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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화오일장터 제주해녀 항쟁시위지(제주해녀 항쟁의 중심지)

도입

"빗창으로 다구찌 도지사 혼쭐낸 제주 해녀 - 부춘화

 

물질하던 옷 벗어 말리며
가슴 저 밑바닥 속
한 줌 한을 꺼내 말리던
불턱에 겨울바람이 일고 있오
비바람 눈보라 치는 날
무자맥질 숨비소리 내뱉으며
거친 바닷속 헤매며 따 올린 처녀의 꿈
짓밟고 착취하며
검은 마수의 손 뻗치려던 도지사 다구찌 놈
보란 듯이 빗창으로 혼쭐내던
세화리 장터의 억척 여인이여!
그대의 분노로
저들의 야수는 꺾이었고
그대의 피흘림으로
조국 광복은 한발 앞서 이뤄졌나니
평화의 섬 제주를 찾는 이들이여!
세화민속오일장 한 접시 회 마주하고
부디 말해주소
해녀 부춘화의 간담 서늘한 애국 이야기를!"

 

이윤옥 시인의 시집『서간도에 들꽃피다』2에 실린 세화오일장터 제주해녀 항쟁의 주모자인 부춘화에 대한 시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1457-1 번지
현재 상태 멸실, 현재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제주도사(濟州島司)가 회장을 겸임했던 제주도해녀조합이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식민지 수탈 기구로 전락하면서 해녀들이 채취한 생산물을 착취하는 데 열을 올렸다.

이런 상황에서 야학을 통해 항일 의식을 키운 구좌면 지역 해녀들이 1932년 1월 7일 구좌면 세화리 오일장에서 대규모로 해녀 항일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등이 주도하였다. 1차 시위는 1932년 1월 7일 세화오일장날에 이루어졌다. 이날 구좌면, 정의면 지역 해녀들은 오일장에 모여 손에는 빗창을 들고, 머리에는 수경을 끼고 제주도 해녀조합의 착취를 성토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당시 이 지역에 설립된 조합지부장은 구좌면장이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위대는 구좌면사무소를 향해 행진했다. 이곳에 도착한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등 해녀 대표들은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면장에게 제시했으나, 면장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라며 12일에 제주도사가 오면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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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제주도는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지녔으나 물이 귀하고 땅이 척박하여 논농사는 거의 어렵고 조·보리와 같은 밭농사에 의지하여 생활해야 했으므로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특히 잦은 자연재해는 제주도인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풍부한 전복과 해조를 비롯한 값진 해물을 채취하여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 일들은 해녀가 맡았다. 해녀는 본래는 물에 잠겨 일하는 아주머니라는 뜻인 잠수(潛嫂) 또는 잠녀(潛女)라고 불렸는데 일본의 영향으로 해녀라고 불리웠다.

육지에서 남자들이 주로 노동을 하는 것과는 달리 제주도에서는 수십 길 바다 속에서 해물을 채취하는 어려운 노동을 여자들이 맡았다. 해녀가 제주 경제의 중심축을 이룬 것은 제주도가 섬인 관계로 유교적인 영향이 덜 미치어 탐라국 시대 이래의 역사적·문화적 전통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해녀들은 20~30명 또는 그 이상의 수가 무리지어 바다 속 노동을 하므로 그 공동체 의식이 매우 강하였다.

바다 속에서 값진 해물을 채취하는 해녀들의 활동은 오랫동안 제주 경제의 생명줄이었다. 근대 이전에는 값진 해물들을 중앙정부에 진상품으로 바치기도 했으나 상당수는 육지에서 쌀 등 곡식과 일용품들로 바꾸어 생활하였다.

강한 생활력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해녀들의 바다 속 해물을 채취하는 특수 기술은 대단하였다. 그들의 진취적인 성격은 활동 영역을 부산, 울산, 장산포 등지로 넓혀갔으며, 때로는 일본,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진출했었다.

1920년도 활동 해녀는 10,000여 명에 달했는데, 그중 해마다 4월부터 9월까지 부산, 울산 등지로 나아가 활동하는 해녀 수는 4,000명 이상이 되었다. 당시 출가 해녀 한 사람당 채취 생산액이 평균 300원으로 그들의 총수입은 약 120만원으로 출가 해녀가 제주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다.


  • 질문1 해녀는 원래 무엇으로 불리었나요?
  • 질문2 제주도에서 여자들이 해물을 채취하는 어려운 노동을 하게된 역사적·문화적 전통은 무엇인가요?
  • 질문3 채취한 해물은 대부분 어떻게 처리했는지 써 봅시다.
  • 질문4 제주 해녀들이 진출한 지역을 써 봅시다.

