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영역
도입
천고의 강상을 짊어짐은 중요하고
삼한의 해와 달은 밝게 비치는데
외로운 신하는 만 번 죽어도 마음 변치 않으니
사람으로 머리 숙여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네.
위의 시는 이석용이 일제에 대항하여 의병활동을 벌이고, 밀맹단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1914년 4월 38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기 전에 남긴 절명시다.
그가 의병활동을 시작한 마이산은 두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솟은 형상이 말의 귀를 닮았다고 해서 마이산(馬耳山)이다. 이 산은 계절마다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봄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운 곳에 솟은 두 봉우리가 쌍돛대와 같다 하여 ‘돛대봉’, 여름에는 나무가 울창해져 용의 뿔처럼 보인다고 ‘용각봉’, 가을에는 단풍든 모습이 말의 귀와 닮았다고 ‘마이봉’, 겨울에는 온 산하가 눈에 덮여 있는 속에 봉우리만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머금은 붓의 끝과 같다하여 ‘문필봉’이라고 한다.
이 곳 마이산 용암에서 시작하여 죽음의 순간까지 항일투쟁의 뜻을 꺾지 않았던 이석용의 의병정신을 알아보자.
역사적 배경
| 현재 주소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산223-11 일대 |
|---|---|
| 현재 상태 | 원형보존 / 정리는 되지 않았으나 현장은 원래 모습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 입구에서 남쪽주차장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오른쪽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 김대중 대통령이 글씨로 새겨진 호남의병창의동맹단 결성지 비석과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이석용 의병장이 의병 300명을 모아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조직하고 바위에서 말을 잡아 그 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의병활동의 시작점으로 삼은 곳이다.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오는 주필대가 있다. 그리고 이산묘라고 부르는 사당에는 단군, 이성계, 세종대왕, 고종황제를 비롯하여 40현위, 일제에 대항하여 싸운 34명의 충신과 열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을 시작으로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정미7조약이 맺어지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더군다나 1907년에는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이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1907년 8월 1일 오전 서울 남대문에서 군대의 강제해산에 반대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났고, 이어 강원도 원주, 강화, 홍주, 진주 등지에서 해산된 군인들의 봉기가 이어졌다. 이 봉기들은 모두 실패하였으나 대부분의 병사들은 의병부대에 합류하면서 전국적인 의병 항쟁의 규모가 확대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읽기
읽기자료 1
몰락 양반의 아들로 구국의 의지를 세우다
이석용은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다음 해인 1877년 11월 29일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향반(鄕班)인 김봉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경항, 호는 정재이다. 신라시대 사공이라는 벼슬을 하던 이한의 후손으로 6대조인 이목이 무오사회로 인해 벼슬을 잃고 시골로 내려온 이후로 관리가 된 사람이 없는 한미한 집안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집안은 양반이면서도 실제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몰락한 양반에 속하였다.
이석용은 어린 시절부터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친 충신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1894년에는 스승인 겸재 김관술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하였고 이듬해에는 스승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1895년 8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을미개혁으로 단발령이 실시되자 이석용은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고 한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버리시니 이것이 무슨 말이뇨. 임진왜란 때 입은 수모도 아직 갚지 못했거늘, 일찍이 듣지 못한 금년 8월의 변을 당하였으니 백성들의 절박한 분통을 펼 때가 없도다. 이것은 또한 머리털을 깎고 살갗을 벗기고자 하는 것이라 살고자 하는 생각을 버림과 같지 못함이 심하다. 또한 군부(君父)의 원수는 맹세코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는 것이니, 만세토록 백성되고 자식된 자는 복수해야 하는 것인데 빨리 죽은 뒤에 그치는 것이 가하리요.
그 뒤 이석용은 진안의 도동으로 이사한 후 널리 스승을 찾아 각지를 다니면서 학자들과 교류하고 나라를 구할 방법을 함께 고민하였다. 이 때 그가 만난 학자들은 송근수, 송병선, 심석재, 송병순, 기우만, 전우, 정운람, 최계남, 허유, 정재규, 곽종석, 최익현 등 전국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선비들이었다. 또 이 과정에서 남한산성, 진주 촉석루, 운봉의 황산대첩비 등 대외침략에 항거하여 싸웠던 유적지를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 질문1 이석용이 탄식한 글 가운데 나오는 ‘금년 8월의 변’이 가리키는 사건은 무엇일까?
-
질문2
윗글에 나오는 ‘남한산성, 진주 촉석루, 운봉의 황산대첩비’는 이석용이 민족의식을 키우기 위해 다닌 유적지들이다. 각 유적지가 외세의 침략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검색하여 아래 표를 작성해보자.
