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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의병 창의지 - 무성서원(위정척사론자 면암 최익현, 최고령 의병장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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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6월 4일 전라북도 태인군의 무성서원, 담장으로 둘러싸인 명륜당 앞 좁은 뜰에는 각지에서 몰려든 유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서원의 출입문인 현가루 밑의 평삼문이 열려 있고 그 밖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이곳에 모인 유생들의 시선은 명륜당 대청마루 위 한 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74세 고령의 나이로 모임을 주도한 이 노인이 면암 최익현이었다. 그는 비통한 눈물을 흘리며 의병을 일으켜 싸우는 데 동참해 줄 것을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왜적이 국권을 빼앗고, 역신이 화를 빚어내어 5백년 종묘사직과 3천 리 강토가 다 없어지게 되었으며, 임금은 나라 잃을 화를 면하지 못하고 백성은 모두 어육의 참혹한 화를 당하게 되었다. 옛 신하인 나는 진실로 종사와 백성의 화가 여기까지 이르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힘을 헤아리지 않고 대의를 천하에 펴고자 하니 성패와 이해는 예견할 수 없지만 내가 전심으로 나를 위해 죽음을 생각하고 살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천지신명이 도와서라도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는가.”

최익현의 창의 선언에 동참하여 즉석에서 80여 명의 유림이 의병 대열에 합류하였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호남지방에서 일어난 최초의 의병부대인 태인의병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으며, 최고령 의병장이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지주이자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던 최익현의 생애를 살펴보고, 태인의병이 결성되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과정과 이후 의병 전쟁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자.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현재 상태 19세기 중엽 보수 공사를 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킴과 동시에 한국에 대한 군사적․정치적 압박을 더욱 강화시켜 갔다. 개전 직후 강요한 한․일의정서를 근거로 1904년 3월 한국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4천여 명의 일본군이 한국에 주둔한 뒤 이듬해 말에는 2개 사단 규모의 일본군이 한국 전역에 배치됨으로써 한국민을 강압적으로 압박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는 한․일협약이 강제 체결되어 재정․외교 등 일본인 고문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소위 고문정치를 실시하게 됨으로써 일제의 침략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일제의 이러한 침략 행위는 러․일전쟁이 종료된 뒤 1905년 11월 19일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로 극에 달해, 대한 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실질적으로 국권을 상실했다. 러․일전쟁 이후 을사늑약이 체결되기까지의 시기에 한국인의 반일 적개심은 한층 팽배했고, 국권수호를 위한 반일투쟁도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중기 의병(을사의병)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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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정통 유학을 바탕으로 위정척사 사상을 기르다

최익현(1833 ~ 1906)이 태어나고 활동 했던 시기는 산업혁명 이후 발달된 기술문명으로 무장한 서양세력이 쓰나미처럼 밀어 닥쳤던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이었다. 전쟁과 폭력을 몰고 온 쓰나미의 충격파는 동아시아의 기존 국제 질서를 무너뜨렸고 서양의 기술 문명의 위력을 실감하게 하였다. 가장 먼저 충격에서 벗어나 근대화의 물결에 성공적으로 합류하여 제국주의 국가로 탈바꿈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반면에 중국과 우리나라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고통 받았다.
서양과 일본의 침략에 맞선 조선의 지식인들의 대응은 크게 위정척사론과 개화론, 그리고 동도서기론으로 나뉘었다. 최익현은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지주이자 실천적 활동가였다. ‘위정척사’란 ‘올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배척한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올바른 것은 그동안 조선을 지배해온 성리학적 질서이고, 사악한 것은 서양과 일본의 모든 문명을 가리켰다.
최익현은 1833년(순조 33) 12월 5일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3세 되던 해에 가족이 모두 충청북도 단양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21세 되던 해에 다시 온 집안이 포천으로 돌아왔다. 이후 관직 생활과 유배 생활을 제외한 대부분의 장년기를 고향인 포천에서 보냈다.
최익현의 학문과 사상을 결정지은 사건은 그가 13세 되던 해에 경기도 양평에 있던 화서 이항로(1792 ~ 1868)를 찾아가서 배우게 된 일이었다. 이항로는 조선 말기 성리학을 대표하는 대학자였다. 이항로의 생가이자 학교인 청화정사는 최익현을 비롯해 김평묵, 유인석 등 위정척사론을 이끈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스승 이항로는 제자 최익현의 비범함을 알아보았고 성심으로 가르쳤으며 손님이 오면 “이 아이는 장래가 크게 기대된다”고 말하면서 그를 아꼈다. 최익현은 19세에 청주 한씨와 혼인했고, 포천으로 돌아온 그 이듬해에 22세의 젊은 나이로 과거 급제한 이후 30대 중반까지 승문원 부정자(종9품)를 시작으로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정언, 이조정랑, 충청도 신창 현감, 예조좌랑, 성균관 직강, 사헌부 장령 등의 관직을 거쳤다.