읽기자료 2

해녀들의 생활상은 참으로 비참했다. 그 이유는 부모 자식을 이별하고 부산 등 멀리 나온 출가 해녀들은 객주며 거간들과 고리채를 하는 일본인들, 더 나아가 일본인 해조회사 등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착취를 당하였다.

객주는 해녀에게 고리로 돈을 빌려주었으며 객주를 통해 해녀들이 채취한 값비싼 해물들을 헐값에 사는 등 이중적으로 착취하였다.

객주와 일본인 전주들은 채취 해물을 매입할 때 시장 값의 3~4% 할인을 규칙으로 정해 놓았다. 해녀들은 힘들게 채취한 해물들을 제값을 받고 팔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들로부터 저울 눈속임 등의 갖가지 부정 수단에 의하여 채취한 해물들을 착취당했다.

부산의 해조업자인 일본인들은 객주나 거간자의 손을 거치지 않고 해녀로부터 직접 매입하되 일반적인 시장 가격보다 많이 할인을 하여 싸게 사들였다. 해녀를 그 회사의 주주로 하겠다면서 해녀조합을 조직, 해조회사에 부속시키는 방법을 취하였다. 이는 해녀들이 입어를 하거나 채취 해물의 매매를 자유로이 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였다. 또한 해녀들을 일본인들의 노예처럼 해조회사에 얽매이게 하여 이탈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또한 현지 사람들의 멸시와 박해도 출가 해녀들의 생활을 힘들게 했다.


  • 질문1 객주는 어떤 방법으로 해녀들을 착취했나요?
  • 질문2 일본인 전주는 어떤 방법으로 해녀들을 착취했나요?
  • 질문3 해조업자인 일본인들은 어떤 방법으로 해녀들을 착취했나요?

읽기자료 3

1921년도에 설립된 사립 하도보통학교(현 하도초등학교)는 하도강습소라는 노동야학을 운영하면서 항일의식을 키웠다. 이러한 야학활동은 당시 혁우동맹, 민중운동자협의회 회원 문도배, 강관순, 부승림 등 일부 하도보통학교 교사와 지역 청년들이 담당하였다.

하도강습소는 낮에는 물질하러 바다에 나갔던 해녀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와서 밤에 공부하였던 문화계몽운동의 현장이었다. 하도리의 해녀들은 한글 및 한문 기초교육과 역사를 배웠다. 또한 『노동독본』, 『농민독본』등을 통해 신지식과 실생활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저울 눈금 읽는 법까지 교육을 받았다. 이를 통하여 제주해녀들은 민족과 계급의식이 생겨났고, 먹고살기 위한 수단으로 삼던 ‘물질’ 노동의 가치에 대하여 자각하게 되었다.

제주해녀항일투쟁이 하도리, 종달리, 세화리, 우도, 성산읍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들 청년교사들의 교육이 큰 역할을 하였다.


  • 질문1 하도강습소를 운영한 사람들이 속한 단체 이름을 써 봅시다.
  • 질문2 노동 야학을 통해서 하도리 해녀들은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써 봅시다.

읽기자료 4

해녀들의 해조회사의 종속은 제주도로서는 중대한 경제적인 문제였으므로 해녀들의 권익을 옹호할 기구인 해녀조합 설립운동이 제주도 유지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1920년 4월 16일에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 설립되어 해녀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하였다. 출가 해녀의 문제에는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행정 수장 간에, 그리고 총독부 수산국과의 협의 등이 있으므로 해녀조합장은 제주도의 행정수장인 도사(島司)가 맡았다.

조합 설립 후 해물의 공동판매와 원정지의 입어문제 등을 조합이 나서서 교섭 해결하여주므로 중간 착취자의 농간이 다소 축소되어 제주해녀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업으로서의 효과를 갖게 되었다.

해녀조합 설립 이후로 공동판매고가 해마다 증가하였다. 1921년에는 9만여 원의 판매고를 내고, 1922년에는 19만여 원, 1923년에는 22만여 원, 1924년에는 30여만 원으로 증가하였다.

해녀들의 수익이 증가되자 부산, 동래, 울산 등 여러 곳에서도 어업조합을 조직하고 제주 출가 해녀들에게 그들의 조합에 가입하기를 강요하고 가입치 않을 경우는 어업활동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 질문1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은 언제 설립되었나요?
  • 질문2 어업조합의 설립은 해녀들에게 준 이익이 무엇인지 써 봅시다.

읽기자료 5

제주해녀의 권익 옹호를 위하여 1920년에 설립된 제주해녀조합은 해를 거듭하면서 조합장과 관련 업무를 담당한 서기 등이 상인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 해녀들의 생존권을 침탈하였다. 그 결과 해녀들은 자신들의 기본적인 생존 권익을 찾기 위하여 조합에 대해 믿지 못하고 항의하였으며 마침내 격렬하게 저항하며 시위를 일으켰다.

