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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는 조선 13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문화의 중추인 동시에 준수한 곳이라서, 전국의 모범이 되므로 나라의 존망을 당해서 책임을 느껴 학문을 진흥시키는 길에 나아간다.”
이 글은 기호흥학회 설립 취지서의 일부이다. 기호흥학회 설립 취지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호지방은 국가의 중심이고 문물(文物)과 인물이 풍성하므로 정치, 사회의 융성은 물론 국민의 교육을 담당하고 실력을 길러 국권회복에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즉 기호는 국가의 중심지로서 지금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근년에 이르러 타지방에 비하여 신문화 수용 및 지식 계발에 적극적인 활동이 미흡하게 되었다. 따라서 교육 진흥이 잘 안 된 것과 주권 상실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깊이 통감하고 국민의 계몽과 학문을 일으키기 위한 단체를 만들을 온 힘을 다하기 위하여 학회를 설립한다”고 밝히고 있다.
기호흥학회의 월간지 『기호흥학회월보』 제1호 표지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대한제국의 독립기초와 2천만인의 자유정신, 기호삼성(畿湖三省)의 흥학주의로서 국민적 뇌수를 자양하는 정신원소로 삼고, 교육계의 학리를 발명하는 나침반의 바늘이 된다.”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 165 [도로명 주소: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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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멸실/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서 있다. |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 정책으로 국권상실의 절박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 민족은 국권회복의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항일 의병 투쟁과 애국 계몽 운동으로 나타났다. 위정척사 사상을 배경으로 무장 투쟁을 전개한 의병운동은 군대 해산 이후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의병전쟁의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반면,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한국병합에 이르는 기간에 서울을 중심으로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을 이루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1904년 일제의 침탈에 항거하여 보안회가 조직된 이후 각종 사회단체가 활발하게 조직되었다. 그중 애국계몽단체는 국권회복을 위한 지름길이 실력양성을 통한 자강 외에는 없다는 입장에 서서 신교육으로 청년을 양성하기 위한 학문진흥과 민족 산업의 육성을 위한 식산흥업이라는 방법에 역점을 두었다. 특히 기울어져가던 국운이 을사늑약으로부터 파멸 직전에 이르게 되자 전국적으로 신교육을 통한 구국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한국에 있어서 교육은 장래의 국권회복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데서 구국운동의 중요한 방법으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사립학교를 중심의 교육구국운동은 통감부의 엄한 통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에서도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그 결과 일제의 강제 병합 직전인 1910년 7월 당시 관공립학교와 준공립보통학교가 각각 82개교, 73개교였던데 비해 사립학교는 2,082개에 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1908년 기호흥학회가 창립되었다.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의 교육진흥을 목적으로 출범하였던 기호흥학회는 초대회장 이용직을 비롯한 임원 대부분이 전․현직 관료 출신들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 단체는 경기도 7개 군, 충청북도 3개 군, 충청남도 8개 군에 지회를 두고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부족한 교사의 충원이었다. 이를 위해 1908년 6월 20일 기호학교를 개교하여 교사 양성을 위한 사범교육과 일반중등교육을 실시하였다. 기호학교는 1909년 9월 흥사단이 세운 융희학교와 합병하고, 그해 11월 기호흥학회와 호남․교남․관동학회가 중앙학회로 통합됨에 따라 중앙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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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기호흥학회의 설립 목적
기호흥학회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의 교육을 일으켜서 국권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1908년 1월 19일에 창립되었다. 그날 발기인 정영택, 이우규, 이용식 등 경기도와 충청도의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보성소학교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행사 당일 참석한 회원은 임시 회장 이종일을 비롯하여 모두 105명이었다.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의 제1호에 실려 있는 취지서에 의하면 기호지방이 우리나라의 문화적 중심지로서 학문과 정치에 중추적 역할을 해왔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권 상실의 위기 상황을 초래한 일차적 책임은 기호지방의 인사들 자신에게 있다는 자기반성을 하였다. 즉 낡은 사상에 집착하여 새로운 사조(思潮)를 받아들이는 것을 등한히 했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인심이 흩어지고 상하(上下)가 분열되었으며, 실업(實業)이 정체되어 국력이 약해졌고, 정치가 문란해지고 국가의 주권을 빼앗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학문을 진흥하고 전국의 청년을 교육시킴으로써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을 다시 일으킬 것을 설립목적으로 내외에 천명하였다. 교육을 일으키는 것을 국권회복과 민족갱생의 방법으로 간주하게 된 이유는 교육을 통하여 국권회복의 필요성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호흥학회는 학문 진흥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나라의 독립과 자유의 쟁취를 추구하였다. 즉 그 설립의 취지와 목적을 1차적으로는 학문과 교육의 진흥에 두고 있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나라의 독립과 자유의 쟁취에 두고 있었다. 기호지역에서 기호흥학회가 학문진흥을 취지로 설립되었다는 것은 당시 계몽운동가나 단체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언론을 통해 민족운동의 선봉에 섰던 『대한매일신보』는 이 단체의 성립을 ‘암흑 세계에 비친 계명성’에 비유하며 대단히 획기적인 사실로 평가하였다.
