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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민관 폭탄의거지(광복을 위한 최후의 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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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거리에 대의당이 부민관에서 무슨 집회를 한다고 난걸 봤어요. 라디오에서도 나왔고요. 그때부터 계획에 없던 일을 갑작스레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대의당은 친일파 거두 박춘금이 만든 건데 나중에 알았지만 전쟁 말기에 우리 민족을 8천명, 혹은 20~30만 명을 학살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박춘금은 관동대지진 때도 우리 동족을 학살한 장본인입니다. 살인마지요. 그러나 사실 당시에는 그런 것까지는 몰랐습니다. 친일파가 여는 행사를 깨부순다는 생각만 했지요. 우리는 이미 거사를 준비해 놓은 게 있어 그것을 가지고 행사를 무산시키기로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막바지에 일어난 부민관 폭파사건의 주역이었던 조문기 선생의 말씀이다. 조문기는 유만수, 강윤국, 우동학, 권준 등과 더불어 1945년 7월 24일 경성부민관에서 ‘아시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가 개최된다는 사실을 알고 이 대회장을 폭파할 계획을 확정지어 실행에 옮겼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시 중구 태평로 1가 60-1 서울특별시의회 [도로명 주소: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125]
현재 상태 부분 변형 / 1991년부터 서울특별시의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40만 인구를 가진 식민지 조선의 중추인 경성부(일제강점기 서울시의 이름)가 문화시설을 완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다. 경성 부민관(府民館)은 오랫동안 논의된 경성부의 숙원사업으로 1935년 12월 10일 문을 열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경성부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종합 문화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부민관은 개관 직후에는 연극, 무용, 악극 등이 공연되는 문화공간의 역할에 어느 정도 충실했다. 그러나 전시총동원체제기로 접어드는 1930년대 말부터는 황국신민화를 선동하는 동원예술과 정치 집회 장소로 변질되었다. 이광수와 모윤숙의 전시동원을 위한 연설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즉 부민관은 처음 건립된 취지와는 달리 식민통치를 홍보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공간으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1945년 7월 24일 오후 7시 경성부민관에서 일본 중의원까지 지낸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 주최로 ‘아시아민족분격대회’라는 대규모 어용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는 조선총독, 정무총감, 조선군사령관을 비롯해 이성근, 김동환, 이은연, 고원훈, 손영목 등 당시 대표적 친일파들과 만주와 중국에서 온 대표들도 참가하였다.
이와 같은 친일대회 저지하고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하여 대한애국청년당원인 조문기, 유만수, 강윤 등은 시한폭탄으로 경성부민관에 대한 폭파를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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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의 건립과 변천

