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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한국에서 일본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반란이 많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많은 정파들은 문화적으로 원시적인 이웃나라 사람들에 의한 한국의 억압에 맞서 싸우고 있다. 한국의 여러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기생충들에 의해 나라가 강제로 잠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결사를 조직했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투쟁은 우리를 자유의 삶으로 인도할 최후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일본이 한국에서 물러나거나 우리 한민족이 불행과 배고픔 그리고 죽음의 나락에 떨어지는 일, 이 둘 중의 하나가 남아 있을 뿐이다.”
- 1927년 벨기에 발표문 -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30-7 [도로명 주소: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예전로 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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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변형 / 현재는 거주자가 없는 상태이다. 당시의 원형에서 조금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
김법린은 범어사 승려 출신으로 3․1운동 당시 동래장터 만세시위에 관여하였고 1919년 4월 상하이로 갔다. 1920년 의용승군을 계획하고 국내로 귀환했으나 좌절되었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 파리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1928년에 귀국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어학회가 주관하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으로 참가하였다. 1930년에는 만당을 조직하여 일본 도쿄 지부 책임자로 활동했고, 1938년 만당 사건으로 체포되었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광복 후 불교중앙총무원장으로 불교혁신운동에 힘썼으며 동국학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에는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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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3·1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
김법린은 1899년 8월 23일 경북 영천군 신령면 치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령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직후 인근의 은해사로 출가하였다. 이후 범어사 명정학교의 보습과 및 범어사 불교 전문 강원에서 공부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출신을 범어사로 바꾸었다.
그 뒤로 서울의 휘문고보에 진학하였지만 졸업하기 1년 전(1918년) 불교 중앙학림에 편입하였다. 이 때 평생의 스승인 한용운을 만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나갔으며 현실 참여적인 불교를 중시하는 관점을 갖게 되었다.
역사적인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김법린은 한용운의 지시를 받고 3․1만세운동의 최일선에서 활약하였다. 3․1운동 전날 밤 10시 지시를 받은 김법린은 중앙학림의 동료들과 함께 긴급회의를 갖고 대책을 숙의하고 역할을 분담하였다. 이때의 역할 분담으로 김법린은 김상헌과 함께 범어사의 만세운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3월 1일 김법린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탑골공원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서 낭독식에 참가하였다. 3월 5일에는 부산 범어사로 내려와 원로 승려인 오성월, 이담해, 김경산 등을 면담하고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알렸으며 범어사 중견 승려인 유석규, 김상호와 범어사 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상의 결과 범어사 강원, 지방학림, 명정학교의 학인들이 중심이 되어 3월 18일 동래읍 장날에 만세 시위를 결행하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김법린은 거사 직전 지방학림과 명정학교의 졸업생을 위한 송별회에서 의거의 목적, 방법 등을 설명하고 적극적인 동참을 약속 받았으며, 시위에 이용할 태극기·선언서·격문 등도 준비하였다. 이처럼 김법린의 용의주도한 준비로 1919년에 있었던 범어사 만세시위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 질문1 김법린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평생의 스승은 누구인가요?
- 질문2 3․1운동 당시 김법린은 서울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말해봅시다.
- 질문3 범어사 의거에서 김법린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중국에서의 독립 운동
김법린은 범어사 의거를 주도한 뒤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일제는 만세운동의 주동자를 체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는 1919년 4월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불교중앙학림 내에 조직된 항일 비밀 결사 조직인 한국민단본부의 대표 자격으로 파견된 김법린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을 도우면서 점차 항일 민족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9년 5월 임시 정부의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파견된 깁법린은 국외 독립 운동의 소식을 국내의 불교계 동지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김상헌, 김대용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안동현에 동광상점이라는 쌀가게를 내고 그곳을 근거로 상하이와 국내를 연결하는 비밀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혁신공보」를 발행하여 상하이의 소식을 신의주까지 전달하였다.
이후 상하이로 돌아온 김법린은 임시 정부에서 한국 독립의 타당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집 발간을 위해 자료 수집에 나섰다. 이를 위해 국내로 잠입하여 사료를 수집하고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
- 질문1 3·1 운동 직후 김법린은 어떤 자격으로 상하이에 파견되었나요?
