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본문영역

  • 도입
  • 역사적 배경
  • 읽기
  • 시각자료
  • 모둠활동

주요사적지 배움터

안규홍 집(천대받던 담살이[머슴]에서 나라를 구한 의병장으로)

도입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 같다 전해산
잘 싸운다 김죽봉 /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
되나 못되나 박포대 ……”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기던 1909년,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불러 전해지던 노래에는 일제의 침탈에 맞서 싸운 호남 의병장들의 용맹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국권침탈로 기울어가던 나라를 살리기 위해 일어난 후기 의병 중에서 호남 지역의 의병은 그 규모와 활약에서 가장 빛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전라남도 보성을 중심으로 활동한 ‘안담살이(안담사리)’ 안규홍이다.
그는 1879년 4월 10일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에서 안달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와 함께 보성군 문덕면 법화마을로 이사하였다. 어머니 정씨가 먼 친척인 박제현의 집에 신세를 지게된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지주 집에서 어려서부터 머슴살이로서 생활하게 되었고, ‘담산’이란 그의 호도 어린 머슴을 호칭하는 전라도 지방의 방언 ‘(깔)담살이’에서 유래하였다.
천대받던 머슴에서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의병을 조직한 의병장으로 떨쳐 일어난 그의 활동을 통해 호남지방에서 활약한 후기 의병운동의 모습을 살펴보자.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동산리 648 법화마을
현재 상태 그가 오랫동안 머슴살이를 했던 박제현의 집은 잘 보존되어 있으나, 박제현의 집 앞에 위치했던 그의 어머니와 부인 이씨가 살았던 집은 없어지고 텃밭으로 이용되고 있음

개항 이후 침략을 계속적으로 자행하던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1907년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저항하는 광무황제(고종)를 황제자리에서 강제로 끌어내리고 이어 정미7조약을 체결한 후, 8월에는 대한제국]군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국군을 강제로 해산시키는 데 보름이 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일제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하고 그 수순에 따른 것임을 알게 해 준다.
정미7조약은 조약문에서 보듯이 입법․행정(2조), 사법(3조), 관리임명(5조) 등 나라의 통치권을 모두 빼앗는 내용으로, 2년 전에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을 한층 강화하여 대한제국의 나머지 주권마저 박탈하는 조약이었다. 그러나 정미7조약이 노린 가장 중요한 목적은 대한제국 주권의 핵심인 군사권을 빼앗기 위해 한국군을 해산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한국민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성에 대해서 적극 반대하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고 한국군 해산을 단행하였다.
또한 일제는 강화도 조약 이후 경제적 침략을 계속 확대하였다. 유리한 조건을 바탕으로 무역에서 막대한 이득을 얻는 것은 물론, 철도 등 침략에 필요한 시설을 확대하면서 막대한 토지를 약탈하였고, 일본 상인들이 농촌까지 침투하여 고리대업을 통해 토지를 헐값에 매입하여 일본인 이주민에게 공급하는 등 토지에 대한 침탈도 계속 확대시켜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일제의 침략이 진행되는 가운데, 우리 민족은 스스로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880년대부터 개화파들에 의해 개화 정책이 시행되었고, 1894~1895년의 갑오․을미개혁과 1897에 성립된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등을 통해 제도적인 근대화를 이루었으며, 동학 농민 운동과 독립협회 운동, 애국 계몽 운동 등을 통해 근대적 민권 의식과 민족의식이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농민들은 일본군의 만행과 일제의 토지 침탈을 겪으면서 삶의 기반을 빼앗기고 식민 지배를 당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성장된 근대적 국민의식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은 일제의 침탈에 맞서 더욱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항쟁을 벌였는데, 그 중 가장 빛나는 투쟁이 의병전쟁이었다. 1907년 후반기에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면서 의병전쟁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해산 군인들의 조직력과 전투력은 지역별로 고립되어 진행되던 의병을 하나로 묶어 의병 진영 간의 연합을 통한 공동 작전 등을 가능하게 하였다.
전국적으로 벌어진 의병 항쟁 중에서도 1908년에서 1909년 사이에 호남 의병이라 부르는 전라도 지역의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다. 1908년 전라도의 의병들은 일본 군경과 교전 횟수 그리고 교전에 참가한 의병 수에서 전국 대비 25%와 24.7%를, 1909년에는 47.2%와 60%를 차지할 정도였다.
안규홍이 1880년대부터 1907년경까지 머슴살이를 한 박제현의 집은 당시의 가옥 형태를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집 앞에 있던 그의 어머니와 부인 이씨가 살았던 집은 없어지고 현재는 텃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읽기

