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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의거지(옛 종로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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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찬바람

섣달이 다 가도 볼 수 없던 눈이

正月들자 내리니 눈바람 차갑던 중학시절 생각난다.

아침 7시 찬바람 눈쌓인 벌판

새로 지은 외딴 집 세 채를 에워싸고

두겹 세겹 늘어선 왜적의 경관들

우리의 의열 김상옥을 노리네.

슬프다 우리의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꽉 잡은 채 그만 ----

아침 7

제비 길을 떠났더니다.

새 봄이 되오니 제비시여 넋이라도 오옵소서.

副註 : 김상옥(1890~1923)


이는 화가 구본웅이 1923년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이 일제 경찰 수색대와 교전 끝에 자결순국한 모습을 회상해서 쓴 시이다. 종로는 우리 역사에서 정치, 경제, 지리적으로 중요하고 상징성이 있는 곳이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각종 수탈기구를 종로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종로경찰서는 1915년 6월 북부경찰서 종로순사파출소가 승격된 것으로 1929년까지 예전 한성전기회사 사옥에 입주해 있었는데, 종로 일대를 무대로 일어난 각종 민족운동을 감시, 탄압하던 일제 공권력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의 주인공 김상옥(金相玉)은 1890년 동대문 안 어의동에서 영문 포수 김귀현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를 전후해 철물점 등을 경영했으며, 3·1운동에 참여한 뒤 비밀결사 혁신단·암살단 등에 가담했다가 1920년 10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22년 겨울 의열단장 김원봉이 구해준 포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하여 이듬해 1월 12일 저녁 8시경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감행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을 피해 10여 일간 은신하던 김상옥은 1월 22일 아침 효제동에서 일제 경찰수색대와 교전하다 탄환이 다하자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스스로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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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그들의 생활은 밝음과 어두움이 기묘하게 혼합된 것이다.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마음껏 즐기려했던 것이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이었다. ······사진 찍기를 아주 좋아했으며, 언제나 이번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리랑』, 님 웨일즈

조선 의열단은 1919년 11월에 만주 길림성 파로문에서 김원봉, 윤세주 등 13인이 조직하였다. 의열단은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 의미를을 담고 있다. 이들은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단 한명도 배신하지 않았다. 
3․1운동을 전후하여 해외로 망명한 독립 지사들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강력한 무장 조직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만주 지방이나 연해주에는 많은 무장 독립 운동 단체가 조직되었다. 이 중에는 독립군 부대를 결성하여 일제와 대규모의 독립 전쟁을 전개하는 단체도 있었으며, 이와는 달리 소수의 인원으로 조직되어 일제 요인의 암살이나 기관 파괴를 시도하는 항일 의거 단체도 있었다. 
항일 의거 단체 중 대표적인 것이 의열단이었다. 이 단체는 일제의 요인 암살과 식민 통치 기관 파괴를 목적으로 소수 정예 대원으로 구성되었다. 조직 형태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으며 매우 엄격한 행동 지침을 가진 단체였다. 조직된 지 얼마 후 의열단은 베이징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각지에서 단원을 포섭하여 1925년 경에는 70명의 결사 대원을 확보한 단체로 성장하였다. 
의열단은 일제에게 위협과 공포의 대상이 될 정도로 많은 의거를 일으켰다. 1920년에는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 투탄 의거를 일으켰고, 이듬해에는 김익상의 총독부 투탄 의거가 있었다. 1923년에는 김상옥의 종로 경찰서, 김지섭의 일본 황궁 투탄 의거가 있었다. 1926년에는 나석주가 한국 경제 침탈의 본거인 동양 척식 주식 회사와 식산 은행에 투탄하고 총격전을 벌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한편, 1923년 신채호는 김원봉의 요청에 의해 일명 ‘의열단 선언’이라고 불리는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하였다. 신채호는「조선혁명선언」에서 외교론, 독립준비론과 더불어 당시 국내에서 등장한 자치 운동, 참정 운동을 맹렬히 비판하고 민중 직접 혁명을 통해서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개인 폭력 투쟁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민중 혁명을 폭발시키는데 있음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의열단은 1920년대 후반부터 개인 폭력에 의한 의열 투쟁의 한계를 느끼고 무장 투쟁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김원봉을 비롯한 단원들은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여 체계적인 군사교육과 간부 훈련을 받았다. 단원의 상당수가 이때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0년대 후반에는 중국 관내의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난징 교외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워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고(1932), 중국 관내 정당 ․ 단체의 통합운동을 주도하여 민족혁명당의 결성에 중심 역할을 하였다.(1935)

