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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석 집터(13도의군 도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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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과 지방 수령은 방관하고 있으니 누가 삼천리강토가 크며, 오 백 년 동안 배양해 온 기상이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한 두 사람의 의로운 선비도 없어 이 같은 방극에 이르러서야 되겠습니까? 신은 이에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감히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은 사람마다 칠 수 있다는 법과, 먼저 일을 하고 나중에 평가 받는다는 뜻에 따라 을미사변에 대해 복수하고 전통을 수호하자는 기치를 세우고 상복을 벗고 병기와 갑옷을 두르고 선비들을 모아 진군을 행하였습니다. 이 어찌 군대의 일을 배웠겠습니까? 진실로 백성의 떳떳한 법과 하늘이 주신 명을 저버리기 어려워 망령되이 생각하기를 한 왜놈만 죽여도 원한을 풀어줄 수 있고, 천하로 하여금 모든 임금의 원수는 당연히 갚아야 하고 중화(中華)의 명맥은 당연히 보존되어야 함을 알게 할 수 있다면 전혀 사양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 호좌창의진을 조직하며 올린 상소 -


선후 없는 시대를 만나 극히 한스럽고
전례가 없어 어려움을 말할 곳조차 없네
늙은이가 몸 밖의 일로 자나 깨나 걱정하고
나라의 존망에 따라 눈물을 흘린다네
대한이 지나면 봄이 옮을 알 수 있듯이
타의에 의해 이지러진 달이 다시 둥그리라
사물의 이치가 이미 이와 같음을 보았으니
내 장차 인간사를 저 하늘에 물으려 하네
- 『의암선생문집』 2권 -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 814 [도로명 주소: 강원도 춘천시 남면 여우내길 13]
현재 상태 없어짐 / 현재 유인석 집터에는 유혜상씨(84세)씨가 거주하고 있으며, 집 안쪽에 함석지붕으로 된 가옥이 유인석의 집터이다. 본래 집은 50여 년 전 불타 없어졌고, 그 자리에 현재의 건물이 지어졌다.

유인석의 호는 의암(毅菴)이다. 그는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서 유중곤의 아들로 태어나 유중선에게 입양되었다. 1896년 2월 7일 이춘영, 안승우, 이필희 등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한 때 3,000여 명에 이르렀던 유인석의 제천 의병은 제천·충주·단양·원주 등지를 점령하고 친일 관찰사와 군수 등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하면서 최후의 거점이었던 제천성을 빼앗겼다.
유인석은 재기를 도모하려고 서북행을 결행하여 강원·황해·평안도를 거쳐 서간도로 건너갔다. 그러나 회인현에서 서본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면서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유인석은 의병해산을 당한 뒤 1897년 3월 고종의 명으로 일시 귀국하였다.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유인석은 여러 지역에 방문을 보내 의병 봉기를 독려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활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어려움에 봉착하였고 1908년 8월 조국 독립의 꿈을 안고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유인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이범윤 등과 1910년 6월 연해주 의병 통합체인 13도 의군을 결성하고 도총재에 추대되었다. 1910년 8월 29일에는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탄하면서 러시아의 탄압으로 13도의군이 해산되자 1914년 3월 중국 봉천성 서풍현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평생을 외세의 침략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유인석은 1915년 1월 29일(음력) 관전현 방취구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나이 74세 때였다. 1962년 정부는 유인석의 독립운동과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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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제천 의병의 결성과 서간도 진출

