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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 생가 터(한국광복군 총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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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저 높푸른 하늘의 오색 민족혼이여!

― 민족의 사표 백산 지청천(池靑天) 장군을 기리며 19세기 말 여명 속에 태어나
20세기 초 개화의 둔덕 위에서 세상을 안았으되
섬나라 왜구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뼈아픈 수모 속에서
민족혼의 길을 찾아
온갖 풍상의 길로 나아간 임이시여!
왜구에게 병탄되던 암흑 속의
2천 만 겨레 중에서
나라를 잃게 된 상황을 직시하고
울분과 통한을 가슴에 품었던 백성은
고작 5%에 머물렀던 시절
8․15 해방 당시
상해임시정부와 광복군, 그 밖의 어떤 형태로든
조국 광복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은
고작 6천 명이었던 스산한 상황
오로지 출세와 영달을 목표로
일본 육사에 진학한 수재들 거의 모두가
광복군 토벌에 앞장서고
광복된 조국에서도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하고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렀던 나라
그토록 퇴락한 민족정기를 돌아볼수록
푸른 하늘에 오색무지개처럼 피어난
지청천 장군의 민족혼 앞에서
천만다행의 심정이 무놀지노니
정녕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값진 사표가 아니신가!
여덟 살 어린 아들이
일본인에게서 30전 동전을 받아오자
불로소득은 떳떳하지 못하며
더욱이 남의 나라를 침노하는 천한 일본인의 돈은
절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며
엄히 꾸짖었던 어머니의 성품은
오늘을 사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명명한 거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눈발 휘날리던 만주 벌판
외롭고 울울한 삼림 속에서
혹한과 피비린내를 벗 삼고
생사의 기로 속에서 만난고초를 겪어내며
한국광복군의 위용을 세계만방에 떨쳤으나
광복군 사령관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광복된 조국의 땅을 밟아야 했던 장군
그 통한을 가슴에 안고
조국의 바른 건설을 위해 분골쇄신하였으나
바르게 서지 못한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광복을 위해 산화해간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70세에 이승을 하직하신 장군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르고 있는 때
지청천 장군의 얼과 삶을 투시하고
민족정기의 이정표를 제시하려는
뜨거운 양심과 이성의 눈들이 오늘
지청천 장군을 기리는 일들을 전개하노니
또 하나의 값진 역사창조의 여울짐이여!
이는 오로지 장군의 얼을 본받아
민족정기를 세우고 조국의 바른 길을 모색하려 함일지니
푸른 하늘 드높이 맑은 서광을 펼치며
오색무지개 같은 민족혼의 불빛을 가슴에 안고
지청천 장군이시여,
오늘 저 백두산 천지를 차고 오르는 용처럼
장엄히 부활하소서!
부활하여 용약하소서!


이 시는 2012년 3월, 백산지청천장군기념사업회 발족을 축하하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지요하가 쓴 시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30
현재 상태 없어짐, 현재 일반 주택건물이 들어서 있다.

지청천은 1888년 서울 삼청동 출생이다. 본명은 석규 또는 대형이다. 배재학당을 중퇴하고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다니다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4년 일본 육사를 2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20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서로군정서의 병력을 이끌고 북만주로 이동, 이듬해 연해주에서 한인 무장 세력이 연합해 세운 대한의용군 총사령부 대한독립군단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1921년 5월 자유시(현재 스보보드니)로 이동해 고려혁명군 조직에 참여했다가 자유시참변 후 이르쿠츠크로 가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만주로 돌아와 이듬해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 군무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25년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28년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3부 통합운동에 참여하여 혁신의회 군사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30년 홍진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모체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군사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에 취임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중국 관내로 이동,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의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1935년 김원봉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가 1937년 탈퇴해 조선혁명당을 재조직하고, 김구와 함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해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총사령에 취임하였다.
광복 후 환국하여 1947년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제헌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고, 1950년 선거에서 재선되었다. 1957년에 굵직하고 파란만장했던 민족주의자의 삶을 마감하고 영면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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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일제의 군사교육을 이용하여 독립 전쟁에 투신