  • 질문1 ‘의열단’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 질문2 ‘의열단’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 질문3 「조선혁명선언」에서 주장하는 독립운동의 방법은 무엇인가요?
  • 질문4 「조선혁명선언」에서 주장하는 독립운동의 방법은 무엇인가요?
  • 질문5 의열단이 체계적인 군사교육과 간부 훈련을 위해 난징에 세운 학교 이름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2

김상옥(金相玉)은 1890년 서울 동대문 효제동에서 출생하였다. 8세 때부터 공장 직공 생활로 생계를 도와야 했던 빈한한 가정의 소년으로 성장하였는데 이러한 궁핍한 생활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당시 식민지시대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삶의 모습이기도 했다. 17세가 될 무렵 기독교에 입교하고 동대문교회 부설 신군야학교에서 주경야독에 힘썼으며 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하자 직접 동흥야학교를 설립하는 등 배움에 대한 남다른 정열을 보였다. 23세가 되는 1912년에는 남한 각지를 무대로 약 행상을 하며 견문을 넓혔다. 이어 영덕철물상점을 경영하면서 경제적인 독립을 이룰 수 있었고 1913년에는 경북에서 채기중, 유창순, 한훈 등과 함께 비밀 조직인 광복단을 만들었다. 이후 말총모자회사를 설립하여 당시 대부분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상인들에 대항하며 일화배척과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는 것은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을 체험하면서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울려 퍼지는 감동적인 독립만세의 함성은 남다른 의지를 가진 한 청년에게 민족에 대한 각성과 스스로의 삶을 던질 인생의 목표로서 독립운동을 설정하도록 하는데 커다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919년 4월 1일 동대문교회 내 영국인 피어슨여사의 집에서 박노영, 윤익중, 신화수, 정설교, 전우진 등 청년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혁신단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4월 17일 각지의 독립운동 소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논설을 게재한 『혁신공보』 1호의 발행을 시작으로 그 해 9월까지 매회 1천부씩의 지하신문을 비롯하여 임시정부후원회 취지서와 항일전단을 제작, 배포하여 독립운동의 열기를 북돋웠다. 그는 신문제작의 재정지원을 맡는 한편 배포책임자로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재정적인 어려움과 일제의 인쇄시설 압수로 인해 9월에 접어들면서 신문발행은 중지되고 말았다. 또한 자신도 일경에 잡혀갔으나 40여 일에 걸친 갖은 악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사실을 부인하여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김상옥은 평화적인 방법의 독립운동이 갖는 한계를 절감하고 무력투쟁에 의한 독립쟁취를 구상하게 되었다. 
 때마침 1920년 1월 초순 중국 만주 소재 독립군단체인 북로군정서에서 파견된 김동순을 만나 무력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하게 되자 그의 결심은 더욱 굳어져 갔다. 이윽고 동년 4월경 김동순, 윤익중, 서대순 등과 함께 무장 의열투쟁을 지향하는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이미 철물상점 경영 등으로 중산층 이상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던 상태에서 격렬한 의열투쟁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광복회에서의 활동경험과 그의 개인적인 성향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3.1운동 당시에는 맨손으로 무장한 경관을 때려 눕히고 군도를 탈취했을 정도로 호협한 그였다. 
김상옥은 군자금 모집에 힘쓰는 한편 별도의 의열투쟁을 계획하여 권총 40정, 탄환 3천발을 휴대하고 입국한 광복단결사대의 한훈과 제휴하여 연계투쟁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8월 24일 미국의원단의 방한을 계기로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제고관의 암살과 적기관 파괴 등을 통해서 국제여론을 환기시켜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는 계획을 진행시켜 나갔다. 
그러나 거사 하루 전날 한훈과 김동순 등이 잡힘으로써 거사가 실패하고 그는 일경의 추적을 피해 은신하였다가 그 해 10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선배지사들의 격려와 경륜을 접하면서 자신의 안목을 넓혀갔고  의열단에 가입하여 의열투쟁의 의지를 다져나갔다. 1921년 7월에는 일시 귀국하여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군자금을 수합하였다. 

