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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병 전투지 - 어등산(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호남 의병들의 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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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진산으로 의젓하게 솟은 이 산은 그 자락을 황룡강의 맑은 상류가 적시고 도도히 흘러 예부터 곡창 지대인 서석평야의 귀중한 수원이 되었다. 어등산은 나주, 화순, 담양, 장성 등과 가깝고 높지 않은 산에 골이 많아 의병들이 숨어들기에 좋았으며, 사방으로 확트인 지리적 여건으로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에 좋았다고 한다. 어등산은 고기 ‘어(魚)’ 자와 오를 ‘등(登)’ 자를 쓰는 산으로 물고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뜻이다. 조선 시대 박중윤이라는 사람이 연못에서 키우던 잉어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와 잉어가 하늘로 올라간 산이라 해서 어등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어등산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일본군과 관군의 진압에 농민군들이 숨었던 곳이며, 일제의 국권 피탈이 진행되던 대한제국 말기에 ‘대동창의단’을 결성한 나주 출신의 김태원 의병장과 그의 동생인 김율을 비롯한 의병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목숨을 잃었던 곳이다.
일제의 잔인한 진압 작전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싸운 용감한 호남의병들의 마지막 모습을 살펴보자.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전라남도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봉동 산113 일대
현재 상태 일반인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깊은 산 속에 있어 비교적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07년 7월,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끝까지 저항하는 고종을 강제로 왕위에서 끌어 내리고, 순종을 황제에 앉혔다. 곧이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정미 7조약이 체결되었다. 당시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 측의 전권대신인 이완용이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인의 차관정치가 시작되어 우리민족의 반일감정은 더욱 높아졌다. 곧이어 전격적으로 단행된 군대해산조치에 반발한 시위대와 진위대의 무장봉기가 이어졌다. 해산을 거부한 군인들이 전국 각지의 의병부대에 합류하거나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전국의 산과 들에는 의병의 함성과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눈앞에 둔 일제는 의병항쟁이 거세게 타오르자 다양한 방법으로 진압에 나섰다. 그들이 1907년 후반을 기점으로 엄청난 분량의 진압 기록을 남긴 점만 보더라도 그러한 상황을 알 수 있다.
3년 동안 일제에 맞서 1,313회나 되는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호남 의병이 활발하게 활동하자, 의병을 소탕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일제는 무자비한 진압 작전을 펼쳤다. 이것이 1909년 9월 1일부터 1909년 10월 25일까지 전개된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었다. 일제의 토벌 작전으로 인해 호남의병은 5백여 명이 처참하게 전사하고, 체포되거나 자수한 숫자는 3천명이나 달하는 등 커다란 타격을 입고 내리막을 걷게 되었다.
어등산 전투지는 일반인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깊은 산 속에 있어 비교적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의병들이 은신하던 바위굴은 방치된 지 오래되어 거의 묻혔고, 토굴 역시 상당 부분 무너졌다. 2008년 11월 14일, 광주 광산구는 김태원 의병장을 비롯한 한말의병들이 최후를 맞은 곳으로 추정되는 마당바위 인근의 토굴과 석굴에 각 1개씩 유적지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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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후기 의병의 중심이었던 호남의병

전라도 지역의 의병은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다음 해인 1896년 장성에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의병장 기우만은 장성 출신으로 위정척사파의 대표적 인물인 기정진의 손자이자 제자였다. 1896년 1월 200여 의병을 조직한 그는 “광산은 호남의 중심이니 처음 일하는 마당에 있어 지리적 조건이 진실로 마음에 맞다” 하여 의병 부대의 본거지를 광주향교로 옮겨 호남의병의 전열을 가다듬었으나 당시 고종이 의병의 해산을 명하는 명령을 내리자 해산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중기 의병이라 불리는 의병이 재차 일어난다. 이 때 남도 의병을 주도했던 중심인물로는 태인의 최익현, 광양의 백낙구, 남원의 양한규, 능주의 양회일 등이었다. 이 중 최익현은 1906년 6월, 전 낙안군수 임병찬과 함께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수 백 명의 문인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다.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과 함께 그가 쓴 격문은 당시 전라도의 선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이 때 태인 의병에 전라도 광산 출신의 박현동이 참여한다.
1907년부터 기삼연이 호남창의회맹소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맹위를 떨치자 일제는 광주수비대를 비롯한 일제군경을 총 동원하여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펼쳤고, 이때부터 항일투쟁의 기폭제가 되어 다양한 계층에서 새로운 의병장이 배출되었고 1907년 후반부터 1909년까지 호남은 의병항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호남의 의병들은 서로 연락하여 연합 작전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는 호남의 11개의 의병부대가 전해산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연합하여 호남동의단을 결성하여 연합투쟁 내지 공동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 질문1 다음은 일제가 1908년 1월 25일 광주의 대표적 의병부대와 활동 목표를 조사해 보낸 문서인 ‘광비발 제 67호’이다. 광주의 대표적 의병 부대를 적어보고, 이들의 활동을 정리해 봅시다.