- 질문1 기호흥학회 창립에 참여한 인사들의 출신지는 주로 어디인가요?
- 질문2 『기호흥학회월보』의 취지서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학문과 정치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3 기호흥학회가 추구한 궁극적인 활동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기호흥학회 회원의 구성
기호흥학회는 「본회규칙」 제4장의 제17조, 제18조에 회원 자격과 회원의 종류에 관하여 규정하였다. 위원의 자격은 경기도 및 충청남·북도 안에 본적이나 주소가 있는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아직 여자는 회원의 자격이 없었고 회원의 종류를 매월 10전(錢)을 납부하는 통상회원(通常會員)과 60원(圓) 이상 300원 미만의 현금이나 재산을 기부한 특별회원, 그리고 300원 이상의 현금이나 재산을 기부하는 특별찬성회원(特別贊成會員)으로 분류하였다. 회원의 입회는 회원 2명의 보증과 입회금 1원을 첨부하여 회원이 되기를 요청하여 회장의 인준을 얻음으로써 이루어졌다. 1909년 7월 현재 회원수가 1,302여명에 달했으며, 그 중 본회회원은 322여명, 지회회원은 980여명이었다.
기호흥학회에 참여한 회원은 현직관리 뿐 아니라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인사, 국내에서 신교육을 받은 등이었다. 특히 주요회원들 중에는 전․현직 고위관료와 일본유학 인사가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서북학회 등 다른 계몽단체들과 성격상 구별되어지는 것이다.
- 질문1 기호흥학회의 회원 자격을 구체적으로 말해보시오.
- 질문2 기호흥학회 회원의 종류를 말해보시오.
- 질문3 서북학회 등 다른 계몽단체들과 비교하여 기호흥학회 회원 구성이 갖는 특성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지회의 설립
기호흥학회는 본회 조직을 정비한 후, 교육운동을 포함한 계몽운동의 확산을 위해 지회 설립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기호지방의 각 군수들에게 흥학을 위해 관내에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국가에 보답하는 자세를 보일 것을 촉구하며, 시대의 변화에 맞게 향교를 근대적인 교육기관으로 전환하여 흥학을 도모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띄웠다. 아울러 기호인사들이 서로 힘을 모으고 지회와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앞장설 것을 청하였다. 그들은 기호흥학회 취지의 실현은 각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는 동시에 공통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았다. 다른 한편으로 각 지역에 권유위원을 파견하여 유지들에게 민중을 위한 민중차원의 신교육을 전개할 지회와 학교 설립을 권장하였다. 지회나 지회원의 확보 없이는 계몽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학교 설립을 통한 근대 교육은 한 두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참여와 후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사실 지방에서 계몽운동의 확대는 지방관과 연결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기호흥학회에서는 지방의 군수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권유위원을 파견했던 것이다. 이는 본회의 지방에 대한 통제방식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현직 관료들로 구성된 기호흥학회에서는 다른 단체에 비하여 지방관과의 관계에 큰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것은 지회의 활동에 전직 군수를 비롯한 관료층의 참여가 활발한 것과 관련이 깊었다. 실제 광주, 양근, 교하, 장단, 강화, 충주, 제천, 양주, 홍주, 목천 등의 지회는 군수나 면장의 적극적인 협조로 운영되고 있었다.
계몽운동의 지방 지회 설립에서 또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은 지방에 있던 기존의 자치단체, 즉 향회(鄕會), 방회(坊會), 군민회(君民會) 등의 자치조직을 기초로 하고 있었던 점이다. 특히 지방에서는 당시 사회 문제를 향약 실시를 통해 해결하려는 논의가 있었는데, 이는 보수적인 유생은 물론이고 개화파의 입장에서도 동일하였다. 민회(民會)의 형태로까지 구성된 것은 아니지만 향약의 조직을 지회 구성의 기초로 삼는 것은 보수적 유생층이 계몽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기호흥학회의 지회원에도 다수의 보수적 유생이 참여하기도 했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 교육을 중심으로 한 계몽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던 배경은 변화를 갈망하는 유생들이나 본회의 인사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있었던 전․현직 관료들과의 연결 속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본회가 설립된 직후인 1908년 4월부터 각 지역에서 지회의 청원이 있었다. 기호흥학회는 지회청원지역에 대하여 그 지역 권유회원의 시찰보고에 준하여 통상총회나 특별총회를 통해 이를 허가하였다. 시찰보고서에는 회원의 숫자, 이제까지의 활동상, 앞으로의 전망 들을 기록하고 있다. 『기호흥학회월보』의 기록을 근거로 할 때 경기도에 7개소, 충청남도에 8개소, 충청북도에 3개소 등 총 18개소의 지회가 설치되었다. 이는 30개소의 지회를 가진 서북학회를 이은 비교적 많은 숫자이다.
