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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만 생가 터(대한민국 독립운동계의 ‘3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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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원군 오송역에서 옥산‧오창 방향으로 가다보면 옥산 읍내 들어서는 로터리(오송‧조치원 방향을 향해 옥산 읍내에서 빠져나오는 로터리)가 나타나는데, 이 로터리에서 덕촌리 방향으로 가다보면 덕촌리 사거리 광장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 덕촌마을에서는 해마다 3월 1일, 주민들이 마을 광장이 모여 3‧1절 기념행사와 함께 단축 마라톤 대회, 민속놀이 행사 등을 해오고 있다. 작은 동네치고는 꽤 오랜 동안 역사적 행사와 공동체 전통을 계승해오고 있는 덕촌마을은 덕촌교회와 덕촌신용협동조합을 비롯한 각종 조합을 중심으로 농촌 공동체 마을의 모범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어디에 자랑해도 충분한 마을이다.
덕촌마을의 3‧1절 기념행사나 공동체 전통은 독립운동가 정순만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정순만(鄭淳萬, 1873~1911)은,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강조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무력에 의한 독립 투쟁을 펼쳤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 박용만(朴容萬, 1881~1928)과 함께 우리나라 ‘독립운동계의 3만’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정순만은 조선 말기, 개화와 외세 침략 시기에 국권회복운동과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로, 그가 태어난 곳이 바로 이곳 덕촌마을,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이다.
정순만은 독립협회 창립에 참여하고, 고향에서 덕신학교를 설립하여 구국교육에 힘썼으며, 만주로 망명하여 북간도 용정에서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민족교육과 독립사상을 주입시키고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또 신민회를 조직하고, 헤이그 특사를 돕기도 하였다. 그리고 연해주 지역에서 『해조신문』과 『대동공보』 등을 발간하는 동시에 13도의군부, 성명회, 권업회 등을 설치하여 민족계몽 및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순만은 1911년 39세의 젊은 나이에 연해주 지역 한인 사회의 갈등으로 비록 동포로부터 억울하게 살해되었지만,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큰 업적을 남겼다. 이에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정순만에 대한 연구나 그의 업적에 대한 홍보 내지 대우가 소홀한 편이다. ‘2008년 충북을 빛낸 역사‧문화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지만, 그에 걸맞은 안내나 홍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의 후손(아들)이 외국에 살고 있기 때문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현재 정순만이 태어난 곳은 잘 관리되지 않고 있으며, 이곳을 안내하는 표지판 하나 없어 일반인들이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다만, 그의 나라사랑과 항일정신이 덕촌마을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을 뿐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 185 [도로명 주소: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덕촌광촌길 9]
현재 상태 변형 / 집이 남아 있으나 변형이 심한 상태이다.

19세기 후반, 서양 세력이 우리나라 가까이 나타나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였고, 조선 침략을 꾀하는 외국 세력 가운데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의도가 가장 강했던 일본에 의해 1876년 조․일조호조규(강화도조약)가 강제로 맺어지면서 우리나라는 결국 개항을 하게 되었다. 이후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개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개화파가 등장하였으며, 조선에 교육을 비롯한 각종 근대 시설이 보급되었다.
한편, 일본은 침략의 야욕을 더욱더 드러내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을사늑약),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차례로 맺어가면서 조선(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였다.
이에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 등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독립협회와 보안회(일본의 황무지 개간을 반대한 항일운동 단체), 신민회 등 많은 애국단체나 계몽단체들이 활동하였다. 또한 해외에서도 민족학교를 세우고, 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등 다양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런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의병운동이 충북지역에서는 크게 3단계의 시기로 나누어져 진행‧발전되었다. 제1단계의 전기 의병(을미의병)은 1896년에 위정척사운동을 이끈 이항로(李恒老)의 제자 유중교(柳重敎)의 화서학통에 연결된 유생 출신 유인석(柳麟錫)과 그 문하생 등 600여 명으로 시작되었다. 제2단계 중기 의병(을사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하여 충북 각지에서 활동이 전개되었으며, 제3단계 후기 의병(정미의병)은 1907년 군대 해산 전후로 의병에 참여하는 군인 출신자, 의병활동을 다시 일으킨 이강년(李康秊)과 김상태(金尙台), 그리고 충북과 연관 있는 사람들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1908년 이후에는 의병활동이 급속히 감소하면서 개별 의병부대가 독자적인 행동을 전개하는 형태로 전환하여 활동하였다. 이는 전술상 일본군과 대규모의 전면전이 불리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급기야 1909년의 일제의 이른바‘남한폭도대토벌’로 말미암아 상당수의 의병들은 근거지를 잃고 피신하거나 다른 형태의 독립투쟁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애국계몽운동에서 가장 기본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운동은 충북지방에서도 마을의 지주나 선각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충북 각지에서는 신교육을 받은 사람을 중심으로 보명학교‧상산학교‧문동학교‧덕신학교‧청남학교 등이 건립되었으며, 신학문을 중심으로 계몽운동이 진행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나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국내에서 독립활동하기가 어려워지자 해외로 떠나 활동을 전개한 이들이 많았는데, 이처럼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충북 출신 인물도 적지 않았다. 충북 출신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는 신건식, 신규식, 신채호, 신팔균, 연병호, 유자명, 이상설, 전좌한, 정순만, 조동호, 황학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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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정순만의 국내 민족운동

