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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반대궐기대회지(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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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온 고종 황제가 머물면서 대한제국의 법궁[임금이 주로 정사를 보며 생활하는 궁, 또는 국왕이 머무는 궁궐들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는 궁궐로 정궁이라고도 하는데, 정궁은 후궁․빈궁 등에 상대하여 황후나 왕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덕수궁은,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이후에도 1919년 고종이 사망할 때까지 머물게 되면서 한국근대사의 중심에 서 있던 곳이었다. ‘황제가 머물고 있다’는 상징성 때문인지 덕수궁은 종종 민의(성들의 의견)가 반영되는 공간이 되기도 하였는데, 1898년 덕수궁(경운궁) 남쪽 정문이었던 인화문에서는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고,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대한문 앞에서 대규모 시위가 펼쳐지기도 하였다.
해방 후 덕수궁은 다시 한 번 민의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데, 1951년 이후 6·25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휴전회담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이곳 덕수궁에 모여들었다. 1951년 7월 11일, 이곳에 모인 서울 시민들은 “38선에서 정전을 한다는 것은 또다시 국토를 분단하고 국제적 분쟁을 가져오므로 이를 절대 반대한다”며 궐기하였다. 서울 시민들은 이 자리에서 ‘중공군(현재는 중국군)은 국경으로’, ‘북한괴뢰군은 즉시 무장 해제하라’, ‘납치된 애국인사를 송환케 하라’고 주장하였다. 뒤이어 12월 10일 충무로 광장에서 통일 없는 ‘휴전반대국민총궐기대회’가 열리는 등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휴전 반대 혹은 북진통일 대회가 계속되는 가운데, 12월 19일 등에도 덕수궁에서 집회가 열려 휴전을 반대하는 주장이 이어졌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6·25전쟁은 북한 공산정권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 아래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할 목적으로 1950년 6월 25일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이다. 이에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자유진영에서는 유엔군이 참전하고, 뒤따라 공산진영의 중국과 소련(공군)이 북한을 지원하였다. 이에 이 전쟁은 남․북한 사이의 전쟁에서 국제적 성격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양측은 군사적으로 격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전쟁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엔은 ‘정전 3인위원회’를 설치하고 전쟁 이전 상태로 복원을 위해 여러 차례 회담을 시도하였지만, 번번이 무산되었다. 그런 가운데 1951년 4~5월, 이른바 ‘중공군(현 중국군) 춘계공세’에서 최대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 기간에 양측 모두 최악의 인명 손실을 본 후에야 무력으로 승리를 얻으려는 정책을 포기하고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정책을 택하게 되었다.
휴전협상은 1951년 7월 26일 ‘무엇을 논의할 것인가?’라는 의제에 합의를 봄으로써 본격적인 토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①의제 및 의사일정 채택, ②군사분계선 설정, ③휴전 감시 방법 및 기구 구성, ④전쟁 포로의 교환에 관한 처리, ⑤관련 각국 정부에 대한 건의 등의 의제를 토의하기로 합의하였다.
우선 합의된 5개의 의제 가운데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분계선 설정’ 의제를 놓고 협상에 들어갔다. 몇 번의 지루한 회의를 거친 후 1951년 10월 31일 회의에서 공산군 측은 오직 실제전선(접촉선)에 기초한 4㎞ 폭의 비무장지대 설치안을 제시하면서 이것이 최선의 제안이라 주장하였다. 유엔군 측 또한 협상이 일찍 타결되길 바라는 미국과 국제적 여론을 고려, 이 안에 동의하기로 함으로써 군사분계선 설정의 대타협을 보았다. 양측은 곧바로 1951년 11월 23일 실제 지상 접촉선 결정 작업에 들어갔으며 마침내 현재의 휴전선과 비슷한 군사분계선을 작성하게 되었다.
마침내 양측 참모장교들이 1951년 11월 26일 접촉선 결정 작업을 완료하였고, 쌍방이 이에 서명함으로써 그동안 난항을 거듭해 오던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설정 문제는 타결되었다. 그러나 휴전협정은 그보다도 1년 8개월이나 지나서야 체결될 수 있었다.
