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본문영역

  • 도입
  • 역사적 배경
  • 읽기
  • 시각자료
  • 모둠활동

주요사적지 배움터

전해산 집터(죽어서도 일본의 패망을 지켜보겠다던 청년 의병장)

도입

1908년 겨울, 일제 군경의 의병 토벌이 강화되자 호남지역의 주요 의병부대는 연합조직인 호남동의단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11개 의병부대의 연합조직인 호남동의단의 대장으로 추대된 이가 바로 29살 청년 장군 해산 전수용이었다.
그가 대장으로 활약한 대동창의단은 1908년 7월 거병하여 이듬해 5월 해산할 때까지 일제의 군경과 크고 작은 전투 70여 회를 벌일 정도로 호남지역에서도 대표적인 의병부대였다.
전해산이 체포된 후 찍힌 사진에 일제가 “영산강 이북 지역에 있어서 수괴(우두머리) 중에 거벽(뛰어난 사람)”이란 설명을 달아놓을 정도로 전해산 의병투쟁은 강렬했다. 체포 뒤 일본인들이 갖가지 감언이설로 전향할 것을 설득하자 끝내 듣지 않고 다음과 같은 우국시를 남겼다.

서생이 무슨 일로 갑옷을 입었나?
본래 세운 뜻이 이처럼 틀려지니 한숨만 나오고
조정에서 날뛰는 꼴 통곡하겠네.
바다 건너 들어온 적 차마 말도 못하겠소.
대낮에 소리 삼키고 강물이 멀어지고
푸른 하늘도 오열하며 실버들에 비 뿌리고.
이제 다시 영산강으로 못 가리니
두견새 되어 피눈물 흘리며 돌아갈거나.


구한말 일제에 체포된 호남의병들은 대구감옥소로 가기 위해 영산포구에서 배를 탔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떠난 대부분들의 의병들은 일제에게 처형당하여 돌아오지 못했다. 전해산도 그의 시(詩)처럼 다시는 영산강을 건너 돌아오지 못했다. 바다 건너 온 적과 싸우기 위해 서생이 갑옷을 입어야 했던 그 당시로 돌아가 보자.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대론리 67 [도로명 주소: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성암길 69-9]
현재 상태 이전의 가옥은 헐려 없어지고 지금은 현대식 주택이 들어서 있다.

해산 전수용(全垂鏞, 1879 ~ 1910)은 전북 임실 출신으로 부친 전병국과 모친 경주 김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공부하기 좋아하여 경서와 역사를 널리 보고 글짓기를 잘하였다. 1903년 한창 열혈의 기질이 발하던 청년시절에 절의로 이름 높던 선비들인 송병선, 기우만과 면암 최익현 등이 인근 지역인 익산군의 낙영당에서 모여 강연회를 베풀 때 고향 사람인 이석용과 함께 참가하여 선비들의 우국충정에 어린 강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전해산은 이러한 견문과 학식을 바탕으로 박학한 지식과 실천 유학자로서 성숙하였다.
1906년 6월 최익현과 임병찬이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열고 의병을 일으키자 그 역시 가담하기 위해 찾아갔다. 이곳에서 전해산은 노구의 몸으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을 보며 감명을 받았지만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무장투쟁에 미흡한 유생 의병들이어서 이내 귀향하고 말았다.
1907년 9월 기삼연, 김용구 등이 전남 장성의 수연산에서 호남창의회맹소를 조직하자 전해산은 이 회맹소의 종사라는 직책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이 회맹소는 1908년 2월 공음전투에서 김용구 의병부대가 패전한 이후 사실상 활동이 중지되고 말았다. 이즈음 일찍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이석용이 임실을 중심으로 무기와 병력을 모아 진안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창의동맹단을 조직하자 전해산은 참모로 이에 가담함으로써 본격적인 의병항쟁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현재 전북 장수에는 전해산이 살던 본래 집은 없어지고 현대식으로 지은 양옥이 들어서 있다. 전해산의 집터 부근에는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한 전해산 기념관과 동상, 그리고 추모비가 조성되어 있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읽기

읽기자료 1

창의동맹단에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다

전해산이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시작한 창의동맹단은 진안과 임실을 중심으로 전주·장수·남원·순창·정읍 등 전라북도 서부 산간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군경과 맞서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1908년 3월 남원 사천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석용은 전해산에게 남쪽으로 내려가 김태원 의병부대에 합류하라고 권하였다. 이석용은 전북에서, 전해산은 김태원과 같이 전남에서 각각 의병항쟁을 확산시켜 장차 남과 북이 연합하여 일제를 몰아내려는 의도였다.
전해산이 전남으로 내려오기 전에 이미 김태원은 어등산에서 전사한 뒤였다. 김태원 의병장마저 순국하게 되자 김태원 의병부대의 선봉장이었던 조경환이 부대의 일부를 거두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오성술이 흩어진 의병을 규합하여 재기를 도모하고 있었다. 전해산은 오성술의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광주, 나주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일시적으로 부대를 정비하고 있을 때 정원집이 일제에 저항하여 일어날 것을 호소하는 광무황제의 비밀명령을 가지고 수십 명의 병사들과 함께 전해산을 찾아왔다. 정원집은 시위대 참위 출신으로 일찍이 을사늑약을 규탄하다가 국사범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의병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유배지를 탈출했던 것이다.