경성에 대규모 공연장이 없던 1930년대 초 경성부가 부민들의 예술적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경성전기주식회사로부터 100만 원을 기부 받아 1935년 연건평 5,676㎡에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건축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다목적 회관으로서, 1,800석의 관람석과 냉난방, 음향, 조명 등의 시설까지 갖춘 대강당을 비롯해 중강당·소강당 등에서 연극, 음악, 무용, 영화 등을 공연하였다. 그 밖에 담화실, 집회실, 특별실, 식당, 이발실 등 부대시설도 잘 갖추고 있어서 극단들의 창단공연, 유명 연극단체들의 공연을 비롯해 중요 강연회 등이 끊임없이 이루어져 1년 내내 휴관하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개인들은 이곳 무대를 빌어 독창회나 무용 발표회, 공연을 벌이기를 원했다. 경성에 온 헬렌 켈러도 이곳에서 강연회를 가졌다. 무용가 최승희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초청으로 만주로 공연을 가는 도중에 이곳에서 공연하였다. 외국에서 초청된 극단이나 영화들이 선보였고 스포츠 공연도 잇따랐다.
부민관의 본래 목적이 경성부민들에게 문화적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경성부가 운영하는 탓에 시간이 흐르면서 총독부나 경성부, 유관기관에서 하는 시책을 홍보하는 여러 가지 강연회나 모임, 영화 상영, 연극 공연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연히 경성부에서 진행하는 각종 행사들이 여기에서 치러졌다. 경성부 탄생을 기념하는 기념식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경성에서 결성된 군사후원연맹 같은 단체나 각종 사회단체의 창립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총독부나 군대에서 여는 각종 집회와 강연회, 그리고 여러 사회단체에서 여는 시국강연회가 줄을 이었다. 이처럼 경성부민관이 식민지 권력을 홍보하고 합리화하는 문화공간이 되었기에 항일 투쟁의 목표가 되기도 했다. 전쟁 막바지인 1945년 7월 24일에는 강윤국, 조문기 등이 동아시아 각국 괴뢰들이 부민관에서 일제에 충성하는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를 개최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행사장인 부민관을 폭파했다.
경성부민관은 8․15광복 뒤 미군이 접수해서 임시로 사용되다가 1949년 서울시 소유가 되었다. 1950년 4월 29일 국립극단이 창단되면서 국립극장으로 지정되었다. 1950년 서울 수복 뒤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다가 1975년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준공됨에 따라 시민회관으로, 1976년 세종문화회관 건립과 동시에 그 별관으로 이용되었고,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1991년부터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 질문1 일제가 경성부민관을 건립하면서 선전한 건립목적과 실제 사용된 내용과의 차이점을 말해봅시다.
  • 질문2 경성부민관의 시설 규모를 말해봅시다.
  • 질문3 조문기․강윤국 등이 경성부민관을 폭파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4 광복 후 경성부민관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순서대로 말해봅시다.

읽기자료 2

대한애국청년단의 결성

경성부민관 폭파 사건의 주역은 유만수, 강윤국, 조문기 등이다. 유만수는 경기도 안성, 강윤국은 서울, 조문기는 경기도 화성 출신이다. 각기 출신 지역이 다른 이들은 항일의 뜻으로 의기투합한 곳은 일본이었다. 이들은 일본 가와사키 시[川岐市]의 군수 공장인 일본강관주식회사에 취업하였다. 일본강관주식회사는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군수공장으로 전환된 업체로, 조선에서 모집한 20대 전후의 청년들이 훈련공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여기에 민족적 차별과 멸시까지 받아야 했다. 세 인물은 각기 일본강관주식회사에 취업중인 1943년 5월 조선인 노동자들을 이끌고 일제의 민족차별에 항의하며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다. 이 파업은 3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가와사키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파업에 참여했던 많은 조선인들이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으며 잠적한 조문기와 유만수는 일본 전역에 지명수배가 내려졌다.
지명수배로 활동이 어려워진 조문기와 유만수는 귀국을 결심했다. 이들은 개별적인 독립운동보다는 임시정부와 같은 단체의 조직원으로 활동하기를 원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큰일을 벌여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5년 1월에 귀국한 두 사람은 동지 규합에 나섰다. 주요 대상자들은 강윤국, 권준, 우동학 등 일본강관주식회사의 훈련공으로 같이 지내다가 먼저 귀국한 인물들이었다. 3월에는 그동안 포섭한 동지들 중에서 가능한 자들을 중심으로 소수 정예의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였다. 조직의 명칭은 대한애국청년당으로 정했다. 조직원은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권준, 우동학, 박호영 등 6명이었고 임시 의장에는 연장자인 유만수가 추대되었다. 이후 뜻을 같이하려 인물들이 속속 결집되어 대략 2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친일파, 침략원흉들을 제거하기로 뜻을 모으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정보수집, 인원포섭, 무기준비 등 업무를 분담하였고 거사를 일으키기 위한 세부 계획을 세웠다.

  • 질문1 경성부민관 폭파 사건의 주역인 유만수, 강윤국, 조문기가 서로 처음 만났던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2 일본강관주식회사 파업 후 유만수 등이 서둘러 귀국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유만수와 조문기가 임시정부와 같은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기 위하여 계획했던 것은 무엇인가요?
  • 질문4 대한애국청년당은 어떤 목적으로 조직되었나요?

