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본문영역

  • 도입
  • 역사적 배경
  • 읽기
  • 시각자료
  • 모둠활동

주요사적지 배움터

기삼연의병 주둔지 - 문수사(백마장군 기삼연, 호남의병의 선봉이 되다)

도입

“신은 생각하옵건대 폐하께서 혹시 위급한 사태를 모르시고 이럭저럭 얼버무려 지탱할 수 있다고 보시는 것 같으나, 어리석은 신의 소견으로는 폐하께서 마치 깊은 산중에 홀로 앉아 호랑이를 불러 호위하게 함과 같아서, 사람의 마음이 있는 이라면 급박한 위험을 달려가 부르짖으며 구하려고 생각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위의 글은 기삼연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고 의병을 일으키면서 올린 상소문의 일부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있으니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일어서겠다는 의지와 더불어 임금에게 당시 상황의 위급함을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절히 녹아있는 상소이다.
이 상소를 올린 1907년은 고종이 일제에 의해 쫓겨나고 군대가 해산되던 대한제국의 주권이 사실상 상실되는 위기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나라를 되찾고자 일어난 수많은 의병 부대 중 호남 지역의 의병 활동은 가장 돋보였으며, 호남 의병에 선봉에 있던 부대가 기삼연이 중심이 된 호남창의회맹소이다.
일제로부터 호남 지역을 폭도 봉기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호남창의회맹소 기삼연의 활동을 통해 국권 수호를 위해 의병의 정신을 살펴보자.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48
현재 상태 문수사 주변은 변모하였으며 사찰은 비교적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지속적인 침략을 시도하던 일제는 1894년 청․일 전쟁,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통감부를 설치하고 외교권을 빼앗아가며 대한제국을 자신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07년에는 고종을 황제자리에서 강제로 쫓아내고 순종을 새로운 황제로 올리는 한편, 대한제국을 지키는 근간이었던 군대를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고종의 퇴위, 순종의 즉위,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이르는 중요한 사건이 불과 보름이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일어났다는 점은 이 시기 일제의 침략이 매우 치밀하게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07년에 맺어진 정미 7조약은 1905년 맺어져 외교권을 빼앗아 간 을사조약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관리임명권 등 나라의 통치권을 모두 빼앗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조약의 핵심적인 내용은 바로 대한제국 주권의 핵심인 군대를 해산하는 것이었다.
1907년 7월 31일 군대 해산과 관련된 칙령을 강제로 얻어내어 8월 1일 동대문 훈련원에서 군대 해산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군대 해산은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을 시작으로 거센 항일 투쟁의 시작이 되었다. 이로 인해 1907년 후기 의병은 무기와 전술 등에서 전력을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병의 활동 지역이 전국 단위로 확대되고, 지역적으로 고립된 의병 부대들이 상호 연합 작전이 가능한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시기 전라도 지역의 호남 의병은 1909년이 되면 일본군과의 교전 횟수 및 교전에 참가한 의병수가 전국의 의병과 비교하여 각각 47.2%, 60%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바로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의병의 선봉이자 중심이었고 수연산 석수암에서 의병 부대를 결성하고 문수사에서 첫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여 큰 피해를 입히면서 의병활동을 본격화하였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읽기

읽기자료 1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서 글을 익히다.