  • 질문1 다음은 이항로가 고종 3년(1866년)에 올린 상소의 일부입니다. 글을 읽고 위정척사론자들이 당시 서양의 문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써 봅시다.

    예로부터 이단적인 교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좀먹고 해롭게 한 것으로 말하면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서양 교리보다 더 심한 것은 없으며 오랑캐들로서 남의 나라에 화를 일으킬 실마리가 된 자들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또한 서양 오랑캐보다 더 심한 자들은 없습니다. 대체로 우리나라에 몰래 잠입하여 불순한 학문을 널리 전파하는 것은 자기의 패거리들을 늘려서 안팎에서 서로 호응함으로써 우리나라의 형편을 탐지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와 우리의 문물제도를 어지럽히고 우리나라의 재물과 여자들을 약탈함으로써 제놈들의 끝없는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읽기자료 2

최익현, 상소를 올려 흥선대원군을 하야 시키다

최익현의 삶은 상소의 삶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불의라고 판단하는 것과는 결코 타협하지 않고, 행동에 옮겼던 그의 인생은 파직과 유배 같은 시련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 중요한 상소는 35세(고종 5년, 1868) 때 올린 「시폐사조소」였다.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르느라 낙향해 있다가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되어 그해 10월 10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대간의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상소를 올린 것이다. 상소는 제목 그대로 ‘당시의 네 폐단’을 시정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경복궁 중건 등 토목 공사를 정지하고, 무거운 세금을 걷는 정치를 그만두며, 당백전을 혁파하고, 사대문세를 금지하라는 것이다. 흥선대원군 집권 10년의 절반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것은 고종의 뒤에서 산천초목을 떨게 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온 흥선대원군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곧 대원군의 영향 아래 있는 대간들이 즉각 탄핵했고 최익현은 바로 사직하였다.
최익현은 40세가 되는 해 동부승지로 임명되었다. 그는 곧 상소를 올려 5년 만에 다시 흥선대원군의 정치를 총체적으로 비판하였다. 상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근년 이래로 정치는 옛 법을 변화시키고 사람은 주관이 없으며, 대신과 육경은 건의하지 않으며 대간과 시종은 일 좋아한다는 비방을 피하기만 합니다. 조정에서는 저속한 논의가 일어나 정의가 소멸되었으며, 아첨하는 사람은 뜻을 얻고 곧은 선비는 사라졌습니다. 가혹하게 세금을 걷기를 멈추지 않아 민생이 도탄에 빠졌고 윤리가 무너져 사기가 막혔습니다. 공정하게 일하는 사람을 괴이하다고 하고, 사적인 이익을 앞세워 일하는 자를 잘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염치가 없는 사람은 융성한 때를 만나고 지조가 있는 사람은 죽게 되니, 하늘의 재변이 위에서 나타나고 땅의 갑작스러운 재앙이 아래에서 일어나서 자연의 섭리가 모두 그 올바름을 잃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을 따르는 대신들은 이번에도 최익현의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5년 전과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고종은 최익현의 처벌하기는커녕 더욱 높은 자리인 호조참판에 임명했다. 최익현은 더욱 강경한 내용으로 상소를 올려 만동묘의 복원, 청 동전의 사용 금지, 원납전 폐지의 의견을 밝혔다. 특히 상소 말미에는 부모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지위를 높이고 녹봉을 많이 주되 나라 정치에는 간여하지 말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흥선대원군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번에도 대신들은 최익현의 엄벌을 주장했다. 그러나 고종은 상소가 올라온 이틀 뒤인 11월 5일, 모든 국무를 직접 결재하겠다는 친정의 뜻을 밝히고 대원군만 사용하던 궐 안의 출입문도 폐쇄했다. 이로서 10년 동안 유지되던 대원군의 권력은 단번에 해체되었다. 이번에도 최익현은 그의 상소 덕분에 1년 반 동안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청동전의 사용은 금지되고 만동묘 복원이 이뤄짐으로써 흥선 대원군의 하야를 포함해 최익현의 핵심 주장이 모두 관철되었다. 사실상 최익현의 승리였다.