읽기자료 2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해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치되어 대한제국이 사실상 식민지 상태가 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 때 이석용은 태인에서 일어난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의병에 가담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고광수, 이평해 등과 준비를 하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 당하자 이석용은 일제를 물리치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부모에게 하직인사를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오랑캐 놈들이 도성 안에 가득 차 있어 임금과 신하는 처소를 잃어버릴 지경에 이르렀사오며, 단군 기자가 베푼 풍교는 요원해지고 요순의 도학은 땅에 떨어졌사오니 무릇 혈기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어찌 역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을 생각이 없겠사옵니까. 다만 대의를 만천하에 펴는 것이 원이오며, 성공하고 못하는 것은 예측할 바 아니옵니다. … 부모님 슬하를 떠나게 되니 모습이 가련하지만 … 두어 해를 지나지 않아 돌아와 뵙게 될 것인즉 어린 아이들이나 돌보아 주시고 행여 조석 간에 너무 기다리시어 몸과 마음을 손상시키지 마십시오.
1907년 8월 이석용은 고종의 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일제의 국권 침탈이 노골화 되자 전북 임실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기삼연이 영광 수록산 석수암에서 호남창의회맹소를 구성하자 전해산과 더불어 종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기삼연의 의병에는 합류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독자적인 활동을 계획하였다.
1907년 8월 27일 임실군 성수면에 있는 상이암에서 이미 모집된 의병들과 함께 회의를 가지고 의병의 명칭을 ‘의병창의동맹’이라 하였다. 이 때 구성된 의병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호남창의동맹에 참여한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임실을 비롯한 전라북도 동부지역에 거주하는 가난한 양반들이었다. 병사들은 주로 농민과 천민들로 구성되었는데 약 300명 규모였다.
이석용은 9월 5일 백암을 출발하여 전열을 정비한 뒤, 9월 12일에는 진안 마이산에서 의병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마이산 남쪽 기슭 용암위에 집합한 의병들은 나무를 베어 단을 쌓게 하고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제단 정면 위에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라 크게 써서 깃발로 걸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의병은 모두 500여 명이었으며, 이 날의 모임을 성원하기 위해 모여든 민중들의 수까지 합하면 1,0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 때 자신들이 지켜야 할 14개 조항과 일제의 죄상을 10개 조목으로 나누어 비판한 「삭왜십죄」를 발표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의병을 모으는 한편 백성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려하였다.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석용은 9월 13일에 진안읍을 공격하여 일본 장교의 팔에 총상을 입히고 일본군의 복장, 서양식 총, 비단, 문서 등을 빼앗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우편소를 습격 파괴하여 우편물을 소각하고 전선을 모조리 끊어버리기도 하였다. 또 9월 16일에는 내원사 골짜기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10월 8일에는 화암리 후방산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일본군과의 병력 차이로 많은 의병을 잃고 퇴각하여 진안·용담·정천·임실·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남원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고, 11월 14일 성수산에서 의병을 재편하였다. 11월 17일에는 장수읍을 야습하여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하였으며, 12월 25일에는 진안 무술촌에서 적 2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3월 5일에는 진안 시동, 3월 14일 마근현, 3월 17일 수류산, 3월 27일 관촌역, 4월 30일 가수리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휘하의 봉수·덕홍 등 승려와 박철규, 허천석 등 소년의병이 전사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군의 토벌작전이 거세져 전력의 소모가 심해지자 이석용은 1909년 9월 의병을 해산하였다.
- 질문1 9월 12일 궐기대회에는 의병뿐만 아니라 민중들까지 1,000여명이 모였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의병 결성식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말해봅시다?
- 질문2 이석용 부대의 활동을 보면 계속 지역을 이동하면서 소규모의 전투를 반복하고 있는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이석용 의병부대가 이러한 전술을 쓰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봅시다.
읽기자료 3
밀맹단을 조직하였다가 실패하고 순국하다
의병 해산 뒤 1910년 8월 29일 국권을 빼앗겨 무장투쟁이 불가능해지자, 1911년 3월 이석용은 동지들과 함께 일본 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1912년 겨울에는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모아 ‘임자밀맹단’이란 조직을 만들어 중국으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구례의 정찬석을 비롯하여 하동·곡성·남원·전주·임실·진안 등지의 20여명이었다. 당시 조직된 밀맹단의 구체적인 활동모습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석용의 공판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총독인 데라우치와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 체결에 주도적 역할을 한 친일파 등을 암살하려 하였으며, 일본의 도쿄, 오사카 등지에 방화를 하려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1913년 10월 친구의 밀고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전주 감옥에 갇혔고, 1914년 1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 때 재판을 맡은 일본인 판사가 “일본 천황의 신민이 될 생각이 없는가?”라고 질문을 하자, 그는 “차라리 대한의 닭이나 개가 될지언정 네 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고 당당히 답변하여 의병장으로서의 기개를 보여주었다. 이석용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14년 2월 대구 감옥으로 이송되어 2심 재판을 받았으나 1심과 동일한 판결을 받았으며, 서울 고등법원에서도 상고를 기각하여 1914년 4월 38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해방 뒤 정부는 이석용의 공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고, 2012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 질문1 임자밀맹단이란 조직을 만들어 이석용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
질문2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 체결에 주도적 역할을 한 친일파 해당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찾아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이석용 의병부대가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인 것을 추모하기 위해 임실군 태평리에 세운 운현전적의혼추모비이다. 이석용은 1907년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1895년부터 시행된 단발과 관련된 문제 의식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
질문1
다음은 단발에 대한 이석용의 태도를 보여주는 글이다. 글을 읽고 이석용이 왜 단발에 대해 부정적이었는지 생각해봅시다.