읽기자료 3

대한애국청년당의 거사 계획과 실패

대한애국청년당은 우선 친일파 거두 3명, 총독부 관리 3명을 처단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박춘금이 1순위로 거론되었으며, 이밖에 화신재벌 박흥식, 중추원 참의까지 오른 친일경찰 김태석 등이 거론되었다. 대상자에 대한 정보 수집은 강윤국, 박호영, 권준 등이 맡고 거사에 사용할 다이너마이트와 권총 구입은 유만수가 담당하기로 하였다. 경비는 각자 조달하기로 했다. 또한 친일파 처단 외에 일제침략의 상징물 세 곳을 폭파한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상징물 세 곳은 1순위가 조선총독부 건물이고, 그 다음이 용산의 군사령부,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 순이었다.
1945년 5월 명월관에서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모여 ‘대의당’을 결성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애국청년당의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대의당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전쟁 협력과 황도주의 확산을 위해 박춘금을 중심으로 한 친일파들이 “일신일가(一身一家)의 소의(少義)를 포기하고 진충애국(盡忠愛國)의 대의(大義)에 살자”는 취지로 조직한 친일단체였다. 이는 일제 말기 가장 적극적인 친일 단체로서 당수인 박춘금을 비롯해 고원훈, 김동환, 김연수, 박흥식, 손영목, 신태악, 이광수, 이성근, 이승우, 이원보, 조병상, 주요한 등 당시의 대표적인 친일파들이 거의 망라된 조직이었다. 대한애국청년당은 친일파 처단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대의당 결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등 거사 준비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대의당 결성식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거사를 일으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무기구입 또한 쉽지 않았다. 더욱이 결성식 당일에 경비가 삼엄하여 접근조차 어려웠다. 결국 대의당 결성을 저지하고 박춘금을 처단하려던 1차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 질문1 대한애국청년당이 우선 처단하고자 했던 친일파 3명은 누구였습니까?
  • 질문2 친일파들이 대의당을 결성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 질문3 대의당 결성식 때 친일파 처단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4

거사를 위한 폭탄 제조 작업

대한애국청년당은 친일파 처단을 위해 폭탄 제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폭약을 구하기 위한 장소로 공사장을 택하였다. 마침 신촌에 있는 변전소를 수색으로 이전하는 공사가 있었고 그곳에서 폭파가 많았던 것이 주목되었다. 이들은 뜻을 같이한 동지의 매부가 되는 사람을 통하여 공사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들은 다이너마이트를 분해해 떡처럼 뭉쳐있는 내용물을 조금씩 떼어내 신발 밑창 에 조금씩 묻혀서 가지고 나오는 방식으로 폭탄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모아진 폭약의 양은 너무 적었다.
폭약의 양이 턱없이 부족하자 이들은 새로운 구상을 하였다. 당시에는 공사장에서 일한 대가로 물엿, 식권, 귤, 담배 등을 탈 수 있는 배급표를 받았는데, 이들은 당시에는 구하기가 쉽지 않은 담배의 배급표를 감독에게 제공하였다. 그렇게 감독의 환심을 사자 감독은 이들을 믿고 폭약이나 뇌관을 나르는 심부름까지 서슴지 않고 시키게 되었다. 이들은 폭약 나르는 심부름을 하면서 이것을 여기저기 빼돌려 숨겨놓았다가 나중에 몰래 찾아오는 방법을 썼다. 나중에는 발파까지도 이들에게 일을 맡기게 되면서 자신들이 만든 폭탄을 발파작업에 끼워 넣어 폭발실험까지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사건 당일까지 폭탄 3개를 만들었다. 회의를 통하여 유만수, 강윤국, 조문기 세 사람이 폭약을 장치하기로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유만수, 조문기 두 사람이 폭탄을 들고 들어가고 강윤국은 권총을 가지고 엄호하는 역할을 하기로 했다. 경비가 삼엄했기 때문에 폭탄을 장치하다가 잡히면 권총을 쏴서 소란을 유도하고, 이틈을 이용하여 이들은 도망을 하고 대회는 대회대로 무산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들키지 않고 단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과 무대 밑 2곳에 폭탄을 설치하였고 유유히 행사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설치한 폭탄은 3분 후 폭발하도록 장치되어 있었다.