1930년 성산포에서의 해초 부정 판매를 항의했으나 조합 측이나 당국에서 해녀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아무 성의를 보이지 않자 해녀들과 지역 청년들이 당국의 처사를 규탄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성산포와 구좌면 일대에 배포하였고, 이 사건으로 인하여 구좌면 하도리 청년 오문규, 부승림이 경찰에 검거되어 벌금형을 받았다.

성산포사건은 제주해녀들로 하여금 관제 어용 조합에 대한 저항 및 투쟁 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관제 어용인들의 해녀의 대한 권익 착취는 해녀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닌 제주사회 전반의 문제였다. 제주 내 사회주의 운동 청년들은 민중운동적 차원에서 해녀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해녀들에게 야학을 열어 교육을 시켰다. 아울러 해녀 자신들도 권익 투쟁에 대한 의식이 자라나게 되었다.

해녀들은 조합의 부당성으로 인한 권익 착취에 대하여 처음에는 대화로 풀기에 노력하였다. 세화리 시위 이전 2~3년 동안 해마다 제주도 해녀 어업 조합에 부당한 조건들을 항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부당 행위를 거듭하며 시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값을 잘 받을 수 있는 채취 해물 중 감태재와 생복 판매는 생명처럼 중요한 것이어서 이들 판매에 대한 5개 요구 조건을 조합에 제출하였다. 해물은 신선도가 떨어지면 상품가치가 떨어져 판매 처리에 세심한 주의와 성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조합은 이러한 현실적인 상황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1931년도 생복, 감태재 판매에 있어서 생복은 지정 매수인이 매수를 거절하여 조합이 처치해주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모두 썩어버렸다. 감태재도 신선도가 떨어져 등급이 낮아지고 가격도 폭락하여 판매를 중지하는 일이 해마다 반복되었다. 분노한 해녀들은 투쟁이라는 방법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 질문1 해녀조합이 해녀들의 생존권을 침탈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2 구좌면 하도리 청년 오문규, 부승림이 벌금형을 받은 이유를 써 봅시다.
  • 질문3 해녀들이 권익 투쟁에 대한 의식이 향상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4 해녀들은 해녀조합에 대해 투쟁적 방법으로 대응하기 시작한 계기가 무엇인지 써 봅시다.

읽기자료 6

1932년 1월 7일 해녀 300여 명은 해물 채취의 기구인 호미와 비창을 손에 들고 어깨에는 양식보자기를 매고 하도리에서 세화리 장터까지 시위를 벌였다. 구좌면 일대에서는 경관들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수천 군중에 에워싸인 장터에서 해녀 대표 10여 인이 번갈아 가며 해녀조합에 대한 불평불만을 털어놓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각오를 천명하였다. 그리고 세화리에서 100리나 되는 곳에 있는 해녀조합 본부를 습격하기 위하여 행진하였다. 세화주재소 경관대가 원만한 해결을 조정하였으나 시위대의 기세가 대단하여 본부로 가도록 길을 터 주었다. 시위대가 평대리 사무소에 당도했을 때 면(面) 지부장과의 면회가 이루어졌다. 면 지부장과 지부대원과 하도리 구장으로부터 이 일들을 책임지고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시위자들은 요구 조건을 제출하고 조합 습격을 멈추었다.

해녀들의 요구 조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합이 해녀의 채취한 해산물을 공동 판매함에 있어 해녀들이 불이익을 당하도록 한 조합 측 관련인과 악덕 매수 상인들이 농간을 하여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받고 있어 생존을 위해 이를 타결하려는 것으로서 지정 판매를 절대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해녀들의 경제적 주권을 찾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둘째, 유소 노약자에 대한 복지적 배려 없이 조합회비를 징수하고 병으로 물질을 못하여 벌이가 없을 때도 조합비를 징수하는 비합리적인 조치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해녀들의 복지와 인권을 찾으려는 의지인 것이다.

1월 7일의 세화리 해녀 시위는 제주도의 전 해녀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동시에 해녀조합의 무책임함과 무성의함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졌다.



  • 질문1 세화리 해녀 1차 시위가 일어난 때와 규모를 써 봅시다.
  • 질문2 해녀들이 채취한 생산물의 지정 판매를 반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해녀들이 복지와 인권을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요?

