한 일본인 심판들은 전년도의 굴욕을 씻기 위해 고의로 규칙 위반, 복장, 태도 불량 등을 내세워 득점을 취소하며 방해하고 심지어는 실격시키기까지 하는 치졸한 행위로 일관했다.
오후 5시경 경기가 끝나고 성적 발표가 있었다. 이 대회의 심판장인 노다이는 우위를 차지한 동래중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를 각각 2위와 3위로 떨어뜨리고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를 우승으로 발표하였다. 이에 한국인 학생들의 의분이 폭발하여 순식간에 운동장은 수라장이 되고 항일의 전쟁터로 변해 버렸다. 심판을 맡은 일본군 장교에게 항의하고 일본일 교사를 구타하기도 하였다. 당시 동래중학교의 교사인 김영근과 허현의 끈질긴 설득으로 운동장에서는 일단 해산했으나 한국인 학생들은 공설운동장에서부터 독립만세를 외치고 아리랑, 황성옛터, 도라지타령, 쾌지나 칭칭등 우리 민요를 합창하면서 보수동 네거리를 지나 대청동, 부평동 쪽으로 시가행진을 벌였다.

  • 질문1 1940년 11월 23일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가 열린 장소는 어디인가요?
  • 질문2 노다이 대좌가 벌인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의 사례를 써봅시다.
  • 질문3 노다이 대좌에 대해 조선인 학생들은 어떻게 대항했나요?
  • 질문4 여러분이 조선인 학생이라면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해봅시다.

읽기자료 5

노다이 관사 습격

200여명의 동래중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들이 영주동 영주터널 입구에 있는 노다이 관사를 습격하였다. 노다이의 집에 도착한 학생들은 현관까지 밀고 들어갔다. 동래중학교의 이종영, 정두열 두 학생이 현관문을 박차며 노다이를 불렀으나 노다이는 도지사와 요정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 없었다. 그러자 동래중학교의 조영식이 현관 앞 디딤돌로 현관 유리문을 부숴버렸다. 이와 동시에 200여명의 학생들이 노다이의 집에 돌 세례를 퍼붓고, 동래중학교의 장종기, 김인규 등이 외등을 박살냈다.
일제의 민족적 차별에 울분을 참지 못한 학생들은 부산중학교와 일본인 심판관의 관사를 습격하여 방화하려고 하였으나 저녁 9시경 자진하여 해산하기로 하였다. 이때 노다이 관사 습격의 거사에 대하여 일경의 심문을 받을 때는 일체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결의 하였다.

  • 질문1 200여명의 학생이 노다이의 집을 습격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학생들이 노다이의 집에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6

참가 학생에 대한 일제의 조치

학생들이 해산할 무렵 부산 헌병대와 경찰서에는 비상 소집이 내려져 가담 학생에 대한 무자비한 검거를 단행하기 시작하였다. 귀가 도중 많은 학생이 체포되어 부산 시내 경찰서의 유치장은 물론 취조실, 경찰서 무도관 등에 200여명의 학생들이 분산 수용되었다. 다음날인 11월 24일은 휴업이었으나 아침 8시 학교 측은 학생들을 긴급 소집하였다. 각반 담임은 개개인에 대한 진술서를 받고, 학교에 파견된 형사는 진술서를 토대로 사건에 가담한 학생들을 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연행된 학생들은 손가락에 막대 끼우기, 물 먹이기 고춧가루 넣기, 비행기 계단 오르기 등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11월 24일 동래중학교 9명, 부산제2상업학교 6명, 총 15명이 송치되어 1심에서 미성년자 3명을 제외한 12명이 징역 8개월을 언도 받았다. 한편 학교에서는 사건 관련 학생에 대해 자체 처벌을 하였다. 동래중학교는 퇴학 13명, 정학 30명, 졸업생 가운데 교련 검정 합격증을 받지 못한 학생이 30여명 가량 되었고, 부산제2상업학교는 퇴학 12명, 정학 10명, 견책 10명의 징계를 받았다. 사건이 마무리되자 동래중학교 하라다 교장은 사표를 냈으며, 부산제2상업학교 교장은 함경북도 경성중학교로 전근되었다.

  • 질문1 연행된 학생들에 대한 일경에 취한 조치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주모자 15명에 대한 일본 법정은 어떤 판결을 내렸나요?

읽기자료 7

부산 학생 의거의 의의와 확산

부산학생의거는 초기에는 조직적이지 못했지만 이후 동래중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들의 민족적 차별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여 노다이 관사 습격으로 이어졌다.
일제 말 폭압적 지배체제에서 학생 운동이 일반적으로 소규모·비밀리에 활동한 것과는 달리, 부산학생의거가 대규모·물리적으로 저항했다는 것은 민족의 독립을 위한 부산지역 학생들의 꺾이지 않은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부산지역 학생들의 이러한 의거는 일제침략 이후 계속되어온 항일정신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이후 더욱 강화되는 폭압 속에서도 민족정신을 지켜나갈 수 있었던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일제는 학생들에 대한 탄압과 통제를 더욱 강화되었으나 반일 항쟁은 계속되었다. 동래중학교에서는 봉안전 오물사건, 조선독립당 사건, 순국당 사건, 울산 비행장 사건, 부산제2상업학교에서는 무궁단 사건으로 이어졌다.

  • 질문1 부산 학생 의거의 역사적 의의를 써봅시다.
  • 질문2 부산 학생 의거 이후 부산에서 전개된 학생 운동의 내용을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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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노다이 사건 기록화’이다.

  • 질문1 노다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어디인가요?
  • 질문2 그림을 보고 당시의 상황에 대해 써봅시다.

시각자료 2

사진은 노다이 관사가 있었던 자리의 모습이다.

  • 질문1 노다이는 어떤 인물이었나요?
  • 질문2 학생들이 노다이 관사를 습격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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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학생 단체의 이름으로 노다이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부산학생의거로 일제에게 검거된 주동자를 위한 변호인이 되어 변론문을 작성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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