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본문영역

  • 도입
  • 역사적 배경
  • 읽기
  • 시각자료
  • 모둠활동

주요사적지 배움터

이남규 부자 순국지(3대에 걸친 독립 운동)

도입

“폐하께서는 백관을 거느리고 광화문에 나아가 사민을 불러 모아 놓고 애통한 조서를 내리소서. ‘세상에 끝내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끝내 죽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멸망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멸망을 재촉하나니 존립이 오히려 구차한 것이요,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즉음을 재촉하나니 삶이 오히려 구차한 것이다. 너희들은 원수가 항아리 옆에 있는 쥐와 같다 하여 돌을 던지기를 꺼리지 말고, 우리 자신이 엎어진 둥지의 새알과 같다 하여 지레 패할 것이 라고 단념하지 말라. 마음과 힘을 합쳐짐이 증오하는 자들을 무찔러 국모의 수치를 갚고 종사의 모욕을 씻도록 하라. 동맹국들도 윤리 질서를 모르지 않을 터이라…….’라고 하소서”
-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상소 -


삼전도(三田渡)의 탄식
전에는 삼전도에
빗돌이 우뚝했는데
지금은 삼전도에
빗돌이 쓰러져 묻혔네
쓰러진 것이야 통쾌하지 않으랴만
핍박을 받아 한 것이 다만 슬프다네
묵은 한, 새 울분을 씻지 못하고
강물만 밤낮없이 흘러간다네
창 자루를 꼬나들고 선봉이 되어
청나라 땅을 짓밟고 일본 땅을 짓이겼으면
돌아와 한 길짜리 옥돌을 다듬어서
임금의 덕을 새겨 일만 년을 전하리라
- 『수당집』 -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595-136
현재 상태 변형, 현장에 1986년에 건립한 ‘수당이남규선생순절의 땅’이라는 기념탑이 있다

이남규는 1855년에 태어나 1875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 동학 교수, 사헌부 지평, 공조 참의, 안동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900년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인 예산으로 낙향하였으며, 이후 일체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1906년 홍주 의병에 선봉장으로 참여하였으며, 홍주성 전투에서 패한 후 의병장 민종식을 자신의 집에 은신시키면서 홍주 의병의 재기를 도왔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곽한일, 박윤식 등과 함께 공주감옥에서 고문을 받았다.
일제는 그를 일단 풀어주었으나 1907년 9월 26일 다시 기마대를 파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일본 기마대는 압송 도중 아산의 평촌 냇가에서 그를 살해하였고 이를 막던 아들 이충구와 하인 김응길마저 함께 살해하였다. 그가 살해된 사실은 민족지인 『대한매일신보』(1907년 10월 2일자)에 기사화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86년에는 이남규 부자 순절 당시 유일한 생존자였던 가수복의 증언 내용을 바탕으로 위치를 확인하여 현장에 ‘수당이남규선생순절의 땅’이라는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읽기

읽기자료 1

일본의 경복궁 점령 반대 상소

이남규는 승정원 동부승지로 재직할 때인 1894년 7월에 일본군의 경복궁 난입을 겪었다. 그는 상소를 올려 일본과 전쟁을 벌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가 외직인 영홍 군수로 밀려난 것도 일본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척화주전론 때문으로 추측되지만, 그는 여전히 일본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일본과의 전쟁을 주장하였다. 더구나 영흥에는 일본영사관이 있고 일본인 주거지가 있는 원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신변의 위험도 마다하지 않은 일본 절교론이었고 대일 전쟁론이었다고 할 것이다.

  • 질문1 이남규는 일본의 경복궁 점령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였나요?
  • 질문2 이남규의 일본의 경복궁 점령에 반대하는 상소에서 어떤 주장을 하였나요?

읽기자료 2

이남규의 대외 인식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대한 유생들의 격문이나 상소문에서는 일본과의 일전을 불사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유생들은 대일전보다는 갑오개혁을 주도한 김홍집, 유길준 등의 개화파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를 더 높였다. 그리고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와 황제의 칭제에 대하여 거의 모두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남규는 칭제에 적극 나섰다. 아울러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위하여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인 것을 잘못으로 지적하였다. 이는 우리나라가 독립 국가의 주권을 확립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동학과 서학을 함께 배척했지만 일반 유생처럼 중화 의식에 몰입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동학농민운동의 원인은 관리의 탐학과 민생고에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이남규가 을미사변 전후에 보여준 주장과 행동은 개화파와 달랐던 것은 물론이지만, 일반 유생들과도 달랐다.
그의 독립 정신은 일반 유림들처럼 중화 의식에 기초한 배청, 배일 논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유교적 국가론에 기초하고 있었다.

  • 질문1 이남규는 동학농민운동의 원인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나요?
  • 질문2 이남규의 독립정신의 기초는 어떤 사상을 바탕으로 하나요?