  • 질문1 이석용이 전해산에게 남쪽으로 내려가 의병활동을 하라고 권유한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봅시다.
  • 질문2 광무황제가 전국의 선비들에게 전달한 비밀 명령의 내용이 무엇이었을 지 상상하여 적어 봅시다.

읽기자료 2

대동창의단 대장으로 일제의 군경과 70여 차례 교전하다

전해산은 정원집이 이끄는 해산 군인들이 합세한 뒤 의병을 지도해 달라는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의병대장에 취임하여 1908년 7월 25일에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였다. 대동창의단은 김태원 의병부대의 잔여의병들이 많았는데 전투력이 뛰어난 정원집과 같은 해산군인이나 포수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대동창의단은 1908년 8월 의병항전을 개시한 이래 다음해 5월 해체될 때까지 10여 개월 동안 일제 군경과 70여 차례의 교전을 벌였다. 이들은 단독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것 외에도 부근에서 활약하던 다른 의병부대와 자주 연합작전을 펼쳤다. 전해산 의병대장은 신속한 부대이동과 작전의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 부장급의 간부들로 하여금 각기 40 ~ 100여명의 의병을 통솔케 하였으며 자신은 평소 100 ~ 150여명의 부하들만 거느리고 작전을 수행하였다. 총 500여명에 달하던 대동창의단의 의병은 평소 소부대 단위로 나누어 통상적인 활동을 하다가 필요할 때에는 합동작전을 수행했던 것이다.
전해산 부대는 정규군으로 무장한 일군에 대해 유격전술을 벌였는데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기 위해 부대를 주로 영광 불갑산과 함평 석문내산 일대에 주둔시켜 작전을 전개하였다. 불갑산은 서남부의 고지대이며 석문내산은 장성, 광주, 함평, 나주 등지의 평야로 둘러싸여 있는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곳이다. 이 두 지역을 근거지로 함으로써 전해산의 의병부대는 유격전을 수행하면서 군수품을 쉽게 조달할 수 있었다. 이들은 항일투쟁뿐만 아니라 주민 보호에 앞장섰다. 군수품을 조달할 때에도 가능한 그 대가를 지불하였으며, 가짜 의병 퇴치, 헌병보조원의 만행, 세무관리의 행패, 일진회원의 비행 등으로부터 주민들을 적극 보호해주었다. 이러한 활동은 전해산의 의병부대가 주민들의 신뢰를 얻는 원동력이 되었다. 광주 대치 전투에서 전해산 의병부대에 패배한 일제가 그 화풀이로 민가에 불을 놓아 100여 호를 태워버렸을 때에도 주민들은 의병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1908년 겨울 전해산은 심남일, 김영엽, 오성술 등과 함께 일제의 강력한 토벌작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호남의병 연합조직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이들의 연합으로 호남지역의 주요 의병부대 11개의 연합 조직인 호남동의단이 탄생하였고 전해산은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호남동의단에는 당시 전라도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의병부대가 모두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호남동의단은 호남지역에서 의병부대를 규합하여 일제와 투쟁을 벌이는 한편 가렴주구를 일삼던 지방관, 일본의 위세를 믿고 횡포하던 친일관리, 일진회원, 친일부호, 헌병보조원, 경찰 등의 횡포를 징계했다. 세금 징수원을 위협하여 친일 내각의 납세를 거부하게 하는 대신에 면장이나 동장을 시켜 마을마다 군자금을 배정하되 공평하게 재산에 따라 분배, 징수했고 해산 군인을 빙자한 무뢰배, 가짜 의병을 칭하고 살인, 약탈, 강간, 방화를 자행하던 자들을 처단함으로써 일시적이나마 민생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수차례에 걸쳐 헌병보조원, 순경, 일진회원, 세금징수원, 친일부호, 가짜 의병들을 상대로 경계하는 격문을 보냈으며 이들을 회유하기도 위협도 하여 그 직을 그만 두도록 하거나 가산을 몰수하고 체포해서 다스리기도 했으며 심한 자들은 총살로서 징계하였다.

