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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영 생가(13도 창의대장으로 서울진공작전을 지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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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들이여! 우리는 함께 뭉쳐 우리의 조국을 위해 헌신하여 우리의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야만 일본제국의 잘못과 광란에 대해서 전 세계에 호소해야 한다. 간교하고 잔인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인류의 적이요, 진보의 적이다. 우리는 모두 일본 놈들과 그들의 첩자, 그들의 동맹인과 야만스런 제국주의 군인을 모조리 죽이는데 힘을 다해야 한다.
광무 11년(1907년) 9월 25일. 대한관동창의대장 이인영."

 

위 글은 이인영 선생이 대한관동창의대장의 이름으로 해외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이다. 의병을 일으킨 이유가 단지 우리의 독립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제국주의가 진보와 인도의 적임을 세계만방에 알려 우리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37
현재 상태 원래 ㅁ자형 가옥이었으나 사랑채는 일부 허물어지고 안채는 내부 일부가 변형되었고, 돌담 일부가 남아 있다. 이인영과 6촌인 이덕영씨가 소유하고 있으며, 현재 여주 군청에서 복원 중이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 이후 일제의 침략은 더욱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1907년 헤이그 특사의 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시켰을 때 우리 민족은 일제에 맞서 더욱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항쟁을 벌였다. 그 중 가장 빛나는 투쟁은 의병전쟁이었다.

1907년 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해산군인을 흡수한 의병전쟁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맞게 된다. 군대해산은 의병항쟁의 불길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다. 전국 각지에서 고립적이고 외로운 항일투쟁을 전개해왔던 의병들은 해산 군인의 합류와 무기의 사용으로 전투력이 향상되었다. 이러한 역량을 바탕으로 투쟁방안을 전혀 새롭게 전환시켜갔다. 무엇보다 먼저 이들은 각기 고립적으로 투쟁해왔던 방법에 대한 반성을 하였다. 비록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병들과 연합투쟁을 전개하거나 시도한 경우도 있지만 이때부터 도의 경계를 넘어서서 의병진영 간의 연합이나, 연계하는 투쟁 전략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평안도와 황해도 그리고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북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박기섭·김수민·김규식·허위·이인영·이강년·민긍호 등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연합항쟁을 모색하고 있었다. 도와 도를 연결하는 이러한 연락망의 구축은 전국적으로 통일되어 대규모의 의병연합부대, 즉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비로소 전국 각지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대표적인 의병부대를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갖춘 이른바 13도창의대진소의 결성이 이뤄지며 우리민족의 의병투쟁사에서 빛나는 성과를 달성하였다.

 

질문 1) 다음 신문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당시 의병의 특징을 찾아 써봅시다.

 

"평안도 의병은 황해도 의장 박기섭과 연락하고, 황해도 의병은 장단 의병장 김수민과 연락하고, 김수민은 철원 의병장 전 참위 김규식과 연통하고, 김규식은 적성 마전 의병장 허위와 상통하고, 허위는 지평 가평 등지 의병장 이인영과 통섭하고, 이인영은 제천 등지의 이강년과 원주 등지 의장 민긍호로 상통하며 같이 모의한다 하고 ……
『대한매일신보』(국문판), 1907년 11월 28일, 「지방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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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이인영(李麟榮, 1867~1909)은 여주군 북내면 교항동 출신으로 일찍이 학문이 높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학자였다. 인영(寅榮)이라고도 하였으며 후에 문경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발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인석·이강년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500여명을 영솔하여 춘천과 양구 사이에서 일본군 80명과 격전하여 적 다수를 도륙하였으며, 이 때 아군 5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1896년 여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고종 황제의 권고를 받들어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그 후에도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재산을 모두 써 버리고 부모와 처자를 데리고 문경에서 내려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이어 1907년 8월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해산군인들이 각지의 의병에 합세하여 의병운동이 활기를 더해갔다. 이에 1907년 9월 강원도 원주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던 의병장 이은찬과 이구재가 해산병 80명이 포함된 500명의 의병을 모은 후 이인영을 찾아와 의병대장이 되어줄 것을 청하였다. 이인영은 “나도 창의(倡義)의 뜻을 품은 지는 오래 되나 부친이 병상에 누워 있어 돌볼 사람이 필요한 형편이므로 차마 가정을 떠나지 못할 정리라” 라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은찬은 “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히는 국가의 난을 당하여 국가의 일이 부자간의 일보다 중합니다.” 하며 4일간 그곳에 머물면서 간곡하게 요청하였다.

