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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의 천개봉우리마다 숲은 울창한데
남김없이 목숨 바쳐 싸우는 열사들은 있어도
나라는 일그러지고야 마는구나.
전마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있고
까마귀 때만이 나무그늘 사이로 내려와 앉는다.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끝내 무엇에 쓸 것인가.
임란부터 외적에 나라를 지킨 명문가에 감히 따를 수 없다
홀로 서풍을 맞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새로 만든 무덤은 높이 솟았으나 옆에 핀 들국화는 누었도다.
위의 시는 매천 황현이 고광순 의병장의 전사 소식을 듣고 연곡사에 와서, 고광순의 무덤을 만들고 그를 추모하여 지은 시이다. 일제의 국권 침탈에 저항해 일어난 의병 전쟁 중에서도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펼쳐진 후기 의병은 명실상부한 의병 전쟁의 꽃이었다.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난 호남 의병은 그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고광순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해 일어난 전기 의병으로 시작하여 1907년 후기 의병까지 활동을 지속하여 호남 지역의 후기 의병을 본 궤도에 올려놓은 선봉장 역할을 하였다.
고광순의 집안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충청도 금산에서 목숨을 바친 고경명의 후손으로 고광순은 자라면서 절개와 의리를 지키는 마음을 키웠다. 평소에는 학문에 종사하던 선비로 생활하였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바친 용감한 고광순의 모습은 자손 대대로 이어져,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고 있다. 고광순의 활동과 최후의 모습을 통해 나라사랑을 대대로 이어간 뜨거운 역사를 조명해 보자.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54-1 연곡사 [도로명 주소: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806-16 (연곡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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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1908년 당시 연곡사는 일본군에 의해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탔다. 그 후 연곡사 등의 건물이 신축되어 당시의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
개항 이후 침략을 계속적으로 자행하던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1907년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저항하는 광무황제(고종)를 황제자리에서 강제로 끌어내리고 이어 정미7조약을 체결한 후, 8월에는 대한제국군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국군을 강제로 해산시키는 데 보름이 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일제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하고 그 수순에 따른 것임을 알게 해 준다.
정미7조약이 노린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한국군을 해산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 주권의 핵심인 군사권을 탈취하려 했던 것이다. 1907년에는 군대해산과 광무황제 퇴위 등을 강요함으로써 한국의 정치적 예속화를 기도하였다. 경제적으로도 일본상품의 대량유입과 금융시장의 지배를 위한 계획이 진행 중에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토지점탈과 수산자원의 확보를 위하여 일본 농어민의 대량이주가 적극 추진되고 있었다. 특히 일본 농어민들의 대량 이주는 한국 농어민들의 토지와 어장을 빼앗는 또 다른 형태의 직접적인 경제 침략이었다.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지리산의 피아골 입구에 있는 연곡사는 544년 백제 성왕 때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탄 것을 이후 다시 세웠으나, 1908년 일제의 토벌 작전으로 연곡사는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 사라졌다. 이후 1924년 박승봉이 심우암을 창건했으나 한국전쟁 당시 피아골 전투로 다시 불에 타 폐사 되었는데, 1965년 소규모의 대웅전이 세워졌고, 1983년에 대적광전과 관음전을 지어 현재의 모습을 조금씩 갖추게 되었다. 연곡사의 경내에는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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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호남의병의 선봉에 서다
고광순에게는 그가 의병전선의 선봉에 서지 않을 수 없었던 여러 가지 명분이 주어져 있었다. 그 첫째는 일제의 극심한 경제침탈로 인해 호남 지방의 농민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을사늑약 체결 후 광무황제가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각 지방의 유생들에게 일제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비밀리에 명령한 점, 셋째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저명한 의병장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 등이었다.
고광순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국사를 그르친 괴수를 죽여 국법을 밝히고 나라를 망치는 왜적을 빨리 무찔러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 을미사변의 원흉들을 단죄할 것을 통렬하게 주창하였다.
을미사변에 뒤이어 그해 음력 11월 17일 단발령이 내려지고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고광순은 호남지방 유림계의 명사들인 기우만, 기삼연 등과 함께 연락을 취하며 각 고을로 격문을 전파하면서 처음으로 의병 규합에 나섰다. 이때는 제천, 춘천, 강릉, 진주, 안동, 홍성 등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나 정국상황과 인심의 향배가 격렬한 소용돌이 속에서 요동치던 무렵이었다.