읽기자료 1

성실하고 의협심 넘치는 머슴 안규홍

1907년 이후 일어난 전라남도 의병이 대부분 유학을 공부한 유학자 출신 의병장에 의해 주도된 사실에 비추어 보면 가난한 농민 출신 의병장인 안규홍은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 그는 전라남도 보성읍 택촌의 가난한 집안의 서얼로 태어났다. 그가 세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먼 친척 박제현의 집으로 이사해 살았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마을의 지주인 염참봉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다. 이러한 그의 출신으로 인해 그는 ‘안담사리’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는데, 담사리란 전라도 방언으로 나이어린 머슴을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점차 장성해 가면서 강직한 성품과 의협심을 지니게 되었다. 1907년을 전후하여 전라도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더불어 의병을 가장한 도적들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일제 군경과 일진회는 자위단을 결성하였다. 안규홍이 살던 보성 법화 마을에도 도적을 방어하기 위한 조직이 만들어졌다. 이 조직에서 활동하던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머슴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그를 따르는 자들은 대부분 머슴들이거나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 질문1 다음은 당시 신문에 실린 안규홍 의병에 관한 기사입니다.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안규홍 의병의 특징을 찾아 써 봅시다.

    보성군 우산에 사는 안씨의 집에 머슴으로 있는 사람이 있는데 수십 년을 고용하여도 삯전을 받지 않고 매우 신실하여 주인이 사랑하며 근방이 사람들이 다 칭찬하였다. 작년 구월에 떠나기를 만류하는 주인을 떠나 근처에 있는 머슴 백여 명을 모아 연설하기를, ‘우리가 남의 집의 고용이나, 국민되기는 일반인데 나라 일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 농가에서 구차하게 살겠는가’ 하며 의병을 일으켰다.
    『대한매일신보』1909년 1월 9일 「머슴군 의병」
  • 질문2 다음은 안규홍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이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는 안규홍의 성품을 써 봅시다.

    안규홍이 어느 날 나무를 지고 산에서 내려오니, 마침 세금을 징수하는 한 관리가 마을에 와 방자한 행동으로 마을 사람들을 때리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이 장면을 보고 분격해, “세금받는 것이 당신의 직책인데, 어찌 사람을 때리는가. 이 마을에 사람이 없는 줄 아느냐.” 하고는 즉시 그 관리를 결박해 꾸짖었다.
  • 질문3 안규홍의 의병에 대해 당시 양반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다음 글을 보고 추론해 봅시다.

    사람을 시켜 비밀히 병기를 찾아 들이고 유지들에게 널리 알렸다. 이듬해인 무신년 2월 드디어 기의하여 약간 명의 사람들을 모았다. 그런데 양반 유생들은 그가 두터운 명성과 인망이 있는 인물이 아니라며 함께 일을 도모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였다.
    2) 대중적인 홍보 활동으로 새로운 의병 부대를 만들다.
    양반 유생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독자적인 의병을 만드는 데 실패한 안규홍은 순천 부근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강용언[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강성인(姜性仁)으로 기록되어 있다]의 부대로 들어갔다. 그러나 강용언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등 주민들에게 적지 않는 피해를 주고 있었다. 이에 안규홍은 1908년 4월 부하들과 함께 양민들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은 자라고 하여 강용언을 죽이고 의병장이 되었다.
    그는 새로운 의병을 적극 모집하였다. 그는 전남 고흥과 순천 등의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그 곳에 모인 농어민과 상인들에게 국가의 위급한 상황을 설명한 후 의병운동에 함께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렇게 대중에게 호소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방법은 안규홍 의병 부대의 특징 중 하나였다. 한편 서울에서 내려온 오주일이 수십명을 이끌고 안규홍의 휘하에 들어왔는데, 오주일은 병법에 밝은 전략가로서 안규홍 부대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그가 서울에서 내려와 1908년 4월경에 합류하였고, 병법에 밝았다는 사실로 보아 서울의 해산 군인 출신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부대를 조직한 안규홍의 이른바 ‘안담사리 의병’은 1908년 3월 그가 머슴살이를 하던 법화 마을 가까이에 있는 동소산에서 봉기하였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부서를 정하였는데, 이를 통해 이들이 평민 의병부대지만 정연한 편제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읽기자료 2

대중적인 홍보 활동으로 새로운 의병 부대를 만들다.