- 질문1 기호흥학회가 지회설립을 위한 노력으로 취한 방식 두 가지를 말해보시오.
- 질문2 기호흥학회가 지방에 지회 설립을 위한 편지를 보내면서도 지방관과의 관계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보수적 유생층이 계몽운동에 참여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 질문4 각 도별로 설립된 지회의 수를 말해보시오.
읽기자료 4
월보(月報) 간행을 통한 계몽 활동
『기호흥학회월보』는 1908년 8월 25일 창간호를 월간으로 계속 발간하였다. 월보는 20호까지 발간하였다고 전해지지만,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1909년 7월 25일 발행된 12호까지이다. 월보에 글을 쓰는 데에는 학회의 임원들이 상당수 참여하고 있는데, 이용식, 정영택 등 64인에 이른다. 월보의 편집인은 이해조, 발행인은 김동규 등이었으며, 구독료는 1부에 25전(錢), 6개월분 85전, 1년분 1원 50전이었고, 발행 부수는 1,302여명의 회원 수와 각 군수 및 향교에 보급하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2,000여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월보의 간행은 국권회복을 위한 흥학의 목적을 관철시키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제1호에서 제4호 표지 이면의 특별광고문에는 독립기초, 자유정신, 흥학주의를 표방하며 그 간행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 이는 애국심의 고취를 위한 민중교화 및 계몽활동을 위해 발간한 계몽지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월보의 목차는 흥학연구(興學硏究), 학해집성(學海集成), 예원수록(藝苑隨錄), 잡조(雜俎), 학계휘문(學界彙聞), 본회기사(本會記事), 관보초록(官報抄錄)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중 흥학연구와 학해집성의 비중이 가장 크며, 그 내용은 국민들의 정신 계도를 위한 계몽과 신지식 보급을 위한 전문교재 내용으로 나눌 수 있다.
흥학연구는 월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이곳이 본회의 정신과 활동 목표 및 본회의 이상과 그 방향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정신 계도를 위한 계몽 내용이 주로 연재되어 있다. 12회에 걸쳐 기고인 50명에 의해 흥학연구에 실려 있는 글은 모두 99편에 달한다. 흥학연구에 나타나는 교육 내용은 광범위하였는데, 대체로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인 근대적 국가사회로의 체제 개혁과 실력을 배양시키는데 초점을 두고 흥학과 국민정신의 앙양을 꾀하는 내용이다. 특히 교육장려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 신․구학문 절충을 바탕으로 한 교육의 진흥을 강조하고 있다. 즉 신학문을 강조하면서도 구학문 본연의 도(道)는 계속 활용해 나갈 것을 촉구하였다. 결론적으로 흥학연구의 내용은 신·구학의 표리를 이루는 ‘신․구학 절충’을 바탕으로 신학문의 흥학을 강조하였다.
기호흥학회는 신교육과 정신교육을 펴나가기 위하여 학교교육을 강조하였다. 구학문에 얽매어 있는 사숙(私塾)을 혁파하고 효과적인 교육의 성과를 얻기 위해 학교교육을 펴나가고자 하였다. 그리고 교육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의무교육을 주장하면서, 이를 위한 교사의 양성이 시급하므로 사범교육을 급선무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학해집성은 창간호부터 12호까지 22명의 집필진이 24교과를 총 118회에 걸쳐서 게재하였다. 학해집성은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자연과학 분야로 나누어 각 분야의 근대학문을 소개하였다.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윤리학, 정치학, 법학, 경제학, 지리학, 행정학, 교육학, 서지학 등 8개 분야이고, 교과는 15개였으며, 12명의 집필진이 55회에 걸쳐서 게재하였다. 자자연과학 분야는 생물학, 화학, 천문 지리학, 농학, 생리학, 광물학 등 6개 분야로서, 9개 교과를 10명의 집필진이 63회에 걸쳐서 집필하였다. 자연과학분야의 게재 회수가 다소 높은 것은 인문교육 중심의 전통교육에서 접하기 어려운 서양의 자연과학 분야를 교육하여 신학문에 대한 민중의 관심을 높이고자 한 것이다.