서구 열강과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하고 나라의 운명이 매우 위태로운 시기에 서울에서 태어난 지청천은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집안 분위기 속에서 교동소학교에 편입했다. 이후 배재학당에 진학하여 산술·과학 등 신학문을 익히면서 황성기독청년회에서도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외세의 침탈을 막기 위한 활로가 독립 전쟁에 있음을 인식하고 1907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미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 일제가 후속 조치로 무관학교가 폐교를 폐교시키자 그는 근대적 군사지식을 쌓아 독립 전쟁에 투신하겠다는 일념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지청천을 비롯한 한국인 유학생들은 “이왕 군사교육을 받으러 온 것이니 배울 것은 다 배우고 중위가 되는 날 일제히 군복을 벗어 던지고 조국 광복을 위해 총궐기하기로 맹세했다”고 한다. 1914년 5월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지청천은 일본군 제10사단에 배속되어, 제1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에 속해 있던 일본이 중국 산둥 반도의 독일 조차지를 공격해서 점령한 이른바 ‘청도 전쟁’을 겪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 독립 전쟁에 참여할 길을 모색하던 지청천은 6개월 동안 휴가를 얻어 국내로 돌아왔다. 지청천은 이미 결심한대로 일본 육사 선배인 김광서와 함께 1920년 4월 하순 남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지 않고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험난한 민족 해방 운동 전선에 뛰어들었다.

  • 질문1 지청천이 육군무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지청천이 남만주로 망명함으로써 독립 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써 봅시다.

읽기자료 2

신흥무관학교 교관과 대한독립군단 조직

망명 후 지청천은 일본군 사관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탈출할 때 지니고 나온 군사용 지도를 바탕으로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 있던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곧이어 교성대장(敎成隊長)으로 선임되어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이 때 지청천은 경천 김광서, 동천 신팔균과 더불어 ‘만주 삼천’으로 불리었다. 만주에서는 ‘나는 홍범도’, ‘뛰는 김좌진’, ‘만주 삼천’이면 산천초목도 두려워 떤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지청천은 뛰어난 독립군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1920년 10월 경신참변을 저지르던 일본군의 침략으로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자 지청천은 100여 명의 재학생과 서로군정서 병력을 이끌고 백두산 근처로 이동했다.
그리고 지청천 부대를 비롯한 만주지역 주요 독립군 부대는 러시아령 밀산에 집결한 뒤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대한국민회, 의군부, 혈성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러시아령 연해주로 옮겨간 대한독립군단은 그 곳의 항일 부대와 합쳐 대한의용군 총사령부를 결성하고 군사 훈련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1921년 6월 독립군의 분열과 소련 적군의 배신으로 인한 ‘자유시 사변’으로 많은 동지들을 잃고 체포되었다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풀려났다. 이후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고려한 소련의 정책 변화로 독립군 활동이 어려워지자 지청천은 192

  • 질문1 지청천은 신흥무관학교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나요?
  • 질문2 지청천이 밀산에서 조직한 독립군 부대의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3 지청천이 연해주에서 만주로 되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위원과 정의부 군사위원장으로 활약

1919년에 수립되어 외교 독립론을 위주로 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전개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조직과 활동이 침체에 빠지자 민족해방운동의 통일적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렸으나, 임시정부의 개선을 주장한 개조파와 무장 투쟁 위주의 새로운 조직 건설을 내세운 창조파의 갈등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지청천은 신숙, 김규식과 국민위원회를 결성하고 그 산하의 군사위원에 선임으로 활약하였다. 창조파에 속했던 지청천은 무장 항쟁을 지휘할 수 있는‘통일적 기관’을 새로 구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창조론은 실천적이며 효율적인 항일 투쟁을 중시한 것이었지만 결국 국민대표회의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만주로 돌아온 지청천은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정의부를 조직하고 사령관 및 군사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국내에까지 대원을 파견하여 일제의 각종 기관을 파괴하고 일제 관헌을 처단하였으며 무기를 노획하는 등 활발히 활약하는 한편으로, 독립운동의 정신적 바탕을 마련하기 위하여 고려혁명당을 창당하고 그 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8년 2월에는 정의부, 참의부, 국민부의 3부 통합운동을 추진하였으며, 북만주에 통합 조직으로 결성된 혁신의회의 군사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3부 통합운동이 단체 본위와 개인 본위 통합론으로 분리되어 실패하게 되자 그는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에 참가하였다.