1896년 2월(음) 광주와 나주 등지에서 의병 규합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게 되자, 기우만을 주축으로 한 의사들이 광주향교에 집결해 규칙을 정하고 앞으로의 전략을 숙의하였다. 기삼연도 이때 3백 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광주로 합세해 왔다. 이어 기우만은 고광순, 기삼연 등과 함께 나주로 옮겨, 이학상을 주축으로 일어난 나주의병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광주, 나주, 담양 등지에서 규합된 의병은 기우만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2월 30일 광주를 본부로 삼아 집결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결집된 호남의병은 관군의 탄압과 회유로 인해 곧바로 와해되고 말았다. 영남지역의 의병을 격파한 여세를 몰고 호남으로 행군해 온 이겸제가 거느린 관군의 공격을 받아 의병 측에 가담한 해남군수 정석진이 희생되는 등 강력한 탄압을 받은 데다, 선유사 신기선이 내려와 해산을 명하게 되자, 의병부대는 더 이상 항거할 명분을 잃고 자진 해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의사들은 형식상 임금의 명령인지라 의진을 해산하기는 했지만, 그 명이 국왕의 본심이 아니고 매국노들의 협박 때문에 내려진 것임을 명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광순과 기우만 등의 선비들은 비분강개하여 그 뒤부터 전국 각지를 전전하고 동지, 지사들을 규합하면서 재기의 기회만 노리게 되었다.
- 질문1 고광순이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위 글에서 찾아 세 가지로 정리해 봅시다.
- 질문2 1896년 의병을 일으킨 원인을 두 가지 써 봅시다.
- 질문3 고광순이 의병을 해산한 이유를 두 가지 적어 봅시다.
읽기자료 2
을사늑약에 항거한 호남의병의 선구자, ‘고충신’
고광순은 의병을 일으킨 이후 집안일은 접어둔 채 오직 의병 재기의 일념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명분만을 내세우기보다는 실천을 우선시하는 강직한 선비로 성장하였다.
고광순의 나이 58세 때인 1905년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박차를 가해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부터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호남지방에서는 74세의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항일전선에 동참한 최익현이 의병의 상징적 인물로 부상되었다. 1906년 6월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일어난 최익현 의병이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광순은 고제량과 함께 여기에 동참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중심인물인 최익현을 비롯한 참모들이 남원, 전주에서 출동한 진위대에 의해 체포당하고, 의병부대가 해산된 뒤였다.
울분을 참지 못한 고광순은 그해 11월에 다시 광양의 백낙구, 장성의 기우만 등과 함께 구례의 중대사에 모여 의병을 일으켰다. 고광순은 백낙구 등과 함께 각지의 군사들을 모아 11월 6일 순천읍을 공략하기로 계획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이 날 모인 의병의 수가 미약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백낙구 등 주모자들이 체포되면서 의병 부대의 순천 공략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고광순은 더욱 분발해 의병부대를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더욱이 그는 이 무렵 광무황제로부터 비밀리에 의병을 독려하는 「애통조」를 받고 감격해 하며 일본군을 몰아낼 것을 굳게 맹세하였다. 그는 드디어 1907년 1월 24일 고제량 등과 함께 인근지역의 장정들을 모아 놓고 담양군 창평면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이때 모인 인원이 모두 5백여 명에 이르렀고, 의병장에는 고광순이 추대되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다음과 같은 편제를 갖추었다.
부장: 고제량
선봉장: 고광수
좌익장: 고광훈
우익장: 고광채
참모: 박기덕
호군: 윤영기
종사: 신덕균, 조동규
고광순이 의진을 편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할 무렵, 때마침 남원에서 일어난 양한규 의병장으로부터 남원읍 공략을 위한 연합작전 제의를 받게 되었다. 이에 호응해 그는 즉시 부하 의병을 이끌고 남원으로 이동하였다.
