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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학교 터(호서지방 개명에 대한 열망이 서린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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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존망(存亡)과 민족의 성쇠(盛衰)는 사회단체의 성부(成否)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존경쟁과 우승열패(優勝劣敗)한 세계를 당하여 크게는 국가와 작게는 개인과 가정을 스스로 보존할 방법을 강구하면 우리 동포 청년이 교육을 힘써 이끌어서 인재를 양성하며 대중의 지혜를 계발하는 것이 실로 국권을 회복하고 인권을 신장하는 기초가 됩니다. ……”

이 글은 기호흥학회가 각 지방에 발송한 편지글의 내용이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을 전후하여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이 크게 일어나 학문을 진흥하고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청년들을 교육시킴으로써 민족역량을 강화하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팽배하였다.
을사늑약 전후 충남 홍성 지역에서도 호명학교가 설립되었다. 호명학교는 김좌진이 중심이 되고 지역 유력인사들이 동참하여 민족 교육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호명학교의 중심인물들은 기호흥학회의 설립 취지와 뜻을 같이 하였고 홍성지역에 지회를 설립하여 활발한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 325 [도로명 주소: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상촌로 9번길 21-7]
현재 상태 없어짐 / 당시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으며, 현재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을사조약 뒤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 정책으로 국권상실을 앞에 둔 절박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 민족은 국권회복의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한편으로는 항일 의병 투쟁으로 다른 한 편으로는 애국계몽운동으로 나타났다. 위정척사 사상을 배경으로 무장 투쟁을 전개한 의병운동은 을미년(1895)과 을사년(1905)에도 일어났지만 1907년 군대 해산 이후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의병전쟁의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반면,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국권강탈에 이르는 기간에 서울을 중심으로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을 이루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04년 일제의 침탈에 항거하여 보안회가 조직된 뒤 각종 사회단체가 활발하게 조직되었다. 이들 애국계몽단체들은 국권회복의 지름길을 실력양성을 통한 자강(自强)에 두었다. 이들은 학문진흥을 꾀하고 근대교육으로 청년층을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민족 산업을 육성하는 식산흥업(殖産興業)운동에 역점을 두었다. 특히 기울어져가던 국운(國運)이 을사조약으로 파멸 직전까지 이르자 전국적으로 근대교육을 통한 구국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들은 근대교육을 통한 실력양성만이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는 일본에 맞서 국권회복을 할 수 있는 최선을 방략이라고 생각했다.
호명학교도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설립되었다. 김좌진을 비롯한 홍성지역의 선각자들은 민족의 장래를 책임지고 있는 청년층을 교육하여 국권회복의 기반을 닦으려고 하였다.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이들의 뜻은 학교 이름에도 나타난다. 이들이 학교 이름으로 사용한 ‘호명(湖明)’이란 ‘근대교육을 통하여 호서지역을 개명’하겠다는 뜻인데,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서 근대적 인재육성을 통하여 민족자강을 도모하겠다는 강렬한 목적과 의지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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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김좌진의 민족의식 형성