- 질문2 김법린이 「혁신공보」를 발행한 이유를 말해봅시다.
읽기자료 3
의용승군의 조직
당시 상하이에 망명한 불교계 지사들과 임시 정부가 추진한 사업은 독립 운동 자금 모집과 불교계의 힘을 독립운동에 투입시키는 의용승군(義勇僧軍) 조직이었다. 그 결과 범어사·통도사의 자금이 임시정부에 제공될 수 있었으며, 김포광이 불교계 대표로 상하이에 특파되었고, 이담해, 오성월, 김경산이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또 의용승군 조직을 위해서 신상완, 김상헌, 김법린 등이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아 국내로 잠입하고 범어사, 석왕사 등지에 기밀부(機密部)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한편 의용승군 조직은 승려들의 비밀결사를 지향한 것이기도 하였는데, 이를 위해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와 임시의용승군헌제가 작성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움직임은 1920년 4월 6일 준비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신상완이 서울에서 체포됨으로써 실패하였고, 김법린은 일경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 질문1 임시 정부가 독립 운동에 불교계를 활용하여 조직하려던 무장 단체는 무엇인가요?
- 질문2 김법린과 동지들이 의용승군 조직을 위해 활동한 내용을 말해봅시다.
- 질문3 의용승군 조직 계획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4
프랑스 파리 유학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로 온 김법린은 1920년 4월 남경의 금릉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대학에서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면서 미국 유학을 생각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단념하였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는 국민당 지도자였던 왕조명(王兆銘)이 주도한 유법검학회(留法儉學會)라는 장학 단체가 있었다. 이 단체는 유능한 중국 청년들을 선발하여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에 김법린은 이 단체의 후원을 얻어 프랑스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1920년 10월 프랑스의 파리에 도착한 그는 청소부, 간호사 등으로 일하면서 고학을 하고 프랑스어를 배우며 고등학교를 마쳤다. 1923년 파리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1926년 7월, 3년 만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파리 인근의 지방은행에 다니면서 1926년 11월 파리대학원에 입학하여 근대 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김법린의 이력이 1927년 2월에 개최된 피압박 민족 반제국주의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김법린은 그 대회 직전에 프랑스 파리에 있었으며, 능숙하게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음은 물론 확고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다.
- 질문1 김법린이 프랑스에 유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단체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2 프랑스 유학이 김법린의 독립 운동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5
피압박 민족 반제국주의 대회 참가
1927년 2월 5∼1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세계 피압박 민족 반제국주의 대회에는 세계 각처의 124개 단체에서 147명이 참가하였다. 이 대회는 제국주의에 압박받는 세계의 민족과 계급이 생존권의 보존을 위한 대응책 마련을 위해 열렸다. 이 대회에는 김법린과 당시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었던 이극로, 이의경(일명 이미륵), 황우일 등 4명이 조선 대표로 참가하여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이들은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침략당한 조선의 현실을 각국의 대표에게 알리기 위해 독일어와 영어로 쓰인 8쪽 가량의 「조선의 문제」라는 문건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김법린은 신문기자단에게 이 대회에 참가한 배경과 소신을 연설하였다. 2월 10일에 열린 본회의장 안에는 태극기도 게양되었으며 사회 평등, 민족 자유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포스터가 있었고, 제국주의 타도를 의미하는 선전문을 순한문으로 쓴 것도 있었다. 본회의 첫날, 김법린은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압박을 탄핵하는 기조 연설을 하였다.
「일본제국주의 정책 보고」라는 제목의 연설문에서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야만성과 비인간성을 지적하고, 일제 식민 지배가 한국의 발전을 도모했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하였으며, 일본 제국주의 식민 정책은 국제적으로 가장 큰 범죄이며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있었다.
또한 김법린은 아시아 문제를 연구하고 아시아 민족 간의 상호 관계를 도모하려는 차원에 조직된 아시아민족회(조선, 중국, 인도, 시리아)의 조선 측 대표로도 선출되었다.
