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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선생은 형리를 시켜 정현동을 묶어다 놓고 볼기를 치며, “너 같은 사람이 많아서 우리나라가 꼴이 된 줄 모르느냐?”하고, “네 악몽이 개도록 태형(笞刑)을 하겠다.”하니 두 손을 저어 잘못을 뉘우치므로 선생은 껄껄 웃으며 포박을 풀어 손을 잡아 끌어올려 술까지 대접하여 보냈다.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 1863-1939)이 양양군수로 재직하면서 근대식 학교 설립을 추진하자 양양의 아문(衙門)에서 오랜 관직을 지내던 정현동을 대표로 하는 유림들의 반대가 심하였다. 이에 남궁억은 그들을 위협과 회유로써 설득하였다.
남궁억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우리나라의 애국 계몽 사상가들의 전형적인 교육 및 사회과정을 겪었던 인물이다. 남궁억은 서울에서 태어나서 교육을 받고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양양의 현산학교, 관동학회와 관련되어 강원도의 근대 교육과 깊은 인연을 맺었는데, 그 중 현산학교 설립은 양양의 근대식 교육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13 [도로명 주소: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남문로 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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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없어짐 / 현재 학교 건물은 남아있지 않고 양양교육도서관이 자리하고 있다. 도서관 자리에 당시 현산학교의 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 정책으로 국권상실의 절박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 민족은 국권회복의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한편으로는 항일 의병 투쟁으로 다른 한 편으로는 애국계몽운동으로 나타났다. 위정척사 사상을 배경으로 무장 투쟁을 전개한 의병운동은 군대 해산 이후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의병전쟁의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반면,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한국병합에 이르는 기간에 서울을 중심으로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을 이루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애국 계몽 운동 세력은 국권회복을 위한 지름길이 실력양성을 통한 자강(自强) 외에는 없다는 입장에 서서 신교육으로 청년을 양성하기 위한 학문진흥과 민족 산업의 육성을 위한 식산흥업이라는 방법에 역점을 두었다. 특히 기울어져가던 국운이 을사늑약으로부터 파멸 직전에 이르게 되자 전국적으로 신교육을 통한 구국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한국에 있어서 교육은 장래의 국권회복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데서 구국운동의 중요한 방법으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각 지역에서 전․현직 관리들도 학교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양양군수였던 1907년, 남궁억은 지역의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현산학교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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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현산학교 설립자 남궁억의 계몽운동
1863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난 남궁억은 1883년 통역관양성소인 동문학에 들어가 1년 동안 영어를 배웠다. 이후 묄렌도르프의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1886년 고종의 통역을 맡았다. 이어 1889년 별군직(別軍職)을 맡았고, 1893년에 칠곡부사, 1895년에는 내부(內部) 토목국장이 되었다. 이 때 낮으로는 토목국장으로 일하면서 야간을 이용하여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영문법과 국사를 가르쳤다.
1897년 내부 토목국장에서 물러난 이후 남궁억은 독렵협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가 독립협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96년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안경수가 회장, 이완용이 위원장을 맡았을 때 그는 간사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이 해 『대조선독립협회보(大朝鮮獨立協會報)』를 간행할 때 그는 편집을 맡았다. 아울러 『독립신문』 영문판 편집도 맡았다.
1898년 독립협회는 점차 정부와 갈등을 빚었다. 이 때 그는 정부에 항의 서한을 보내는 일을 담당했고, 독립협회를 해산하려는 관리를 사직토록 했으며, 이용익 등 관리들의 불법 행위를 규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고위 관료들을 고등재판소에 고발했으며,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정부에서 수구파들을 몰아내려 하였다. 이처럼 그는 토목국장에서 물러난 뒤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가 정부와 갈등 중일 때, 그는 『황성신문』의 초대 사장이 되었다. 1898년 9월 첫 호가 나온 이 신문은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개신유학자들의 입장에서 만든 국한문체 신문이었다. 『황성신문』에 독립협회 관련기사가 많이 실린 것도 남궁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1900년 8월, 『황성신문』 사장으로 있던 남궁억은 구속되었다가 며칠 만에 풀려났다. 신문에 러시아가 일본에게 한국을 분할 점령하자고 제의했다는 기사를 실은 것이 문제였다. 1902년 유사한 사설로 인해 3개월의 감옥생활 후 신문사에 사표를 냈다.
1905년 3월에서 1907년 9월까지 남궁억은 다시 성주목사와 양양군수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양양군수로 있을 때 헤이그특사 사건이 일어나고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자 사직을 결심한 듯하다. 양양군수에서 물러난 뒤 평산군수 물망에 오르기도 하고, 평산군수에 서임되었다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온 남궁억은 1908년 몇몇 동지들과 같이 순 한글로 『교육월보(敎育月報)』를 간행하였다. 이 월보는 교육 이론을 전개한 것이라기보다 학교 밖에서도 신학문을 공부할 수 있게끔 한 일종의 통신 강의록이다. 신학문으로 민족정신을 부흥시킴과 동시에 자강(自强)을 도모하는 것이 간행의 취지였다. 또한 같은 해에 강원도민의 민족 문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관동학회(關東學會)를 창립하여 회장에 취임하였다.
