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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한은 대대로 녹(祿)을 먹은 집안으로 남달리 나라에 은혜를 입었사오니 죽음을 맹서하고 나라에 보답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본래부터 축적된 것입니다. 1894년 6월 일제의 경복궁 점령 이후 시골에 엎드려 그대로 죽으려고 했던 것이온데 1895년 8월에 을미사변을 보고서는 너무도 원통하고 더 살고 싶지 않은데다 다시 또 11월 15일 단발령이 공포됐으니 이것이 모두 흉역(凶逆)의 행위가 아닙니까. 임금님의 욕되심이 극도에 달하자 신자의 충정이 더욱 격하여 마침내 시국 형세와 자기 역량을 계산하지 않고 다만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어 보겠다는 목표 하에 의거를 제창했던 것이온데. 모사가 치밀하지 못하여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경솔히 거사했다는 이유로써 죄를 주신다면 실로 달게 받겠으며, 본시 의리를 망각하고 당을 모아 변을 일으키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 1896년 2월 고등재판소에서 김복한 공술 -
초연히 홀로 앉아 누구와 말을 할까
담벽만 보노라니 남산을 못보겠네
대쪽 같은 절개로 나라 위하는 사람 적고
파랗게 된 추한 얼굴로 나라 그르치는 놈만 많구나
- 『지산집』 -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운곡리 126 [도로명 주소: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운곡길 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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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없어짐 / 당시의 집은 헐리고 다시 집을 지었으나 현재 거주자 없이 폐가로 방치되어 있다. |
김복한은 1860년 오늘날 충남 홍성군 갈산면에서 부친 김봉진과 연안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복한의 선대가 홍성에 정착한 것은 11대조 김광현 때부터이다. 김광현은 홍주 목사를 거쳐 이조 참판을 역임하고 홍성에 내려와 살면서 그의 후손들이 홍성에 살게 되었다.
김복한은 1892년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지평, 우부승지 등의 관직에 있으면서 고종을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그는 1894년 일제의 경복궁 점령으로 조정이 일제의 수중에 들어가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다음해인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일어나자 그는 홍성 지역의 사람을 모아 홍주 의병을 일으켜 반침략 반개화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1896년 2월 유배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다행히 고종의 특지로 석방되었고 귀향하여 그 해 4월 갈산면에서 보령시의 청라로 이사하여 후학 지도에 전념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설과 함께 병든 몸을 이끌고 서울에 올라와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1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김복한은 민종식의 홍주의진과 연루되었다하여 1906년 10월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다음해 1월 풀려났다. 1907년 10월 또다시 홍주의진의 인물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져 김복한은 보령에서 체포되어 공주부로 압송되었다가 갖은 고문 끝에 경무관 황종복의 노력으로 죽음을 면하고 석방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 서명하였으며 서명자 137명이 모두 일경에 체포되었고, 그는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결국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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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홍주 의병 주도
김복한은 1892년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지평, 우부승지 등의 관직에 있으면서 고종을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정통 성리학자였던 그는 개화파의 개화 정책을 반대하였고 일제가 경복궁을 점령하자 낙향하여 두문불출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를 접하고 반개화 반침략의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단발령 공포 직후 홍주지역 유생들과 잦은 접촉을 하였다. 중앙 정계에서 요직을 지냈던 김복한의 의병 봉기는 지방 유생들을 크게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우선 이설에게 의병 봉기 동참을 요청하였다. 또한 관찰사 이승우를 찾아가 거병을 권하였으나 이승우는 역량과 인재의 부족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1895년 11월 27일에는 홍주향교 전교인 안병찬과 만나 의병 봉기를 결의하였다. 또 이상린과 이봉학, 청양군수 정인희에게도 연락하여 의병 참여를 요청하였다. 김복한의 거의에서 안병찬을 중심으로 하는 홍주 지역 유생들과의 연합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안병찬은 1894년부터 의병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을미사변 직후부터는 군사모집과 무기수집 등의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김복한을 만난 다음 날 안병찬이 청양군의 화성에서 향회를 열어 모집한 180여명의 의병이 홍주의병의 중심이 되었다.