기삼연(1851∼1908)은 1851년 1월 18일 전남 장성군 황룡명 야곡리 하남에서 진사 기봉진의 4남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자는 경로이고 호는 성재이며 행주가 본관이다. 그는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 국론을 주도하던 위정척사파 가운데 기호지방의 이항로와 더불어 대표적인 인물인 기정진의 조카이자 문하였다. 또한 그는 기정진의 손자이면서 당시의 유명한 유학자였던 기우만의 9촌 아저씨이기도 했다. 그는 위정척사운동의 대표적인 가문이면서 한말 의병전쟁에 참전한 인사가 많이 배출된 집안 출신이다.
기삼연은 일찍이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서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 기정진은 19세기를 대표하는 조선의 유학자로 호남과 경남 서부지역에 근거로 하여 노사학파를 형성했다. 기정진의 사상은 이러한 학파의 결속력을 바탕으로 해서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발전에 정신적, 물질적 기반이 되었다. 그리하여 을미의병을 시작으로 정미의병까지 기정진의 문인들은 호남의병의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호남창의회맹소를 조직한 기삼연이다.
기정진의 위정척사사상은 1866년 병인「척사소」를 통해 알아 볼 수 있다. 그는 서양의 침략 의도를 ①정치적 예속 ②경제적 착취 ③문화적 예속 ④사회적 파괴 ⑤도덕적 추락 등에 있다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서양 문물의 수입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서양 문물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는 것(結人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군주가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국가적 위기의 원인이 대외적 변화에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정치체제의 모순으로 인한 체제의 약화에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기삼연이 기정진의 위정척사 사상을 수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성리학 이외의 도교, 불교의 모든 경전과 문학, 야사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탐독하였다. 특히 병서를 공부하고 실제 여러 가지 병법을 시험해본 경험은 훗날 의병장이 되어 군사들을 훈련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 젊어서 부모형제의 권유로 과거에도 응시하여 장문의 답지를 써서 제출하였으나 시험관이 어려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형식을 어겼다는 명목으로 낙방시킴으로써 과거에 실패하는 경험을 하기도 하였다.

  • 질문1 노사 기정진은 당시 국가의 위기를 조선 후기 ‘정치체제의 모순’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렇다면 당시의 정치체제의 모순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 내용을 정리해보자.
  • 질문2 기정진은 ‘장문의 답지를 제출하였으나 시험관이 이해하지 못하여 과거에 떨어진’ 내용을 통해 조선 후기 과거제가 어떻게 운영되었을지 생각하여 서술해보자.
  • 질문3 만약 여러분이 이 시기에 태어났다면 서구열강과 일본세력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어떤 해결책을 찾아 행동하였을지 생각해보자.

읽기자료 2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을 일으키다.

1895년 8월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을미사변)이 일어나고, 같은 해 10월 단발령이 강제로 실시되자 이에 반발하여 많은 의병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광주에서도 기우만과 고광순이 일어나 일제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였다. 이 때 기삼연도 장성에서 3백여 명의 의병을 모아 광주로 진군하여 기우만과 합세한 뒤 스스로 군사와 관련된 업무를 자원하여 담당하였다. 이 때 기삼연은 백마를 타고 왕래하면서 의병을 모집하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백마장군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896년 4월 진주의 노응규 의병을 격파한 친위대장 이겸제가 진격해오고, 한편으로는 이전에 학부대신을 맡았던 신기선이 남로선유사로 파견되어 해산을 권유하자, 기우만은 별다른 저항없이 의병 부대를 해산하였다. 이에 기삼연은 강하게 반발하며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고 한다.