    “이 방면에 있어서의 폭도의 수괴는 고(故) 최익현의 문하인 장성군 서이면 송계동 거주의 기삼연 부자, 나주군 거평면 갈마지 거주의 김태원, 광주군 고룡면 장교 거주의 박처인 형제 등이다. 근거지는 일정하지 않으며 전라북도와 경계하는 장성군의 산맥 안, 혹은 장성, 함평, 나주, 광주 등의 군 경계에 있는 산맥 안을 배회 출몰한다. 많을 때는 100명 내지 200여명, 적을 때는 30여 명이 단체가 되어 횡횡한다. 그들이 목적하는 바는 일본인을 죽여 없애고 일진회원 및 경찰 관리를 살해하는데 있다. 물론 한편으로는 각 면에 있어서의 조세징수원을 협박하여 징세를 금하고, 이미 징수한 금액을 약탈하는데 있다”

읽기자료 2

일제의 가혹한 호남 의병 소탕전

1908년 ~ 1909년, 광주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는 기삼연, 김준(金準, 김태원)·김율 형제, 전해산, 조경환, 박처인 4형제, 김원국·김원범 형제, 양진여·양상기 부자(父子), 오성술, 이기손, 김동수, 박용식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일본군을 대상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당시 광주 지역의 의병 부대의 규모는 많게는 100 ~ 200명에서 적게는 수십 명 규모였다. 이들은 주변 환경을 잘 이용하고 "분산과 집중"의 전술을 사용하였지만 무기의 열세로 전투력이 약했다. 이 때문에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일본군의 피해 보다 의병의 피해가 훨씬 더 컸다. 하지만 열악한 무기와 초보적인 전술로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호남 의병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일제를 괴롭혔다.
의병 활동이 거세지자 일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이른바 "토벌 작전"을 전개한다. 특히 1908년 2 ~ 4월에 전개된 토벌 작전에 의해 광주 지역의 의병 200여명 이상이 전사하였는데, 이때 기삼연과 김태연(김준)·김율 형제 등이 희생된다. 기삼연은 1908년 2월 광주천에서 총살형을 당했고 김태연(김준)은 1908년 4월 어등산에서 치열한 접전 끝에 순국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일제는 호남 의병을 완전히 없애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무자비한 진압 작전을 펼쳤다. 이것이 1909년 9월 1일부터 1909년 10월 25일까지 전개된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었다. 이 기간에 전남 의병을 비롯한 광주 의병은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의병 500여 명이 전사하고, 잡히거나 혹은 자수한 자가 1,500명을 넘는다. 이때 광주 출신의 양진여, 오성술, 김원국과 심남일, 안규홍, 강사문, 강무경 등 남도의 대표적인 의병장들이 체포되어 처형된다.

  • 질문1 다음 표는 1907년에서 1908년 5월 사이 일제가 조사한 사상자 현황표입니다. 이 <표>에서 "폭도"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 적어보고, 일제가 조사한 폭도가 누구를 말하는 지 적어 봅시다.

  • 질문2 위 <표>에서 폭도의 사망자 수가 일본군 수비대, 헌병 등과 비교해서 매우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시 의병 활동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그 이유를 적어 봅시다.

