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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바탕한 의사 발동이지 범죄가 아니다.”
위의 말은 인천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 및 만세시위를 주동했던 김명진이 법정에서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고 떳떳하다는 뜻으로 한 것이다.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1919년 3월 6일 전혀 예상치 못한 동맹휴학과 만세 시위를 전개하여 인천지역 만세시위에 불을 붙였다.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행동에 자극받은 인천부의 조선인들은 일본경찰의 감시와 탄압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천 전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일본인 교장과 일본 경찰의 협박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열흘간의 동맹휴학을 진행하였다. 일본 경찰은 주동 학생을 색출하고 검거하여 가혹한 형벌을 가하는 등 강력하게 대응하였다. 학교 전화선을 절단한 4명의 학생에게 보안법 위반, 전신법 위반, 절도 혐의를 씌워 처벌하였다.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인천시 동구 창영동 37-1 [도로명 주소: 인천시 동구 금창로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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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변형 / 현재 인천창영초등학교 교정에는 운동장 앞으로 1922년에 지어진 근대건축물과 함께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구교정은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
1876년 2월에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의해 1883년 1월 인천항이 개항을 하였다. 개항되던 해 5월 ‘진세이 마루’ 등 3척의 배에 상품을 싣고 인천항에 도착한 일본인들은 90여 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해 말에는 일본 상인들이 348명에 달해 일본인 거류지에서 상점을 개설했고 11월에는 제일은행 출장소를 두었다. 이후 1896년에는 제18 은행지점을, 1892년에는 제58 은행지점을 각각 설치하면서 일본 상인들을 지원하였다. 청․일 전쟁 후에는 대판상선주식회사와 일본우선주식회사 등이 지점을 차려 인천항의 수출입 상품 수송을 독점하였다. 이들은 1907년경에 주식회사 7개소, 합자회사 12개소, 지점 또는 출장소 9개소를 각각 운영하고 있었다.
개항 2년 후 인천 거주 일본인들은 562명이었으나 10년 후인 1893년에는 2,500여명, 1897년에는 4,207명에 달하는 등 급속한 증가세를 보였다. 1911년에 이르면 총 인구 32,701명 가운데 한국인이 15,978명이고 일본인은 무려 15,148명에 달하였다. 일본인은 당시 인천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면서 그들의 영역을 날로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일본 조계 밖인 지금의 답동, 신흥동, 신생동, 전동, 중앙동까지 일본들의 거주지가 확대되면서 인천은 일본의 한 도시처럼 변해갔다. 이 같은 일본인의 폭발적인 팽창은 영사관, 외국인 공동묘지, 인천항 상법회의소, 대불호텔, 인천활판소, 일어판 조선신보, 인천전환국, 인천소방조, 경인철도, 인천 권번, 인천 신사 등 식민지 통치 수단을 단계적으로 불러들였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인천 지역의 각종 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 육국 제12사단을 주둔시키는 한편, 인천경찰서와 부평주재소를 통해 요시찰 인물의 동향, 사상범 동정 조사, 시국 관계 집회 탐문, 노동쟁의 발생 상황 조사, 비밀결사 검거 등에 혈안이 되어, 전국 항구 도시 가운데 그 어느 지역보다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개항 이후 일본이나 청국인들의 침탈행위가 있을 때마다 인천인들은 단합을 꾀하는 동시에 독립협회 자매단체인 인천박문협회 등을 통해 주권 수호의 민족 운동을 펼치며 저항하였다. 그러한 정신이 3·1 운동으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읽기
읽기자료 1
인천 지역 3․1 만세 운동의 시작
서울에서 3․1 만세 운동이 시작되자 일본 경찰은 이것이 인천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인천역, 축현역을 중심으로 철두철미한 경비를 섰다. 일본 경찰은 서울에서 인천으로 내려오는 조선인들의 몸과 짐을 수색하여 독립선언문 등의 유인물이 인천으로 유입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천 시내에 조선인들이 모이는 것을 철저하게 경계하였다. 이렇듯 삼엄한 분위기에서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인천학생, 청년들을 통해 만세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은 일본 경찰의 동향을 살피면서 거사를 준비하며 기다렸다.
