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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인물’ 하면 많은 이들은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을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김구를 도와 평생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키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들이 계시다. 그 가운데 한 분이 일파 엄항섭(一波 嚴恒燮)이시다.
엄항섭은 임시정부의 선전부장, 김구의 보좌관으로 김구와 함께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온몸을 바치신 분이다. 특히 엄항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수꾼이자 지킴이’로서 임시정부가 어려울 때는 몸소 돈을 벌어 임시정부 사람들을 도와주었으며, 한 평생을 임시정부를 지키며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혁명은 무자비라 하였지만 나는 진정한 혁명은 눈물에 있다 한다. 그것은 눈물에는 참사랑이 있는 까닭이다. 말에는 거짓이 있지만, 눈물에는 거짓이 없다. 과거 우국지사들의 쓰라린 눈물이며, 예수님의 뜨거운 눈물을 분석한다면 ‘사랑’ 이외는 아무 것도 없으리라.
- 성결교회 전국수양대회 강연(1946. 4.)에서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은 가셨는데 무슨 말씀하오리까. 우리들은 다만 통곡할 뿐입니다. … 선생님! 선생님!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저녁마다 듣자왔는데, 오늘 저녁부터는 뉘게 가서 이 말씀을 듣자오리까. 선생님! 선생님!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을 아침마다 뵈었는데, 내일 아침부터는 어데 가서 그 얼굴을 뵈오리까. 선생님은 가신대도 우리는 선생님을 붙들고 보내고 싶지 아니합니다.
- 김구 선생 추모사 중에서(1949. 6.)
위 첫 번째 글은 해방 후 귀국한 엄항섭이 교회에서 ‘사랑의 눈물’이란 제목으로 강연하던 내용이고, 아래 추모사는 평생 독립운동을 위해 몸바쳐온 김구가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허망하게 죽게 되자 김구를 모시던 엄항섭이 그를 추모하며 쓴 글이다. 하늘처럼 모시던 김구의 죽음은 엄항섭에게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무너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김구와 함께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던 엄항섭의 고향은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이다. 경기도 이천이나 곤지암에서 주록리계곡(또는 금사저수지) 방향(양평이나 여주 금사에서 동막골저수지 방향)로 향하다 고개 정상에서 노루목길로 접어들면 몇몇 가구들이 모여 있는 노루목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 노루목에 엄항섭이 태어난 곳이 있다. 현재 이곳은 집은 없어지고 땅만 밭으로 덩그러니 남아 있어 일반인들이 이곳이 ‘독립운동가 엄항섭의 생가 터’라고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관리는커녕 이곳을 안내하는 표지판 하나 없어 독립운동가가 태어난 곳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울 정도다.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90 [도로명 주소: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노루목길 3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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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없어짐 / 현재 밭이 되어 있다. 이곳이 엄항섭 생가 터라는 사실을 알기 어려우므로 이곳에 안내 표지판이라도 설치하면 좋을 것이다. |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난 후,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대항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어난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국내외에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어졌다. 일제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임시정부는 국내외에 7개나 세워졌다. 3월 21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가 세워졌으며, 1919년 4월 10일과 11일 상하이[桑海;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각 지역 교포 1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이를 4월 13일 대외에 선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였으며,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을 채택하였다. 또 임시정부의 행정부로 국무원(國務院)을 두었으며, 행정을 총괄하는 우두머리인 국무총리에 이승만(李承晩)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4월 23일 서울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세워져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李承晩)을 집정관 총재로 선출하였다.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국내외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혼선이 빚어졌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 때문에 정보 교환도 쉽지 않았다. 