  • 질문1 최익현이 올린 「시폐사조소」에서 경복궁 중건 공사를 중지를 주장한 이유를 적어 봅시다.
  • 질문2 고종이 최익현의 상소를 받아들여 대원군을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한 이유를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3

호남 최초의 의병인 태인 의병을 일으키다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둥으로서 개항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경한 상소를 올려 일제의 침략과 정부의 개화시책을 규탄하며 재야의 여론을 대변해온 최익현 선생이 투쟁의 방식을 바꿔 의병에 투신하게 되는 계기 또한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이었다. 선생은 조약 체결을 곧 나라의 멸망으로 인식하고, 「청토오적소」와 「창의토적소」 등의 상소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의병에 동참할 것을 천명하였다.
최익현 선생이 항일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은 1905년 12월 말 충남 논산군 노성의 궐리사 집회에서 나타났다. 그는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놓고 강연회를 열어 절박한 시국 상황을 알리는 한편 국권회복 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듬해 3월 최익현은 전북 태인의 종석산 밑에서 거주하는 임병찬을 찾아가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실무를 맡아보게 하고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다음으로 그는 담양의 용추사로 내려가 호남 지방 유림의 거두이며 항일세력의 중심인물이던 기우만 등 호남의 유력한 유림 50여명과 모임을 갖고 항일전을 수행할 방책을 계획하였다. 이와 같은 준비 끝에 최익현 선생은 1906년 6월 4일 태인 무성서원에서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의 깃발을 들었다. 제자인 최제학을 비롯한 제자 및 유림 80여 명이 즉석에서 의병 대열에 합류했다. 이때 임병찬은 미리 가재를 털어 병기를 수집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 100여명을 대동하고 있었다. 이들 180여명이 호남지역에서 을사늑약 이후 최초로 일어난 태인의병이었다.

  • 질문1 다음은 태인의병의 활동을 기록한 글입니다. 최익현의 의병에 대해 호남 지역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이야기 해 봅시다.

    최익현이 물러나 옥과에 주둔하며 각 군에 격문을 전하자 전라북도 사민이 최익현이 거의하였음을 듣고서 앞을 다투어 날뛰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와서 참여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읽기자료 4

대마도에서 외롭게 순국하다

무성서원에서 일어난 최익현의 태인의병 부대는 태인과 정읍을 지나 순창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저항 없이 행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순창을 거점으로 삼고 남원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한 때 곡성으로 나아가기도 하였지만, 예상외로 저항이 심해 순창으로 회군하고 말았다.
6월 11일, 일제의 사주를 받은 정부에서는 전주관찰사 한진창에게 전북지방 진위대를 동원해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진창은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를 순창으로 출동시켜 태인의병을 봉쇄하면서 의병을 압박하였다. 동족끼리의 전투가 예상되자 최익현 의병장은 부득이 의병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익현과 더불어 해산하지 않고 끝까지 남은 인원이 100여 명에 이르렀다.
전주·남원 두 진위대는 11일 당일 오후 6시경 일제히 의병을 공격해 왔다. 최익현을 비롯한 의병 지휘부가 저항 없이 순창 객관 연청에 그대로 눌러 앉아 있자 진위대는 사격을 중지하고 지휘소를 포위한 채 그대로 밤을 지샜다. 이튿날 의병장 최익현과 임병찬을 비롯한 13명이 체포된 뒤 14일 전주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일제의 헌병대에 넘겨져 18일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 뒤 1906년 8월 14일 일제의 육군이사(陸軍理事)로부터 최익현은 3년, 임병찬은 2년형을 선고받고 대마도에 유폐되는 고초를 겪었다.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쌀 한톨 물 한모금도 왜놈 것을 먹을 수 없다”고 단식으로 저항했고 결국 11월 17일에 순국했다.
최익현의 태인의병은 활동 기간이 10여 일에 불과하고 격전 한번 없이 해산하고 말았지만 그 여파는 컸다. 이를 계기로 호남 각지에서 태인의병과 연계되었거나 혹은 그 영향을 받아 많은 의병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 질문1 다음 대화에서 빈 칸에 들어갈 말을 적어보자.

