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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응규 집터(진주성을 점령한 유생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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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1896년 2월 19일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을 점령한 의병장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글을 올려 의병을 일으킨 명분을 드러내어 밝혔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는 총명을 분발하시어 역적을 토벌하고 충신을 권장하여 사기를 격려하시고. 짐승, 괴수 같은 왜인들을 구축하여 변방 수비를 견고히 하시고, 선왕의 법복(法服)이 아니면 입지 마시고, 구차하고 영악한 꾀는 조금도 마음에 두지 마시고, 사직을 위해 죽는 다는 의(義)를 처신의 방편으로 삼으신다면 자연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서양 여러 나라가 침범해와 화친을 제의하는 때에는, 그 모든 것을 신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신이 비록 재주는 용렬하오나 석 달 안에 피를 볼 것도 없이 모두 축출하고 선왕의 문물과 토지를 회복하겠사옵니다. 아뢸 말씀이 반에도 못 미쳐 눈물이 비오듯 쏟아져 끝내 붓을 잡지 못하고 대략 미미한 정성만 바치옵니다.

1876년 개항 이후의 일제와 외세가 내정간섭과 경제적 침탈을 자행하는 현실을 보며 나라 일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 이 의병장이 신암 노응규 였다. 노응규 의병장이 이끌었던 진주의병은 영남지역에서 일어난 을미의병 가운데 안동의병과 더불어 양대 산맥을 이룰 만큼 그 세력이 대단했다. 임진왜란 때 3대첩의 하나를 이룬 진주대첩에서 보여준 항일정신을 이어받아 절개와 의리의 고장으로 이름 높은 이 지역에서는 한말에 들어서도 일제 침략 세력을 맞아 대규모의 의병항전을 벌였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목숨을 걸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웠던 노응규 의병장의 애국정신을 찾아가 보자.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 218·219 일대
현재 상태 없어짐 / 옛 건물들은 모두 멸실되었다.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 279-1번지에 노응규 의병장 생가가 복원되었다.

노응규 의병장은 1896년 2월 19일(음력 1월 7일) 경남 안의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게 점령된 진주성을 빼앗고, 이후 영남과 호남일대에서 항일 운동을 펼쳤다. 그 후 고종 황제의 비밀 명령을 받아 1906년 6월 최익현의 전북 태인 의병에 가담한 후 충북 황간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일본군 정찰 부대와 일제 시설물을 공격하는 무장투쟁을 전개하다 일본군에 체포되어 엄중한 심문을 받다가 1907년 경성감옥소에서 순국하였다. 노응규 의병장이 목숨을 걸고 의병 항쟁을 전개한 이유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통해 알아보자.
일제는 1894년 7월 경복궁에 난입하여 친일정권을 수립하고, 곧이어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청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반외세․반봉건의 기치 아래 전개된 동학농민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막아버리고, 조선에서의 정치․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여 갔다. 개항 이후 조선을 둘러싸고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던 청․일 양국의 싸움은 청일전쟁의 승전국인 일제의 승리로 끝나는 듯하였다. 하지만 승전의 기쁨도 잠시뿐 일제의 대륙진출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프랑스․독일의 3국 간섭으로 일제는 조선에서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처지가 되었다. 이에 일제는 세력을 만회하기 위하여 1895년 10월 배일파의 핵심인물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뒤따라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단발령을 강제 시행하였다.
노응규 의병장은 평소부터 일제의 침탈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침략의 만행이 국모를 시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단발령으로 인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의 일부를 훼손하는 불효를 저지르게 되고, 나아가 성리학자로서 자존의 상징인 상투까지 잘리게 될 상황이 되자 국모의 원수를 갚고, 국왕을 보위하며, 성리학적 유교 사회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의병을 해산하라는 국왕의 명이 내려지면서 의병을 해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일제는 한국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각축을 벌이던 중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 침략정책을 더욱 빨리 진행시켜 갔다. 그리하여 일제는 러일전쟁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군사적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한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제함으로써 우리나라 영토를 차지해 갔고, 8월 22일에는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함으로써 내정 간섭을 본격적으로 하여 갔다. 그리고 러․일전쟁 승전 직후 제국주의 열강의 인정 아래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자주적 외교권과 통치권을 장악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이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이 되자 노응규 의병장은 다시 의병을 일으켜 국권회복을 위한 즉각적인 항일투쟁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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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애국 의식의 형성