읽기자료 3

을미의병과 안동관찰사의 사임

이남규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전국에서 의병 항쟁이 일어나던 1896년 초에 안동부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전임 관찰사 김석중이 단발령에 앞장서다가 문경 새재에서 이강계 의병에게 잡혀 처단되어 공석 중에 있었다. 9개 의진이 연합하여 상주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략할 연합 작전을 세워 1896년 3월에 예천으로 집결하고 있을 즈음 관찰사의 임명을 받고 이남규가 안동으로 간 것이었다.
안동부 내의 의병들은 이남규 관찰사 부임의 수용 여부를 논의하여 대부분 수용하자는 의견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각 지역의 의병 대표가 모여 관찰사 부임 수용 여부를 논의한 것은 드문 사례이며, 현직 관찰사가 의병진과 타협한 경우도 안동부의 경우에만 있었다.
안동․제천 연합 의병이 태봉으로 진격한 것은 3월 26일과 29일이었다. 태봉 전투에서 의병이 대패하면서 상주․예천․영주․안동 일대가 참혹하게 파괴되었고 4월 2일에는 일본군이 안동으로 난입하여 시가지를 불태웠다.
15개 군을 거느린 안동부는 거의 모든 군현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안동의 의병은 관찰사와 예천․의성․영덕 군수를 처단할 정도로 강력하였다. 행정의 공백 상태가 된 안동에 관찰사로 내려간 이남규는 의병 지도자를 만나 협의하고 민심의 안정을 위해 의병을 변론하고 일본군의 잔학상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리고 사임하였다.

“4월 1일에 순검으로 도피했던 자들과 일본 군인이 갑자기 본부에 쳐들어와 관청 건물을 부수고 가옥에 불을 질러 민호 수천 채가 한둘도 남지 않았습니다. 군졸들은 산중으로 달아나고 백성은 구렁에 빠진 듯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그 참담한 광경을 참아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신(이남규)이 속히 부임하여 이들을 불러 모아 안정을 시키고 싶으나 어쩔 방도가 없습니다.”

이남규의 항의성 상소로 안동부의 방화문제는 한․일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하였다.

  • 질문1 안동부 내의 의병들이 이남규 관찰사 부임을 수용하자고 의견을 모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 질문2 이남규의 상소에 나타난 일본군의 잔학상을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4

이남규와 홍주 의병

이남규는 고향에서 을사늑약을 맞이하였다. 을사늑약에 반대한 의병이 홍주에서도 일어났다. 홍주 의병은 홍주를 비롯하여 홍산․남포․비인․서천․보령․정산․청양․예산․결성․서산․당진 등의 의병을 망라한 충청남도의 연합 의병이었다. 을미의병 때 홍주 관찰사 이승우의 변절로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김복한, 안병찬, 박창로, 이용규 등 내포 지역의 이름 난 학자들이 을미사변 후 청양 정산에 내려와 있던 민종식을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는 등 용의주도하게 추진되었다.
1906년 3월 16일 예산 광시에 집결한 의병 500명이 홍주성으로 쳐들어갔으나, 공격에 실패하고 방향을 돌려 공주로 가다가 관군의 매복에 걸려서 뿔뿔이 흩어졌다. 흩어졌던 의병들은 전라도 여산에 모여서 전열을 정비한 후, 5월 11일 부여 홍산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관군을 격파하면서 서천, 남포, 보령 등 서해안 지방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1천명이 넘는 큰 부대가 되었다. 결성을 거쳐 5월 19일 홍주성 공격에 성공하여 의병이 홍주성에 입성할 때는 이남규가 선봉장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홍주성을 점령한 의병은 소규모로 공격해 오는 관군과 일본군을 격퇴하고, 25일부터는 대한제국군 헌병 중대장으로 있다가 퇴임한 이세영을 중심으로 전투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때에는 이남규처럼 실전 경험이 없는 인사는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5월 31일 새벽 서울에서 파견된 일본군 정예 병력이 매국 단체 일진회의 도움을 받으며 홍주성을 공격하자 홍주 의병은 많은 전사자와 포로를 남긴 채 흩어졌다.
이남규는 홍주 의병의 봉기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의병의 모집과 군량 확보 등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일본군에게 패한 후에 민종식 등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였으며, 민종식의 처남 이용규와 더불어 홍주 의병의 재기를 도모했던 것도 이남규의 집이었다.

  • 질문1 홍주 의병의 특징을 시기, 의병장, 참여한 주요 인물들, 점령했던 곳 등으로 정리해 봅시다.
  • 질문2 홍주 의병에서 이남규가 맡은 직책과 주된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읽기자료 5

홍주 의병의 재봉기 추진

이남규는 홍주 의병의 재기를 도모하였다. 그는 홍주 의진의 대장 민종식을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본가에서 아산 도고면 감밭으로 은신시키고, 이용규에게 의병을 다시 모을 것을 부탁했다. 이남규는 먼저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고 부여·연산·논산 지방에서 의병을 보충하였다. 그러나 7월에 연산 부흥리 전투에서 이용규의 의병이 패배하여 병력을 잃은 뒤에, 10월부터는 예산에서 병력을 모았다. 의병들은 이남규의 본가에 모여서 11월 20일에는 예산읍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일진회 밀정들에게 뒤를 밟히고 말았다.
11월 17일 일본군과 일진회의 습격을 받아 이남규는 그의 아들 이충구, 함께 모의하던 곽한일, 박윤식, 이석영 등과 체포되어 공주감옥으로 끌려갔다. 이남규 부자는 공주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1907년 초에 풀려났지만 민종식, 이용규, 김덕진, 성우영 등도 모두 잡혀 홍주 의병의 재봉기 계획은 차단되고 말았다.