즉 1908년 2월의 기록을 보면, “저녁에 동화 장터에 당도하여 머리 깎은 사람을 매 때리고 백성들을 좀 먹은 임(任)·장(長)들을 불러들여 역시 매를 때렸다. 머리 깎는 데 앞장선 괴수놈들을 잡아 때리고 그 도당에게 일체 갓·망건을 쓰고 출입할 것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또 같은 해 4월 22일 “왕방리를 지나다가 머리 깎은 사람이 갓·망건을 쓰고 각근히 지공하며 나에게 심심한 치하를 하는 것을 보았다. 이때에 근읍(近邑)의 난민들 사이에 마음을 고친 자가 많았으나 죄를 입을까 두려워서 심한 자는 문을 닫고 머리를 길렀다”는 것이다.
시각자료 2
아래 사진은 1907년 이석용이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고 의병을 일으킨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은 격문이다. 이후 의병활동을 지속하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밀맹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해나가다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
질문1
다음 글은 당시 이석용 재판의 판결문 중 일부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판결문의 내용은 일제의 입장에서 서술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판결문에 드러나지 않은 이석용의 실제 활동을 재구성하여 서술해봅시다.
(이석용은) 폭도의 수괴로 행동하면서 남원수비대의 밀정 장운규에게 피고 등의 행동을 밀고한 3명의 집에 방화하여 전부 불에 타고, 김용원의 집에 넘어가 그의 장남 김재환이 순사로 일하는 것은 좋지 않다면서 김용원을 구타하여 상처를 입히고 집에 방화하였다. 사람들로부터 불법으로 금품을 약탈한 3명을 총살하고, 공전영수원을 구타하여 위협하여 망건 1개와 연관 3개를 강제로 빼앗고 집에 불을 지름.
- 1914년 3월 6일 대구복심법원 판결문 -
시각자료 3
아래 사진은 이석용 의병장이 의병활동을 시작한 1907년 8월 26일부터 다음해인 1908년 4월 29일까지의 일기와, 부록으로 전주공판기가 붙어있는 ‘정재 이석용 창의일록’이다.
-
질문1
다음은 1914년 1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공판 중에 재판장과 이석용 사이에 있었던 1문 1답 가운데 일부이다. 글을 읽고 재판장의 질문에 대한 이석용의 답변을 자신의 생각으로 써봅시다. 이석용의 답변을 서술할 때는 창의록과 불망록이이 이석용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재판장) 무슨 목적으로 폭도가 되었는가?
(이석용) 너희들 일인(日人)을 배척하기 위해서이다.
(재판장) 창의록*을 장황하게 저술한 것은 무슨 소용이며, 불망록**은 무슨 의미인가?
(이석용)
(재판장) 선고를 내릴 터이니 기립하라.
(이석용) 기립은 경의를 표하는 것인데 나는 원수에 대해 경의를 표할 수 없다.
(이때 강제로 일으켜 세우니)
이석용은 크게 노하며 "나의 마음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자 재판장은 사형을 선고하고 나갔다.
*창의록 : 의병활동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글
**불망록 : 잊지 않기 위해 쓴 기록
모둠활동
(가) 13도 의병총대장 이인영은 고향에 병중에 있던 부친의 부고가 전달되자 돌아가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라에 불충함이 부모에게 불효함이 되며, 부모에게 불효함이 나라에 불충함이 된다. 그 도(道)는 하나이며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나라 풍속에 따라 3년상을 치르고 효도를 다한 후에 재기하겠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3 - (나) 이석용은 국가에 대한 충(忠)과 집안에 대한 효(孝) 양자에 대한 가치비중과 일의 선후 문제에 대한 고뇌를 깊이 하였던 것 같다. 송병선을 찾았을 때 그는 이 문제로 함께 토론하였는데, 부모의 초상을 주관하는 문제로 인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유인석을 비판하는 송병선의 이야기를 듣고 그는 국가 위급 시에는 효보다 충에 절대가치를 부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듯하다.
- 윤병석, 「한말의병장열전」 -
위 글을 읽고 모둠원들의 의견을 모아 각자의 입장을 정리하여 (가)와 (나)의 주장의 차이점과, (가)와 (나)의 주장 가운데 하나의 입장을 선택하여 주장의 타당성이 포함되게 300자 내외로 써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