  • 질문1 지청천이 국민대표회의 군사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주장한 내용을 써봅시다.
  • 질문2 지청천이 사령관으로 활약한 정의부의 활동 내용을 써봅시다.
  • 질문3 3부 통합운동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4

한국독립군의 조직과 대전자령 전투

1930년을 전후하여 만주의 민족주의 운동세력은 크게 남만주 국민부의 조선혁명당 산하 조선혁명군과, 북만주 혁신의회의 한국독립당 산하 한국독립군으로 양립되었다는데 1930년 김좌진이 암살당당한 후 지청천은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여 총사령에 취임하였다.
지청천은 일제의 만주침략이 중․일 전쟁으로 확대되자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것으로 예견하여 이때가 항일무장투쟁의 성과를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그가 이끈 한국독립군은 초기 전투에서 승리한 경우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숫자와 무기에서 우세한 일본군에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강한 투쟁 의지로 무장하고 때로는 중국항일군과 연합전선을 펴면서 많은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1933년 6월 대전자령 전투에서는 일제의 간도 파견군을 매복 공격하여 일본군 1,300여명을 섬멸시키고, 군복 3,000여 벌과 소총 1,500정 등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대전자령 전투는 1920년의 청산리 대첩 못지않은 대승리였으므로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주고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한 승리였다.
이 당시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는 운동방법론을 둘러싸고 무장독립론과 외교독립론, 실력양성론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외교독립론이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1920년대 중반 이후 무장독립론의 비중은 더욱 커졌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독립 전쟁에 앞장섰던 지청천의 무장 투쟁은 가장 치열한 민족해방운동이었다.

  • 질문1 지청천이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하여 조직한 민족주의 계열의 무장독립운동 단체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지청천이 지휘한 대전자령 전투의 전과와 의미에 대하여 써봅시다.
  • 질문3 1920년대에 외교독립론이 왜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었는지, 그리고 지청천이 주장했던 무장독립론은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5

중국 본토에서의 독립 투쟁

일제에 의한 만주지배가 강화되고 한․중연합군의 내분 등으로 한국독립군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지청천은 독립군을 이끌고 무장 항일의 최전선인 만주를 떠나 중국 관내로 옮겨갔다.
1933년 10월 그는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허난성[河南省]에서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창설하고 총책임자로 취임하여 교성대장에 이범석, 교관에 오광선, 조경한 등을 임명하고 한인 애국 청년 90여명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 하지만 한인특별반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정책 변경으로 1기생을 배출하고 문을 닫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독립전쟁을 지향하던 지청천은 의열 투쟁에 치중하던 김구와 군관학교 입교생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4년에 접어들면서 중국 관내 민족해방운동정당 단체들의 통일 운동이 본격화되자 만주에서 이동한 한국독립당과 한국혁명당이 통합된 신한독립당의 군사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지청천은 1935년 7월 김원봉, 김규식 등과 합작하여 통일전선 정당으로 출범한 민족혁명당의 중앙 집행위원과 군사부 부장에 선임되었다. 군사부의 주된 활동은 화북 지역과 만주 등지에서 반만(反滿)·항일의 군사 활동을 전개하고, 조선 청년의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민족혁명당의 군사 활동을 지휘하게 된 지청천은 서기부 부장으로서 당무를 총괄하던 김원봉과 더불어 양대 세력을 이루었다.
1937년에 이르러 노선과 당권을 둘러싼 두 세력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그해 4월 지청천 계열은 따로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조선혁명당의 중심인물은 대부분 만주에서 활약한 무장 독립군 간부 출신이었는데. 군사부장 지청천이 당의 실질적 지도자였다. 조선혁명당은 김구 중심의 한국국민당, 조소앙 중심의 한국독립당에 비해 다소 진보적 이념을 내세웠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 통일전선의 요구가 더욱 커지자 3당은 그 해 7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여 우파 민족주의 세력의 연합을 이루었다. 나아가 3당은 한국독립당으로 통합하여 임시정부의 중심 정당이 되었다.

  • 질문1 지청천이 만주의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중국 본토 쪽으로 이동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지청천과 같이 독립군 조직을 만들거나 연합하여 활동한 독립 운동 지도자들을 위 글에서 모두 찾아서 써봅시다.
  • 질문3 지청천은 왜 우파 민족주의 독립군 지도자의 길을 걸었는지 1921년에 연해주 자유시에서 있었던 사건을 참고하여 추정해 봅시다.