군사분계선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도 휴전협정의 조인이 늦어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전쟁 중 발생한 포로의 처리 문제에 있었다. 휴전협상 의제 가운데 제4항이었던 포로교환협상은 군사분계선협상이 어느 정도 정리된 1951년 말부터 시작되었다. 포로교환협상은 표면상으로 비교적 간단한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쌍방이 다 같이 인정한 「제네바협약 제118조」에 “포로는 적극적인 적대행위가 종료된 후 지체 없이 석방되고 송환하여야 한다.”고 명확히 규정되어있어, 이견의 여지가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포로 가운데에는 귀국을 원치 않는 자도 있을 것이며, 자기 나라의 정치제도를 반대하는 처지에서 제3국을 택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귀국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네바협약 체결 당시에는 이와 같은 사항을 예측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외규정을 두지 않았는데, 이것이 바로 포로교환협상 토의에서 쟁점이 되었다.
결국, 1952년 1월 중순까지 휴전회담은 포로 문제로 별로 진척이 없었다. 협상자들은 사소한 몇 가지 항목에 관해서는 합의하였으나, 포로들의 자원송환 문제에 관해서는 양측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 후 포로의 교환 방법은 포로수용소의 폭동사건과 결부면서 회담의 최대 쟁점이 되었다. 당시 협상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이 전쟁이 앞으로도 18개월이 더 흐른 뒤에야 최종적인 합의에 도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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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1953년 유엔군과 공산군이 휴전, 특히 포로송환 문제를 놓고 난항을 거듭하는 동안 국제사회에서는 휴전에 대한 열망이 커지고 있었다. 1952년 12월 13일 국제적십자사 집행위원회는 전쟁의 즉각적인 종결과 제네바협정에 따른 병상(병들거나 아픈) 포로의 송환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가결했다. 따라서 양측은 우선 제네바협정을 준수한다는 의미에서 내부적으로 병상 포로의 교환에 관한 문제를 검토하고 있었다. 국제사회는 한국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점차 휴전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었다. 
1952년 말 미국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빠른 기간에 6·25전쟁을 종결시키겠다’고 강조했던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은 1953년 2월 2일 국회에 보내는 연두교서에서 미 해군의 대만 봉쇄를 철회하기로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중국을 압박하였다. 중국은 지금까지 중국 본토에 대한 장개석 대만 정부의 군사적 위협에 별 부담을 갖지 않고 한국 전선에만 모든 군사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가 대만 중립정책 포기를 천명하면서 군사적 및 심리적으로 커다란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휴전협상에 큰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즉, 1953년 3월 5일 소련 수상 스탈린이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스탈린의 사망 후 소련의 국내 정세는 후계자들이 스탈린의 정책을 그대로 따라 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스탈린의 후계자 말렌코프(G. M. Malenkov)의 등장은 새로운 노선으로의 정책 변화를 암시하였다.
소련의 비밀외교문서에 의하면, 소련 정부는 1953년 3월 19일 “이제까지 취해 온 노선을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맞도록 전쟁을 종결시킨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세계평화구축이라는 면에서 전쟁의 중지는 모든 국민의 이해, 특히 중국과 북한 인민의 근본적인 이해에 들어맞는 것”이라는 입장을 북한과 중국에 전달하였다. 또한, 소련은 3월 21일 제2차 세계대전 종식 이후 최초로 모스크바 방송을 통해 미국과 영국이 연합국의 일원으로써 전쟁을 종식하는데 일익을 담당했음을 발표하였다.
소련 정부는 6·25전쟁으로 북한에 억류된 영국인 외교관과 선교사들의 석방 교섭에 나서겠다고 했으며, 독일 문제에서도 유럽공동방위조약에서 서독 인준에 대해 상당히 유화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되자 전쟁의 직접 당사자인 북한과 중국이 전쟁 종식을 원하면 곧바로 휴전을 추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성숙하고 있었다.
이 무렵 북한-소련 비밀전문에 의하면, 당시 북한의 김일성도 “우리 측이 전쟁의 종결과 평화달성에 관한 주도권을 잡을 때가 왔다.”고 하여 소련의 노선에 따를 것을 밝히고 있었다. 그 결과 유엔군 측은 공산주의자들의 변화된 외교 노선에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휴전협정 체결을 위한 활동에 힘을 얻었다.