특히 워싱턴에 머물고 있는 이승만 집정관 총재와는 업무 연락조차 여의치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외를 통할해 효과적으로 항일투쟁을 지휘하기 위해서는 각지의 임시정부를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9월 6일 한성 임시정부와 노령 임시정부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통합되어 9월 11일 통합 정부가 선포되었으며, 제1차 개헌을 거쳐 9월 15일 대통령 중심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그리고 1926년 9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원제를 채택하였으며, 이후 의원내각제가 정부 형태의 주류를 이루며 이어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제국과는 시간적 연속성이 없고 주체세력과 이념이 달랐으므로 망명정부가 될 수 없었고, 통치권을 행사할 대상이 없었으므로 독립국가 정부와도 성격이 달랐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민족의 의지와 이념적 바탕 위에 독립운동의 통합기구로서 조직된 임시정부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8․15광복까지 상하이(1919), 항저우(1932), 전장(1935), 창사(1937), 광저우(1938), 류저우(1938), 치장(1939), 충칭(1940) 등지로 옮겨가며 줄기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항일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 단체 지원, 광복군 창설 등의 군사 활동으로 이루어졌는데, 초기의 독립전쟁은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 단체에 맡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인 연통부와 교통국 등 비밀조직의 운영과 외교활동에 전념하였다.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본보기로는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들 수 있는데,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도쿄의거는 실패하였으나,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하이의거는 일본군 사령관 등 20여 명을 살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 결과 한국독립에 대한 여론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다. 대신 임시정부는 일제의 보복을 피해 여러 곳으로 이동,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조국 광복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군사활동으로는 1920년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 비행사 양성소, 간호학교 등을 세워 군사를 양성하는 한편, 중국 군관학교에 군인을 파견하여 교육시키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하였다. 특히 임시정부가 충칭에 있을 때(1940∼1945)에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는데, 한국광복군은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 사이판, 필리핀 등지에 군대를 파견하여 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얻기도 하였는데, 이를 통해 1945년 임시정부과 한국광복군은 국내진입작전[냅코작전; NAPKO Project]의 하나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갑작스럽게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8월 21일 실행하려던 국내진입작전은 펼쳐보지도 못하고 한스러운 8‧15광복을 맞았다.
8‧15해방은 일제가 우리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었던 만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측으로부터 정식 정부로서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귀국마저 뜻대로 하지 못하고, 결국 1945년 11월 23일 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조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온 조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대립하고, 마침내 통일된 정부가 세워지지 못하고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으며, 심지어 같은 민족끼리 전쟁까지 치러야 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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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킴이, 엄항섭
엄항섭(嚴恒燮, 1898~1962)은 1898년 음력 9월 1일(양력 10월 15일), 승지를 지낸 엄주완(嚴柱完)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은 경기도 여주군(현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이다.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국외용의조선인명부」에 따르면, 엄항섭의 출생지는 경기도 시흥군 서면 안양리로 기록되어 있지만, 『여주군사』(2005년)와 『내고장 경기도의 인물』(2006년)에서는 엄항섭의 출생지에 대하여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90번지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는 군지의 기록을 따르기도 한다.
