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본문영역

  • 도입
  • 역사적 배경
  • 읽기
  • 시각자료
  • 모둠활동

주요사적지 배움터

학도병 전투지, 포항여자중학교

도입

7번 국도로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다 포항 도심지에 가까워지면 우현, 즉 소티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고개를 넘으면 맞은편 언덕에 두 개의 여자학교가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포항여자중학교와 포항여자고등학교이다. 이 학교들은 1939년 4월 개교한 포항여자고등보통학교를 전신으로 하고 있는데, 포항여자고등보통학교는 해방 후인 1946년 9월 포항여자중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6․25전쟁 당시 낙동강전선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던 1950년 8월, 동해안을 따라 빠르게 남쪽으로 내려와 부산을 함락시키고자 했던 북한군 제12사단이 포항을 공격하면서 이곳 포항여자중학교는 포항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어선이 되었다.
1950년 8월 10일 국군 제3사단 후방지휘소가 설치된 포항여자중학교에는 71명의 학도병이 집결해 있었다. 이들 학도병은 제대로 된 훈련도 보급도 받지 못하였던 반면, 이들이 맞닥뜨려야 하는 적은 최고의 전술과 화력으로 무장한 정규군이었다. 이날 포항여자중학교에는 조국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죽음에 대한 본능적 공포가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11일 날이 밝아오며 적이 포항여자중학교 정문을 향해 진격해 전방 50m 지점까지 도달하자, 학도병들은 일제히 사격을 집중하면서 적을 저지하기 시작하였다. 오후 3시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학도병들은 갖고 있는 실탄과 수류탄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싸웠다. 학도병들이 적의 포항 시내 진출을 저지하는 동안 국군 제3사단 사령부와 기타 지원부대 및 경찰, 그리고 행정기관은 무사히 안전지대로 철수할 수 있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6․25전쟁 초기 인민군은 10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1개 기계화부대 등 총 198,380명의 병력과 150여 대의 T-34탱크, 200여 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국군은 8개 사단 95,000여 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지상군 전투 병력은 67,0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무기도 열악해서 고무 타이어로 된 경장갑차 27대와 포 700문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그야말로 맨주먹으로 싸워야 했다.
당시 대한민국의 병역법을 살펴보면, 병원 모집은 만 17세~만 28세까지 군사교육이나 청년단체에서 훈련을 받은 자를 모집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미군정청이 정한 국군 10만 명 정원제에 묶여서 1950년 3월에는 징병제가 지원제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병역업무를 담당하던 육군본부 병무국과 병사구사령부가 해체되어 병사를 징집할 기구가 없어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정부는 기한 없는 피난길에 올랐다. 국가의 존망이 일각에 놓인 상황에서 젊은 학생들이 앞 다투어 자원입대했다. 서울이 함락되면서 피난길에 오른 서울시 각 대학 학도호국단 간부와 단원 200여 명이 1950년 6월 28일 수원에서 회동하여 전국 100만 학도들에게 국가수호에 동참을 호소했다. 이어서 학도호국단 학생들은 정훈국의 지원을 받아 비상학도대를 발족시키고 3개 소대로 편성하여 활동에 들어갔다. 6월 29일 비상학도대의 학도전투대가 한강 방어선 노량진지구 전투에 참가하면서 학생들의 종군이 시작되었다. 
1950년 7월 1일 대전에서는 학생 700여 명이 의용학도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대구로 내려간 비상학도대와 7월 20일 대구 광복동 동아극장에서 애국학도 총궐기대회를 한 후 통합하여 대한학도의용대로 확대 개편하였다.
대한학도의용대는 대구역 앞에 사무실을 얻어 학도의용군 모집, 피난 학생 규합, 선전대원 파견 등 군 업무에 적극 참여하였다. 대한학도의용대를 통해 학도의용군 2,000여 명이 신병교육대 제25연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700여 명의 학도의용대가 유엔군에 편입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7월 초 부산에서도 350여 명의 학도의용대가 조직되어 시가행진 후 제8교육대에 입소했다. 이때 입소한 학도의용군들은 약식훈련을 받고 8월 중순 제8사단에 편입하여 팔공산 전투에 참가했다가 대부분 희생되었다. 또한, 부산에 본부를 둔 육군 특무부대장 하갑청 장군 지휘 하에 800여 명의 학생들이 특공대를 조직했다.
7월 27일 육군본부 정훈감실 소속으로 1,500여 명 규모의 학도기간대가 창설되었다. 학도기간대는 적 후방에 투입되어 유격전을 전개할 목적으로 밀양에서 창설된 유격부대에 편입되었다.
정부가 8월 중순에 부산으로 천도하자 대한학도의용대도 옮겨갔다. 부산에 있던 학도의용대는 대한학도의용대와 합류하여 국방부 정훈부 소속의 유일한 학도조직체로서 학도의용군의 발판을 만들었다.
이후 학도병들은 안동 전투, 다부동 전투, 안강 전투, 영천 전투, 포항 전투 등 대규모 전투에 투입되어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의성에서 단기교육을 받은 학도병 600여 명은 수도사단 제17연대와 제18연대에 실전 배치되었다. 7월 13일 광주지역에서 학생 300여 명이 출정식을 한 후 제5사단에 입대하였고 7월 중순부터 5차에 걸쳐 700여 명이 제3사단으로 투입되었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읽기