김복한은 12월 1일 저녁 이봉학․이세영․김정하 등이 이끄는 정산과 청양의 의병 수백 명을 나그네나 장사꾼으로 위장하고 홍주성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였다. 12월 2일 박창로, 청양의 박창서가 수백 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각각 홍주부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의병의 반대파인 홍주부 참서관 함인학과 경무사 강호선을 동문 밖으로 끌어내어 구타하였다. 관찰사 이승우는 이들을 살려줄 것을 호소하면서도 의병에 동참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김복한은 끝까지 이승우를 설득하여 의병에 참여시켰다.
12월 3일에 홍주부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은 의병 총수에 추대되었다. 김복한은 ‘존화복수(尊華復讎)’라고 쓴 기를 세우고 홍주부 관할에 통문을 띄워 집마다 한 명씩 의병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관찰사 이승우도 관내 관군을 홍주에 집결하여 의병에 참가하도록 명령하였다. 김복한이 관찰사를 의병에 끌어들이면서 홍주의병은 큰 위세를 떨치게 되었으며 조정과 일제에게 큰 위협을 주었다.
김복한은 창의소를 지휘하면서 각지에 책임자를 파견하여 의병을 모집하였고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산성을 수리하게 하였다. 한편, 청양군수 정인희는 청양읍내에 창의소를 별도로 설치하였다. 그는 관찰사에게 포군 500명과 화포 1천 자루를 요청하는 등 독자적인 의병을 조직하고자 하였다.
- 질문1 김복한이 의병투쟁을 전개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은 무엇인가요?
- 질문2 홍주의병의 중심은 누가 조직한 의병부대였나요?
- 질문3 김복한이 홍주의병에서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홍주 의병의 실패와 후진 양성
창의소를 설치한 뒤 하루만인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면서 이승우와의 연대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이승우는 김복한의 권유와 의병들의 위협에 마지못해 참여는 하였지만 실패 뒤에 미칠 화(禍)를 두려워하였다. 이승우는 의병 참여에 대한 주병의 반대와 신우균이 이끄는 중앙의 친위대 1개 중대가 홍주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김복한과 이설, 안병찬 등 총 23명을 구금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서산군수 성하영의 군사가 해미에서, 남양 부사 남백희의 수군이 서해상에서, 대흥군수 이창세의 군사가 홍주군 경내에서, 전 승지 김병억의 군사가 홍주 서문 밖에서 모두 회군하고 말았다. 오직 청양군수 정인희만 공주를 공격하려고 진격 중 정산 철마정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김복한은 12월 7일 신우균의 취조를 받고 홍주부에 수감되었으며, 12월 30일 서울로 압송 되던 중 1896년 1월 1일 신례원에서 다시 돌아와 홍주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것은 이승우가 아관파천 직후에 김홍집 등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압송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복한은 이설, 홍건, 안병찬, 송병직, 이상린(이상 홍주 6의사)등과 함께 보석되었으며, 나머지 17명도 모두 석방되었다.
하지만 김복한은 정국이 뒤바뀌면서 이설, 안병찬 등과 함께 1896년 1월 17일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구금되었고, 이때 각기병을 얻어 평생 보행이 어렵게 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김복한은 관리를 협박한 죄로 10년 유배형을 선고받았으나, 그날 자정 고종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귀향한 뒤에는 그 해 4월 길현(현, 충남 보령시 청라면)으로 이사하여 후학 지도에 전념하였다. 1898년 이후에는 후학 지도에 힘쓰는 한편 향음례를 실시하고 향약을 베푸는 등 주자학의 교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 질문1 1895년에 일어난 홍주 의병이 실패했던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2 홍주 의병의 실패로 김복한이 받은 벌(罰)은 무엇일까요?
- 질문3 김복한이 감옥에서 풀려난 뒤 어떤 일을 했는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3
을사늑약 반대 상소
김복한은 1904년 일제가 이른바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송병선을 비롯한 인근의 유림들과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는 송병선에게 글을 보내어 “요즈음 저 원수들이 우리의 산천을 저들 것으로 만들려는 것은 우리의 땅을 모두 저들의 것으로 하려는 뜻”이라고 하면서 민종식, 이설 등과 함께 의논하고자 하니 참석하여 좌장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김복한은 1905년에 부인 이씨를 잃은 직후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설에게 연명소를 올릴 것을 상의하였다. 이에 이설이 국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자고 하여 김복한은 함께 상소를 올렸다. 상소에서 김복한은 “… 임금께서는 먼저 나라를 팔아넘긴 을사 5적 놈들을 쾌히 처벌하시어 역적의 머리를 거리에 매단 뒤에 특별히 애통하신 교지를 내리시고 사방의 충성스러운 선비들을 불러 들여서 원수인 왜놈들을 물리치고 왕실의 부흥을 도모하소서.”라고 하여, 을사 5적을 처벌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 왕실을 회복할 것을 요청하였다. 아울러 그는 일본과 맺은 조약의 파기를 거듭 주장하였으며, 이로써 국토가 일본에 떨어져 나라가 멸망하게 되었다면서 최익현, 송병선, 전우, 곽종석과 같은 훌륭한 선비들에게 나라를 다스릴 방책을 얻을 것을 건의하였다.