노응규 의병장은 1861년 3월 15일 경남 안의군(현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 죽전동에서 노이선의 2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신암이고 원래 총명했던 노응규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고, 특히 김해부사를 역임한 성재 허전의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학문에만 매달리지 않고, 1876년 개항 이후 일제와 외세가 물밀 듯이 밀려와 내정간섭과 경제적 침탈을 자행하는 것을 보면서 나라를 근심하고 염려하는 참된 마음을 키워갔다. 그리하여 30세 전후하여 당시 유림의 두터운 믿음과 신망을 받고 있던 면암 최익현을 찾아가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의 위정척사사상을 수용하면서 성리학적 민족의식을 심화시켜갔다. 또한 우암 송시열의 후손으로 절개 있는 학자로 명망 있던 연재 송병선과 입재 송근수 문하에 드나들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상을 고양시켜 갔다.
한편 고향인 안의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전라도 남원으로부터 밀려온 동학군과 관군이 격전을 치른 곳으로 그 피해가 심했다고 한다. 이 때 큰 충격을 받았으며 나라의 정치가 날로 일그러짐을 통탄하고 항일구국의 신념을 더욱 굳혔다.

  • 질문1 다음은 최익현이 개항 반대를 주장한 글이다. 이 글을 통해 노응규는 최익현으로부터 어떠한 가르침을 받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저들이 우리의 방비가 약한 실상을 알고 조약을 맺는다면, 앞으로 밀려올 구렁텅이와 같은 욕심을 무엇으로 채워주겠습니까? ……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 하나 실은 서양 도적입니다. 강화가 한 번 이루어지면 사학(邪學) 서적과 천주의 초상화가 교역하는 속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 안 가서 선교사를 통해 신자에게 전해져 사학이 온 나라 안에 퍼지게 될 것입니다.
    - 최익현, 『면암집』 -

읽기자료 2

경남 안의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1895년에 들어와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선생은 항일구국의 기치를 들게 되었다. ‘의리와 명분’을 생명처럼 귀하게 여긴 조선의 전통적 선비들이 ‘죽음이 삶보다 영예롭다’고 판단하고 의병항전에 나선 때가 바로 이 시기였던 것이다.
1896년 2월 19일(음력 1월 7일) 경남 안의에서 의병을 일으켜 장수사의 승려 서재기를 선봉장으로 삼고, 정도현·박준필·최두원 등 문인, 임경희·성경호 등의 지사들과 함께 의병을 모아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곧바로 경남의 지리적 요충지인 진주를 공략하여 다음날 새벽에 진주성을 함락시켰다. 노응규를 총대장으로 하는 진주의병부대는 진주성을 거점으로 삼아 인근의 여러 지역을 장악하면서 활동영역을 넓혀 갔다. 진주의병부대는 일본인과 결탁한 친일파는 물론 단발한 사람 등을 처단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부산 개항장을 공략하려 김해까지 진출하였다. 그 뒤 일본군 수비대를 괴멸시키고, 부산 개항장의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하기 위해 선암나루터에 집결하였지만,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으로 진주로 회군한다. 회군한 후 진주성에서 관군과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관군과 친일개화파 서리들의 흉계에 빠져 전세가 역전되고 의병을 해산하라는 국왕의 명에 내려지면서 의병을 해산시킬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항전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 질문1 승려의 신분으로서 의병 항쟁에 참여한 서재기의 모습을 통해 우리나라의 불교가 갖는 특징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읽기자료 3

목숨을 걸고 상소

이 와중에 안의의 서리들에 의해 부친과 형이 피살되고, 가산이 몰수되는 등 집안이 망하여 없어질 위기까지 몰리게 되었다. 이에 선생은 1897년 여름에 상경하여 각방으로 노력한 결과 궐내에 들어가 도끼를 옆에 놓고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노응규 의병장은 고종황제의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사면을 받았다. 이후 합천 청계에 머물면서 흩어진 가족을 모아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한편, 학문 연구를 통해 문인들과 정의를 두텁게 하였다. 그러던 중 규장각 주사, 경상남도 사검겸 독쇄관, 중추원 의관, 동궁 시종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노응규 의병장이 올린 상소의 대략을 살펴보자.