읽기자료 1

한강 방어선이 무너진 후 국군과 유엔군은 지연전을 통해 지역을 양보하면서 시간을 벌어나갔다. 국군이 한강전선에서 물러난 후 다시 수원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후퇴하는 동안에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시작으로 한국에 상륙한 미 제24사단은 경부국도에서 국군과 교대하는 형식으로 그 일대에 투입되었다. 
이 시점에서 작전개념은 어떻게 하든지 적의 진격을 늦추고 시간을 확보해 최대한 빨리 전투력을 회복 또는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국군과 유엔군은 우선 몇 개의 방어선을 선정해 새로 투입된 병력을 배치하고 북한군의 진격 속도를 최대한 더디게 하려고 하였다.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24사단은 평택-안성선을 최초의 저지선으로 선정하고 전초부대로 스미스부대를 오산 북방에 배치했다. 그러나 스미스부대는 북한군의 기세에 눌리며 붕괴되었고 이어서 천안 일대의 미 제24사단 방어진지 또한 단 하루 만에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미 제24사단은 금강선을 다음 저지선으로 선정하였다. 하지만 금강 방어선도 후방을 차단하는 북한군 게릴라와 정면을 짓밟는 전차의 공격으로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금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대전도 7월 20일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대전이 함락되자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은 중․동부전선에 투입했던 미 제25사단을 화령장-상주 일대로 황급히 전환하였다. 그리고 상륙작전부대로 운영하려 했던 미 제1기병사단을 영동-김천선에 투입하여 경부국도를 따라 남하하는 북한군을 막도록 하였다.
7월 5일, 미 제24사단이 작전에 투입된 후부터 국군은 전선의 중·동부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중 수도사단 및 제1·제2사단은 중부전선의 서부지역을 담당하고, 제6·제8사단은 중부전선의 동부지역을 하였으며, 동해안은 제3사단이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국군과 유엔군의 지연작전 결과 7월 25일에는 영동-상주-함창-예천-안동-영덕 남쪽으로 이어지는 전선이 형성되었다.
1950년 7월 말, 낙동강지역에 도달한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에 대한 추격전을 계속하려 하였다. 하지만 당시 북한군의 전투력은 전쟁 시작 초기보다 50~60%로 감소하여 있었다. 또한 병력과 장비의 보충이 여의치 못한데다 유엔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어 모든 부대의 행동은 큰 제한을 받았다. 그러나 북한군은 그때까지 계속해온 분위기를 유지하며 여전히 전장의 주도권을 잃지 않고 있었다.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한 국군과 유엔군은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는 한편 뒤따라오고 있는 북한군의 추격을 격퇴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워커 장군의 공세적 방어 개념에 따라 증원부대의 증원과 보급 수송을 위한 병참선을 확보하고, 우세한 포병과 항공기로 적의 사기를 저하시키면서 적극적인 역습으로 전환하여 장차 반격을 위한 준비에 주력하였다.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을 공격하는 북한군은 가용 부대(움직일 수 있는 부대)의 절반에 해당하는 5개 사단을 대구 북방에 배치했다. 반면 그 지역의 아군 방어 병력은 총 3개 사단(국군 제1·제6사단, 미 제1기병사단)뿐이었으며, 그나마 인접 사단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 상태였다. 적의 주 접근로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낙동리 부근에서 강을 건너는 적을 몇 차례 격퇴했으나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제6사단은 북한군과 공방전을 반복하다가 결국 용기동에서 위천으로 물러났다. 왜관 일대의 미 제1기병사단은 역습을 전개하여 낙동강을 건너려는 적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8월 11일 육군본부는 국군의 방어선을 303고지(왜관 북쪽)-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축소 조정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은 다부동-군위 선에서 대구를 방어하게 되었다. 그리고 8월 16일 미 극동공군사령부는 낙동강 주변에 ‘융단폭격’을 단행하였는데, 이는 대구 정면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미 제8군사령부가 낙동강 기슭에 있는 북한군 주력부대를 제압하기 위해 유엔군사령부에 건의해 시행한 폭격이었다. 융단폭격의 성과는 명백하게 확인되지 않았으나, 북한군 지휘관들에게 대단히 큰 심리적 충격을 준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 질문1 한강 방어선에서 낙동강 방어선에 이르기까지 국군과 유엔군의 주요 방어선은 어떻게 변하였나요?
  • 질문2 북한군은 ‘8월 공세’에서 어디(어느 지역)를 가장 집중적으로 공격했나요?