양한규 부대는 1907년 2월 13일 설날을 틈타 허술한 경비를 무너뜨리고 남원성을 손쉽게 점령하였다. 그러나 달아나던 진위대 군사들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의병장 양한규가 전사하고 말았다. 사기가 떨어진 의병은 이튿날 관군의 반격을 받고 참패를 당해 성을 탈출한 뒤 지리산 일대로 흩어지고 말았다. 나아가 양한규의 처남 박봉양을 비롯해 참봉 박재홍, 상인 양문순 등의 간부들은 체포되어 전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고 말았다.
고광순이 남원에 당도하였을 때는 양한규 부대가 이미 와해된 뒤였다. 그러므로 그가 거느린 의진은 남원읍 공략을 단념하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고광순 의병은 비홍치를 넘어 담양군 평창으로 회군하고 말았다.
그 후 고광순은 능주의 양회일, 장성의 기삼연 등과 힘을 합해 창평, 능주, 동복 등지를 활동무대로 삼고 전전하였다. 특히 4월 25일에는 화순읍을 점령함으로써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평소 원성이 자자하던 일본인 집과 상점 10여 호를 소각시켜 버렸기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동복으로 진군한 의병부대는 광주에서 파견된 관군과 도마치에서 교전한 끝에 패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육순 노구의 고광순은 이처럼 오로지 충의에 의지하여 10여 년 간 고군분투하였다. 그 결과 일제조차 그를 ‘호남의병의 선구자’ 혹은 ‘고충신’이라 부르며 감탄할 정도로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는 1907년 9월 의병전략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즉, 화력과 훈련 면에서 압도적인 일제의 군경에 임기응변의 전술로 그때그때 맞서 싸우는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고 힘을 기른 후에 전쟁을 불사한다는 ‘축예지계’(蓄銳之計)를 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기 항전의 근거지로 지리산을 택하였다.
- 질문1 위 글에서 ‘축예지계’의 뜻을 써 보고, 고광순이 ‘축예지계’ 전략을 쓴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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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다음 글을 참고하여 고광순이 지리산을 장기 항전을 위한 근거지로 삼은 이유를 정리해 봅시다.
1907년 음력 8월 11일 행군하여 구례 연곡사에 이르렀는데.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었다. 동쪽으로는 화개동과 통했는데, 그곳에는 짐승을 사냥하는 산포수가 많았다. 북쪽으로는 문수암과 통했는데, 암자는 천연의 요새였다. 연곡사를 중간 기지로 삼아 장차 문수암과 화개동을 장악하여 의병을 머물게 하여 힘을 기르는 계책으로 삼았다.
- 『녹천유고』, 「행장」 -
읽기자료 3
피아골의 붉은 단풍으로 지다
고광순은 지리산을 의병들이 숨어 힘을 기르는 의병 기지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 지리산의 여러 골짜기 가운데서도 피아골은 특히 입지 조건이 좋았다. 골짜기가 깊은데다 동쪽엔 화개동, 서쪽으로 구례, 그리고 북쪽에는 문수골과 문수암 등이 자리한 천험의 요새로서 장기전에 더없이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피아골의 중심인 연곡사에서 민간의 포수를 모집하여 의병으로 훈련시켜 강력한 일제의 군경과 맞설 만큼의 힘을 비축할 생각이었다.
이에 1907년 9월 11일 고광순 의병부대는 지리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전라도에서 경상남도의 안의․하동․함양 등지로 활동 지역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지리산 부근의 영남, 호남 각지로 의병을 모으는 격문을 연이어 발포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투쟁이 계속되자, 일제는 지리산을 무대로 활동하던 의병세력을 진압하고자 하였다. 이때 동원된 일제 군경은 진해만의 중포병대에서 파견된 소대 병력, 광주에서 출동한 1개 중대, 그리고 진주경찰서의 순경 등으로 의병 측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1907년 10월 16일 새벽, 연곡사를 포위한 채 일제 군경은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고광순 의병부대는 일제에 맞서 부대를 3개로 나누어 대응하였다. 즉 고광수와 윤영기에게 각각 1개 부대를 주어 경남 화개의 앞 뒤 방향에서 공격하게 했으며, 자신은 고제량 등과 함께 피아골 연곡사를 근거지 삼아 일제의 군경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격렬한 전투 끝에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의병장 고광순은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내가 평소 마음을 정한 바이다. 여러분은 나를 위해 염려하지 말고 각자 도모하라”
이에 부장 고제량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며 죽음을 함께 할 것을 맹약하였다.