김복한은 상소를 올린 지 이틀만인 12월 29일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12월 그믐날 풀려나 홍주로 내려간 뒤 보행조차 불편한 몸이었으나 안병찬 등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고무하는 등 끝까지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 질문1 김복한이 이설과 함께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올린 상소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요?
- 질문2 김복한이 을사늑약 상소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뒤 어떤 일을 했는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4
홍주 의병의 재봉기
안병찬을 중심으로 한 홍주지역 인사들은 민종식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1906년 3월 청양의 광수 장터에서 의병의 기치를 올렸다. 이들은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하고 기세를 떨쳤으나, 5월 31일 새벽 일본군의 기습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고 성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의병장 민종식은 이남규의 도움으로 재기를 꾀하다가 체포되었으며, 김복한도 이때 민종식과 더불어 의병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공주감옥에 구금된 그는 11월에 다시 서울의 경무청으로 이송되어 구금되었다.
김복한은 그 해 11월말 풀려났으나,1907년 10월 13일 다시 체포되어 보령군의 관노청에 구금되었다. 죄명은 민심 선동죄였다. 더욱이 이들에 의해 공주감옥으로 이송하는 도중 보조원 2인이 의병의 소재지를 대라며 구타하고 총을 쏘며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다행히 순검 정원조가 총대를 밀쳐서 탄환이 빗나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10월 22일 풀려난 그는 12월에 결성면 산수동으로 이거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일로 인해 중풍에 걸려 밥을 먹고 책을 넘기는 일도 어렵게 되었다.
- 질문1 홍주 의병이 재봉기 할 때에 김복한이 체포되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김복한이 1907년 10월 13일 다시 체포되었을 때의 죄명은 무엇인가요?
- 질문3 계속되는 체포와 구금을 당하면서도 김복한은 어떤 태도로 대응하였나요?
읽기자료 5
파리 장서 운동 주도
1910년 8월 국권피탈의 소식에 김복한은 통곡하며 스스로 죄인으로 자처하였다. 음식을 물리치고 모든 집안일은 큰아들에게 맡겼으며 손님도 접견하지 않고 자정(自靖)의 생활로 들어갔다. 건강 상태도 더욱 악화되었다.
1919년 1월 고종의 죽음에 김복한은 상복을 입고 애도하였다. 그 해 3월에는 거족적인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홍주에서도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김복한은 건강 문제로 거국적인 만세 시위에는 직접 참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고 파리에서 1차 대전 승전국들이 강화회의를 개최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과거 의병운동의 동지들과 연명하여 강화 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글을 보내는 장서운동을 계획하였다. 『지산집』을 통하여 확인되는 김복한의 장서에는, 일제가 신의를 버리고 고종과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일과 그 뒤 일제에 의해 자행된 잔악한 침략상을 성토하면서 전 세계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김복한은 임한주와 안병찬 등 홍주 지역 일대 17명의 선비들의 서명을 받은 뒤 제자들을 서울로 보내 파리 강화 회의에 장서를 보내도록 하였다.
이때 김창숙을 비롯한 영남지역 유생들도 곽종석을 중심으로 파리장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에 유림 대표가 빠진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유림들은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열강으로 하여금 우리의 독립을 인정케 하자고 하였다. 이들이 전국의 유림들과 연락을 취하던 중에 김복한의 제자인 임경호를 만나면서 호서와 영남 지역의 장서운동이 통합되었다.
김창숙은 서명을 받은 장서를 가지고 상하이로 가서 파리에 체류 중이던 김규식에게 장서를 우송하여 파리 강화 회의의 대표들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또한 중국의 각 정계 요인과 각국의 외교관 및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하였다. 그러나 이 장서운동은 송준필의 자제인 송회근이 4월초 성주 시장에서 3·1 운동을 주동하여 체포됨으로써 일경(日警)에 탐지되었으며, 이어서 곽종석 등이 체포되었다.