읽기자료 2

8월 공세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의 동쪽 산악지대마저 공격하였다. 북한군은 제12사단과 5사단을 청송-도평-입암-기계 방면과 영덕-포항을 연결하는 동해안 각각 투입해 경주를 거쳐 최종 목표인 부산으로 진출하려 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8월 5일부터 시작된 북한군의 공격으로 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이 철수하자 북한군 제12사단은 거의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기계를 점령하고 포항으로 접근하였다.
이 무렵 포항에는 제3사단 후방사령부와 보급 및 근무지원부대, 해군 포항경비부와 공군 포항지부대 1개 중대, 그리고 경찰과 청년방위대 등 9,000여 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조직적으로 전투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지휘 체계는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미 제8군사령부는 포항 시가지 남쪽 영일비행장의 방어가 시급한 문제로 대두하자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를 급파하였다. 육군본부도 민기식 대령이 지휘하는 ‘민부대’를 포항지구에 출동시켜 미군과 함께 적을 격퇴하도록 하는 한편, 포항지구 사령부를 급히 편성해 기계로 출동하도록 하였다.
한편 제25연대 제3대대는 8월 9일 포항역에 도착, 포항 방어 임무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대대 병력은 전황이 위급한 안강 전선으로 이동하거나 25연대 예비부대로 재편되었기 때문에 실제 제3대대장 이방우소령이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은 1개 중대에 불과하였다.
제3대대장은 대대 전술지휘소 요원과 제9중대를 지휘해 포항 북서쪽 2㎞ 지점에 있는 소티재, 일명 우현으로 진출하였다. 대대장은 포항 방어를 위한 마지막 보루였던 7번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105고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도록 제9중대에 지시하였다. 그런데 제9중대는 전체 180여 명의 인원 중 장교는 중대장을 포함해 3명에 불과하였고, 대다수가 학도병으로 전투경험이 아예 없거나 보잘것없었다.
이날 밤 적의 정찰대와 소규모 전투를 치른 제9중대는 다음날인 10일 자정 무렵 증강된 1개 중대규모의 적이 고지의 북쪽 기슭에 출현하자 기습적으로 사격을 가해 격퇴하였다. 하지만 물러났던 적은 대오를 갖추고 공격을 단행하였고, 약 2시간에 걸쳐 치열한 교전을 벌인 제9중대는 병력의 50%를 잃었다.
제9중대가 방어진지를 재조정하는 동안 적의 주력은 아군 방어진지 전방에서 105고지를 향해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약 3시간의 처절한 전투로 결국 진영 내 백병전(칼이나 창, 총검 따위와 같은 무기를 가지고 적과 직접 몸으로 맞붙어서 싸우는 전투)까지 전개하였다. 아군의 병력이 소수인 것을 파악한 적은 백병전 직후 포항으로 남하하였다. 전투 직후 아군 방어진지에 남아있는 병력은 대대장과 대대 지휘부를 포함해 20여 명에 불과하였다. 제3대대장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포항 시내를 우회하여 다음날 오후 경주에 도착하였다.
한편 8월 10일 제3사단 후방지휘소가 설치된 포항여자중학교에는 전날 저녁 의성지구로부터 도착해있던 71명의 학도병이 있었다. 이 무렵 적 제12사단의 1개 연대 병력은 소티재의 제25연대 제9중대 방어진지를 돌파하고 포항으로 진출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제3사단 사령부는 단순히 북한군이 포항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정도밖에 알지 못하였다. 
8월 11일 새벽 4시경 소티재 방향에서 예광 신호탄과 함께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는 제25연대 제9중대와 적 제5사단 1개 연대의 교전에 의한 것이었다. 제3사단 후방지휘부는 71명의 학도병에게 사령부 방어 임무를 부여하는 한편 행정요원 60여 명으로 편성된 2개 소대를 학교 뒷산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일부 병력으로 보급품과 기밀문서를 후송하기 시작하였다.
날이 밝아오며 북한군이 포항여자중학교 정문을 향해 진격해 전방 50m지점까지 도달하자, 학도병들은 일제히 사격을 집중하였다. 기습사격을 받은 적은 200여 명의 피해를 보았으나 나머지는 흩어진 후 증원 병력과 함께 공격을 재개하였다. 얼마 후 적은 박격포 공격을 학교 주변에 집중한 후 공격을 계속하였다.
오후 3시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학도병들은 갖고 있는 실탄과 수류탄이 모두 바닥날 때까지 교전을 전개해 50~60명의 적을 사살하였다. 하지만 학도병 또한 47명이 전사하는 인명 손실이 있었다. 이때 후방지휘소 요원들은 이미 철수를 완료하였고, 실탄마저 고갈된 학도병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학도병들이 북한군의 포항 시내 진출을 저지하는 동안 제3사단 사령부와 기타 지원부대 및 경찰, 그리고 행정기관은 무사히 안전지대로 철수할 수 있었다. 
한편 후방지휘소 손창규 소령은 후퇴하는 병력을 형산교에서 수습해 전투중대를 편성한 후 형산강 제방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해군 포항경비부는 경비부 뒤편의 고지에 병력을 배치하고 잔류병으로 철수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로써 무방비상태에 놓인 포항 시가지는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 질문1 포항을 공격한 북한군 부대와 맞서 싸운 국군 부대는 각각 어느 부대(사단)인가요?
  • 질문2 제3사단의 포항 방어 작전 전체에서 보았을 때 포항여자중학교에서 학도병들이 북한군과 맞서 싸워 얻은 가장 큰 성과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다음 편지는 학도병 이우근의 수첩에 적힌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이다. 국군 3사단 소속 학도병 이우근은 1950년 8월 10일 포항여자중학교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 편지는 그의 군복 주머니에서 발견된 것이다.