정순만(鄭淳萬, 1873~1911)은 하동 정씨(河東 鄭氏)가 수백 년을 살아온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당시 주소: 충청북도 청주군 서강내이하면 덕촌리)에서 아버지 정석종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하동(河東), 호는 검은(儉隱)이다. 그는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895년 을미의병에 참가하여 민족운동의 길에 나섰다.
이후 서울로 올라간 정순만은 1896년 3월 이승만‧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 창립에 참여하였고, 독립협회 총무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유신당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또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 도총무부장으로 활약하다가 이승만‧유근‧나철‧안창호‧남궁억‧양기탁 등 367명과 함께 체포되어 형무소(현 교도소)에 가기도 하였는데, 정순만은 이승만‧박용만과 함께 ‘3만 또는 3형제’로 불리기도 하였다.
1900년대 초에 정순만은 서울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를 이끌기도 하였다. 상동청년회는 상동교회 안에 조직된 청년단체로서, 이곳에는 이승만‧박용만‧김구‧이준‧이동녕‧최재학 등이 함께 활동하였다. 상동청년회는 당시 민족운동의 중심지라 할 수 있었는데, 일제 또한 상동청년회를 독립협회를 계승하고, 신민회의 모체가 된 단체로 파악할 정도였다. 정순만은 상동청년회를 이끌면서 멕시코 이민 참상 규탄 및 멕시코 이민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상동청년회를 이끌던 정순만은 이준․이현석 등과 함께 적십자사 설립 운동을 이끌어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의 항일운동은 결코 나약하지 않았다. 정순만은 1904년 7월 일본의 조선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항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조직된 항일단체인 보안회(保安會)와 함께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 운동을 펼쳐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막아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동녕, 이준, 김구 등과 함께 상동교회에서 도끼를 메고 임금께 나아가 올리는 을사조약 결사반대 지부상소문(持斧上疏文)에 서명하는가 하면 을사오적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체포되기도 하였다.
한편, 정순만은 고향에서 덕신학교(德新學校)를 세워 신교육을 실시하는 등 국권회복을 꾀하기도 하였는데, 덕신학교는 1902년경 정재봉(鄭在鳳)‧정순만(鄭淳萬)‧정두현(鄭斗鉉) 등이 뜻을 모아 덕촌마을에 세운 사립 근대학교이다. 구한말 민족적 자각이 늘어나고 근대의식이 성장할 즈음에 경제력을 가진 지방유지 및 선각자들이 민족교육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다. 옥산 덕촌리에서도 하동 정씨 집안에서 돈을 모아 덕신학교를 설립하고 정재봉이 교장으로 취임하여 주변 마을의 젊은이를 모아 가르쳤다. 종래 한문 위주의 서당 체제를 버리고 수신‧조선어‧산술‧한문‧역사‧지리‧이과‧창가‧농업기초 등 근대 교과를 도입하여 농촌 자녀들을 교육하였다. 이 학교는 민족의식이 강한 학교였기 때문에, 일제의 간섭과 통제가 심하였는데, 1919년 3․1운동 직후 일제는 학교를 강제로 폐교하고 학생들을 흡수하고 공립학교로 전환하여 1920년 옥산공립보통학교(옥산소학교)를 새로 세웠다.

