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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4천년 나라는 없어지고 우리 2천만 민족은 노예가 되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악정과 폭행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이것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끓어올라 조국을 회복하고자 하는 염원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이 본회가 성립된 이유이니, 각 동포는 그 지닌 바 능력을 다해 이것을 돕고, 앞으로 본회의 의로운 깃발이 동쪽에 오를 것을 기대하라. 그리고 각 자산가는 미리 재산을 준비하여 본회의 요구에 응하여 출금하기 바란다. 만일 본회의 기밀을 누설하거나 그 요구에 불응할 때는 자체로 정한 규정에 따라 징계할 것이다.”
- 대한광복회 포고문 -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70번지 [도로명 주소: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장신신흥길 28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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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복원, 1980년대까지 생가가 일부 남아 있었다. 현재 생가는 2000년 복원된 것이다. |
김한종은 일제강점 후 충청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동지들을 규합하던 중 1916년 7월 김경태, 김재창과 함께 부여의 이철영 집에서 조선 총독 및 고관들의 암살을 모의했다. 때마침 조선 총독이 부여 지방을 시찰한다는 정보를 입수해 조선총독 처단을 모의하던 중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피신하게 되었다.
그는 경주로 박상진을 찾아가 광복회에 참여해 박상진, 채기중, 우재룡과 회합을 갖고 독립 운동의 방법을 협의하여 충청도 지부 조직에 착수했다. 그가 책임을 맡은 충청도지부는 광복회 지부 중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했고,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충청도지부장으로써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활동을 펼쳤다.
서울에서 박상진과 함께 김좌진을 만주 부사령으로 파견하기도 하고, ‘고시문’을 별도로 작성하여 충청도 지역에서 자금을 모집하고 예산, 연기, 인천에 곡물상으로 위장한 광복회 거점을 설치하였다. 또한 식민 지배에 안주하려는 친일 세력들을 처단해 민족적 각성을 일깨우기 위해 친일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8년 1월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한종 생가는 2000년에 해체 복원되었으며, 2007년 기념관이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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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조선 총독 암살 기도
김한종은 1883년 김녕 김씨 김재정과 광주 안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한종의 가문은 대대로 학행이 뛰어나고 충효의 전통을 지닌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이었다. 부친은 성리학을 공부한 유생으로 집안의 아이들과 인근의 학동들을 교육하는 훈장이었다. 김한종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김재풍 의사로부터 한문을 수학하고 충효사상을 전수 받으며 유학을 공부하였다.
개항 이후 외세의 침탈을 목격하면서 김한종과 그의 부친은 외세 배격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게 되었다. 민종식이 1906년 홍주 의병을 일으키자 부친 김재정은 성달영과 함께 소모장(召募將)으로 활약하였고, 김한종 또한 홍주 의병에 참여하였다. 홍주 의병이 일본군에 패하자, 김한종과 그의 부친은 의병장들을 자신의 집에 피신시키고 재기를 도모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고 일제의 식민 통치가 본격화되자 김한종은 34세 되던 1916년 일본 총독이 부여를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철영, 이온, 김민태, 김재창, 우덕상 등의 동지들과 더불어 일본 총독을 제거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하여 같은 해 12월에 우덕상을 중국의 창춘[長春; 장춘] 지방으로 파견하여 권총 2정과 실탄 2발을 구입하였다. 그러나 김한종의 거동을 수상히 여긴 일본 경찰이 자택을 압수 수색하였고 김한종을 비롯한 동지들은 모두 피신하셨다. 김한종은 이때 박상진, 채기중 등이 활동하고 있는 경상도 풍기, 경주 등지로 피신하였다.
- 질문1 김한종이 참여한 홍주 의병은 언제 일어났나요?
- 질문2 김한종이 국권 피탈 후 세운 계획은 무엇인가요?
- 질문3 김한종이 조선 총독 암살 실패 이후 피신한 곳은 어디인가요?
읽기자료 2
김한종의 대한광복회 가입
대한광복회는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을 중심으로 창립한 대한광복단과 1915년 초 대구에서 박상진을 중심으로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이 1915년 7월 15일 통합해서 결성된 무장 독립투쟁 단체이다.
김한종은 조선총독 암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1916년에 경상도로 피신했다가 1917년 6월에 가입하였다. 김한종의 가입으로 경상도 중심이었던 대한광복회는 충청도에 기반을 갖게 되었고, 바로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를 설치하고 지부장에 김한종을 임명하였다.
조직의 규모는 경상도, 충청도, 황해도가 비교적 컸고 활동도 가장 활발하였다.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설립해 본부로 삼았으며, 경상북도 영주의 대동상점 외 강원도 삼척, 전라남도 광주, 충청남도 예산·연기, 경기도 인천, 평안북도 용천에 곡물상을 경영하며 연락처로 삼았다. 서울과 황해도 해주에는 여관, 만주에는 단둥[安東; 안동]의 양제안이 경영한 여관과 이관구의 삼달양행, 창춘[長春; 장춘]에 상원양행 등 잡화상을 설립하여 연락 거점으로 삼았다. 이처럼 상점을 거점으로 했던 것은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해 연락이 편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점 영업을 통해 군자금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질문1 김한종의 대한광복회 가입의 의의를 써봅시다.