    철수: 최익현 의병장은 의병을 포위한 진위대 군사들에게 일제에 맞서 같이 싸우자고 간곡히 설득했지만 거절당했다는군.
    영희: 진위대 군사들은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입장에서 의병 진압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해.
    자영: 1년 후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자 많은 군인들이 의병활동을 벌이지. 태인의병을 진압했던 진위대 군인 중에도 나중에 의병활동을 했던 사람도 있을거야.
    철수: 그런 군인이 있다면, 그가 진압한 의병과 그 군인의 의병활동은 다른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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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병오창의기적비

다음은 1992년 무성서원의 동재인 강수재 앞에 세워진 병오창의기적비이다.

  • 질문1 사진 속 비석은 1992년 무성서원의 동재인 강수재 앞에 세워졌다. 어떤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을까?

시각자료 2

최익현 초상

이 그림은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는 어진화가로 유명한 채용신이 1905년 정산군수로 재직할 때 그린 최익현의 초상으로 평생을 위정척사에 노력한 전통 성리학자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 질문1 심의(겉옷)와 털모자를 쓴 최익현의 초상화에서 전해지는 느낌을 말해 보자.

시각자료 3

다음은 태인의병의 참모 역할을 했던 임병찬의 초상화이다.

  • 질문1 다음 글을 읽고 태인의병에서 임병찬의 역할을 정리해 봅시다.

    임병찬은 전라북도 옥구에서 태어나 낙안군수를 지냈다. 그는 동학농민운동군의 지도자인 김개남을 체포하는 등 군대를 운용한 경험이 있었다. 최익현은 그에게 의병 모집에서부터 군수물자 조달, 군사 훈련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군사 업무를 위임하였다. 그는 각지의 의병 모집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산포수를 규합하여 태인의병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시각자료 4

다음은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육군대신에게 보낸 전보로, 을사의병을 체포하여 대마도로 끌고 가 철저히 가두어 두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제는 을사의병을 진압하기 위하여 이집트를 침략할 때 이집트 민족운동의 영웅인 아라비 파샤를 멀리 인도 남쪽의 실론 섬에 유폐한 사실에 착안하여 의병장을 대마도로 끌고 가 유폐하였다.

  • 질문1 일제와 영국이 민족운동의 영웅을 섬에 철저히 가두려고 한 공통 목적은 무엇일까요?

시각자료 5

최익현의 순국을 보고한 일제의 문서(1907.1.4)

다음은 대마도에서 최익현이 순국한 사실을 보고한 일제의 문서이다.

  • 질문1 다음은 최익현이 죽기 전, 함께 갇혔던 임병찬을 통해 임금에게 올린 글입니다. 최익현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써 봅시다.

    신의 나이 74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년 화하정도가 더럽혀져도 부지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 선왕의 적자가 어육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고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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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다음은 태인의병을 일으키기 전에 호남 지역의 뜻있는 선비들을 만나 항일투쟁을 모의하는 장면입니다. 각 모둠별로 이날 최익현의 이름으로 뿌려진 격문을 가상으로 지어봅시다. 격문을 만들 때에는 아래의 내용을 포함하여 설득력 있는 글이 되도록 합시다.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키기 직전인 1906년 5월 30일에 담양 추월산에 있는 용추사에서 호남지방의 항일세력의 중심인물인 송사 기우만 등을 비롯해 50여명의 유림 인사들과 만나 항일투쟁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모임 이후 최익현의 이름으로 의병 투쟁의 정당성을 밝히고 주민들의 참가를 독려하는 격문이 만들어져 각지에 발송되었다.
※ 격문에 들어가야 할 내용
- 강화도조약 이후 일제가 우리의 국권을 짓밟은 구체적인 사례들
-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로 인해 실질적으로 나라가 망할 단계에 이르게 된 실정 - 모든 국민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움을 통해 일제를 몰아내야야 하는 이유
모둠활동 2
태인의병이 순창에서 진위대에 포위 되었을 때 최익현 의병장은 동족끼리의 싸움은 할 수 없다며 의병 해산을 명령하고 저항을 포기합니다. 당시 최익현 의병장의 의병 해산 결정에 대해 모둠별로 찬반 입장을 정하고 토론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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