“선비와는 함께 일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때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는 수가 있거늘, 하물며 강한 적(敵)의 협박을 받은 것이요,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님에서야. 이 군사가 한번 파(罷)하면 우리 모두는 왜놈이 될 뿐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을미의병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김한정이 이끌고 온 전주진위대의 군사에게 붙잡혀 전주옥에 갇혔다가, 서울 평리원에 옮겨져 고초를 겪었다. 다행히도 보름 정도 지난 후 평리원장이었던 이용태의 도움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 질문1 1896년 4월 기우만이 의병을 스스로 해산한 이유를 찾아서 써봅시다.
  • 질문2 만약 여러분이라면 기우만과 같이 의병을 해산하겠습니까? 아니면 기삼연의 주장대로 의병을 유지하며 투쟁을 계속하겠습니까? 자신의 의견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3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의병을 일으키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준식민지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1907년에는 고종이 강제로 물러나고, 정미 7조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기삼연도 1907년 9월에 전라남도 영광 수연산 석수암에서 의병을 모아 부대를 편성하고 ‘호남창의회맹소’라고 이름하였다. 이 때 편성된 의병 부대의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이와 같은 의병부대의 면면을 살펴보면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의병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대규모 부대였다. 결성 이후 기삼연은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의병을 일으킨 사실을 알리고 『대한매일신보』에도 글을 보내 의병항쟁을 후원하고 지지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다. 그 중 전국 각지에 「격서문」을 보내 일제와 국내의 친일세력을 비난하고 전 국민이 항일의병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격문 끝에 평민이 일본인 한 사람을 죽이면 100냥을 주고, 순검이나 일진회원이 일본인 한 사람을 죽이면 죄를 면해주고 두 사람을 죽이면 상금 100냥을 준다고 첨가하여 포고하였다.
기삼연의 창의회맹소는 각 의병장을 중심으로 단위부대를 편성한 뒤 분산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작전 목표가 정해지면 집결지와 집결일시를 각 부대에 통보하여 양민을 가장하거나 각개 행동으로 집결지에 모였다. 그런 다음 일시에 작전을 수행하고는 다시 각처로 분산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때문에 일본군은 좀처럼 기삼연 의병부대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 질문1 기삼연의 창의회맹소에 많은 의병장이 합류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자신의 의견을 써봅시다.
  • 질문2 순검이나 일진회원이 일본인 한 사람을 죽이면 죄를 면해준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일진회는 어떤 단체인지 조사하여 정리해 봅시다.
  • 질문3 기삼연의 창의회맹소는 각의병장을 중심으로 부대를 편성, 분산하여 활동하다가 작전 때에는 집결, 작전 후에는 다시 분산하였다. 이런 전술로 일본군에 대항한 이유는 무엇인지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4

고창, 영광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다.

의병을 일으킨 후 기삼연 의병부대는 장성 지역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북상하여 1907년 9월 23일 고창 문수사에서 선봉장 김태원이 거느린 부대가 일본군을 격파하여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 때 주민들이 의병에 적극 협력하여 적의 기밀을 알려 주었던 것이 승리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겨울에 대비하여 군사들의 식량을 준비하기 위해 서쪽의 법성포로 향하여 진격하였다. 당시 법성포에는 근처 지역에서 세금으로 걷은 많은 곡식들이 쌓여있었다. 1907년 12월 7일 기삼연을 비롯하여 통령 김용구, 선봉장 김태원 등이 지휘하는 호남창의회맹소의 의병부대는 영광 법성포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순사주재소와 우편소는 물론 일본인 가옥 7채를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창고에 쌓여 있는 세곡미를 비롯한 곡식을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일부는 군량미로 노획하였다. 공격 직후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기삼연이 이끄는 본대는 장성과 담양으로, 통령 김용구가 지휘하는 부대는 고창으로, 선봉장 김태원이 인솔하는 부대는 나주, 함평, 광주로 이동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삼연 부대는 장성 무동촌에서 적을 만나 격전을 벌여서 적 5, 6명을 살상했으나, 아군도 흩어졌다. 다시 흩어진 군사들에게 연락하여 동짓날에 영광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기밀이 누설되고, 추위로 병든 군사들이 많아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기삼연이 이끄는 호남창의회맹소 의병부대가 장성, 고창, 영광 등지에서 기세를 떨치자, 일본군 광주수비대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10개 종대의 이른바 ‘폭도토벌대’를 편성하고 1908년 1월 24일부터 광주, 나주, 장성, 함평, 순창 등지에서 의병부대를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 질문1 다음 글을 읽고 기삼연이 영광 법성포를 공격했을 때 순사주재소와 우편소를 불태운 이유를 간단히 써보자.