엄항섭의 본관은 영월이고, 다른 이름으로 ‘예빗 엄’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중국에 망명해서는 ‘일파(一波)’라는 호를 주로 사용했으며, 필명으로 ‘대위(大衛)’를 사용한 적도 있다. 그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며, 1919년에 보성법률상업학교(보성전문학교의 옛 이름으로, 현 고려대학교의 전신)를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보성법률상업학교를 다닐 때 3‧1운동이 일어났는데, 온 국민이 일어나 조국의 자주독립을 부르짖는 것을 보면서 엄항섭은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가 상하이에 도착하였을 때는 그곳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져 있었다. 임시정부에 참여한 엄항섭은 거기서 김구를 만났고, 김구와 함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엄항섭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19년 9월 법무부 참사에 임명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새로운 체제를 갖추어 출범한 상태였다. 3‧1운동 직후 연해주‧, 상하이, 한성에서 수립되었던 세 곳의 임시정부가 통합을 실현하고,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과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를 중심으로 새롭게 출범한 때였다. 엄항섭은 법무부의 참사가 되어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는데, 임시정부에 오래 있지 않았다. 당시 그의 나이 22살로서 상하이로 찾아온 청년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그 역시 공부를 계속하고자 하였다. 그가 입학한 곳은 항주에 있는 지강(芝江)대학이었다. 그는 지강대학에서 중국어, 영어, 불어 등 어학을 공부하였는데, 어학을 공부한 것이 뒷날 그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1922년 지강대학을 졸업한 후, 엄항섭은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동안 상하이 임시정부는 크게 변해 있었다. 수립 초기 국내외에서 많은 인사들이 모여들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미국에 있던 대통령 이승만은 상하이로 와 일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국무총리 이동휘도 떠났다. 그리고 각원들도 대부분 사퇴하였다. 시일이 지나면서 젊은 청년들 역시 임시정부에서 멀어져 갔다. 이로 인해 임시정부는 정부로서의 조직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김구와 이동녕을 비롯한 몇몇 인사들이 임시정부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사람만 떠난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워졌다. 수립 초기에는 임시정부에 대한 기대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이와 함께 독립자금도 적지 않게 들어왔다. 그러나 사람이 떠나면서 자금도 함께 줄어들었고, 임시정부 청사의 집세를 내지 못할 형편이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있던 김구‧이동녕 등의 인사들조차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 곤궁은 극심한 형편이었다.
엄항섭은 임시정부를 어떻게 해서든 유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편으로 그는 프랑스 조계의 공무국에 취직하였다. 자신이 월급을 받아 그 돈으로 임시정부 사람들의 끼니를 해결하고, 또 일본영사관에서 한인들을 체포하려는 정보를 얻어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엄항섭이 프랑스 조계의 공무국에 취직한 것은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임시정부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를 지키고 있는 요인(要人: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먹고 자는 것만이라도 해결되어야 했다. 그 역할을 엄항섭이 맡은 것이다. 엄항섭 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 연미당(延薇堂, 1908~1981) 여사도 임시정부 요인들을 극진히 모셨다. 김구는 자신이 엄항섭 집에 갔다가 나올 때면 문 밖까지 따라 나와 전송하며 은전 한 두 개씩을 내 손에 쥐어주며 “아기 사탕이나 사주세요”라고 말하던 부인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였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숨진 엄항섭 부인의 무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며, 무덤에 묘비를 세워주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생활만이 아니라, 이들 요인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도 임시정부를 지켜내는 주요한 방법이었다. 상하이의 일본영사관에서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들을 체포하려면 사전에 프랑스 조계 당국과 교섭하여 양해를 얻어야 했다. 엄항섭이 프랑스 공무국에 근무하고자 한 것은 이러한 정보들을 알아내어 미리 피신하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이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20년대 중반에 부딪혔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임시정부라는 조직이 존립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엄항섭의 공헌이 적지 않았다. 당시 엄항섭은 20대의 청년이었다. 엄항섭이라는 한 20대 청년의 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켜낸 원천이 되었다. 엄항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켜내는 일에 한눈팔지 않고 성실하게 헌신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수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킴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 질문1 엄항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중국 지강대학에서 무엇을 공부하였기 때문인지 써봅시다.
- 질문2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엄항섭이 프랑스 조계의 공무국에 취직한 이유는 무엇인지 대답해 봅시다.
읽기자료 2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을 펼친 엄항섭
엄항섭은 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래 줄곧 김구와 함께 활동하였다. 자신의 활동이나 역할이 대외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김구가 활동하는 곳에는 거의 엄항섭이 있었다. 김구와는 스물두 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그는 김구를 선생님처럼 모시고, 그의 활동을 뒤에서 도운 것이다. 박찬익(朴贊翊), 안공근(安恭根) 같은 이들이 측근으로 김구를 보좌하기도 하였으나, 엄항섭도 이러한 역할을 하였다.