  • 질문1 1953년 2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취한 정책은 무엇인가요?
  • 질문2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이후 6·25전쟁에 대한 소련의 견해는 어떻게 변화했나요?

읽기자료 2

한국 정부는 처음 휴전협상이 제기될 때부터 협상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한국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휴전협정에 동의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을 반대한 이유는 통일에 대한 강한 열망, 북한의 남침에 의한 막대한 피해, 중국과 소련의 군사력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장차 다시 북한으로부터 침략을 받을 수도 있다는 등의 생각 때문이었다.
한국 정부의 공개적인 휴전 반대 입장은 판문점 휴전협상의 진전 상황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자 예전보다 더욱 강도가 높아지기 시작하였으며, 휴전 반대 데모와 대중 집회가 전국적으로 확산하여 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휴전회담을 반대하며 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고 결의를 나타내었으며, 국회도 이에 발맞추어 ‘휴전반대 및 북진통일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만일 유엔군사령부가 중국공산군이 압록강 이남에 잔류하는 것을 허용하는데 동의한다면,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에서 철수시킬 것”이라고 통보하였고, 또 “만일 싸워야 한다면 단독으로도 싸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엔군사령관 클라크(Mark W. Clark)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였다. 이 회담에서 논의된 중요한 문제는 유엔군과 중국공산군의 동시 철군문제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회의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소련이 침략할 경우 미국의 원조 보장’, 그리고 ‘평화가 확보될 때까지 해군의 봉쇄와 공중 방어의 계속 및 국군의 증강’ 등을 요구하였다. 또한 “휴전을 반대하는 견해에는 변함이 없으며, 포로 관리를 목적으로 인도군이 한국에 입국한다면 내 명령으로 송환거부 포로들을 석방하겠다.”는 뜻까지 밝혔다.
1953년 5월 미국은 휴전을 앞당기기 위해 서두르고 있었다. 클라크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공산군 측에 제안할 송환거부 포로에 관한 유엔군의 최종안을 설명하였다. 그는 이 대통령에게 “휴전협정에 협력할 경우 미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지원을 보장해 주겠다.”고 설득하고 나섰다.
그러나 유엔군의 최종안은 한국 정부와 국민들을 경악케 하였으며, 심한 반발을 가져왔다. 우선 휴전회담 한국대표가 회담 참석을 거부하였다. 한국대표의 휴전회담 참석 거부는 유엔군의 제시안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 포로 석방을 은밀히 추진하면서, 남한 전역에 임시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모든 미국 주재 한국 관리들을 귀국하도록 함과 동시에 한국 측 휴전회담 대표들을 소환함으로써 휴전 반대 입장을 확고히 하였다.
1953년 6월 8일 한국 국민의 기대와는 아랑곳없이 포로송환협정이 조인되었다. 포로송환협정의 조인은 사실상 휴전 성립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며, 가장 많은 피를 흘린 한국 국민의 의사가 무시된 것이었다. 자연히 국민들의 휴전반대운동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데모 인파는 연일 거리를 메우고 “우리에겐 북진통일이 있을 뿐, 휴전이라면 우리에게 죽음을 달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산하를 흔들었다.

  • 질문1 한국 정부가 휴전에 반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한국 정부가 휴전회담에 반대하기 위해 취한 조치로는 무엇이 있었나요?

읽기자료 3

■「정전결사반대 서울서 궐기대회」
서울시민들도 11일 정전반대국토통일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대회장인 덕수궁 앞뜰에는 사 만여 시민이 태극기와 “통일 없는 정전은 결사반대한다.”, “중공군은 압록강 이북으로 구축하라”, “북한괴뢰군을 즉시 무장해제하라”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운집하였다. 
대회는 이동률씨의 사회로 열리어 국민의례와 노일경씨의 개회사가 있은 다음, 홍호씨로부터 “국토를 통일하여 한국의 영원한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우리 국민은 생명과 모든 것을 바쳐서 싸웠으며 또한 앞으로도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싸울 것이다.”라는 요지의 참전 각국 원수, 국제연합사무총장 및 국제연합총사령관에게 보내는 메시지 낭독이 있었다.
이어 결의문 낭독이 있은 다음 우렁찬 만세삼창으로 동(同) 대회를 성황리에 끝마치었다.(『동아일보』 1951년 7월 13일 자)

■「덕수고궁에 시민궐기, 38선 재판 반대를 결사 절규」
바야흐로 판문점 휴전회담은 무르익어 다시금 38선의 비극과 6·25를 재연시킬 우려가 농후해지고 있는 이때, 과거 6년간 이 나라 이 민족에 가진 고난을 강요하며 자주독립을 허용치 않은 38선의 재판은 영원한 이 나라의 평화를 가져온다고 보장하기 어려운 이때, 이에 서울시민들은 또 다시 총궐기하여 평화보장 없는 휴전을 반대하여 19일 아침 11시 동 연합회 주최의 대회가 덕수고궁에서 수만의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김일씨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먼저 시경 악대의 주악과 국민의례가 있은 후, 임홍순씨의 38선의 비극을 다시금 맛볼 수 없으며, 6·25의 재판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는 개회사가 있은 후, 유엔총회와 트루먼 미 대통령 및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 등에게 각각 보내는 메시지를 함두영, 유동면, 안창렬, 등 제씨가 순서로 낭독·결의한 바 있었다.
이에 이어 평화보장 없는 휴전을 반대하는 대회의 결의문을 강창희씨가 낭독하자 이것 역시 만장일치 박수로 통과되었으며, 납치된 애국지사의 석방에 대한 결의문도 최봉하씨 낭독으로 통과되었다. 이로써 만세삼창으로 동 대회는 12시 반 경 원만·성대히 끝마쳤으며, 대회가 끝난 후 시민들은 각각 시가행진을 하며 기세를 올렸다.(『조선일보』 1951년 11월 30일 자)