    1908년 스티븐스 저격사건 이후 일제는 각 지방에 대한 헌병과 경찰의 포위망을 더욱 조밀히 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경찰의 경우에는 70경찰서, 3분서, 3399(순사)주재소에 4,960명을 배치하였다.
    - 『한국사』 43 - 일제는 대한제국의 통신기관을 강제로 빼앗은 후 1905년 통신협정을 체결하였다. 각 우편국소에서는 통상 우편물과 등기물을 취급하는 한편 우편환, 우편저금사무를 취급하게 하였다.
    - 『한국우정100년사』 -

읽기자료 5

담양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순국하다.

이런 가운데 기삼연은 3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장성을 지나 담양 금성에 들어갔다. 이곳의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겨울을 지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담양에 도착해 부대를 정비하고 있을 때 담양에 주둔하던 일본군대와 경찰에 의해 선제 공격을 받아 30여명이 전사하는 패배를 당하였다. 이 때 의병부대는 완전히 포위당하여 빠져나갈 길이 없었는데, 갑자기 안개가 끼어 기삼연을 비롯한 나머지 의병들은 북문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담양 금성에서 참패를 당한 기삼연 부대는 곧바로 순창 복흥산으로 들어갔다. 여러 차례의 전투로 인해 전력이 크게 소모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 겨울의 추위로 인해 의병활동이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에 한계를 느낀 기삼연은 병사들에게 각자 집으로 돌아가 설을 쇠고 정월 보름에 다시 모이도록 하자며 일시적인 해산명령을 내렸다.
의병 부대를 해산한 뒤 기삼연은 구수동의 기구연의 집에 머물며 설을 쇠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08년 2월 2일 음력 설날 일본군에 의해 은신처가 발각되어 갑자기 들이닥친 금촌 토벌대 수십 명에 의해서 체포되어 담양으로 압송되고 말았다.
이 때 마침 선봉장 김태원은 창평에서 일본군 토벌대장 요시다를 죽이고 그 잔졸들을 추격하다가 기삼연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병 30명을 이끌고 광주로 가는 길목인 경양역에 이르렀으나 이미 기삼연은 광주로 압송되어 수감된 뒤였다.
일본군에게 잡혀 곧 바로 광주로 옮겨진 기삼연은 다음날인 1908년 음력 2월 2일(양력 2월 3일), 광주시 서천교 밑 백사장에서 피살되어 58세를 일기로 순국하고 말았다.
하지만 기삼연의 순국은 헛되지 않아 그의 죽음을 계기로 호남의병은 더욱 왕성하게 발전하여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였던 김태원(김준), 김용구, 전수용, 이석용 등은 물론 안규홍, 강무경 등의 평민 의병장들이 나타나 호남을 의병항쟁의 중심지로 만들어 갔다.
정부는 기삼연의 공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2001년 1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 질문1 일본군이 기삼연을 재판 과정도 없이 빨리 사형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는지 자신의 생각을 간단히 써보자.
  • 질문2 기삼연처럼 일본군에 잡혀서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한 의병장이 전국적으로 더 있는지 조사하여 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시각자료

시각자료 1

군사를 일으켜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이던가


왼쪽 글은 행주 기씨 집안에서 편집한 것으로, 성재 기삼연과 관련된 각종 기록과 더불어 11명의 의병장에 대한 전기가 실려 있는 「호남의병장열전」이며. 오른쪽 글은 이 책의 기록된, 기삼연이 죽음을 맞이하여 쓴 절명시이다.

  • 질문1 기삼연은 시의 내용 중 밑줄 친 ‘해’가 무엇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했을까? 그리고 ‘해를 삼킨’ 것을 어떻게 이해했을지 생각해보자.
  • 질문2 기삼연의 순국을 애도하고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드러내는 짧은 글을 지어봅시다.

    예) ‘삼가 기삼연 의병장의 순국을 애도하며 저도 당신의 그 높은 뜻을 따라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시각자료 2

다음 글은 기삼연이 일으킨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에 대한 일본 경찰의 기록이다.