김좌진의 집안은 미곡 2,000석을 수확했던 홍성지역의 오래된 지주였다. 집의 규모만 해도 80여 칸이나 되었으며 노복들도 30여명이나 거느리고 있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매우 부유했고 사회적으로도 지명도가 높았다.
김좌진은 글공부보다는 활쏘기, 말타기, 병정놀이를 좋아하는 무인적 기질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유년시절에는 김광호, 김동익, 김복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이들 가운데 일찍이 개화사상을 받아들였던 김광호는 열강의 침입 앞에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의 현실과 시국을 한탄하며 비분강개했던 지식과 인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김광호는 청년 김좌진에게 의병활동과 독립협회운동 등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그의 노력 덕분에 무인적 기질을 소유했던 김좌진이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는 독립의지를 갖게 되었고 마음을 가다듬고 학문에 열중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김좌진에게 김석범을 만나게 된 것도 스승 김광호를 통해서였다. 김석범은 김광호의 조카로 김좌진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단발을 한 뒤 독립협회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김석범은 일찍부터 고향인 홍성을 떠나 여러 해 동안 서울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이 처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김석범의 영향으로 김좌진은 일찍이 계몽의식을 갖게 되었다. 또 호명학교를 설립할 때도 김석범의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국권피탈 이후에는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동지가 되었다.
김좌진은 김광호가 개인 사정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에 갈산면 부기리의 부춘서당(富春書堂)에서 수학하였다. 이곳은 김광호의 조카인 김동익이 훈장으로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집에 부춘서당을 열어 교육사업 뿐만 아니라 기호흥학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나중에는 갈산면 초대․3대 면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김좌진은 김복한으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는 1895~1896년에 전개된 홍주의병의 총수였으며 을사조약 반대항쟁과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는 등 전 생애를 항일민족운동에 바친 민족 지사였다. 김좌진은 김복한으로부터 의리 정신과 민족 수호 정신을 배웠으며 이것은 이후 그가 항일 투쟁을 전개하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질문1 김좌진 집안의 경제적 규모를 말해보시오.
  • 질문2 김좌진의 민족의식 형성에 영향을 준 세 사람은 누구인가요?

읽기자료 2

김좌진의 애국 계몽 활동

김좌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외교권이 강탈되는 것을 목격하고 울분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보려 하였다. 1907년 서울에 올라왔던 것은 그와 같은 생각의 일환으로 보인다. 서울에서 개화운동에 참여하게 된 김좌진은 여러 계몽 운동 단체에 참여하였다. 그는 1907년 11월에 조직된 대한협회에도 참여하였고, 또한 대한협회 계통의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1908년 1월에 설립된 기호흥회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면서 고향에 개화사상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홍성 지역에 애국계몽운동 단체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기호흥학회 홍주지회를 만드는 데 간여하였으며, 1909년 4월 경에는 기호흥학회 홍주지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09년 말 경에는 대한협회 홍주지회를 설립하는데 참여하였다.
이처럼 기호흥학회와 대한협회 홍주지회를 설립하고 활동하면서 김좌진은 홍성 지역의 유지층으로 개화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호서교육회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에 뜻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좌진이 호명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도 개화운동의 일환으로 판단된다. 그는 호명학교에서 학감으로 재직하였는데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다.
김좌진은 홍성에서 호명학교에 간여하는 한편 홍성 지역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신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정미7조약이 체결된 뒤로는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다고도 한다. 호명학교 설립과 민중계몽에 앞장섰던 김좌진은 나중에 홍성 지역의 재능 있는 학생들을 선발해 서울에 유학시키는 운동도 전개하였다.
서북학회 및 신민회 인사들과의 교류와 신민회 참여, 신민회 산하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 간여도 국권피탈 이전 김좌진의 주요 활동 가운데 하나다. 특히 신민회 인사들과의 교류는 나중에 만주와 노령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커다란 힘이 되었다.

  • 질문1 김좌진이 서울로 올라간 계기와 그 시기를 말해보시오.
  • 질문2 김좌진은 호명학교 설립 이후 민족 교육을 위해 홍성 지역에서 어떤 활동을 했나요?
  • 질문3 김좌진이 참여했던 애국계몽운동 단체를 말해보시오.