1926년 12월 김구는 국무령에 취임하여 임시정부를 활성화시킬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 방안의 하나가 헌법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당시 엄항섭은 프랑스 조계의 공무국에 근무하면서 이 일에 관여하였다. 헌법개정기초위원이 되어 그 일익을 담당한 것이다. 보성법률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임시정부 법무부에서 근무한 경험도 있었고, 김구의 의도를 누구보다도 잘 간파할 수 있는 인물이 엄항섭이었다. 헌법의 개정은 대통령, 국무령 같은 단일지도체제의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정되었고,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를 도입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1927년 4월 11일 제정‧공포된 「대한민국임시약헌」이 바로 그 헌법이었다.
김구가 미주교포들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정책’을 할 때도, 엄항섭이 그것을 도왔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미주교포들에게 재정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편지의 내용은 김구가 직접 썼지만, 영어를 할 줄 몰랐던 김구는 겉봉에 주소를 쓸 수 없었다. 김구 옆에서 이 일은 한 것이 안공근과 엄항섭이었다.
김구가 작성하여 발표하는 각종 글을 번역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의거를 주도하였던 김구는 두 의사의 의거를 세상에 알리고자 하였다. 그 하나로 김구는 이봉창의사가 사형에 처해진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봉창이란 인물의 행적과 그가 결행한 일왕저격의거의 경과와 사실을 「동경작안지진상(東京炸案之眞相)」이란 제목으로 작성하였다. 국한문 혼용으로 된 이 글을 엄항섭이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이 글은 중국의 『신강일보(申江日報)』와 『중앙일보(中央日報)』에 「진동전세계 동경작안지진상(震動全世界 東京炸案之眞相)」이란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김구가 가흥(嘉興)으로 피신해 있을 때도 그 곁에는 엄항섭이 있었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는 60만원이라는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김구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김구는 일단 상하이에 있는 미국인 피치 박사의 집으로 몸을 숨겼다. 엄항섭은 박찬익, 안공근 등과 함께 김구가 안전하게 피신할 곳을 찾았다. 중국 측과 교섭하여 가흥에 있는 저보성(楮輔成)의 집을 피신처로 마련하였고, 엄항섭은 이동녕 선생과 김의한 가족들과 함께 먼저 그곳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김구를 모셔왔다. 당시 일제가 내건 현상금은 천문학적인 액수로, 일제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한국인들도 자칫 현상금에 눈이 어두울 수 있는 상황이어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최측근뿐이었다.
엄항섭은 김구가 쟝제스[蔣介石; 장개석]를 만나러 갈 때도 수행하였다. 중국 측은 김구가 주도한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크게 감격하였고, 이 일을 계기로 김구와 쟝제스와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1933년 봄 난징[南京; 남경]에서 이루어진 이 면담에 엄항섭은 박찬익, 안공근과 함께 김구를 수행하였다. 이 면담에서 중국 측이 우리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하였고, 한인청년들을 낙양군관학교에서 훈련하도록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몇 가지 예와 같이 엄항섭은 상하이에서 김구를 만난 이래 그가 세상을 떠난 순간까지 김구를 보좌하며 활동하였다. 때로는 김구의 명의로 발표된 각종 선언문이나 글들을 번역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고, 대필을 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1932년 중국 상하이에서 한인애국단 활동에 대해 김구가 쓴 것을 엄항섭이 정리‧서술하여 『도왜실기(屠倭實記)』를 펴냈으며, 고국으로 돌아온 이후인 1946년 내용을 보완‧번역하여 다시 발간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한편, 엄항섭은 정당 결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29년 말 민족유일당을 조직하려는 시도가 좌절된 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사들이 정당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 방향은 민족주의 세력을 결집하여 정당을 조직하고, 이를 기초 세력으로 삼아 임시정부를 유지‧옹호하는 것으로 추진되었다. 정당의 추진은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급진전되었고, 1930년 1월 김구, 이동녕, 안창호, 조소앙 등과 함께 엄항섭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31년에는 김구가 단장으로 있는 한국교민단의 의경대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5년 11월 김구를 이사장으로 한 한국국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7명의 이사 가운데 한 사람인 동시에 선전부장을 맡았으며, 1936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뽑혀 활동하였다.