- 질문1 남궁억이 근대교육을 받은 교육기관을 말해보시오.
- 질문2 독립협회가 정부와 갈등을 빚었을 때, 남궁억은 독립협회에서 했던 역할은 무엇인가요?
- 질문3 양양군수로 재직하던 남궁억이 사직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4 남궁억의 활동 가운데 강원도에서의 교육과 관련된 사례를 모두 말해보시오.
읽기자료 2
현산학교의 설립과 운영
1906년 1월에 강원도 양양군수로 임명된 남궁억은 1년 8개월간 재직한 후 1907년 9월에 물러났다. 그가 군수로 있던 1907년 7월 20일, 근대식 학교인 현삭학교가 세워졌다. 현산학교는 양양 지역의 유지들이 평의회를 조직하여 기부금을 모으고 유력한 문중의 재산 등 4,000환을 재원으로 동헌(東軒)의 뒷 산에 건립되었다. 이는 남궁억이 자신의 손으로 처음 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현산학교가 건립되는 과정에서 유림(儒林)의 일부에서 반대가 있었다. 당시 지방 유림들은 외세의 침략에 대한 경계심과 함께 근대식 학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양양 지역도 비슷하여 남궁억의 현산학교 설립은 쉽지 않았다. 남궁억은 그들을 위협과 회유로써 설득하였다.
어렵게 학교의 문을 열고 학생을 모으려고 각 가정을 찾아갔지만, 아이를 먼저 나서서 학교에 보내는 가정은 하나도 없었다. 자진 입학을 권하였으나 별 효과가 없었으므로, 남궁억은 다시 자제를 한 사람씩 의무적으로 보내라고 강요하였다. 이러한 남궁억의 피나는 노력으로 1906년 7월 20일 개교식에 학생이 200명에 달하게 되었다.
당시 현산학교의 교육과정과 담당교사를 보면 남궁억이 영어와 음악을, 정우용이 산수와 역사를, 김흥식이 일본어와 체조를, 이흥영이 국문과 한문을 각각 맡았다.
학생들의 수업료는 없었고, 또 학교에서 공책과 연필을 무상으로 공급해 주었다. 그리고 교과서를 깨끗이 사용하는 학생에게 상을 주어, 다음 학생에게 넘겨주었는데 이는 교과서 구입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1907년 남궁억은 양양군수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 때 그는 현산학교 설립을 반대했던 유림 학자인 정현동을 불러 교장으로 임명하였다.
현산학교는 1920년 4월 양양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고, 지금의 양양초등학교로 이어졌다.
- 질문1 양양에 현산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조성된 자금은 얼마나 되었나요?
- 질문2 근대식 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남궁억이 겪었던 어려움은 무엇이었나요?
- 질문3 근대식 교육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남궁억이 입학생 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취한 조치를 설명해보시오.
- 질문4 현산학교에서 가르쳤던 교과목을 말해보시오.
- 질문5 남궁억이 양양군수직에서 사임하고 서울로 올 때 교장에 임명된 정현동은 어떤 인물인가요?
읽기자료 3
관동학회
관동학회는 1908년 3월 23일 남궁억, 박기동 등 14인에 의해 서울 전동에 있는 자강회관(自彊會館)에서 조직되었다. 같은 해 4월 2일에 임원을 선출하였는데, 회장에 남궁억, 부회장에 정봉시가 선출되었다. 관동학회에서는 강원도민이 교육과 계몽을 위하여 강릉, 원주, 철원 등에 7개 지회를 설립하였다. 특히 강릉지회와 원주지회에서는 직접 사립학교를 설립하였다.
관동학회는 강원도 출신의 재경학생과 도내의 청년들을 모아 교사 양성 강습회를 열었다. 사범강습회는 종로구 후염동에 있던 관동학회의 회관을 이용하였다. 강습 내용은 교수법이 중심이 되었으며, 수료자들은 신설 사립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관동학회의 재정은 여타의 학회들과 같이 민간인의 의연금과 출자금으로 운영했다.
관동학회는 초기에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나 일제에 의한 학회령 발표, 언론의 탄압 등으로 쇠퇴하다가 1910년 8월 일제의 금지 조치로 문을 닫았다. 학회의 역할 중 가장 커다란 사업의 하나였던 월보(月報)를 간행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 관동학회는 다른 학회에 비하여 그 규모나 활동이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질문1 관동학회의 활동 목적을 설명해보시오.
- 질문2 관동학회의 초대 회장은 누구인가요?
- 질문3 관동학회는 모두 몇 개의 지회를 설립하였는가요?
- 질문4 관동학회가 문을 닫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남궁억이 간행했던 『교육월보』이다. 『교육월보』는 남궁억이 양양군수를 물러나고 다음 해인 1908년 6월 25일 국민계몽을 위해 펴낸 잡지이다. 이 잡지는 한글 교육과 독서를 통한 국가발전과 일제로부터 주권회복을 목표로 간행된 것이다. 순 한글이며, 띄어쓰기를 철저히 지켰다.
- 질문1 현산학교 설립을 비롯하여 남궁억이 근대식 교육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 활동 내용을 찾아서 정리해봅시다.

모둠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