- 질문2 상점을 거점으로 했던 이유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3
대한광복회의 활동
대한광복회의 조직원들은 양반과 상민의 구분 없이 서로 어울렸다. 정통 유학자도 있었지만, 유교 가정에서 태어났어도 신교육을 받아 혁신 유림의 성향을 지닌 인사가 오히려 많았다. 지도층 인사인 박상진, 이관구 등은 유교 교육과 신교육을 모두 받고 중국의 신해혁명(1911년)에도 참여한 혁명 투사였으며, 단군에 대한 관심으로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광복회의 처음 계획은 국내에 100개의 거점을 두고 군자금을 모아 무기를 구입해 독립군을 길러 중국의 신해혁명처럼 일제히 혁명을 일으켜서 공화주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만주 등 다른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와도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군자금을 모으고 무기를 구입하였다.
군자금은 의연금을 모으는 방법 외에 일제의 재산을 강제로 탈취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채기중은 강원도 상동이나 충청남도 직산의 일본인 광산을 습격하였고, 우재룡, 권영만 등은 경주에서 우편차를 습격해 현금을 탈취하기도 하였다. 또 위조지폐를 만들 계획도 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모금은 부호들이 호응하지 않아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 뒤부터 식민 통치에 안주하는 부호들을 상대로 강제 모금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부터 각 도별로 부호 명단을 작성하고 ‘광복회’ 이름으로 모금 액수를 표시한 고지서를 발부하면서, 불응 시에는 처단된다는 뜻도 밝혔다. 고지서를 받고 모금에 호응한 사람도 있었지만, 고발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 친일성이 강한 대표적 부호를 처단하기로 하였다. 1917년 말과 1918년 초에 걸쳐 경상북도 칠곡군 부호 장승원,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 전라남도 보성군의 양재학과 낙안군의 서도현을 처단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광복회의 소문이 전국에 퍼져 민족적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 질문1 대한광복회의 처음 계획은 무엇이었나요?
- 질문2 대한광복회는 어떤 방법을 통해 군자금을 모집하였나요?
- 질문3 대한광복회의 친일 부호를 상대로 한 강제 모금 사례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4
김한종의 충청도지부 조직 확대와 활동 거점
김한종은 충청도지부를 확대하기 위하여 친분이 있었던 장두환을 가입시켰으며, 그와 함께 회원을 모았다. 김한종은 광시(예산), 홍성, 청양 지역을 돌면서 친분이 있는 인물과 문중 사람들을 중심으로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고, 장두환은 천안, 아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원은 대부분 홍주 의병에 참여했거나 내포 문화권에 속하는 지역에 사는 인물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김한종의 집안을 중심으로 예산 광시 신흥리 사람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 결과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는 홍성, 예산, 아산, 청양, 천안을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그 참여 인원은 60여 명에 달하였다.
김한종은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장으로서 군자금 모금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군자금 모금에 있어 예산의 김재창과 연기의 박장희가 운영했던 쌀가게, 인천에서 강석주, 이재덕, 황학성이 운영했던 쌀가게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재덕은 김한종의 부친 김재정의 제자로서 충청도지부에서 인천에 파견한 인물이었다. 또한 청양 적곡면에 있었던 중석 광산 광무소, 천안 성정동의 성달영의 집, 아산의 강석주와 성문영의 집 등이 충청도지부 활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 질문1 김한종과 함께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 조직 확대에 노력한 인물은 누구인가요?
- 질문2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 조직의 특징을 써봅시다.
- 질문3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의 주요 거점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5
김한종의 군자금 모금 노력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는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지역을 분할하여 충남 지역의 자산가를 파악하였는데, 장두환이 천안, 아산, 안성, 연기 지역을, 엄정섭이 공주, 청양, 부여, 논산 지역을, 김한종이 서산, 홍성, 예산, 보령 지역을 맡았다. 자산가에게 보낼 고시문(告示文)과 지령장(指令狀)을 직접 만들어 160여 통을 발송하였으며, 모금한 액수는 170만 원에 이르렀다. 170만 원은 오늘날 100억 원 이상에 해당된다고 한다.
하지만 군자금 모금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일제에게 신고하는 악질 친일파들로 인해 군자금 모금은 뜻대로 되지 않자, 김한종은 지도부와 의논하여 군자금 강제 모금을 진행하고 이를 거부하는 친일 부호들을 처단하는 계획을 세웠다. 김한종을 비롯한 지도부는 자산가들에게 대한광복회 명의의 포고문과 배당금 통고문을 보내고, 이를 일경에 알리거나 돈을 내지 않는 친일 부호들은 처단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 11월 10일, 김한종은 박상진의 명령으로 악덕 친일 지주였던 경북 칠곡의 장승원을 채기중, 유창순, 강순필, 임봉주 등을 시켜 처단하였다.