읽기자료 3

호명학교의 설립

김좌진은 민족의식과 계몽사상을 받아들인 뒤 자신의 집에서 부리던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그는 집안의 노비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인 후에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노비들에게 분배하였다.
노비 해방을 단행한 후 김좌진은 호명학교 설립에 참여해 신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전해지는 기록의 부족으로 호명학교의 설립시기를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정황상 1907년쯤으로 추정된다. 호명학교라는 명칭은 호서 지역을 개명(開明)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개화와 신학문에 대한 교육을 목적으로 하였다.
호명학교의 설립에는 김좌진 뿐만 아니라 당시 홍성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던 안동김씨 문중에서 재원을 지원하고 참여하였다. 김좌진을 비롯해 김병익, 김병수, 김병익, 김선규, 윤필 등이 호명학교 설립에 참여하였는데, 윤필을 제외한 인물들이 모두 안동김씨 문중이었다. 이들은 홍성 지역 유지들로서 김병익은 판서, 김병수는 참판, 김병원과 김선규는 군수를 지낸 사람들이었고, 윤필은 현직 군수였다. 당시 전․현직 관료들은 관직 생활을 통해 국내 사정과 일제의 침략상황을 절감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을사조약 이후 사립학교 건립을 통한 신교육의 보급으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할 수 있었다. 이처럼 호명학교 설립 주체들은 안동김씨 문중인물이 다수를 차지하면서 모두 전․현직 관료 출신이었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 질문1 호명학교가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는 언제인가요?
  • 질문2 호명학교의 설립 목적을 말해봅시다.
  • 질문3 호명학교라는 명칭의 의미를 말해봅시다.
  • 질문4 호명학교 설립의 중심인물들과 특징을 말해봅시다.

읽기자료 4

호명학교의 규모

호명학교의 규모는 갈산공립보통학교의 연혁을 통해 그 규모를 찾아볼 수 있다. 갈산공립보통학교는 호명학교 교사를 이용해 1917년 3월 6일 고도면(현 갈산면) 상촌리에서 개교한 후 1923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갈산공립보통학교의 구교사(舊校舍)는 호명학교였는데, 구교사의 평수는 62평, 학교 부지의 넓이는 865평이었고, 학교 실습지가 219평이었다. 1908년부터 중등과와 소학과를 나누어 가르쳤다. 또한 법률전문과를 설치하는 등 향후 홍성 지역의 사립학교 설립을 주도하였다.
1908년 11월 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호명학교의 ‘모집 학생이 100여 명에 달했다.’는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학교 설립 뒤 지역민들이 적극 호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지역 사회의 칭송이 대단하다’는 기사는 호명학교를 설립한 주체들의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교과목은 1908년 호명학교에서 사용했던 산술학 교재가 전해질 뿐이어서 어떤 교과목들을 가르쳤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한편 호명학교의 학생들은 ‘위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위국가의 내용은 학문에 정진하여 세계의 맹주가 되어보자는 내용으로 민족정신과 애국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이었다. 한말 사립학교의 교육이념이 1905년 이전에는 개명과 부강이었으나,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는 근대교육을 통한 국권회복 이념으로 변화되었다. 호명학교 역시 이와 같은 교육 이념으로 학생들을 교육했음을 알 수 있다.

  • 질문1 호명학교 자리에 세워진 근대 공립학교의 이름을 써 봅시다.
  • 질문2 호명학교 교재 가운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무엇인가요?
  • 질문3 호명학교 학생들이 불렀던 노래와 그 내용을 말해봅시다.
  • 질문4 ‘개명과 부강’이라는 신교육의 이념이 ‘국권 회복’으로 바뀌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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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호명학교 졸업사진이다.

  • 질문1 졸업식장에서 선생님이 제자에게 당부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말을 써봅시다.
  • 질문2 호명학교 졸업생의 입장에서 학창시절을 되돌아보고 각오를 다지는 가상의 일기를 써봅시다.

시각자료 2

다음은 1908년 11월 1일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호명학교 관련 기사이다.

  • 질문1 당시 홍성군에 사는 주민의 입장에서 신문기사를 보고 감동하여 아들에게 호명학교 입학을 권유하는 말을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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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찾아보고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어떠한 방식이 가장 최선일지 함께 토론해봅시다.
모둠활동 2
김좌진을 비롯하여 호명학교를 설립하는 데 주체가 되었던 인물들이 함께 상의하고 토론하여 학교설립을 추진하는 단계부터 개교하기까지의 내용을 시나리오로 작성하여 역할극을 만들어봅시다.
모둠활동 3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개인과 국가의 교육목표가 달리 정해진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교육을 통해 이루어야 할 과제를 모둠별로 작성하여 발효하여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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