읽기자료 3

어등산에서 싸우다 스러진 의병들

1908년 4월 25일 김준(김태원)은 3시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23명의 의병과 함께 순국한다. 농성 광장에 우뚝 서 있는 김태원(김준) 의병장의 동상이 두 눈 부릅뜨고 어등산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이유다.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을 맡았던 김원범도, 김태원 의병장의 선봉장이었다가 독립한 조경환 의병장도, 형인 김태원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갔다가 총살당한 김율의 순국 현장도 어등산이었다. 양동환 의병 80여명도 어등산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10여명이 전사한다. 이처럼 어등산은 김준 의병장을 비롯, 최소한 50명 이상의 의병이 전사한 전국 최대 격전지다.
어등산 앞산인 용진산 사호고개에서는 오상렬 의병장도 순국한다. 어등산 가까이의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장소인 세 동천(洞天)인 대명동천과 석문동천, 용진동천은 전해산·오성술·조경환 의병부대의 주둔지이자 전투지였다. 어등산 주변인 고룡면 장교(長橋) 부근은 의병장 박처인 4형제 고향이며, 김원범의 형 김원국이 의병장 조경환을 만난 후 의병에 투신한 장소 또한 어등산 자락의 선암리였다. 이처럼 어등산과 주변 자락은 전국 최대의 의병 격전지였으며 순국지였다.
특히 김태원·김율 형제는 감동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김태원은 나주 출신으로 을사늑약의 체결 이후 기삼연이 이끄는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1908년 설날 일본군 광주수비대를 담양에서 격파하고, 장성의 토천 전투에서 일본군 광주 수비대 30여명을 처단하는 한말의병전쟁사에 길이 남을 큰 승리를 거두었다. 김태원․김율 형제 부대의 활동에 피해를 입은 일제는 제2특설 순사대를 편성하고, 광주수비대와 헌병을 총출동시키는 대토벌작전을 펼쳤다. 결국 1908년 3월 29일 동생 김율은 광주 인근 지방에서 붙잡혀 광주감옥에 갇혔다. 김태원은 동생 구출 작전을 계획하였으나 4월 25일 다친 허리를 치료하기 위해 어등산에 들어갔다가 일제의 토벌대에게 발각되어 포위되었다. 이를 알아챈 김태원은 부하들에게 “나의 죽음은 의병을 일으킨 날 이미 결정하였다. 다만 적을 멸하지 못하고 왜놈 총에 죽게 되었으니 그것이 한이로다. 나와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너희들은 나를 대신하여 뒷일을 도모함이 옳다”고 이르고는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부하들을 탈출시켰다. 기어이 끝까지 남겠다는 부하 김해도 등과 함께 적진을 향해 총탄을 퍼붓다가 일군의 집중사격에 쓰러졌다. 죽는 순간까지 의병장다운 의연하고 장렬한 순국이었다. 다음 날, 일제는 한 달 전 체포되었던 아우 율을 데리고 와서 형의 시신을 확인시킨 뒤 그 자리에서 총살시켰다.

  • 질문1 다음 글을 읽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김태원 등 한말 의병의 용기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당신들은 언제 전투를 했습니까?” “오늘 아침에 저 아랫마을에서 전투가 있었습니다.” ……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기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가 죽게 되겠지요. 그래도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 한국인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무심하지도 않다. 한국인들은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맥켄지, 『한국의 독립운동』>
  • 질문2 나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가치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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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어등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김태원 의병장의 동상이다.

  • 질문1 다음 글을 읽고 김태원 의병장의 일생을 통해 본받고 싶은 장점을 써 봅시다.

    매천 황현은 김태원 의병장을 다음과 같이 높이 기렸다. “기발한 전략을 많이 이용하여 일여 년 동안 수백의 일병을 죽였으며, 부하를 엄히 다스려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시각자료 2

김태원 의병장 기적비와 친필 시비(나주 시민 공원)

다음은 김태원 의병장 기적비와 친필 시비이다.

  • 질문1 친필 시비의 내용을 알아보고 시에 담겨 있는 의미를 이야기해 봅시다.

시각자료 3

다음은 김태원·김율 형제가 태어난 집이다.

  • 질문1 김태원과 김율 형제는 자라면서 어떤 꿈을 가졌을지 생각해서 이야기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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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다음은 광주의 역사교사의 글이다. ‘절의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활동을 제안해 봅시다.

남도인의 소중한 정체성 중 하나가 절의 정신이다. 그래서 불리는 남도의 별칭이 의로움의 고장, 즉 의향이다. 그러나 광주 어디에도 의병들의 절의정신을 기리는 기념공원, 기념탑 하나 없다. 100여 년 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어등산 등지에서 순국한 의병들의 혼을 기리는 사업은, 의로움의 고장을 내세우며 살아가는 광주시민의 자긍심이다. 그 적격지는 김준 의병장과 수많은 의병들이 순국한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 어등산일 수밖에 없다. …(중략)… 그러나 1907 ~ 1909년 사이 가장 치열했던 광주·전남의 의병 정신인 절의정신은 이후 광주학생항일운동과 5․18 민주항쟁을 거치면서 민주·인권의 정신으로 계승된다.
- 노성태,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 어등산」, 『광주 뉴스통』(2013.12.12.자) -
모둠활동 2
2) 위 글에서 전라도 지역민의 정체성을 ‘절의정신’이라고 필자가 주장하는 이유를 적어 봅시다.
모둠활동 3
우리 역사 속에서 ‘절의정신’을 계승한 사건과 인물을 찾아 모둠 별로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절의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활동을 모둠 별로 토의하여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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