  • 질문1 독립운동계의 ‘3만’으로 불리는 이들은 누구인지 써봅시다.
  • 질문2 보국안민(輔國安民)를 내세운 단체로, 정순만과 함께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막아낸 단체의 이름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3 정재봉을 비롯한 정순만이 고향에 세운 근대학교 이름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2

정순만의 국외 독립운동

일제의 탄압으로 더 이상 국내에서의 민족운동이 불가능하자, 그는 1906년 봄 가족을 데리고 이상설 등과 함께 망명길에 나서 북간도 용정에 터를 잡았다. 이곳에서 그는 이상설, 이동녕, 여준 등과 함께 북간도 민족교육의 요람이자 최초의 조선족 근대학교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동포 자제들의 교육활동에 온힘을 쏟았다. 서전서숙을 통해 독립사상을 일깨우는 민족교육과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1907년 4월, 서울에서 조직된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에 안창호, 김구, 이동녕, 양기탁, 이회영 등과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 서전서숙을 운영하던 이상설이 을사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할 고종 황제의 특명을 받고 먼저 연해주로 떠나 헤이그로 갈 준비를 하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정순만은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달려갔다. 이는 정순만과 친한 이상설과 이준이 특사로서 헤이그에 가기로 되었으나 경비가 부족하였기에 이들을 돕고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달려 간 것이었다. 비록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던 한인들 간에 파벌이 있어 경비 모금이 여의치 않았으나, 한인회장 김학만을 비롯한 이동휘 등과 함께 갖은 노력을 기울여 여비 18,000원을 교포로부터 모금하여 전달하였다. 이에 이상설과 이준 특사가 계획대로 출발할 수 있었다. 정순만은 이들 특사를 헤이그로 보내고 다시 서전서숙으로 돌아와 교육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어려워지자 이듬해인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최봉준(崔鳳俊)이 투자하여 1908년 2월 26일 창간한, 해외에서 우리말로 발행된 최초의 일간신문인 『해조신문(海朝新聞)』의 주필‧주간‧총무를 맡아 1인 3역을 하면서 동포들을 계몽하는 언론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곧 국내에서 주필로 모셔온 장지연(張志淵, 1864~1921)과 사이가 나빠졌다. 이는 신문사 운영과 민족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싼 의견 대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해조신문』은 창간 3개월 만에 폐간되고 말았다. 이어서 1908년 『대동공보(大東共報)』가 발행되자 그는 다시 러시아인 미하일로프와 함께 주필을 맡았다.
한편, 그는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연추(煙秋)]에서 최재형, 이범윤, 이위종과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였다. 이는 정순만이 국내에 있을 때도 그러하였지만, 국외에서도 민족운동을 위해서는 계몽운동과 무장투쟁을 함께 전개하는 투쟁방법을 전개하였다. 나아가 그는 미주 동포사회와의 연결에도 관심을 기울여 공립협회(共立協會: 190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되었던 항일운동 단체)에도 가입하였으며,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 부회장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정순만은 의열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09년, 대동공보사에서 여러 차례 안중근(安重根, 1879~1910) 등 동지들을 만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 계획을 세워 나갔다. 일제 비밀 자료에는 안중근 의거 계획 장소를 대동공보사로, 미하일로프와 정순만을 주요 관련 인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중국 신문은 안중근과 정순만은 생사를 같이 할 동지라고 보도하기도 하였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가 성공하고 안중근이 체포되자, 정순만은 돈을 모아 변호사를 구하는 등 안중근의 목숨을 구하는 데 발 벗고 나섰다.
이외에도 정순만은 13도의군부(十三道義軍府)를 비롯하여 관일약(貫一約: 1909년 의병장 유인석이 연해주에서 국내외 항일의병 세력을 결속하기 위해 시도한 향약 형태의 조직 체계)을 통해 독립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또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항일운동 단체인 성명회(聲明會)‧권업회(勸業會)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1910년 1월 23일, 정순만이 연해주 한인사회 민회장 양성춘을 권총으로 쏴 죽인 ‘양성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정순만이 살의를 가지고 양성춘을 쏜 것이 아니라, 정순만이 동포 사회의 분열과 대립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개선시키려고 “차라리 내가 죽겠다”고 하며 권총으로 자살하려는 행동을 했는데, 양성춘이 달려들어 말리다가 권총이 오발되어 일어난 사고였다. 당시 연해주 한인사회는 출신 지역에 따라 몇 개의 파벌로 분열되어 있었다. 서북파의 수장 격으로 민회장을 지낸 양성춘이 기호파의 수장 격인 정순만에게 피살당했다는 사실은 곧 동포사회에 파쟁의 회오리를 몰고 와 서북파와 기호파의 대립이 더 극심해졌다.
1911년 2월 8일, 정순만은 최종 무죄 판결을 받고 1년여의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나왔다. 그러나 아직도 서북파가 정순만을 죽일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상설의 집에 은신하며 숨죽이고 지내기도 하였지만, 민족운동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조국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5월 하순 그는 홍범도(洪範圖, 1868~1943) 등 동지들과 함께 의병의 국내진공작전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등 조심스럽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6월 21일, 정순만은 양성춘 가족들에게 처참하게 보복 살해당하고 말았다. 39세의 민족운동가 정순만의 조국 독립의 꿈도 꺾이고 말았다. 그의 장례를 둘러싸고도 논란이 일었다. 이상설 등의 노력으로 50여명이 모여 무사히 장례를 치르긴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그가 묻힌 곳이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 질문1 이상설이 중심이 되어 정순만, 이동녕 등이 1906년 북간도 용정에 세운, 조선족 최초의 근대학교이자 민족교육의 요람이었던 학교 이름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2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주장하고자 1907년 4월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상설과 이준을 정순만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어떻게 도왔는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3 정순만이 주필‧주간‧총무를 맡아 1인 3역을 하였던 신문으로, 해외에서 우리말로 발행된 최초의 일간신문으로 평가되기도 하는 이 신문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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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정순만의 건국공로훈장증과 훈장