“당초 의로써 함께 일어섰으니, 마침내 의로써 함께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죽음에 임해 어찌 혼자 살기를 바라겠는가!”
일제 군경은 총공격을 가하며 피아골을 유린한 끝에 의병들을 연곡사 구석으로 몰아갔다. 의병도 만만하게 당하지만은 않았다. 많은 인원수를 바탕으로 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화승총을 내세워 완강히 저항한 것이다. 그러나 최신무기를 앞세운 일제와 정면 대결을 벌이기에는 전력의 차가 컸다.
결국 의병장 고광순과 부장 고제량 이하 25 ~ 26명의 의병이 연곡사 일대에서 장렬히 전사 순국하였다. 일제 군경은, 고광순의 본가에 불을 질렀듯이, 연곡사 안팎을 모두 불사르고 퇴각하였다. 연곡사가 다시는 의병의 근거지로서 이용될 수 없게 한 것이다. 결국 고광순이 이루고자 했던 국내 의병기지의 건설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연곡사에서의 치열한 전투가 끝난 직후에, 어느 농부가 순국한 고광순과 고제량의 시신이 불에 타지 않도록 밭으로 옮겨 솔가지로 덮어두었다. 나흘 뒤에는 고광훈이 시신을 수습할 상복을 준비해 가지고 연곡사 터를 찾아갔다. 솔가지로 덮어둔 두 의병장의 시신을 절 부근에 임시로 묻고 봉분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임시로 매장되어 있던 두 의사의 유해는 이듬해 4월에 두 의사의 고향인 담양군 창평(고광순)과 화순(고제량)으로 옮겨 안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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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다음은 고광순의 평소 좌우명이다. 우리 역사에서 첫 줄에 해당하는 활동을 한 인물을 써보고, 둘째 줄에 해당하는 인물도 적어서 비교해 봅시다.
의를 보고 몸을 버림은 종기에 침놓은 것 같고
이익 따라 몸을 달림은 도둑과 같다 - 질문2 내가 고광순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나는 어떤 사상을 갖고 있었을 것이며, 일제의 침략을 맞아 어떻게 행동했을지 생각하여 말해 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고광순 상소문
- 질문1 1896년 고광순이 올린 상소에는 “국사를 그르친 괴수를 죽여 국법을 밝히고 나라를 망치는 왜적을 빨리 무찔러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 1895년 벌어진 을미사변의 원흉을 단죄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을미사변의 내용을 이야기 해 봅시다.
- 질문2 을미의병은 왜 1년도 못 가서 모두 해산하고 말았는지, 당시 의병장들의 사상과 관련지어 생각해보고 말해 봅시다.
시각자료 2

자료는 고광순이 간직했던 ‘불원복’ 태극기이다. 고광순은 연곡사를 의병의 본거지로 삼고 ‘불원복’ 세 글자를 쓴 태극기를 군영 앞에 세웠다.
- 질문1 ‘불원복’의 뜻은 ‘없어졌던 양의 기운이 머지않아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고광순이 이글을 태극기에 쓴 이유를 적어 봅시다.

모둠활동
1. 짧더라도 완결된 이야기를 써보기: 주제를 ‘고광순 의병장의 비장한 최후’로 정한 다음, 시간과 장소를 설정하여 시작과 끝이 있는 간단한 이야기를 만듭니다. 이야기가 짧더라도 전개와 갈등, 결말이라는 극의 흐름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2. 등장인물 정하기: 모든 이야기에는 주인공, 주인공과 대립하는 악당, 주인공과 악당의 옆에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조연, 그리고 엑스트라가 있습니다. 대사가 있는 등장인물의 수는 3 ~ 4명이 적당합니다. 등장인물을 정하고 인물 간의 관계를 만들어 봅시다.
3. 극본의 3 요소가 모두 들어가도록 쓸 것: 극본의 3 요소인 해설, 지문, 대사가 모두 들어가도록 써야 합니다.
4. 사건과 갈등이 명확히 드러나도록 써야 합니다. 사건에는 시간과 공간적 배경이 정확히 설정되도록 합시다.
5. 분량: A4 용지 5쪽 이상의 분량으로 작성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