이에 이인영도 드디어 승낙한 후 강원도 원주로 출진하여 관동창의대장에 오른 후 사방에 격문을 발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격문의 내용에 감명 받은 사람들이 의병에 가담하였다. 이때 의병을 모집하는 방법은 사람을 시켜 마을마다 격문을 보내어 일반에게 알리고 응모자를 비밀리에 지정된 장소로 모이게 하는 것이었다.

뜻을 같이 하여 모인 의병이 수천 명(해산병 200명 포함)에 달하자 우선 급한 것은 식량과 자금 문제였다. 일부 무고한 양민의 미곡을 탈취하여 의병운동 자금으로 유용하고자 하는 무리도 있었으나, 그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어 굶주림에 떨게 하는 것은 차마 우리들이 할 바가 아니오. 또 의병이 할 행위가 아니니, 우리는 오직 하늘을 대신하여 그들 매국노 및 신협약을 체결하는데 부화뇌동한 현 내각원(內閣員) 등의 의롭지 못한 재물을 빼앗아 군자금을 도울 뿐이라” 하여 매국노들의 재산을 빼앗아 의병활동에 충당하기로 방침을 결정하였다.

  • 질문1 이인영은 처음에는 부친의 병이 중하여 이를 돌보기 위해 의병장 추대를 거부하였습니다. 의병장 추대를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질문2 위 질문의 거꾸로 질문입니다. 이은찬과 이구재는 부친의 간병으로 의병장 추대를 거절한 이인영을 왜 간곡히 설득하여 의병장으로 추대하려 했을까요?

읽기자료 2

이인영이 관동창의대장에 오르자 그의 공평한 인품을 흠모하여 원근에서 그를 따르는 의사가 계속 모여들어 군세는 더욱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에 이인영은 원주를 떠나 횡성·지평·춘천을 왕래하며 8도의 의병규합에 진력하면서 각도 의병장에게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었다.

 

"용병의 요체는 고립을 피하고 일치단결하는 데 있다. 각도의 군사를 통일하여 뚝이 무너지는 형세를 타서 근기지방(경기·서울)으로 밀려들면 온 천하를 우리 보물로 하기는 불가능하더라도 한국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리하게 될 것이다.
(최해청, 『대한매일신보 발췌록』, 청구대학출판부, 50쪽)"

 

이인영은 전국의 의병에게 보내는 격문에서 고립적인 의병항쟁을 지양하고 대동단결의 힘으로 서울을 공략하여 의병들의 최후 목표를 달성하고자 호소하였던 것이다. 이인영의 호소에 응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몰려들었다. 전국 각지의 의병이 몰려든 배경에는 이인영이 전기의병 당시 유인석·이강년 등과 활동했던 경험과 경기도 일대에서 널리 알려진 유학자로서의 명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그가 고종의 비밀 명령을 받았다는 소문이 난 것도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이때 각도의 의병을 거느리고 온 의병장들을 보면, 전라도는 문태수, 충청도는 이강년, 강원도는 민긍호, 경상도는 신돌석, 평안도는 방인관, 함경도는 정봉준, 경기도는 허위, 황해도는 권중희였다.

이인영은 또한 김세영을 서울에 파견하여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의병부대는 애국단체이니 정의와 인도를 주장하는 여러 나라들이 국제공법 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하고 성원해주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에 의하여 한국의 외교권은 박탈되었기 때문에 13도 의병부대의 서울 진공작전은 국제적인 고립 속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각도의 의병장들은 이인영을 13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3도 창의대장으로 추대 받은 이인영은 각도 의병장과 상의한 후 자신들의 부대 이름을 내리고 각 군의 칭호를 정한 후 전국 연합의병부대 편성에 착수하였다.