  • 질문1 밑줄 친 부분을 통해 노응규 의병장이 정당화하려고 했던 자신의 행동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신이 삼가 『춘추』의 의리를 상고하여 보건대 역적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죽여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漢) 나라의 관동과 당(唐)나라의 하북에서 충의로 분개한 의로운 지사들이 군사를 일으켜 동탁과 안녹산을 친 것은 한 나라의 헌제나 당 나라의 명황의 명령이 없이 한 것이지만 『강목』에 크게 기록하고 인정하여 주었습니다. 이 의리로 미루어 볼 때 나라에 있는 역적에 대해서 폐하가 치지 못했고 감사가 치지 못했다고 해서 비록 미천한 유생이라도 역시 치지 못한다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대체로 역적을 치는 큰 의리가 폐하의 명령을 받는 것보다 급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 질문2 밑줄 친 내용을 통해 노응규 의병장이 지니고 있던 유교사상을 생각해 봅시다.

    비록 부녀자나 아이들과 같이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들도 오히려 모두 주먹을 부르쥐고 기회를 기다리면서 한번 칼을 휘둘러 역적을 치려고 하였는데 더구나 신은 비록 지극히 어리석지만 그래도 옛사람의 글을 읽었으므로 군신간의 의리나 중화와 오랑캐 간의 큰 법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마침내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진양에서 피로 쓴 격문을 돌려 수일 사이에 뜻을 같이하여 의를 위해 달려온 선비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하여 며칠 안으로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올라가서 폐하를 뵙고 어떻게 하라는 명령을 기다려서 역적의 머리를 벨 것을 청한 후에 제멋대로 군사를 일으킨 죄에 대해 처벌을 받으려 하였습니다. 폐하의 명령이 내린 후에 의병들을 해산하여 보내고 원한을 품고 원통함을 참으면서 단지 나라에서 역적들을 쳐서 복수하는 날을 바랐을 뿐입니다.
  • 질문3 노응규 의병장이 고종황제에게 용서를 구한 네 가지 죄를 정리해 봅시다.

    아, 신(臣)은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나섰다가 원수는 갚지 못하고 집안에 재앙과 난리만 초래했으니, 위로 임금에게 불충하고 아래로 부모에게 불효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첫째 죄입니다. 관군이 다가오던 날 신은 비록 화살 하나 쏘지 않았으나 감히 자수하지 않고 몸을 숨겨 멀리 도망친 것이 둘째 죄입니다. 아버지와 형이 죽었으되 아직도 상복을 입지 못해 자식으로서의 의리를 완전히 상실한 것이 셋째 죄입니다. 옛적에 임금의 원수를 갚으려는 자는 비록 칼날을 밟고 물불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이를 사양하지 않았는데, 신은 지금까지 구차히 살면서 한 가지의 계책도 세움이 없이 먹고 자는 것과 말하는 것을 일반 백성과 같이 하고 있으니 이것이 넷째 죄입니다.
    바라건대 나라의 법을 신에게 적용하여 드러내놓고 처단함으로써 세상의 신하와 자식 된 사람들로서 충성스럽지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한 사람들에게 경계할 줄 알게 한다면 신에게 다행스러운 일이 되겠습니다.






읽기자료 4

최익현 의병에 가담, 황간에서 다시 의병을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체결과 8월 한일협약의 체결, 1905년 11월 을사늑약의 체결로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이 도래하자 노응규는 관직을 버리고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때 고종황제는 비밀리 노응규에게 시찰사 인부(印符)와 암행어사의 마패를 하사하여 의병 일으키기를 독려하였다. 노응규 의병장은 전북 태인의 최익현이 1906년 6월 4일 의별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태인의병은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최익현을 비롯한 13명의 의병지도부가 체포됨에 따라 해산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1906년 늦가을 충북 황간군 상촌면 물한리 직평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황간의병은 총기와 화약을 모아 무장을 갖추는 한편,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경부철도와 열차, 그밖에 일제 시설물 등을 주요 파괴대상으로 삼아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걸쳐 일본군 정찰부대를 괴멸시키는 등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면서 장차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타도하고자 하였다.