■「휴전반대 천만 명 동원 대회 개최는 팔천 회」
당국의 집계에 의하면, 지난 4월 하순경부터 전국 방방곡곡에서 개최된 통일 없는 휴전반대궐기대회는 5월 12일 현재 약 8천 회에 달하고, 동원된 인원은 남한인구의 반수 약 1천만에 달하고 있다 하여 싸우는 이 나라 겨레의 굳은 결의는 여실히 표명되고 있다.
즉 13일 치안국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혈서 또는 일가 단식 등 가지가지의 비장한 결의를 내외에 표시한 휴전반대운동은 4월 14일부터 5월 12일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개최되어 민중대회가 7천5백여 회, 각 지방의회의 결의대회가 5백40회에 달하는 한편, 동 대회에서 결의된 결의문 약 1천5백 통이 정부에 건의되었으며, 동 대회에 참가한 인원은 8백여만 명으로 남한인구의 반수에 달하고 있다 한다.
그런데 당국자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현재도 각 지방에서 그칠 줄 모르고 개최되고 있다고 하며, 최후의 1인까지 싸워 적색도장(공산주의 무리)의 국외추출을 열원하는 굳은 국민의 결의는 의기충천하고 있다고 한다.『동아일보』 1953년 5월 15일 자)

■「중구 다방업자 휴전반대대회」
다방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북진을 부르짖고 통일 없는 휴전을 반대하는 ‘중구 다방여성 총궐기대회’가 18일 오전 10시 수도극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날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여성들은 휴전을 반대하고 공산흉계를 분쇄하겠다는 결의 밑에 대회를 끝마친 다음, 질서정연한 시위행진을 하고 북진의 기백을 여실히 나타낸 바 있었다.(『경향신문』 1953년 5월 19일 자)

■「미헌병과 소충돌 진명고녀생 21명이 부상」
9일 거시적인 휴전 반대 데모에 참가한 진명고 여학생 20명이 해산을 명령하는 미군 헌병들에 의해 부상을 당한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즉 이날 시위에 참가한 시내 각 중학교 학생들은 정오경 미 제8군사령부와 미 제5공군사령부 앞에 쇄도하여 통일 없는 휴전 반대와 반공 포로의 즉시 석방 등 구호를 높이 부르면서 열열한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때마침 미 제5공군사령부 후문을 경비 중이던 미군 헌병이 쇄도하는 진명고 여학생들을 제지하려고 이들을 구타한 나머지 동 고녀생 21명을 부상시켰다. 부상당한 학생들은 대부분 타박상을 입었는데, 그 중 기이한 것은 면도칼을 사용한 것 같은 열상을 팔목에 입은 학생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미 제8군사령부에서는 기총 2정을 장치한 소형장갑차가 출동하는 한편 장탄(裝彈)한 경비원들의 엄중한 경계로 전기한 바와 같은 마찰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후략). (『경향신문』 1953년 6월 11일 자) 

  • 질문1 휴전반대궐기대회에 참여하였던 군중들이 내걸었던 슬로건의 내용은 대체로 무엇이었나요?
  • 질문2 1953년 5월 12일 당시에 파악된, 휴전반대궐기대회의 개최 횟수와 참여 인원은 각각 얼마나 되었으며, 당시 남한인구의 어느 정도에 해당하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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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625전쟁 당시 판문점에서 양측 군인이 만나 휴전협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 질문1 테이블 중앙의 깃발과 양측 군인들의 얼굴을 살펴보고, 양측은 각각 어디를 대표하여 참석한 것으로 보이나요?
  • 질문2 양쪽 대표는 물론 테이블 중앙의 지도를 자세히 살펴볼 때, 이 협상에서 가장 심각하게 논의되었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 질문3 사진과 같은 움직임에 대해 당시 우리나라(남한)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시각자료 2

사진은 625전쟁 기간인 1953년에 벌어진 한 시위 모습이다.

   

  • 질문1 사진에 나타난 사람들의 복장을 살펴보아 이들은 어떤 사람들로 생각되는가요?
  • 질문2 사진에 보이는 피켓에 쓰인 영문과 한문 등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파악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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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휴전반대궐기대회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일어난 휴전반대궐기대회의 사례를 찾아 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625전쟁 당시, 한국 정부와 국민은 휴전을 반대하면서 북진통일을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북진통일휴전협상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한 후 자신의 의견을 주장해 봅시다.

   

모둠활동 3

625전쟁 휴전회담의 최종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 문서에 서명한 당사자로 한국군이 빠져있는데, 그 이유를 찾아봅시다.

모둠활동 4

1953727일 체결된 휴전협정은 한국정부와 국민들의 기대나 의사와 다른 휴전이었기에 앞으로의 통일은 반드시 한국인이 주체가 된 자주적인 통일, 무엇보다도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적인 통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앞으로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 각자의 견해를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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