양반 유생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독자적인 의병을 만드는 데 실패한 안규홍은 순천 부근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강용언[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강성인(姜性仁)으로 기록되어 있다]의 부대로 들어갔다. 그러나 강용언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등 주민들에게 적지 않는 피해를 주고 있었다. 이에 안규홍은 1908년 4월 부하들과 함께 양민들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은 자라고 하여 강용언을 죽이고 의병장이 되었다.
그는 새로운 의병을 적극 모집하였다. 그는 전남 고흥과 순천 등의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그 곳에 모인 농어민과 상인들에게 국가의 위급한 상황을 설명한 후 의병운동에 함께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렇게 대중에게 호소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방법은 안규홍 의병 부대의 특징 중 하나였다. 한편 서울에서 내려온 오주일이 수십명을 이끌고 안규홍의 휘하에 들어왔는데, 오주일은 병법에 밝은 전략가로서 안규홍 부대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그가 서울에서 내려와 1908년 4월경에 합류하였고, 병법에 밝았다는 사실로 보아 서울의 해산 군인 출신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부대를 조직한 안규홍의 이른바 ‘안담사리 의병’은 1908년 3월 그가 머슴살이를 하던 법화 마을 가까이에 있는 동소산에서 봉기하였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부서를 정하였는데, 이를 통해 이들이 평민 의병부대지만 정연한 편제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대장 : 안규홍
부장 : 염재보
선봉장 : 이관회
좌·우익장 : 임병국, 손덕호, 정기찬, 장재모, 송경회
난후장 : 안택환, 소휘천
참모장 : 오주일, 나창운
서기 : 임정현
운량관 : 박제현

  • 질문1 안규홍 부대가 편성되는 과정에서 해산 군인들이 서울에서 합류하게 된 시대적 배경을 설명해 봅시다.

읽기자료 3

게릴라 전법으로 일제를 괴롭힌 안규홍 부대

안재홍 부대의 활동은 1908년 4월부터 1909년 9월까지 보성․순천을 비롯한 전라남도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화력과 전투력이 뛰어난 일제의 군대와 경찰에 맞서기 위해 지리적인 이점과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는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였다. 안규홍 의병부대가 전과로 크게 명성을 떨친 것은 파청(보성군 득량면 예당리) 전투와 대원사 전투, 동복 운월치(화순군 동복면 운월치) 전투 등이다.
특히, 1908년 4월 26일 전남 보성군 송곡면 파청촌(현재 득량면 예당리)의 버들고개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안규홍 의병 150여 명이 잠복했다가 보성분견소의 헌병 세 명을 포위하여 두 명을 죽이고 한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일제는 안규홍 부대를 토벌하기 위하여 새로운 부대를 조직하여 대원사를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그러나 동복을 탈환하기 위하여 운월치로 진군하다가 누봉산에서 적과 부딪쳐 참모 나창운이 전사하는 등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이에 장경선을 새로 참모로 임명한 후 병력을 증강하여 1908년 8월 진산에서 일본 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일본군 5명을 중상시키는 승리를 거두는 등 커다란 활약을 펼쳤다.
안규홍 의병대는 게릴라 전법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고향지역 지리에 밝아 낮에는 잠방이를 입고 삽을 메고 돌아다니면서 농민으로 위장, 첩보를 수집하고 밤에는 기습 공격하는 식이었다. 이러한 게릴라식 전법으로 안규홍 부대는 일본 군인과 경찰, 우체인, 세무원, 관료, 일진회원, 악질부호들을 처단했다. 게릴라식 기습전투는 약 30회에 이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질문1 안규홍 의병 부대가 우세한 화력을 가진 일본군에 맞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요? 위 글을 통해 생각해 봅시다.

읽기자료 4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잡혀 끝내 순국하다

일제는 한국병합을 마무리하기 위해 전남지역 의병을 토벌하는 ‘남한폭도대토벌 작전’을 1909년 9월 1일부터 55일 간 전개, 소탕전을 벌였다. 일제에 가장 강력하게 맞섰던 전라도의 의병 진압을 위한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이들의 토벌 작전은 치밀하고도 잔인했다. 일본 측 자료에 따르더라도 이때 420명이 죽임을 당했고, 1687명이 체포되거나 자수했다. 이 작전의 결과 전남의 의병들은 거의 섬멸되었다. 안규홍 부대도 일제의 포위망이 거미줄처럼 조여들어 1909년 9월 중순 지도부를 포함한 60여 명의 부하들이 투항하고 말았다. 결국 안규홍은 부하들에게 후일을 기약하며 부대를 해산하였다.
안규홍 의병 부대원 중 일부는 끝까지 싸우다 죽기도 하고, 해산을 전후로 체포되거나 투항한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포위망을 뚫고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군에 가담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부대를 해산한지 얼마 후인 9월 하순에 안규홍은 부장인 염재보 등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가 체포된 곳은 머슴살이 하던 집의 마구간이었다. 어머니를 만나러 왔다가 체포된 것이다. 안규홍은 광주를 거쳐 대구 감영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점령한 다음 해인 1911년 5월 5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서른세 살이었다.