  • 질문1 고종황제가 비밀리 노응규에게 의병 일으키기를 독려한 이유를 적어봅시다.
  • 질문2 황간의병을 일으킬 때 노응규 의병장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오늘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압제하여 인민이 이처럼 고난을 받게 되었으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지라 우리들도 역시 국민인즉 외국의 모욕을 받으니 어찌 통탄치 않으리오. 의중에 있는 지사들을 모아 서울 통감부로 함께 가서 담판하고 설담설전을 벌여 외국인을 축출하고 우리나라의 종묘사직과 생령의 안전을 기하되, 만일 뜻과 같이 되지 않으면 같이 죽어 돌아오지 않는다.

읽기자료 5

못다 이룬 한을 품고 옥중에서 돌아가시다.

이러한 사실이 일본군 밀정에게 알려지게 되어 1906년 12월 8일 노응규를 비롯한 의병지도부가 순검들에게 체포되고 의병은 해산되었다. 이후 노응규 의병장은 경무청 감옥으로 압송되어 엄중한 심문을 받았으나 의사로서의 기개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감옥에서 주는 어떠한 음식도 단호히 거부했으며 시종 강경한 태도로 항일 구국의 대의를 역설하다가 1907년 1월 4일 47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질문1 일제의 엄중한 심문에도 기개를 굽히지 않고 옥중에서 항일 구국의 의지를 나타내시던 노응규 의병장의 당시 심정을 글로 표현해 봅시다.

읽기자료 6

순국 그 이후

노응규 의병장은 올곧은 삶을 실천한 겨레의 스승이었다. 경술국치 직후 가문을 없애기 위해 가혹한 행위가 행해져 두 아들은 모두 비명으로 사망했고, 노씨 문중은 오랜 세월동안 터를 잡고 살아왔던 초계를 떠나 창녕 이방면으로 옮겼다가 다시 부산·김해 등지로 옮겼으니, 고(故) 노무현 대통령 증조부도 이때 김해로 왔다.

  • 질문1 일제가 노응규 의병장의 가문을 없애려고 한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 질문2 일제의 탄압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다녀야 했던 분들과 그 후손들의 삶은 어떠했을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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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노응규 의병장 생가

노응규 의병장 생가

  • 질문1 이곳은 복원된 노응규 의병장의 생가입니다. 이곳에서 노응규 의병장은 어떤 공부를 하였고 어떤 사상을 키워갔을지 생각해 봅시다.

시각자료 2

노응규 의병 활동도

노응규 의병부대의 활약

  • 질문1 위의 자료는 노응규 의병장이 1896년 경남 안의에서 처음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상대로 항일전을 전개했던 지역을 나타낸 것이다. 활동했던 핵심 지역은 어디일까요?
  • 질문2 노응규 의병장의 진주의병은 일본인과 결탁한 친일파와 단발한 사람 등을 처단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 질문3 노응규 의병장의 진주의병은 부산 개항장을 공략하기 위해 김해까지 진출하였다고 합니다. 부산 개항장을 공략하려 한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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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다음 두 자료를 통해 고종황제가 비밀리 의병 일으키기를 독려한 이유와 의병을 일으킨 주체들이 추구했던 국가의 정치 체제는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봅시다.

노응규 황간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의 체결로 나가라 망해가는 상황이 되자 노응규 의병장은 관직을 버리고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때 고종황제는 비밀리 노응규 의병장에게 시찰사 인부(印符)와 암행어사의 마패를 하사하여 거의를 독려하였다. 노응규 의병장은 전북 태인의 최익현이 1906년 6월 4일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 합류하였다.


임병찬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다
임병찬은 1912년 음력 9월 28일 공주(公州) 유생 이칙(李侙)으로부터 독립의군부전라남북도 순무대장으로 임명한다는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았다. 고종황제는 열강들에 대하여 국권을 만회할 원조를 구할 목적으로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으로 조직하여 무력항쟁을 추진하기 위하여 1906년에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던 선생을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으로 지명하였다.
모둠활동 2
노응규 의병장이 추구했던 국가의 정치 체제와 신민회가 추구했던 국가의 정치 체제가 서로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봅시다.

1907년 비밀결사 신민회가 조직되다
신민회는 「대한신민회 통용장정」 제2장 제1절에서 다음과 같이 목적을 규정하였다. 첫째, 궁극적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 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치 체제는 공화정체(共和政體)로 하는 것이다. 독립협회 때에는 입헌군주국이 협회의 공식 목표였다. 그런데 신민회에 이르면 입헌군주국은 낡은 체제로 인식되고, 처음부터 국권이 회복되면 공화정을 세우려는 목표가 뚜렷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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