어느 훈장증과 훈장 모습이다.

  • 질문1 훈장을 받은 사람의 이름과 훈장을 준 사람의 지위(직책)을 써봅시다.
  • 질문2 몇 년도에 수여된 훈장인지 써봅시다.
  • 질문3 이 훈장의 종류는 ‘건국훈장 국민장’이다. 건국훈장은 대체로 어떤 분들께 수여하는 훈장일지 말해 봅시다.

시각자료 2

『해조신문』, ‘여자교육’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1908년 2월 28일자 신문의 일부이다.

  • 질문1 됴신문(또는 죠신문)은 海朝新聞을 가리킨다. 현재의 우리말로 무엇이라고 읽는지 써봅시다.
  • 질문2 이 신문의 논설 제목이 ‘녀자교육’이라고 되어 있다. 현재의 우리말로 어찌 읽어야 할지 써봅시다.
  • 질문3 이 글을 쓴 이는 정순만이다. 정순만은 이 글에서 교육의 초보는 가정지학(家庭之學)이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의 가정교육을 위하여 여자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그 사회의 성쇠는 여자교육의 유무와 관계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정순만은 여성의 교육에 대하여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대답해 봅시다.

시각자료 3

정순만 사망 기사(『신한민보』, 1911년 8월 9일)

당시 미국에서 발행되던 『신한민보』 1911년 8월 9일자에 실린 정순만 사망 기사이다.

  • 질문1 정순만이 피살된 것은 몇 월 몇 일이라고 쓰여 있는지 써봅시다.
  • 질문2 정순만이 피살된 것은 정순만이 권총 오발사고로 누구를 사망케 했기 때문이었는지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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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독립운동가 정순만의 생가 터는 관리는커녕 그를 안내하는 표지판 하나 없어 찾기가 어렵다. 더구나 근처에 그와 관계된 덕신학교 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는지 친구들과 함께 찾아봅시다.
모둠활동 2
정순만의 생애를 체계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연표를 만들어 보고, 정순만을 쉽게 홍보할 수 있는 팸플릿(Pamphlet)을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대한민국 훈장은 크게 무궁화대훈장, 건국훈장, 국민훈장, 무공훈장, 근정훈장, 보국훈장, 수교훈장, 산업훈장, 새마을훈장, 문화훈장, 체육훈장, 과학기술훈장 등이 있다. 대한민국 훈장의 종류를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서로 만들어 봅시다.
모둠활동 4
내가 만일 정순만이 활동했던 당시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다면, 동포 간의 화합과 단결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했는지 서로 상의해서 좋은 방안을 정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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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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