  • 질문1 대한애국청년당이 폭탄 제조를 위해 폭약을 구했던 과정을 말해봅시다.
  • 질문2 경성부민관을 폭파하기 위하여 제조한 폭탄은 모두 몇 개였나요?
  • 질문3 대의당 행사장에 폭탄을 설치한 인물들의 이름을 말해봅시다.

읽기자료 5

경성부민관 폭탄 사건의 결과

폭탄을 설치하고 행사장을 빠져나온 세 사람은 숨죽이며 길 건너 오늘날의 서울시청 앞에서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마음속으로 카운트다운을 하였다. 폭탄은 9시 10분경 굉음을 내며 폭발하였고 경성부민관에서는 아비규환의 비명이 터졌다. 화약연기와 먼지가 뿜어져 나오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대회장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강연회가 최고조에 달할 즈음 오후 9시 10분 안팎으로 사람이 꽉 찬 부민관에 돌연 회장을 진동하는 폭음이 들리며 폭탄 두 개가 연속 폭발되어 회장은 별안간에 일대 수라장으로 변하고 대의당 당원 한 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왜놈과 박춘금 일당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며 불사신 조선민족의 의기를 만천하에 선양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 거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조문기는 당시 “20명 정도가 죽었다고도 하고, 부상자는 많았지만 죽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도 하는데 그것이 다 추측”일 뿐이라고 증언하였다. 다시 말해서 당시 일제가 발표를 안했기 때문에 정확한 상황은 모른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거사가 일제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전국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지고 주동자를 수배하였다. 폭파범에 대한 포상금으로 5만 엔이 책정되었는데, 박춘금이 개인적으로 2만 엔을 보태 실제로는 7만 엔이나 되었으니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사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한 사건이 되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꺾일 줄 모르는 민족혼, 독립열의를 내외에 과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잔혹한 일제의 학살음모를 분쇄하여 수많은 민족 지사들을 위기에서 구출한 사건이기도 하다. 뒷날 알려진 바에 따르면, 1945년 7월 24일 분격대회는 여러 차례에 나누어 극비리에 민족 지사들을 학살하려던 계획의 신호탄이었다고 한다. 이미 각 지역에 행동대가 조직되었고 명령만 하달되면 학살극을 벌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회가 폭탄 세례를 받자 박춘금은 이미 정보가 흘러나간 것이라 판단하고 계획을 포기하였다.
광복 후 조문기 등이 박춘금을 찾아가 자신이 사건의 당사자임을 밝히자 박춘금은 이튿날 일본으로 도망하였다. 그가 민족을 배반한 죄를 깨닫기 보다는 끝까지 본인의 안위를 도모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질문1 일제가 경성부민관 폭파범에게 걸었던 현상금은 얼마였나요?
  • 질문2 경성부민관 폭파의 효과를 박춘금의 의도와 관련하여 말해봅시다.
  • 질문3 해방 후 조문기 등이 박춘금을 방문하자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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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경성부민관 사건에 대한 신문 기사 내용이다.

  • 질문1 당시 신문 기사를 읽고 독립을 열망하던 우리민족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상상하여 말해봅시다.

시각자료 2

다음은 1945년 7월 24일 경성부민관을 폭파했던 사실을 알리는 내용의 표지석이다.

  • 질문1 표지석이 세워진 의미를 알리는 안내문을 작성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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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전개된 경성부민관 폭파 사건과 유사한 사례들을 조사하여 발표해봅시다.
모둠활동 2
폭력적 방법으로 일제에 항거하고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는 것의 옳고 그름을 모둠별로 이야기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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