  • 질문1 일제가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벌인 이유를 적어 봅시다.
  • 질문2 다음 글을 읽고 일제가 벌인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적어 봅시다.

    “촌락마다 샅샅이 수색하기를 마치 참빗으로 빗질을 하듯 집집마다 뒤지고,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즉시 죽였다.” (황현, 『매천야록』 중)

    나는 말에서 내려 걸어와 잿더미 위를 걸어 다녔다. 그처럼 철저하게 파괴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한 달 전만 해도 분주하고 번창했던 도시가 지금은 새까만 먼지와 잿더미로 화해버렸다. 벽 하나, 기둥 하나, 장독 하나도 온전히 남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미국인 기자 맥켄지의 목격담)
  • 질문3 다음은 안규홍 의병장의 이야기를 문병란이 서사시로 쓴 「동소산 머슴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시에서 안규홍 의병장을 가리키는 부분들을 찾아 적어보고 그 의미를 이야기 해 봅시다.

    동소산 머슴새
    문병란

    역사가 피 흘리는 조국의 산하
    두 동강난 땅 동소산 기슭에
    아직 못다한 노래
    살아남은 소년투사
    바우의 눈동자에
    지리산 골짜기에 황토빛 무덤 속에
    무등산 봉우리에 또다시 부활하는 민중의 새여
    이제 그 울음 기쁨에 노래로
    조국강토에 역사의 밝은 해는 삼천리 비치고
    아아, 우리의 투쟁
    오, 안담사리 대장이여
    동소산의 머슴새여
    민중의 새여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안규홍이 의병활동을 벌였던 보성군 득량면 예당리 버들고개에 세워진 안규홍의병장 승첩비

사진은 안규홍 의병부대가 첫 승리를 거두었던 파청 승첩비이다.

  • 질문1 승첩비를 보고 심능표가 남긴 다음 시를 읽고, 시 속의 ‘생기 얻은 무궁화’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적어 봅시다.

    안담산 의사의 비석을 읽고
    심능표

    공자 맹자 사서 삼경 읽지도 못했던 / 鄒魯經書曾未讀
    들 일 하고 나무하던 머슴살이였는데 / 困於傭野採山人
    의를 취해 인을 이룸을 어디서 배웠던고 / 成仁取義從何得
    생기 얻은 무궁화가 천년 봄을 맞이했네. / 生氣槿花千古春
    <『모암유고(慕巖遺稿)』 권1>

시각자료 2

일제가 호남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일으킨 ‘남한대토벌’ 작전 당시 기록한 진중일지. 안규홍의 의병이 복내장기병대를 습격하여 불태운 사실 등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은 일본 14연대가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의병을 진압한 사실을 적은 진중일지이다. 여기에는 한국군 강제 해산 이후 우리 의병과 치렀던 각종 전투와 당시 한국의 상황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안규홍 부대와 일본군 14연대와의 전투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질문1 일본군이 안규홍 부대와의 전투를 자세히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모둠활동

모둠활동 1
다음은 안규홍 부대의 행동 강령입니다. 이를 참고로 모둠 별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의병부대를 만들어 봅시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의병부대의 이름을 정하고 의병 부대의 목표와 행동 강령을 정하는 일입니다.

의병으로서 민간을 침포하는 행위를 금한다. 민간인이 밖으로 곡식을 파는 행위를 금지시킨다. 여러 명목으로 파견된 관원이 민간에 해를 끼치면 모두 잡아들인다. 무릇 마을에서 공공연히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를 근절시킨다. 일본 세력을 앞장서서 따르는 자부터 먼저 죽여서 우익을 없앤다. 왜구를 죽여서 그 새떼같은 무리들을 제거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근본을 보호하고 우리나라의 명맥을 길이 보존해야 한다.

모둠활동 2
양반과 지주 등 지배층에게 멸시를 당하던 머슴 안규홍의 가슴에 민족과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 어떻게 해서 자리 잡게 되었을지, 당시 일본의 경제․정치적 침략 과정과 대한제국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참고하여 3가지 이상 정리해 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31232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1  전화: 041-560-0405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21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