  • 질문1 전해산 의병장이 열악한 무기와 훈련받지 못한 의병들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 선택했던 전술은 무엇인지 말해봅시다.
  • 질문2 전해산 의병장이 주민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위 글에서 찾아봅시다.
  • 질문3 호남동의단의 활동을 연표로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3

의병 부대의 해산과 체포

1908년 일제는 일본군, 헌병보조원, 경찰 등을 포함하여 11,000여 명의 병력으로 의병을 토벌하더니, 1909년에는 일본 본토에서 임시 파견된 약 2개 여단의 병력을 추가로 투입하고 4 ~ 5월 사이에 한국 주둔 헌병대의 천안 및 영산포 분견대의 관할 하에 45개소의 임시파견소를 증설하는 한편 43,000여 명의 친일파 한국인을 헌병보조원이라 해서 분산 배치시키고 의병토벌과 정보수집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의병들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의병들은 1909년 3월 영광 오동과 덕흥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헌병대에 연패를 당한 뒤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겨우 탈출하였으나 의병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어 거의 전투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더욱이 5월에 들어서자 농번기로 인해 농민들의 참여가 부진해져 의병활동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전해산 의병장은 최후의 방편으로 부대이동을 결심하고 새로운 항전 기지를 독립운동가들이 이주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던 만주로 정하고 부하들에게 북상하자고 권고하였다. 하지만 의병들은 대부분 농민들인데다 가족의 생계문제 등이 걸려 있어 따르려는 자가 없었다. 더구나 순종황제의 의병 해산령까지 전해지자 전해산은 마침내 의병을 해산하기로 결심하여 같은 해 5월 영광 오동촌에서 부대의 지휘권을 호군장 박영근에게 넘겨주었다.
의병해산 뒤 전해산은 남원 고래산에서 학동들을 가르치며 후일을 대비하고 있었다. 일제는 전해산의 행방을 몰라 백방으로 탐문하는 한편 현상금을 걸기도 하였다. 1909년 12월 의병부대에 출입하던 조두환이란 자가 영산포 헌병대에 전해산을 밀고하였다. 전해산은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수개월 만에 붙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일본군에게 “오늘이 있을 것을 이미 각오하였다. 죽는 것은 의병을 일으키던 날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노부모와 병약한 처(妻)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만나보고 떠나는 인사를 하겠다.”고 말하면서 부모를 만나 인사를 올리고 부인에게 “지금 내가 떠나면 돌아오지 못하니 부모님을 잘 봉양하기 바란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영산포 일군 헌병 분견대에 구금되었다.
전해산은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 받은 후 대구 감옥소에 이감되어 대구공소원과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고 말았다. 사형이 언도되자 전해산은 일본인 재판장을 향해 “내가 죽은 후에 나의 눈을 빼어 동해에 걸어 두라. 너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1910년 7월 18일 전해산은 여러 동지들과 함께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 질문1 다음은 1909년 의병을 해산하면서 전해산이 남긴 시(詩)이다. ‘오얏꽃’과 ‘보국할 서생’, 그리고 ‘산새’가 각각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호남 삼월에 오얏꽃은 지는데 보국할 서생이 갑옷을 벗었네. 산새도 또한 사정을 알고 떠나가는 나를 밤새 부르며 돌아가지 말라 하네.

  • 질문2 1909년 일제의 잔혹한 남한대토벌작전으로 호남지역의 의병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결국 진압되었다. 살아남은 의병들이 선택한 새로운 투쟁 전략이 무엇이었을지 추측해 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전해산 추모 비각

전해산 추모비각

  • 질문1 전해산 추모 비각(碑閣)에 모셔진 비문(碑文)의 내용을 찾아 그 뜻을 이야기 해 봅시다.

시각자료 2

전해산 진중일기

전해산이 의병 활동 중에 적은 진중일기다. 진중일기는 전해산 의병장이 직접 쓴 종군일기로 당시 의병활동을 알려주는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특히 격문을 국한문으로 쓰고 평민의병장을 우대하여 신분보다 공적으로 군사를 다룬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 질문1 의병 활동을 적어 기록을 남긴 전해산 의병장의 인품에 대해 말해 봅시다.

시각자료 3

대동의병장 전해산 묘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대론리 원촌마을에 있는 대동의병장 전해산 묘이다. 이곳에는 함께 자결한 부인 김씨와 함께 나란히 쌍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 질문1 다음 글을 읽고 상상으로 전해산 의병장의 아내인 김씨가 전해산 의병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봅시다.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한 전해산의 시신이 생가인 원촌마을로 운구되자 부인 김씨는 남편의 시신이 든 관을 어루만지며 크게 통곡하다 그날 밤 자결하였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이 충신과 열녀를 마을 앞 양지바른 언덕에 쌍분으로 모신 것이 현재의 묘이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모둠활동

모둠활동 1
전해산 의병장의 격문 만들기 전해산은 전남지방에서 의병대장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격문을 써서 여러 곳으로 보냈다. 격문의 대상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저버린 친일파와 의병 행세를 하며 백성들을 괴롭히는 가짜 의병의 무리, 친일단체인 일진회원, 순경, 세금징수원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모둠별로 전해산이 이들에게 보내는 가상의 격문을 만들어 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31232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1  전화: 041-560-0405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21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