1950년 목요일 쾌청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 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러 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래해서 입었습니다. 물 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래해서 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내가 빨래해서 입은 내복을 말입니다. 그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서 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되는 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삼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 질문1 적과 전투를 치르면서 이우근 학도병이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무엇일까요?
  • 질문2 서로 죽이려는 적과 맞서면서 이우근 학도병이 정작 무서워 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시각자료

시각자료 1

  • 질문1 이들의 복장과 모습으로 보아 어떤 사람들이라고 짐작되나요?
  • 질문2 이들이 한 복장이나 장비로 보아 이들은 실제 전투에서 주로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요?

시각자료 2

<> 경북 도내 학교별 전사자 수

  • 질문1 <표>에서 전사자 수가 많은 학교를 순서대로 10개 학교를 뽑아 써봅시다.
  • 질문2 이들 학교의 전사자 수는 1950년 8월 낙동강 방어선의 움직임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모둠활동

모둠활동 1

19508월 포항여자중학교에 집결한 학도병들 자신들이 지켜내야만 하는 전선에서 상대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적을 상대하였다. 자신이 이런 일을 당했을 경우, ‘전선을 사수할 것인지아니면 후일을 도모할 것인지두 모둠으로 나누어 서로의 입장을 주장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자신이 포항여자중학교 전투에 참여한 71명의 학도병 중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부모님이나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봅시다.

모둠활동 3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6·25 전쟁 당시 어떠한 전투가 있었는지 알아봅시다. 만약 자신의 지역에 전몰용사를 기념하는 시설물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홍보방법을 찾아보고, 어떻게 알리는 것이 가장 효과가 있을지에 대해서 친구들과 서로 의견을 나눠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천읍 삼방로 95 전화: 041-560-0441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14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