유인석은 을미사변(1895)과 단발령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켰지만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국토와 종묘사직이 없어져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갑오개혁 직후 청풍의 서상철, 연평의 안승우, 홍주의 김복한 등이 의병 봉기를 준비하였다. 조선의 유생들은 갑오개혁을 침략행위로 간주하고 반침략투쟁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선포되자 충청도 유성의 문석봉을 시작으로 전국의 유생들이 너도나도 의병을 일으켰다. 1896년 1월 12일 문인, 이춘영, 안승우가 연평에서 의병을 일으켜 제천으로 들어오고, 이어 서상렬, 이필희, 신지수, 이범직 등과 합류하여 단양, 풍기, 영동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이들은 유인석이 의병부대를 규합하여 이끌어주기를 적극 권유하였다. 이에 유인석은 1896년 2월 8일 강원도 영월에서 호좌창의진을 조직하고 대장에 취임하였으며 ‘나라와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기치를 내세우며 의병투쟁을 시작하였다.
유인석의병은 제천으로 회군한 뒤 충주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 뒤로 영남, 호서일대와 춘천과 같은 곳에서 전과를 올렸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충주성을 버리고 제천으로 후퇴하였다. 여기에는 각처의 의병들이 합류해왔고 이후 3개월 동안 수안보, 가흥, 음성, 단양 등지에서 활발한 전투를 벌여 나갔다.
의병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때쯤 고종은 의병해산을 강하게 종용하고 있었다. 해산하지 않는 의병들은 관군으로 진압하였다. 유인석은 평안도로 옮겨 의병을 모아 항전을 계속하고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간도로 옮겨 근거지를 마련하고 청나라에 원군도 요청하기를 기약하면서 서행 길에 올랐다. 6월 10일 여주에서 영월, 평창, 정선, 강릉을 거쳐, 봉평, 인제, 평강, 소금강, 양덕을 지나 8월 16일에는 영흥까지 행군하였다. 이어 평남 영덕, 맹산, 덕천을 거쳐 북상을 계속하며 영변, 운산을 거쳐 8월 23일에는 초산에 도착하였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회인현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회인현에서 관군 장수 서본우에게 무장 해제 당하여 219명의 의병을 해산시켰다.
유인석의 서간도 진출은 항일의병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서간도 정착으로 국외 독립운동기지가 건설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유인석이 고종의 의병 해산 요구를 거부하고 전쟁을 계속한 이유는, 왜적의 핍박에 의해 내린 명령은 임금의 속뜻이 아니고 의병이 한번 해산되면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궁극에는 망할 것이기 때문이며, 서간도로 간 이유는 의병의 근거지를 마련하여 힘을 쌓아 세력을 이루게 되면 복수하여 치욕을 씻고 소중화(小中華)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 질문1 유인석이 갑오개혁으로 나라가 망했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유인석이 1896년 2월 영월에서 조직한 의병 부대 이름을 써 봅시다.
  • 질문3 유인석의 서간도 진출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2

평안도에서 항일 민족의식 고취와 일진회 반대 운동

유인석은 의병 해산 후 청에 군사 요청을 하기 위해 심양으로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군사 요청이 실패한 뒤에는 통화현 오도구에서 근거지를 구축하고 망국단과 망묘단을 조성하여 정기적으로 나라와 조상에 대한 배례 의식을 하면서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다. 1897년 8월 고종의 권유로 잠시 귀국하여 춘천에서 모친의 대상(大喪)을 모셨다. 이 무렵 암살 기도가 있자 1898년 유인석은 다시 간도로 옮겨 한인들의 교화와 의병의 재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다가 1900년 7월 의화단의 난이 발생하자 평북 강계로 근거지를 옮겼고 이때부터 황해도, 평안도 지역을 순회하면서 문인을 양성하는 한편 주민들에게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평산, 용천, 개천, 은율을 근거지로 삼고 철산, 안주, 선천, 평양, 용강, 서흥, 해주, 영변, 태천, 숙천, 단천, 덕천 등지를 왕래하며 항일 민족 자주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유인석은 을미년(1895)의 전기의병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일제의 협박에 의해 국가가 군사를 동원해 서로 싸우게 하였고, 의병에게 반란군이라는 오명을 씌워 처신하기 곤란하게 한 점을 들었다. 그러므로 다시 의병을 일으킬 때는 국가의 상층부 관리가 나서 상하가 합세해야 하며, 전국적으로 조직을 연계하여 일제히 전쟁에 나설 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서북지역에서 의병을 양성하는 한편 최익현에게 편지를 보내 거의에 앞장 설 것을 부탁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1904년,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자 유인석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전국에 향약을 조직하여 대처할 것을 계획하고 최익현에게 총책임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최익현은 깊이 공감하지 않았다. 최익현과의 연대가 순조롭지 못하자 유인석은 우선 원용정, 원용석, 이정규 등에게 지시하여 제천을 중심으로 향약을 조직하게 하였다. 1905년 4월 제천에 온 유인석이 명륜당에서 향약례(鄕約禮)를 실시하였을 때 참석자가 천여 명에 이르렀고 구경꾼은 그 배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에 고무되어 인근 5,6읍(邑)이 향약을 실시함으로써 제천, 원주 일대에는 일진회 조직이 침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유인석의 향약은 단순한 지역공동체를 넘어선 의병조직체였다고 할 수 있다.