이후 엄항섭은 한국국민당의 세력을 확대해가면서 임시정부를 유지‧옹호해 갔다. 엄항섭이 추진한 방법은 청년들을 조직화하는 것이었다. 당시 김구 주위에는 낙양군관학교 출신들을 비롯하여 많은 청년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엄항섭은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국민당청년단, 한국청년전위단을 결성하였다. 이렇게 한국국민당의 외곽단체이자 전위조직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임시정부를 유지‧옹호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한민(韓民)』, 『한청(韓靑)』 등의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청년들에게 독립운동의 노선과 지도이념을 교육하고 선전하고자 한 것이다.
1940년 5월에는 우익진영의 3당 통합을 이루어냈는데, 우익진영의 3당은 엄항섭이 참여한 한국국민당을 비롯하여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던 조소앙이 탈퇴하여 재건한 한국독립당, 이청천 등 만주세력이 중심이 된 조선혁명당을 말한다. 이들 3당은 임시정부의 옹호를 전제로 통합하기로 하고, 1939년 10월부터 통합을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엄항섭은 한국국민당 대표로 통합회의에 참여하였고, 결국 1940년 5월 3당이 통합하여 새로이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이를 중경에서 결성되었다고 하여, 중경 한국독립당이라 한다.
한국독립당의 창당은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계기로 분파되었던 민족주의 세력이 총결집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임시정부로 민족주의 세력이 결집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세력기반이 크게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는 김구가 뽑혔으며, 엄항섭은 조소앙, 이청천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이후 엄항섭은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옹호‧유지하면서 활동하였다. 이렇게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면서 김구를 도와 한국광복군 창설의 실무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여전히 엄항섭은 김구와 함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 질문1 엄항섭이 김구를 보좌한 사례를 구체적인 사실을 들어 대답해 봅시다.
- 질문2 엄항섭이 참여한, 1930년 1월 김구, 이동녕, 안창호, 조소앙 등과 함께 창당한 정당 이름과 1935년 11월 김구를 이사장으로 창당된 정당 이름을 각각 써봅시다.
- 질문3 1940년 5월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3당이 통합하여 중경에서 새롭게 결성된 당은 무슨 당인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3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함께 한 엄항섭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충칭[中京; 중경]에 정착하였다. 1932년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상해를 떠나 항주로 옮겼던 임시정부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진강・장사・광주・유주・기강 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중경에 도착한 것이다. 당시 중경은 중국국민당 정부가 임시수도로 정한 곳이었는데, 중경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 체제로 정비되었고,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하여 추진한 첫 사업은 한국광복군의 창설이었다.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부터 군대를 편성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중경에 정착하면서 이를 추진한 것이다. 그 방법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과 중국군관학교를 졸업한 한인청년들을 중심으로 우선 총사령부를 성립하는 것으로 추진되었고,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을 거행하였다.
엄항섭은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성립전례식은 중경에서 가장 좋은 호텔인 가릉빈관에서 개최되었고, 당시 중경에 있는 외국사절들을 비롯하여 중국국민당, 중국공산당 인사들과 중국군 관계자 등 2백여 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였다. 행사는 일본 공군기의 공습을 피해 아침 7시부터 3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이 행사의 제반 준비와 실무를 엄항섭이 맡아하였다.
나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나 활동을 미주교포들에게 알리는 일도 엄항섭이 맡아하였다. 당시 임시정부가 해결해야 했던 주요한 과제의 하나는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중국정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턱없이 모자랐다. 광복군을 창설하였지만, 그 대원들의 의식주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하였고, 그것을 미주교포들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재정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서는 임시정부가 어떠한 활동을 추진하고 있는지를 알려야 했고, 엄항섭이 그 일을 맡았다. 엄항섭은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배관기(光復軍總司令部成立典禮拜觀記)」, 「광복군에 관한 보고」, 「대한철혈남아 사방에서 운집」 등의 글을 작성하여,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엄항섭이 보내는 글들은 대부분 미주에서 발행되는 『신한민보』에 그대로 보도되었다.