3월 6일 일본 경찰의 경비망을 뚫고 인천공립보통학교 4학년 학생들이 주동하고 3학년이 동참하는 동맹휴업과 만세시위를 감행하였다.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이를 즉각 실행에 옮겼다. 동맹휴학에 만족하지 못한 일부 학생들은 이날 정오 학교 정문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인천 시내로 진출하였다. 이에 인천상업학교 학생들도 즉각 동맹휴학을 하고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 질문1 인천에서 처음으로 만세시위 운동이 일어난 날짜를 말해 봅시다.
- 질문2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3․1 만세 시위에 합세한 학생들이 소속된 학교 이름을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2
일제의 탄압과 저항
3월 7일에도 인천공립보통학교 3․4학년 학생들은 아침 일찍부터 학교 교문 앞에서 1․2학년들의 등교를 저지하며 이들의 동참을 이끌어 냈다. 이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해 인천공립보통학교 측에 학생들의 동향을 자세히 경찰서로 보고하도록 강요하였다. 일본인 교장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만세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을 낱낱이 경찰서에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교원들로부터 심한 감시와 통제를 당하였다. 교원들의 감시와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3학년의 김명진, 박철준, 4학년의 이만용, 손창신 등은 행동대를 조직하여 3월 8일 오후 9시경 통신망을 절단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학교로 갔다. 김명진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박철준, 이만용, 손창신은 밖에서 망을 보았다. 건물 2층으로 올라간 김명진은 전화선을 절단하고 1층 교실로 들어가 전화 수화기를 파괴하였다. 다음 날인 3월 9알 오전 9시경 김명진은 학교 화장실 뒤에서 자신이 파괴한 전화 수화기를 발견하고 이를 수거하여 자신의 집에 보관할 정도로 대담하였다. 결국 후에 일본 경찰이 수색하는 과정에서 전화 수화기가 발견되어 김명진, 박철준, 이만용, 손창신이 체포되어 구속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일제의 강력한 저지에도 불구하고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은 3월 14일까지 이어졌다. 3월 14일 경찰은 학부모회의를 소집하여 주모자 25명을 체포하여 처벌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이에 학부모들은 자녀들이 만세운동을 하지 않도록 하겠으니, 선처해달라고 요구하였다. 학부모들의 간절한 자녀 설득에도 불구하고 전교생 405명 중 주로 4학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85명이 결석을 하였다. 이 같은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 휴학 및 만세시위는 인천지역에 3․1 만세운동이 크게 확산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 질문1 김명진 등이 학교의 통신선을 절단하고 수화기를 파괴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일본 경찰이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막기 위해 동원한 방법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인천 지역 3·1 운동의 확산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는 다음날인 3월 7일부터 인천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3월 8일에는 독립선언서가 인천 전역에 배포되었으며, 특히 노동자의 분발을 촉구하는 격문이 뿌려졌다. 특히 아침에는 50명의 주도자들이 경인가도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삽시간에 300명으로 늘어났다.
3월 9일 오후 5시 30분 경 기독교 신자와 청년, 학생 300여 명이 각국공원에 모여 만세를 부르다가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을 당하였다. 오후 8시 30분 경에는 인천부 동쪽 가도에 5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경찰과 충돌하여 주동자 수명이 체포당했으며 강제 해산 당하였다.
3월 10일에는 인천 시내 중심가에서 인천부민과 학생 200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 행진을 하자, 경찰이 강제 진압하고 8명의 주동자를 구속하였다. 이어 13일에는 소래면 소래산과 계양면 계양산에서 주민 수백 명이 횃불을 올리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만세시위가 계속 확산되자 경찰은 순사대를 증원하여 경계태세를 강화하였다. 삼엄한 경계태세에도 불구하고 3월 17일 인천공립상업학교 조선인 학생 100명은 오전 9시 30분 강당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교문 밖으로 진출하였다. 당시 경찰은 어느 정도 만세시위가 수그러들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다시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즉각 출동하여 강제 해산시키고 주동자 17명을 체포하였다. 일본인 교장은 즉각 휴교 조치를 취하고 학생들을 내쫓았다.