김복한도 그 해 8월 공주감옥에 구속되었다. 그는 구속되기 전 인 7월 대구감옥에서 궐석 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에서 같이 재판을 받은 이들 중에서 가장 형량이 많은 집행 유예 없는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7월 31일 형이 확정되었다. 결국 김복한은 8월 6일에 체포되어 12월 12일까지 4개월여 동안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김복한은 파리 장서 사건으로 주위 유림으로부터 그의 척사론에 대한 문제 제기를 받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척사론을 견지하고 서양을 거부하였으나, 서양 문명의 우위를 인식하고 서양의 힘을 빌려서라도 독립을 쟁취하려는 유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질문1 김복한은 1910년 국권피탈을 당하여 어떤 행동을 하였나요?
- 질문2 김복한이 파리장서 동을 벌인 이유와 목적을 써봅시다.
- 질문3 호서와 영남지역의 장서운동이 통합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4 파리 장서 운동은 어떻게 일제에게 발각되었을까요?
- 질문5 파리장서운동으로 알 수 있는 김복한의 대외인식에 대하여 말해봅시다.
읽기자료 6
항일 민족의식 고취와 후학들의 활동
파리장서운동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출옥한 뒤 김복한은 홍성의 서부면 이호리에 인지서재를 세우고 후학을 지도하였다. 그는 유생들의 의병 격문과 상소문 등을 중심으로 교재를 편집하여 후학들에게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한편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유생들과 함께 1920년 5월 인도공의소(人道公議所)를 설립하여 유교의 부흥을 꾀하고자 하였다. 인도공의소의 활동은 미미했으나 김복한이 죽은 지 3년 뒤에 유교부식회(儒敎扶植會)가 설립되어 활동이 이어졌다. 유교부식회는 인도공의소의 설립자들이 중심이 되어 유교 사상을 부흥시키고 시대에 적합한 충의심을 높여 새로운 윤리관을 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1927년 홍성에서 조직되었다. 유교부식회는 정기 강연회, 『인도』지 간행, 태안, 청양, 공주 등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여 유교 사상의 보급과 충의 정신의 고양에 힘썼다.
1928년 5월 창간된 『인도』지는 월간지로 발행되어 많을 때는 5천부씩 발간되었으며 전국 각지의 지회를 중심으로 배포되었다. 그러나 창간호부터 일본 경찰의 검열로 원고의 일부가 삭제당하는 등 탄압을 받다가 재정 문제로 1930년 12월호(통권 28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
김복한의 장자인 김은동은 인도사의 총무로 『인도』지의 간행 업무를 총괄하는 한편, 신간회 활동에도 참여하는 등 홍성 지역에서 민족 운동가로서 큰 활약을 하였다. 『인도』지 논설위원으로는 김복한의 둘째 아들인 김노동이 활동하였고, 셋째 김명동은 한학을 공부한 뒤 주로 정치 활동에 주력하였다. 신간회 창립 발기인이기도 한 그는 광복 후 공주에서 제헌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윤봉길은 유교부식회의 회원으로서 김복한의 수제자인 전용욱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용욱은 파리장서에 서명한 전양진의 아들로 김복한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윤봉길은 유교부식회에서 한학을 공부하면서 민족의식을 깨우쳤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30년 3월 고향을 떠나 1932년 4월 상하이로 건너갔고 홍커우공원 거사를 감행할 수 있었다.
청산리 대첩을 이끈 홍성 출신의 김좌진은 김복한의 종숙으로 항렬은 높지만 그 역시 김복한의 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 질문1 김복한이 인도공의소를 설립 목적을 써봅시다.
- 질문2 유교부식회의 주요 활동 내용은 무엇인지 말해봅시다.
- 질문3 김복한의 3명의 아들은 각기 어떤 활동을 했는지 말해봅시다.
- 질문4 김복한과 관련이 깊은 독립운동가 2명의 이름을 써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1947년에 간행된 김복한의 문집 『지산집』의 표지이다.
- 질문1 『지산집』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상상하여 말해봅시다.
시각자료 2

사진은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이다.
- 질문1 김복한을 비롯한 유림들이 파리장서에서 주장한 내용은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3

사진은 1919년 파리장서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의 김복한의 모습이다.
- 질문1 김복한은 파리장서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뒤 어떤 활동을 하였나요?

모둠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