읽기자료 6

한국광복군의 조직

1930년대 후반부터 임시정부는 무장독립노선을 지향하면서 군사 조직을 마련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였다. 1939년 10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부장에 선임된 지청천은 부대를 조직할 형편이 안 될 경우 총사령부라도 먼저 구성할 것을 강조하였다. 마침내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할 시기가 왔다”면서 충칭[重慶] 가릉빈관에서 임시정부의 정규군인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成立典禮式)을 거행하였다. 이때 지청천은 총사령으로 임명되었으며 참모장에는 이범석이 임명되었다.
한국광복군은 애초 전투 부대를 갖고 출발한 것은 아니었으나 점차 대원을 확보하고 조직을 정비하면서 군대 조직을 갖추어 나갔으며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합류함으로써 3개 지대로 편성되었다. 하지만 광복군에 직접 합류한 인원이 적었고, 임시정부를 지원하던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이 ‘한국광복군 행동준승 9개항’을 강요하여] 광복군 활동을 후방 작전 위주로 제한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군을 직접 상대한 독립전쟁을 전개하지 못함으로써 무장 독립군으로서 광복군의 활동은 상당히 한계가 있었다. 또한 광복군 대원들 중 일부가 미국 OSS의 특수훈련을 받고 시도한 ‘국내진공작전’도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함으로써 시도조차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광복군이 민족 해방을 쟁취할 수 있는 주력군의 역할을 담당하여 장차 국군 창건의 기틀이 되기를 바랐던 지청천의 뜻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독립군 양성에 누구보다 앞장섰고 독립전쟁을 위해 끝까지 진력했던 그는 광복군 총사령의 대명사로 실천적 독립운동가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 질문1 한국광복군이 결성된 날짜와 장소를 써봅시다.
  • 질문2 한국광복군에서 지청천은 어떤 역할을 하였나요?

읽기자료 7

광복 이후의 활동

광복 후 지청천은 일본군에 동원되었던 학도병과 징병자들을 중심으로 광복군 확대를 꾀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국내 청년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지청천은 1947년 4월 22일 귀국하여 청년운동이 조국 통일의 유일한 길이며 청년 단체의 통합은 자격이 있는 자신의 지휘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해 8월 그가 조직한 대동청년단은 단순한 정치단체가 아니라 무력적이고 결집력이 강한 청년 단체였다. 우익 청년단체의 약70% 정도를 흡수한 대동청년단은 우익 진영의 물리력 강화는 물론 지청천의 굳건한 정치 기반이 되었고, 앞서 귀국한 이범석이 1946년 10월에 만든 조선민족청년단과는 같은 우익 청년 단체로서 경쟁하고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지청천 세력이 커지자 김구, 이승만 등 세 사람의 관계도 미묘해졌다. 처음에는 지청천이 김구와 이승만에 대한 동시 지지 입장을 취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였으나, 나중에는 이승만이 주장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대동청년단은 5․10 총선거에 참가하여 13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였고 단장인 지청천은 서울 성동구에서 출마하여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면서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김구 등 임시정부 계열을 비롯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단정 수립에 반대했던 것에 비해 그는 매우 현실적인 정치가로 변모하였다. 이후 지청천은 국회와 정당, 정부의 주요 요직을 역임하였다.

  • 질문1 지청천이 광복 후 귀국하여 청년운동에 매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이범석이 1946년 10월에 창립한 청년 단체와, 1947년 8월에 지청천이 조직한 청년 단체의 이름을 각각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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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지청천 초상이다.

  • 질문1 복장으로 보아 지청천은 어떤 방식의 독립운동을 전개했을까요?

시각자료 2

사진은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 기념사진이다.

  • 질문1 지청천이 총사령으로서 이끈 한국광복군총사령부의 역사적 의의를 써봅시다.

시각자료 3

사진은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 위원 환송 기념사진으로 위쪽은 지청천, 아래쪽은 김구이다.

  • 질문1 두 인물은 각각 어떤 방식의 독립운동 방법을 택했는지 써봅시다.(읽기자료 (5) 한국독립군의 조직과 대전자령 전투 참조)
    지청천 :
    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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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1940년 9월 17일에 있었던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에서 총사령으로 추대된 지청천의 입장에서, 그리고 당시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에 맞서 중국 국민당의 지원과 간섭을 받으면서 싸웠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어려운 상황을 고려하여 연설문을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미국 OSS의 지원을 받아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다가 예상보다 빨리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갑자기 광복을 맞게 된 한국광복군 총사령 지청천의 입장에서 광복에 즈음하여 고국의 동포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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