  • 질문1 김상옥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된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요?
  • 질문2 김상옥이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청년동지들과 함께 조직한 비밀결사단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 질문3 김상옥이 평화적인 독립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무력투쟁에 의한 독립 쟁취를 구상하게 된 사건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상하이에서의 생활은 의미 있었으나 뜨거운 가슴을 가진 김상옥의 기질에는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결심하고 동지들과 상의한 후 1922년 11월 말 동지 안홍한과 함께 트렁크식 나무 상자에 권총 4정과 탄환 8백발 그리고 항일문서 등을 숨긴 채 서울로 돌아왔다. 귀국 목적은 암살단 이래 숙원인 종로경찰서 폭파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죽이는데 있었다. 당시 종로경찰서는 일제 식민통치의 골간을 이루었던 경찰력의 대표적인 본산이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 압살하여 한국인들에게 원한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동지들과 작별할 때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니 거사에 임하는 그의 비장하고 결연한 자세를 읽을 수 있다. 서울에 도착해서 옛 동지들인 전우진과 이혜수의 집에서 정설교, 윤익중 등과 회의를 거듭하며 거사준비를 갖추어 갔다. 우선 필요한 것은 활동자금이었다. 이들은 항일문건과 독립운동자금 영수증, 인장 등을 제작하는 한편 거사용 폭탄을 마련하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드디어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김상옥은 종로경찰서(현 장안빌딩 근처) 서편 동일당이란 간판집의 모퉁이에서 경찰서 서편 창문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이 창문에 적중하여 터지는 굉음은 마치 일제의 탄압에 억눌린 민족혼을 일깨우는 우렁찬 함성과도 같았고 일제에게는 그들의 종말을 예고하는 철퇴처럼 강렬했다. 폭탄 투척 후 용산 삼판동(현 후암동) 소재 고봉근의 집에 몸을 감추었다. 고봉근이 그의 매부일 뿐 아니라 다음의 목표인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죽이기 위해서는 서울역에서 가까운 삼판동이 적당하였기 때문었이다. 1월 17일 일본 제국의회에 참석차 도쿄로 떠나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서울역에서 사살하기 위해 서울역을 사전 답사하는 등 계획을 추진해나갔다.
그러나 동대문서 한인순사 조용수의 밀고에 의해 은신처가 탐지되었고 1월 17일 새벽 종로경찰서의 무장한 순사 14명이 고봉근의 집을 포위하였다. 열에 아홉 발을 명중시킨다는 정확한 사격술을 갖춘 김상옥은 일경과의 격전 끝에 종로경찰서 유도사범이며 형사부장인 다무라〔田村長七〕을 사살하고 이마세·우메다 경부 등 수명에게 중상을 입힌 후 포위망을 탈출하여, 왕십리 근방 안장사에서 승복으로 변장하고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1923년 1월 22일 새벽 최후 은신처마저 일본경찰에게 탐지되고 말았다. 상해로부터의 서신이 효제동으로 온 것을 전해준 전우진이 일본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문초당한 끝에 은신처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 날 5시반 경 경기도경찰부장 우마노〔馬野〕가 총지휘관이 되고 보안과장 후지모토〔藤本〕가 부지휘관이 되어 시내 4대 경찰서에 총비상령이 내렸다. 기마대와 무장경관 수백명이 은신처를 중심으로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였다.
이번에도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쥐고 대총격전을 3시간 반 동안이나 벌였다. 구리다경부를 비롯한 10여 명을 살상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탄환마저 다하여, 마지막 남은 탄환 한발을 가슴에 겨누고 벽에 기댄 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자결, 순국하였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할 때 그의 몸에는 열한발의 총상이 있었다고 하니 최후의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상옥의 시신은 1923년 1월 26일 가족들과 그의 뜻을 추모하여 일경의 눈을 피해 찾아온 학생들의 울음 속에 이문동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0여 일 동안 일경들을 전율케 했던 열혈의사의 장례치고는 너무도 초라한 행렬이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항일행적과 민족정신은 당시 한국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한줄기 빛과 같이 이어져 조국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 질문1 김상옥이 종로경찰서를 의거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김상옥이 자결을 선택한 이유를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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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 질문1 의열단은 활동 과정에서 불가피한 폭력을 사용하였다. 의열단의 폭력 사용과 테러의 차이점을 써봅시다.