이후 김한종은 충청도지부에서 처단 대상으로 도고면장 박용하를 지목하였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처단하기로 하였다.
“도고면장 박용하는 통고문을 받고 이것을 헌병대에게 건네주었을 뿐만 아니라, 박은 다시 부하 면서기 가족을 거지와 같이 만들고 전 면장을 옥사시킨 악인(惡人)이므로, 대한광복회를 찬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연금을 낼 리가 없으므로 이 자를 죽여서 그 밖의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해야 한다.”
박용하의 처단은 김한종이 장두환에게 말하자 장두환이 김경태에게 실행을 지시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917년 12월 김경태는 임봉주와 함께 도고 성문영의 집에서 사형선고문에 박용하의 이름을 기입한 후 박용하의 집에 도착하였다. 박용하는 의연금을 내겠으니 시간을 달라고 하였으나 결국 처단되었다.
- 질문1 군자금 모금을 위해 김한종이 맡은 지역은 어디인가요?
- 질문2 김한종의 충청도지부가 모금한 군자금 액수는 얼마인가요?
- 질문3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내지 않는 친일 부호들에 대해 어떤 계획을 세웠나요?
- 질문4 김한종의 명에 의하여 도고면장 박용하가 처단된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5 여러분이 대한광복회 회원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군자금을 모을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6
김한종의 순국과 대한광복회의 수난
일경이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 집 추녀 끝에는 「사형선고문」이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일경은 천안군내 저명한 자산가들 집에 배달된 독립군 자금 협조 요청 통고문들이 1월 20∼22일 사이에 서울 우편국의 소인이 찍힌 것에 주목하였다. 또한 이들 통고문이 자산을 비교적 정밀하게 조사한 후 요구 금액을 배분, 통고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경은 관내 요주의 인물의 동태를 잠복, 감시를 하다 천안에 거주하는 장두환을 이 사건의 용의자로 소환하고, 가택수색 결과 단서를 발견하였다. 이 과정에서 배신자 이종국의 밀고로 조직이 발각되어 대한광복회의 핵심 인물들이 1918년 1월에 거의 체포되었다. 일경은 이 사건을 주도한 김한종 외 51인의 연루자를 밝혀내고 그중 37명은 보안법 위반 및 살인죄, 총포화약취제령 위반 등으로 체포하였다.
이 37명 중 24명이 충청도지부 조직원이었다. 체포된 인물 중에서는 충청도지부 조직원인 김한종, 김경태, 유창순, 장두환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김경태는 경성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유창순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 장두환은 7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장두환은 일제의 악랄한 고문으로 28세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김한종과 박상진은 상고했지만 역시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8월 2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같이 체포되었으나 나중에 풀려난 아산의 정우풍은 다음과 같은 만장(輓章)을 지어 김한종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그대 생각하면 옷에 눈물 마를 날 없어
진실로 봄 산의 외로운 두견새 같구려
옳다 그르다 사람들아 말하지 마라
일월보다 밝게 비춤을 스스로 알 것이로다
- 질문1 대한광복회 조직이 발각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충청도지부 조직원 중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 질문3 김한종이 순국한 장소는 어디인가요?
읽기자료 7
대한광복회 활동의 계승
대한광복회와 충청도 지부는 활동 기반을 거의 상실하였지만, 1918년 이후에도 체포되지 않은 인물과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인물들을 중심으로 명맥이 이어졌다. 청양 출신으로 전라도에서 활동한 한훈을 비롯하여 우재룡, 권영만, 윤병일, 정태복 등은 상하이 임시 정부 및 암살단, 대동단 등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과 함께 1920년대까지 대한광복회의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광복단결사대, 주비단, 유교부식회 등 다른 단체들이 조직되면서 대한광복회의 정신과 투쟁 방식이 계승되었다.
광복단결사대를 결성한 한훈은 1917년에 대한광복회의 지령을 받고 만주로 가서 무장투쟁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던 김좌진의 지원을 받아 무기를 구입하였다. 아울러 김상옥의 암살단과 연계하여 조선 총독 및 고관에 대한 암살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드러나 실패하기도 하였다.
- 질문1 대한광복회의 활동은 언제까지 지속되었나요?
- 질문2 대한광복회의 정신과 투쟁 방식을 계승한 단체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3 한훈의 활약상에 대하여 써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김한종의 공주지방법원 상고기각판결문이다.
- 질문1 일제가 김한종의 상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를 써봅시다.
시각자료 2

사진은 김한종이 대구형무소 수감 중 부친 김재정에게 보낸 편지이다.
- 질문1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까요?
시각자료 3

3) 사진은 김한종의 순국을 보도한 1921년 8월13일 『동아일보』 기사이다.
- 질문1 김한종이 사형을 당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각자료 4

사진은 2007년 개관한 김한종 의사 기념관 모습이다.
- 질문1 기념관 외형이 콘크리트의 감옥 모양으로 설계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