- 질문1 인천공립보통학교 밖에서 만세시위 운동이 일어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 질문2 경찰의 삼엄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3월 17일 만세시위를 전개한 학교 이름을 말해 보시오.
읽기자료 4
점점 거세지는 만세시위
부평장날인 3월 24일 일단의 청년들이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로 몰려갔다. 이에 당황한 부평주재소 일본 경찰은 인천 본청에 헌병대와 수비대의 급파를 요청하였다. 출동한 경찰 및 헌병대와 수비대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5~6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같은 날 계양면 장기리 장터(일명 황어장터) 에서도 심혁성, 이담, 최성옥이 주도하여 620명의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순사 4명이 심혁성을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해 면사무소에 구금하였으나, 오후 5시 경 300여 명의 군중이 주재소로 달려가 심혁성을 구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칼을 휘둘러 이은선이 죽는 등 5~6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3월 25일에는 장기리 만세시위 주동자 28명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또한 계남면 소사 6개 마을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27일에는 인천시내 조선인 상점을 중심으로 만세를 부를 것과 철시하라는 내용이 담긴 격문과 『독립신문』이 배포되었다. 이에 호응한 조선인 상인들은 3월 30일부터 상점 문을 닫고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경찰은 철시한 조선 상점을 찾아다니며 즉각 상점을 열도록 협박하였다. 상인들은 경찰의 강경한 협박에 마지못해 상점을 열었지만 경찰이 지나가는 즉시 문을 닫는 식으로 저항하였다. 27일에는 문학동에서 천도교인들이 만세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3월 28일에는 남동에서 40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고, 용유도 관청리에서 비밀조직을 통해 150명의 주민이 모여 만세시위를 하였다. 30일 천도교인 이상은이 주도한 시위대가 화평동을 걸쳐 ‘북성고지(현 북성동)’까지 진출하였다. 31일에는 서창리의 송성용과 송윤중이 “4월 1일 질천시장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는 내용의 통지서를 작성하여 배부하다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어 4월 1일에는 인천시내 외리에서 20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며, 내리에 거주한 김삼수와 임갑득은 조선인 상인들이 철시하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겠다는 경고문 18통을 작성하여 밤 11시 경 우각리 이복현 등 17개 상점에 살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체포되었다.
4월 1일에는 월미도에서 천 수백 명의 군중이 만세를 불렀다. 4월 2일에는 만국공원에서 박용희, 장봉, 김규 등이 조선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조선 13도 대표자 명의로 독립선언의 뜻을 계승하여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법을 제정하여 임시정부를 선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대와 수비대의 봉쇄로 선포식은 무산되었다.
일본 경찰과 헌병대, 수비대 등이 나서서 인천 지역의 만세운동을 강제로 진압하였으나 인천부민의 열망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경찰의 요청으로 4월 19일 인천항으로 순사대 1,636명이 들어와야 했을 정도로 치열하게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 질문1 인천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지역들을 날짜순으로 말해봅시다.
- 질문2 상인들이 일제에 저항하는 방식은 무엇이었나요?
- 질문3 조선국민대회를 개최하려 했던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4 점점 거세지는 인천의 만세시위에 일본 경찰은 어떻게 대처하였는가요?
- 질문5 인천 지역 3·1 운동의 특징을 시작 날짜, 운동 선두 주체, 지역적 특성 등의 관점에서 말해 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인천창영초등학교에 세운 3․1 독립만세 운동 인천지역 발상지 기념탑이다.
- 질문1 3·1 운동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 입장에서 시민들에게 시위에 참여하도록 선동하는 유인물을 작성하여 봅시다.

모둠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