이렇게 구성된 13도 연합의병 부대의 총수는 약 1만 명(혹은 8천명)이었고, 그 가운데 정예군이라 할 수 있는 근대적 무기, 즉 양총을 가진 과거의 진위대 병사들 및 기타의 훈련받은 군인이 약 3,000명이었다. 즉 문경으로부터 이은찬과 이구재가 거느리고 온 80명, 강원도의 민긍호의 부하가 약 800명, 강화·청주의 해산병, 기타 경기 각지의 해산병, 기타의 훈련받은 군인이 양주에 모두 모였을 때 약 3,000명이나 되었다. 이는 해산병과 그 이전의 군인이었던 자를 합한 숫자였다.

  • 질문1 다음 글을 읽고 1907년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된 원인을 정리해 봅시다. "일제가 남긴 『폭도사편집자료』와 『조선폭도토벌지』에서는 의병의 봉기 원인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대체로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의 체결, 군대 해산 등을 주요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충청북도의 보고서에는 그 외에 『대한매일신보』을 통한 일제에 대한 반감의 고취가 의병봉기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되어 있다. 또한 함경도의 경우에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의 발효되어 사냥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산포수들이 생존권에 위협을 받게 되자 의병에 뛰어들었음을 말하고 있다."
  • 질문2 이인영의 격문에 전국의 의병장들이 하나로 모여 13도 창의군을 조직하게 된 이유를 위 글을 참고하여 이야기 해봅시다.

읽기자료 3

13도 창의부대는 서울을 향하여 진격을 시작했다. 1908년 정월에 군사장 허위는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의 지점까지 접근했으며 후속 부대들이 그 뒤를 따랐다. 당시의 의병부대의 모습에 대하여 『기려수필』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서로 연락하여 그 성원을 받아 각 도에 격문을 전하고 고기(鼓起)로써 하니 원근 응모자가 주야부절로 모인 자가 만여 인이었다. 이에 있어서 서울로 진군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협약을 취소시키고 국권을 회복코자 하여… 군사(軍師)는 그 군려(軍旅)를 정돈하고 진발(進發)을 준비하였다. 이에 이인영은 각 도 의려(義旅)로 하여금 일제 진군을 재촉하고, 몸소 3백명을 이끌고 먼저 동대문 밖 30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각 군이 이르지 않았는데 일병이 먼저 쳐들어 와 서로 분전하였으나 적에 대적할 수 없어 이에 퇴군하였다."

 

본래 연합부대의 계획은 동대문 밖에서 전군이 집합하여 대오를 정비한 후 음력 정월을 기하여 서울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즉 1908년 1월 28일(음력 12월 25일) 의병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 사망의 부고를 받게 되었다. 당시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이인영은 부친의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곧 뒷일을 군사장 허위에게 맡기고 자신은 전열에서 이탈하여 문경으로 향하였다. 그래서 군사장인 허위가 친히 300의 정병을 거느리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이르렀으나 집합하기로 약속한 각지의 의병부대와 연락이 끊어지게 되고, 이 기미를 알게 된 일본군에게 각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진격하는 의병부대가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연합의병부대의 서울 탈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908년 2월 이후 서울 근교에서의 의병들의 활약 기사가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이인영의 하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후 부친의 장례를 마친 이인영에게 많은 의병들이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하였으나, 그는 “나라에 불충한 자는 어버이에게 불효요 어버이에게 불효한 자는 나라에 불충이니, 효와 충은 하나요 둘이 아니라고 하면서 국풍을 지켜 3년 종상의 효도를 다한 후 재기하여 13도 창의군을 일으켜 권토중래의 세력으로 일인을 소탕하겠노라”고 말하면서 유생의 입장에서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이인영은 노모와 슬하의 두 아들을 데리고 상주군으로 몸을 피하였다가 다시 충북 황간군 금계동에 이주하여 은신 중 1909년 6월 7일 일본군 대전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그는 당당히 자기 소신을 토로하고 일제의 침략을 규탄함에 있어서 하나도 굴하는 빛이 없었다. 일제의 관헌도 그를 ‘의사’로서 대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해 9월 20일에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 질문1 다음은 이인영이 체포된 후 일본군의 가혹한 심문 속에 있었던 일입니다. 글을 읽고 이인영의 대답 속에 숨어있는 사상을 쓰고, 이 사상의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 해봅시다. "일군 헌병의 가혹한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견뎌낸 선생은 당시 전황이 그러한데 어찌 부친이 사망했다고 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는 질문에 “부모의 상을 치르는 것은 조국의 규칙인데 이를 행하지 않으면 불효요, 부모에 효도하지 않는 자는 금수와 같으며 금수는 신하가 될 수 없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불충인 것이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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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1909년 8월 13일 경성지방재판소가 선생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교수형에 처한 판결문입니다.