대회가 종료된 후 김법린은 일단 프랑스로 돌아갔으나, 이후 1927년 12월 9∼11일 벨기에의 수도 룩셈부르크에서 개최된 피압박민족대회 간부회에 참석하여 한국의 실정을 보고하였다. 그 후 그는 네덜란드에서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1928년 1월 14일 귀국하였다.
- 질문1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를 개최한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이 대회에 참가한 조선 측 대표 이름 세 명을 써봅시다.
- 질문3 조선 측 대표가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침략당한 조선의 현실을 각국의 대표에게 알리기 위해 작성한 문건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 질문4 김법린이 본회의에서 행한 연설문인 「일본제국주의 정책 보고」의 내용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6
만당의 조직과 활동
김법린은 1930년 백성욱․김상호․이용조․조학유 등과 함께 불교계 비밀결사 조직인 만당(卍黨)을 조직하였다. 만당은 한용운을 당수로 추대하고 정치와 종교의 분리, 불교 행정 확립, 불교의 대중화를 강령으로 한 일제하 불교 혁신 운동이자 독립 운동이었다. 만당 결성이후 일본의 고마자와 대학에서 인도철학과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면서 1930년 8월 자신을 지부장으로, 최범술, 허영호, 장도환 등을 당원으로 만당의 일본지부를 결성하였다. 아울러 1931년 3월에는 만당을 은폐하기 위해 만들어진 표면적인 단체인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동경지부장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3월 귀국하여 한용운이 발간하던 잡지 『불교』의 주간을 맡아 독립사상 고취와 불교의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이 잡지에 정교분립론을 발표하여 조선 불교의 자주권을 부정하는 일체의 정치 간섭을 배격하고 불교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최범술이 주지로 있던 사천 다솔사로 거처를 옮겼다. 다솔사는 만당의 근거지로 독립지사들의 집합처 구실을 하였다.
김범린은 다솔사 강원과 해인사 전문불교강원에서 불교, 역사, 영어 등을 강의하였으며, 1936년에는 범어사 불교 전문 강원의 학감직을 맡아 청년 승려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다솔사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였던 만당이 일제에 노출되면서 1938년 김법린은 박근섭, 장도환, 최범술 등과 함께 피검되어 3개월간 진주경찰서에 수감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와 같은 방식은 일제가 항일 민족운동 단체를 탄압하는 대표적인 형태였는데, 이 사건으로 지도부가 검거, 구금되면서 만당도 해체되고 말았다.
- 질문1 김법린이 참여한 만당의 강령에 대해 써봅시다.
- 질문2 김법린이 정교분립론을 발표한 잡지 이름은 무엇인가요?
- 질문3 만당의 근거지였던 사찰의 이름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7
한글 연구와 보급 노력
김법린은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준비위원으로 참가하여 프랑스어와 불교 용어의 심의와 자문을 맡았다. 그는 일제의 탄압으로 민족혼을 고취시키기 위해 조선어 편찬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흥원경찰서에 피검되었다. 결국 그는 최현배, 이희승 등 12명과 함께 본심에 회부되어 아홉 차례의 공판 끝에 징역 2년 집행 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2년 3개월간의 수감 생활을 하면서 갖은 고초를 당하다가 1945년 1월 출옥하였다. 두 차례의 수감으로 고초를 당하였고 이 사건으로 김법린이 원장으로 있던 범어사 금정불교전문강원은 강제 폐교 당하였다.
- 질문1 김법린이 조선어 편찬 사업에 매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김법린이 입은 피해는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1995년 3월 1일 세워진 범어사 3․1운동 유공비이다.
- 질문1 김법린은 범어사 3․1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나요?
시각자료 2

위 사진은 피압박 민족 반제국주의 대회 참가한 조선 대표의 모습이다.(좌로부터 이의경, 김법린, 허헌, 이극로)
출처 - 동아일보, 1927년 5월 26일 기사
- 질문1 피압박 민족 반제국주의 대회에 참가한 김법린의 활동 내용을 써봅시다.
시각자료 3

사진은 만당의 근거지인 다솔사의 모습이다.
- 질문1 김법린이 주도한 만당의 활동 목적은 무엇인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