  • 질문1 이남규는 홍주 의병의 재봉기를 위해 어떤 활동을 했나요?
  • 질문2 이남규의 본가에서 구상한 예산읍 공격 계획은 누구에게 발각되었나요?

읽기자료 6

이남규의 최후

일제는 1907년 7월 홍주 의병의 재봉기를 계획했던 민종식, 이용규, 박윤식, 곽한일, 정재호, 황영, 김덕진, 박두표 등에 대한 재판을 끝내고 그해 9월 26일 기마대 1백여 명을 동원하여 이남규 본가를 습격하였다. 이것은 이남규를 없앰으로써 홍주 의병의 재봉기 계획의 뿌리를 뽑자는 일본 제국주의의 음모였다.
이에 이남규는 “나는 사대부이다. 죽을지언정 욕을 당하여 너희에게 포박될 수 있겠는가.”하고 가마를 타고 가려고 하였다. 그의 두 아들이 쫓아 나오고자 하였으나 “너희가 나를 따라 죽는다면 집안은 어떻게 되겠느냐.”하며 만류하였다. 그래도 큰 아들 이충구는 그의 뒤를 쫓았다. 온양(현 아산시 송악면) 평촌 냇가에 이르러 일본군이 이남규에게 일본에 굴복하고 순응할 것을 강요하자, 이남규는 단호하게 거부하며 일본군을 꾸짖었다. 그러자 일본군은 계획한 대로 칼로 이남규를 치려하였고, 아들 이충구가 막았으나 결국 둘 다 일본군의 칼날 아래 쓰러졌고, 가마꾼 김응길과 하인 가수복도 주인을 구하려고 하다가 일본군의 칼을 맞았다. 김응길은 죽고, 가수복은 큰 부상을 입고 쓰러졌으나 가까스로 살아나 탈출하여 이 잔인무도한 일본군의 만행과 이남규 부자의 순국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 질문1 일제 기병대가 1907년 9월 이남규 본가를 습격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이남규와 아들 이충구가 일본군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3 이남규 부자와 함께 살해당한 가마꾼의 이름과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린 하인의 이름을 써 봅시다.

읽기자료 7

독립 운동에 투신한 손자 이승복

이승복은 이남규의 손자로 1913〜1919년간 노령(연해주)과 북만주에서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 이상설 등과 교류하며 독립 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1920년에는 박은식과 함께 『청구신문』을 발간하고 신문 활자를 노령으로 운반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간 감옥 생활을 하였다. 1920년 7월 블라디보스크에서 박용만, 이민복, 조성환 등이 조직한 대한국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국내 연통제의 조직 결성을 위해 힘썼다.
1923년에는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파 의거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홍명희 등과 함께 사상단체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제휴를 주장하여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 결성의 계기를 마련한 정우회의 집행위원회에서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1927년 1월 신간회 결성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2월 창립대회에서 35명의 간사 중 일원으로 선임되어 선전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11월에는 신간회 예산 지회의 조직을 후원하였다.
또한 1928년 6월 조선교육협회의 정기총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1927〜1931년 동아일보 이사 겸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언론을 통한 민족운동에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일제가 한국인과 중국인을 이간질시키려고 조작한 만보산 사건의 진실을 보도하였다는 이유로 안재홍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6년경에는 중국 난징이나 상하이 등지의 독립 운동 단체나 중국 군관 학교에 입교를 원하는 국내의 청년들을 그곳의 지도자들에게 소개시켜주며 독립투사 양성에 힘썼다.

  • 질문1 이승복은 신간회의 조직에 어떤 역할을 하였나요?
  • 질문2 이승복이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이승복은 1920년에 연해주의 어떤 도시에서 독립 운동에 참여했나요?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홍주성 수복 기록화이다.

  • 질문1 이남규는 이 전투 이후 어떤 역할을 하였나요?

시각자료 2

사진은 1907년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이남규 부자 순절 관련기사이다.

  • 질문1 위 기사가 어떤 내용일지 끝부분의 “부자(父子)가 일시(一時)에 살해(殺害)를 당(當)허엿다고”라는 내용을 참고하여 정리해 봅시다.

시각자료 3

사진은 ‘수당 이남규 순절의 땅’ 기념비와 이남규 부자 순절지 모습이다.

  • 질문1 이남규 부자가 온양(현 아산시 송악면) 평촌 냇가에서 순절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이곳에서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써 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모둠활동

모둠활동 1
이남규의 입장에서 일본군의 의병 학살을 규탄하는 상소문을 작성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이남규 부자와 손자 이승복 등 3대에 걸친 애국애족의 일대기를 주제로 하여 역사 신문을 만들어 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31232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1  전화: 041-560-0405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21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