예원수록은 한시, 소설, 수필 등 문학부문을 소개하였다. 잡조는 동양과 서양의 격언 198종과 민중의 교양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이밖에 학계휘문, 본회기사, 관보초록에 교육계 동향, 본 학회의 활동 내용, 교육 관계 법령과 규칙 등을 수록하였다.
이렇듯 『기호흥학회월보』는 신지식, 신문화, 서구의 새로운 학문을 게재함으로써 사회계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월보를 통한 계몽은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학회운동과 대중과의 매개체로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또한 신학문을 소개함으로써 당시 우리나라의 사상사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 질문1 『기호흥학회월보』는 모두 몇 회가 발행되었나요?
- 질문2 목차를 근거로 한 『기호흥학회월보』의 내용을 모두 말해보시오.
- 질문3 기호흥학회가 학교교육의 확산을 위해 급선무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 질문4 ‘학해집성’에서 인문·사회과학 분야에 비해 자연과학 분야의 내용이 좀 더 많이 게재된 이유를 설명해보시오.
읽기자료 5
기호학교(畿湖學校) 설립과 운영
기호흥학회는 학교설립은 학회의 모든 활동 중에서 가장 우위에 두었다. 이에 따라 청년을 교육하기 위해 서울에 기호학교를 설립하였다. 기호학교는 1908(융희 2)년 5월 20일 임시평의회에서 본회 총무 정영택이 학교설립 의안을 제출하였고, 6월 1일 특별총회에서 학회 목적이 교육에 있으니 학교설립이 시급하다는 이종일의 동의로 가결하였다. 이어 6월 20일 개교식을 거행함으로써 사립 기호학교를 설립하였다. 기호학교는 최초의 교사를 한성북부 소격동에 있는 기호흥학회의 전회관(前會館)을 사용하였으나 교실이 부족하여서 한성북부 대안동의 이용태의 가옥을 매수하고 개축하여 1909년 12월에 이전하였다.
기호학교 설립의 중요한 취지는 교사의 양성이었다. 이것은 당시 지방교육이 부진한 이유가 무엇보다 교사의 부족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지금 교원의 양성은 경성사범학교뿐이므로 일반사립학교에서 필요로 하는 교원은 물론 관·공립학교 및 사립보통학교에 대한 교원의 공급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교원의 부족 문제를 지적하였다. 이와 더불어 『기호흥학회월보』에서는 “교사가 교육의 근본적인 핵심역할을 하므로 교사는 3번 생각해보고 택하라”고 하여 교사의 자질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기호학교의 설립 목적을 교사양성에 두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기호학교에는 수업연한 3년의 본과(本科)와 1년 반의 특별과(特別科)를 두었으며, 본과는 학년으로 특별과는 학기로 구분하였다. 입학자격은 20세 이상의 신체 건강하고 품행 단정한 자로 하며, 시험과목은 한문에 소질이 있고 지지(地誌)·역사(歷史)·산술대개(算術大槪)에 능한 자로 하되, 보통학교 이상 졸업증서가 있는 자는 면제해 주었다. 개교식 직전인 1908년 6월 15일에 95명의 학생을 선발하고 9월에 추가 모집하여 204명이 되었다. 그 후 중도 탈락하는 학생들이 많아 1909년 7월에는 165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기호학교의 학과는 수신(修身), 교육(敎育), 학교관리법(學校管理法), 지문 급 지지(地文 及 地誌), 역사(歷史), 물리(物理), 화학(化學), 박물(博物), 산술(算術), 어학(語學), 경제(經濟), 법학(法學), 농학대요(農學大要), 도화(圖畵), 음악(音樂), 체조(體操) 등 16개 학과였다. 그 가운데 도화, 음악, 체조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당시의 서구의 근대적 교육이 우리나라에 정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더욱이 교사 12명 중 체조 담당교사가 4명이나 되는 점도 주목된다. 이는 당시에 지(智), 덕(德), 체(體)의 조화로운 인간 양성에 관심을 기울이려는 교육풍토를 반영한 것이다. 또한 전통적인 교육이 글만 읽는 것에 치우쳐 열강들의 침략에 효율적으로 대처를 못하고 마침내 일제에게 국권이 침탈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 청년들에게 씩씩한 기상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 질문1 기호학교가 설립된 때를 말해보시오.
- 질문2 기호학교를 설립한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3 기호학교의 입학하는 학생들은 어떤 자격을 갖춘 청년들이었나요?

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기호흥학회월보』의 표지이다.
- 질문1 『기호흥학회월보』는 국권이 상실되어가는 시대적 문제에 근대 교육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와 그 해결 방법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내용으로 구성할 책자의 목차를 작성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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