엄항섭의 이러한 활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 일이었다. 임시정부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나 임시정부를 위한 일에 엄항섭이 관계되지 않은 일들이 별로 없을 정도고, 그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 임시의정원 의원, 그리고 주석 판공실 비서로도 활약하고 있었지만,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다.
엄항섭이 대외적으로 그의 이름을 나타낸 것은 임시정부의 선전부장이었다. 1944년 임시정부는 새로운 체제를 갖추었는데, 좌익진영이 참여하여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한 것이다. 좌익진영은 1942년 그 무장세력인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으로 편입하고, 10월에는 의정원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1944년 4월에는 정부에도 참여함으로써,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좌우연합정부가 구성되면서 정부의 조직도 확대 개편하였다. 부주석제를 신설하여 김구와 김규식은 주석‧부주석으로 뽑혔고, 예전의 내무‧외무‧군무‧법무‧재무의 5부에서 문화부와 선전부를 증설하였다. 이때 엄항섭이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광복 후인 1945년 11월 23일, 엄항섭은 임시정부와 함께 귀국하였다. 그 뒤 국내에서도 임시정부와 함께 활동하며 김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국토는 38선으로 분단되었고, 미군정하에서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과 여건도 없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추진되자, 엄항섭은 김구와 함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통일된 하나의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남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어 민족이 분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선생님처럼 모시던 김구가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하면서 희망도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민족의 분단은 전쟁을 불러왔고, 엄항섭은 6‧25전쟁 속에 1950년 9월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도 통일을 위해 진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1962년 7월 30일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묘는 북한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모셔져 있다. 묘비에는 1898년 10월 15일 생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양력으로 음력으로는 9월 1이에 해당된다.
1989년 대한민국 정부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애쓰신 선생의 업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질문1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창설된 독립군의 이름은 무멋인지 써봅시다.
- 질문2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직후 귀국하지 못하고 한참 뒤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언제쯤 귀국하였는지 써봅시다.
- 질문3 해방 후 귀국한 엄항섭은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남북협상을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대답해 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1927년 중국에서 치러진 엄항섭과 연미당의 결혼식 모습이다.
- 질문1 사진 뒷면 중앙에 태극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범상한 결혼식은 아닌 듯하다. 1927년의 시대 상황을 감안하여 어떤 활동을 하던 분의 결혼식일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2 사진에는 이동녕, 이시영, 김구, 안창호 선생 등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결혼식의 주인공과 같은 곳에서 근무하던 분들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 결혼식의 주인공은 어느 곳에서 근무하던 분일지 써봅시다.
- 질문3 이 결혼식은 독립운동가 엄항섭과 연미당 여사의 결혼식 모습이다. 엄항섭과 연미당은 어떤 분들인지 아는대로 대답해 봅시다.
시각자료 2

독립운동가 엄항섭과 관련 있는 잡지와 책의 표지 모습이다.
- 질문1 왼쪽은 청년들에게 독립운동의 노선과 지도이념을 교육하고 선전하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던 한국국민당 기관지인 『韓民』이다. 무엇이라고 읽는지 써봅시다.
- 질문2 오른쪽에서 屠는 잡을 도, 倭는 왜국 왜로, 도왜실기는 일본을 잡은 실제 기록이라는 뜻이다. 1932년 발간된 이 책은 한인애국단의 활동에 관한 내용이 쓰여 있다. 그러면 이 책에는 어느 사건의 진상보고서가 쓰여 있을지 대답해 봅시다.
- 질문3 오른쪽 책은 엄항섭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던 분이 쓴 글을 정리하여 펴낸 것이다. 책 표지에도 원 저자를 밝히고 있다. 누구인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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