  • 질문1 다음 글은 판결문의 내용입니다. 글을 통해 이인영이 의병을 일으킨 목적을 이야기 해봅시다. "피고는 ……통감정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자이다. 융희 원년 7월 군대가 해산되고 전 황제폐하가 양위하자 요로의 대신들을 매국노라 지목하여 이들을 살육하고 새로이 자기가 신임하는 자로 정부를 조직하여 일본인은 물론 기타 외국인을 국외로 구축하는 등 당시의 정사를 변경할 목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기로 다짐하였다. ……"

시각자료 2

다음은 독립기념관에 있는 이인영의 창의격문 어록비입니다.

  • 질문1 창의 격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이인영의 서울 진공작전의 목표를 정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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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다음 글을 읽고 자신이 이인영 총대장의 입장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모둠 별로 의견을 정하고 의견이 다른 모둠과 토론을 해봅시다.

 

총대장 이인영은 서울진공작전을 앞두고 갑자기 의병부대에서 이탈하였다. 이유는 고향에서 병중에 있던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그는 부친상을 모시기 위해 의병부대를 떠나며 다음과 같은 이유를 밝혔다.

 

"나라에 불충함이 부모에게 불효함이 되며, 부모에게 불효함이 나라에 불충함이 된다. 그 道는 하나이며 둘이 아니다. 고로 나는 차라리 나라 풍속에 따라 3년상을 입어 효도를 다한 후에 재기하겠노라."

 

유교사상으로 본다면 부자관계에서의 효는 ‘하늘의 맺어준 인연’이고, 군신관계에서의 충은 ‘의리로 맺어진 인연’이다. 효는 ‘하늘의 뜻(천합)’이기 때문에 끊을 수 없지만 충은 ‘의리가 합쳐진 것(의합)’이기 때문에 ‘의’에 맞지 않으면 군신관계에서 물러설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효를 우선시킨 이인영은 훌륭한 유학자라 하겠다.
그런데 13도 의병총대장이란 그의 공적인 입장은 어떻게 되겠는가. 유교사상은 사와 공, 효와 충, 왕조와 국가가 연결되어 있어서 분리할 수 없는 사상체계이다. 여기에 항일의병전쟁의 지도사상으로서의 유교사상의 한계가 보인다. 의병장이 지역적 혹은 전국적인 명성만을 가지고 의병장이 되는 한, 또는 의병장 자신이 그러한 유교사상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항일의병전쟁을 국민적인 저항운동으로 발전시킬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모둠활동 2

모둠 친구들과 주제에 대해 논의하여 활동지의 내용을 정리해봅시다.

내가 선택할 길은?
1. 나의 입장 : 내가 당시 이인영이었다면 (     ) 이다.
2. 근거
3. 우리  모둠의 의견과 근거
4. 평가

모둠활동 3

의견이 다른 모둠을 두 팀으로 나누어 토론 대표와 보조 토론자, 2명을 뽑는다. 토론 진행 순서에 따라 토론을 진행한다. 토론 대표 이외의 다른 친구들은 배심원이 된다.


토론 진행 순서

① 대표가 자기 의견을 말한다. 나머지 조원들은 발표하는 조원의 입장을 경청하며 핵심적인 부분을 메모하며 듣는다. 
② 상대방은 대표의 발언이 끝나면 반론을 1회 이야기한다.
③ 반론에 대한 재반박은 토론자와 보조 토론자가 2회 할 수 있다.
④ 토론이 진행된 후 배심원들은 자신의 생각의 변화를 평가란에 기입한다.
⑤ 토론이 끝난 후 입장을 지지하는 숫자가 바뀌었는지 조사해본다. 이 때 처음과 입장이 달라진 학생이 얼마나 있는지를 중심으로 파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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