시각자료 2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중략)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경찰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발자국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의 자유가 없어 고통의 울분과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뜬 소경이 되고, 자녀가 나면, “일어를 국어라, 일문을 국문이라”하는 노예양성소 학교로 보내고, (중략) 우리 민족은 아주 인류의 자각을 잃을 뿐 아니라, 곧 자동적 본능까지 잃어 노예로부터 기계가 되어 강도 수중의 사용품이 되고 말 뿐이며, (중략)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의 산송장을 만들려 하는 도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하여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내정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가 누구이냐. (중략) 3.1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완화시키려고 송병준·민원식 등 한 두 매국노를 시키어 이따위 광론을 외침이니, 이에 부하 뇌동하는 자가 맹인이 아니면 어찌 간사한 무리가 아니냐? (중략) 일본을 종주국으로 봉대한다 함이 치욕이란 명사를 아는 인류로는 못할지니라.
일본 강도 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가 누구이냐?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약탈의 제도 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종의 보존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능이 있으랴? (중략) 
이상의 이유에 의거하여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나 강도 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강도 일본의 구축(驅逐)을 주장하는 가운데 또 다음과 같은 논자들이 있으니, 제1은 외교론 이니, (중략) 그러고도 국망 이후 해외로 나가는 모모 지사들의 사상이, 무엇보다도 먼저 외교가 그 제1장 제1조가 되며, 국내 인민의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방법도 “미래의 일미전쟁(日美戰爭)·일로전쟁 등 기회”가 거의 천편일률의 문장이었고, 최근 3·1운동의 일반 인사의 평화회의, 국제연맹에 대한 과신의 선전이 도리어 2천만 민중의 용기 있게 힘써 앞으로 나아가는 의기를 없애는 매개가 될 뿐이었도다.
제2는 준비론이니, (중략) 강도 일본이 정치·경제 양 방면으로 구박을 주어 경제가 날로 곤란하고 생산기관이 전부 박탈되어 입고 먹을 방책도 단절되는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어디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양성한들 일본전투력의 백분의 일의 비교라도 되게 할 수 있느냐? 실로 한바탕의 잠꼬대가 될 뿐이로다.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쫓아내어야 할 것이며, 강도 일본을 쫓아내려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에 종사하려면 어느 방면부터 착수하겠는가?  (중략) 그러므로 우리 혁명의 제일보는 민중각오의 요구니라.
민중이 어떻게 각오하는가? 민중은 신인이나 성인이나 어떤 영웅호걸이 있어 <민중을 각오>하도록 지도하는 데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요, “민중아, 각오하자” “민중이여, 각오하여라.” 그런 열렬한 부르짖음의 소리에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 불합리한 민중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을 각오케하는 유일한 방법이니, 다시 말하자면 곧 먼저 깨달은 민중이 민중의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됨이 민중 각오의 첫째 길이다.
 (중략) 
이제 폭력 - 암살· 파괴 ·폭동 - 의 목적물을 열거하건대,
㉠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 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
㉢ 정탐꾼·매국적
㉣ 적의 일체 시설물
이외에 각 지방의 신사나 부호가 비록 현저히 혁명운동을 방해한 죄가 없을지라도 만일 언어 혹 행동으로 우리의 운동을 지연시키고 중상하는 자는 우리의 폭력으로써 마주 할 지니라. 일본인 이주민은 일본 강도정치의 기계가 되어 조선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선봉이 되어 있은즉 또한 우리의 폭력으로 쫓아낼지니라.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중략) 제1은, 이족통치를 파괴하자 함이다. (중략) 제2는 특권계급을 파괴하자 함이다. (중략) 제3은 경제약탈제도를 파괴하자 함이다. (중략) 제4는 사회적 불평균을 파괴하자 함이다. (중략) 제5는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하자 함이다. (중략) 이제 파괴와 건설이 하나요, 둘이 아닌 줄 알진대, 민중적 파괴 앞에는 반드시 민중적 건설이 있는 줄 알진대, 현재 조선민중은 오직 민중적 폭력으로 신조선(新朝鮮) 건설의 장애인 강도 일본 세력을 파괴할 것뿐인 줄을 알진대, 조선민중이 한 편이 되고 일본강도가 한 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아니하면 내가 망하게 된 외나무다리 위에 선줄을 알진대,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로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질문1 의열단이「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한 목적을 써 봅시다.
  • 질문2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기존의 독립운동의 방법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어떠한 독립운동의 방법에 대해 비판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써 봅시다.
  • 질문3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독립운동의 진정한 방략이 무엇이라고 보고 있으며 열거한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시각자료 3

장제스가 교장이었고, 저우 언라이가 정치부 부주임이었던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이 나중에 중국 국민당 군대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 질문1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여 체계적인 군사교육과 간부 훈련을 받은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2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독립운동가에 대해 조사해 보고, 이 후 한국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을 조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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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열기가 확산되면서 1920년대 한국 독립운동의 방략은 무장독립전쟁론을 제외하고도 외교론 ·준비론 ·문화운동론 등으로 다양화 되었다. 모둠별로 각각의 방략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어떠한 전략을 취할지 토론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일제시기 우리 지역에서 일어난 의열투쟁의 사례를 찾아보고, 당시 어떠한 평가를 받았는지 토론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기 전 김상옥의 입장에서 가족이나 동지, 민족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나 성명서를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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