  • 질문1 1898년 간도로 옮겨갔던 유인석이 했던 일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유인석이 1900년 의화단을 피해 평북 강계로 옮겨가서 했던 일은 무엇인가요?
  • 질문3 유인석이 일진회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한 것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중기(1905)와 후기(1907) 의병의 조직

일제는 1905년 11월 17일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유인석은 정부 및 명망 있는 인사들에게 글을 보내 일제히 거의해 적을 물리치는 길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하고, 할 수 없으면 서울에 다 모여 성토하고, 또 한편으로 대궐을 지키고 임금을 호위해 나라에 거의할 것을 통고하고 한편으로 각국에 외교 서신을 보내 세계에 호소하며 온 나라 사람돌이 단결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원수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재기를 노리던 유인석의 문인들은 도처에서 의병을 이끌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이전부터 원용팔, 단양의 정운경, 홍천의 박장호, 제천․단양의 이강계, 평북 용천의 전덕원, 평산의 박정빈, 해주의 이진룡 등이 거의하였다. 특히, 해서 지역은 유인석이 평산을 중심으로 항일 자주 정신을 고취하였던 터라 활발한 거의가 있었다. 또 최익현에게도 전투 경험이 있는 김태원 등을 파견하여 거의를 촉구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은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면서 일어난 후기 의병의 바탕이 되었다.
유인석은 당시 전국적 거의의 여망을 받았지만 각기병에 걸려 운신할 수 없었다. 이에 각처의 의진에 의병전쟁을 격려하는 편지를 보내 독려하였다. 유인석은 국내에서의 의병전쟁이 여러 모로 불리함을 인식하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근거지를 마련한 뒤 전국적으로 의병을 결집하여 세력을 이루고 총기를 확보하여 지구전을 펼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1907년 8월 문인 박치익, 차재정, 나희태 등을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하여 정세를 탐문케 하였다. 또한 전 민족의 결집을 계획하고 서울에 잠입하여 양기탁, 조성환, 안창호, 이갑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대책을 협의하였다.

  • 질문1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유인석이 했던 일은 무엇인가요?
  • 질문2 1907년 유인석이 문인들을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한 이유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4

연해주에서 13도의군의 창설

1908년 유인석은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연해주에서 유인석은 이범윤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였다. 유인석은 1908년 10월 「의병 규칙」을 제정하여 일본과의 전면전에 대한 전략과 전술을 마련하였다. 그는 의병전쟁을 국가 간의 전쟁으로 인식하고 전국적으로 의병을 조직하려고 하였다. 「의병 규칙」 중 가장 주목을 끄는 내용은 일본 정부에 대한 선전 포고와 세계 각국에 전쟁을 통고하고 중국 신문에 그 사실을 게재케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전술에서도 별책으로 테러와 암살, 주요 철도, 전기 시설 등의 파괴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전술은 이후 독립전쟁에서 받아들여져 그대로 수행되었다.
유인석은 별개 조직들의 각개 전투로는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각처의 의병들에게 전국적인 단일 조직을 구성하여 조직적인 전투를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같은 노력 끝에 1910년 6월 21일 연해주에서 13도의군이 편성되었고 유인석은 도총재로 추대되었다. 13도의군은 이범윤, 이남기, 이상설, 정재관, 안창호, 이갑, 홍범도 등이 참여한 해외 무장투쟁 세력의 단일 군단이었다. 유인석은 국내의 이천만 동포가 온힘을 모아 일제와 싸우기를 통고하였고, 고종에게 의병 자금을 요구하였으며, 연해주에 망명 정부를 세울 것을 상소하였다.
13도의군은 전기의병 이후 확산된 국내 의병 전쟁의 결집이며, 애국 계몽 세력과 처음으로 연합한 거족적 투쟁 조직이었다. 부대 규모는 최대 4천 여 명이었으며 신식 무기로 무장하였다. 이렇게 결집된 13도의군은 만주 지역 무장독립투쟁의 기반이 되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 질문1 유인석이 작성한 「의병 규칙」의 내용이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2 1910년 6월 연해주에서 유인석의 주도로 조직된 전국적 연합 의병부대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유인석이 13도의군 도총재로 취임하여 한 일은 무엇인가요?
  • 질문4 13도의군 창설의 역사적 의의를 말해봅시다.