출몰 구역은 원래 일정치 않아 본년 1월부터 3월경까지는 거듭하여 광주·나주·영광·함평·담양·장성·곡성·옥과(玉果)·구례(求禮) 등 전라북도에 접근한 방면에 출몰하였으나, 4월 이후에는 큰 수괴가 대개 멸망하고 잔당은 화적으로 변한 자가 많고, 그 구역도 따라 일정치 않다.
그러나 점차 동복·화순·능주·보성·장흥·영암·강진 및 순천·낙안·광양 등 남부지방으로 전출하여 근래에는 남평(南平)·능주·보성·낙안 동복 등지에서 출몰하는 것 같다.

  • 질문1 위 기록을 읽고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의 범위를 지도에 표시하여보자.
    (표시 방법 - 기록에 나오는 지명을 점을 찍어 선으로 연결하여 활동범위를 영역으로 표시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모둠활동

모둠활동 1
다음 글은 기삼연 의병장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면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린 광고문의 일부이다. 여기서 기삼연은 우리나라가 이렇게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외국과의 통상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제의 근원 및 해결책을 2 ~ 3가지 들어 사람들에게 알리고 지키라고 하고 있다. 아래 글을 참고하여,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한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당시 대한제국이 닥친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3가지 정도 토의를 통해 작성해보도록 하자.

광고문
호남창의대장이 널리 고하는 일
이웃 나라와 외교한다고 핑계하고 통상(무역)을 금하지 않은 것이 실로 문제가 되었다. 처음에는 음란하고 부정한 물건을 만들어서 우리 백성의 풍속을 문란케 하고 마침내는 나라를 팔아먹는 무리를 뇌물로 매수하여 국가에 난이 그칠 때가 없다.
본 창의회맹소는 큰일을 일으켜서 강토를 회복하기를 맹서하는데, 병을 얻은 근원을 살펴서 쓴 약을 쓰지 않으면 한갓 군사만으로는 일을 이룰수 없는 것이다.
이에 문제의 근본과 근원을 2, 3가지 대략 들어서 우리의 의지를 보이니, 각기 마음을 씻어 영을 따르라.
1. 곡식의 매매에 제한과 방지가 없음은 실로 우리 백성의 목숨을 여위게 하고 가만히 우리 국가의 명맥을 해치는 것이다. 백성들은 무지하여 작은 이익을 엿보고 큰 해독을 잊어버리니 그들에게야 논할 것이 있으랴.
2. 부정하고 교묘한 물건은 실로 순박한 풍속을 깨뜨리는 것이다. 감히 매매하는 자가 있으면 그 물건을 불태우고 그 몸을 죽이리라.
3. 왜적과 가만히 통하여 우리의 기밀을 누설시키는 자는 죽여서 용서함이 없으리라.
위의 3건은 그중 심한 것만 들었고, 뒤에 게시하여 널리 고하노니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어김이 없으라.
정미(丁未) 10월 24일



모둠활동 2
다음 글은 정미 7조약의 비밀 「부수각서」 중 군대 해산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1. 육군 1개 대대를 존치하여 황궁수비를 맡게 하고 이외에는 해산할 것.
2. 군부를 비롯한 육군에 관계되는 관청은 전부 폐지할 것.
3. 교육받은 장교는 한국군대에 머물 필요가 있는 자를 제외하고 기타는 일본군대로 부속시켜 실지연습을 시킬 것
4. 해산한 군인들 가운데 경찰관의 자격이 있는 자는 채용하고 이외에는 실업(實業)에 종사하도록 할 것. 그 방법은 예컨대 ①간도로 이주시켜 개간에 종사시킬 것 ②둔전법으로 황무지 개간에 종사시킬 것.


위 글의 3조에서 장교들을 그대로 유임시킨 이유는 무엇인지 말해봅시다. 그리고 4조에서는 해산 군인들에 대한 사후 처리 문제를 규정해놓았는데, 이 조항이 가져온 결과는 무엇일지 토론해 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31232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1  전화: 041-560-0405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21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