읽기자료 5

국권피탈에 대한 선전 포고 및 독립선언

십삼도의군이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던 중 국권피탈이 일어나자 유인석은 대일 선전 포고를 하였다.
이 선전 포고문은 국권피탈을 인정하지 않고 전쟁을 개시하는 것이며, 일본이 국제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부당한 것이고 우리에게 정의가 있음을 선포한 것이었다. 또 당시 연해주 거류민이 경술국치에 반대하여 신한촌의 한민학교에서 성명회를 결성하였다. 유인석은 회장으로 추대되어 세계 각국에 일본의 국권피탈 무효와 우리나라의 독립을 선언하고 정의와 인도주의에 입각해 도와줄 것을 호소하는 성명회 취지서를 대한일반인민총대 유인석의 명의로 세계 각국 정부와 신문사에 보냈다. 성명회 취지서는 최초로 발표된 국권피탈 무효 선언이었다.
한편 13도의군은 결빙기를 기다려 두만강을 건너 단위 부대 별로 국내 진공 작전을 수행할 것을 결의하였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또 성명서와 선전포고문을 중국과 러시아의 한인들에게 반포함으로써 독립 활동을 확대해 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러시아 당국은 13도의군과 성명회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결국 이상설,이범윤 등은 체포되었고, 유인석은 1914년 3월 서간도지역인 봉천성 서풍현으로 피신하였다가 그해 5월 관전현 방취구로 다시 옮겼다. 유인석은 1915년 1월 29일 관전현 방취구에서 74세의 일기로 병사하였다.

  • 질문1 국권피탈에 반대한 유인석의 선전포고문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상상하여 써봅시다.
  • 질문2 유인석이 대표로 있었던 성명회 선언서의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조사하여 말해봅시다.
  • 질문3 유인석이 사망한 곳은 어디인가요?

읽기자료 6

유인석 문인들의 활약

성명회의 뒤를 이은 권업회는 광복군 양성을 위한 거류민의 교육과 실업 장려 사업을 추진하다가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13도의군 휘하에 있던 이범윤은 1920년을 전후하여 대한의군부를 편성하였으며, 홍범도는 대한북로군독부를 편성하여 국내 진입 작전을 벌여 나갔다.
또한 유인석의 문인들은 박장호, 조맹선, 백삼규, 전덕원을 중심으로 1919년 4월 대한독립단을 결성하였다. 대한독립단은 국내외에 세력을 확장하고 군비를 모으고 장정을 모아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1919년 12월경까지 국내외를 통하여 1백여 개의 지단과 지부를 조직하였다. 또 독립군 1, 2, 3, 4 중대를 편성, 남만주 제1사단으로 명명하고 본격적인 독립 전쟁에 돌입하였으며,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는 유격전을 벌여나갔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워지자 임시 정부 직할 광복군총영에 가담하여 조맹선이 광복군사령장에 취임하였다.

  • 질문1 권업회가 주도했던 일은 무엇인가요?
  • 질문2 홍범도가 조직한 독립군 부대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3 유인석의 문인들이 조직한 독립군 부대 이름을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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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2002년 독립기념관에 세워진 의암 유인석 선생 어록비이다.

  • 질문1 유인석은 연해주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어떤 활동을 하였나요?

시각자료 2

1946년 백범 김구는 유인석 묘소를 참배하였다. 사진은 이를 기념하여 세운 백범김구선생친필고유문비이다.

  • 질문1 백범 김구 선생이 유인석 묘소를 참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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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유인석의 입장에서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작성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유인석의 입장에서 국권피탈에 즈음하여 외국 기자들에게 배포할 보도문을 작성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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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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