읽기자료 7

조합에 의한 해녀들의 가장 큰 피해는 지정 판매자 제도이다. 1차 시위에 제출된 18개조 요구 조건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것도 지정 판매의 철페였다. 그런데 해녀의 요구조건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한 조합에서 다시 1932년도에 해산물 중 전복과 어패류에 대해 지정 판매를 한다는 광고문을 부쳐놓았다. 지정 판매로 인하여 여러 해 동안 당한 손해들이 1월 7일 시위에서 시정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시행되자 해녀들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각 지역의 해녀들은 지정 판매일을 앞두고 저항하기 위한 대책 회의를 매일 열었다. 그러는 가운데 구좌면 정의면의 해녀들 사이에서는 폭발 직전의 심한 긴장감이 돌았다.

조합이 내놓은 지정판매일인 1월 12일은 세화장날로 제주도사로 새로 부임한 전구(田口)가 도 순시차 구좌면을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구좌면의 하도리, 세화리, 종달리, 연평리와 정의면의 오조리, 시흥리 등 6개 마을의 해녀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널리 알리고, 조합장인 도사와의 면회를 통하여 요구 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시위를 계획하였다. 해녀들의 시위 계획이 알려지자 세화리 장날에는 보통 때의 몇 배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 질문1 세화리 2차 해녀 시위를 준비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인가요?
  • 질문2 1932년 1월 12일에 세화리 2차 해녀 시위를 계획한 이유를 써 봅시다.
  • 질문3 세화리 2차 해녀 시위 계획에 참여했던 마을의 이름을 써 봅시다.

읽기자료 8

1월 12일 오전 11시 반이 되자 세화경찰관주재소 동쪽 네거리에 종달리, 오조리의 해녀 200여 명과 하도리 해녀대 300여 명과 세화리 해녀대 40여 명이 일시에 동남북으로 모여들어 호미와 비창을 휘두르고 만세를 부르며 세화리 장으로 행진하였다. 그 때 전구 도사를 태운 자동차가 뒤쪽에서 달려오다가 많은 시위대를 보고 차에서 경관이 내려 시위대를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세화 장터를 점령하고 각지에서 모여든 일만여명의 군중에 에워싸인 가운데 각 동리별로 대표 해녀들이 나와서 해녀조합에 대한 불합리와 불평을 열거하고 죽음으로써 항쟁하자는 격렬한 각오를 다졌다.

각 동리별로 20여 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요구 조건을 함께 결정하려는 때에 정찰 임무를 맡은 해녀가 도사가 돌아가려고 한다고 알려오자 시위대가 즉시로 몰려가서 차를 타려는 도사를 주재소 문 앞에서 순식간에 포위하였다.

경관과 주재소원들이 칼을 휘두르며 시위 해녀들을 위협하고 밀치기도 하면서 자동차길을 트려고 힘을 다하여 제지하였다. 해녀들은 “우리들의 진정한 요구에 칼로써 대하면 우리는 죽음으로 대항하겠다.”고 하면서 호미와 비창을 휘둘렀다.

도사는 시위대에게 해결해주겠다는 간곡한 말로 달래었다. 이에 해녀들은 공동으로 작성한 7개 요구조건과 하도리 해녀들의 11개 요구조건을 도사에게 제출하고 조속히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20여 명의 대표가 도사와 면담을 하였다. 동쪽 편에서는 시흥리와 연평리 해녀 300여 명이 호미와 비창을 손에 들고 “속히 해결해라.”는 구호를 계속 외쳤다. 대표 중 3~4인은 눈물을 흘리며 “해녀들의 억울함과 불평을 알면서도 그대로 돌아가는 도사는 해녀 대중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강력히 항의하였다. 또 격분한 해녀들은 “일보도 양보하지 말고 뻗대어서 도사로부터 요구 조건 전부를 5일 안에 해결하겠다는 승낙을 받아내고 5일 이내에 해결하지 못하면 더 맹렬한 항쟁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해녀 시위대들은 앞으로 더욱 굳게 단결하고 해녀 대중의 이익을 대표하여 분투하자는 맹세를 하고 만세를 부르며 해산하였다.

신임 도사에게 제출한 해녀들의 요구조건은 1월 7일 세화리 1차 시위에서 요구했던 내용과 큰 차이가 없었다.


  • 질문1 세화리 2차 해녀 시위에 참여했던 군중은 몇 명이었나요?
  • 질문2 세화리 2차 해녀 시위의 요구사항은 무엇이었나요?

읽기자료 9

제주도사는 세화리 해녀 시위를 성의 있게 해결하기보다는 무력으로 진압하겠다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1~2차 시위가 모두 해녀들의 생존권을 찾으려는 평화적 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2차 시위 날 무장경관 수십 명을 세화리 장터에 급파했다. 그러나 시위대가 이미 평화롭게 해산한 뒤였다. 그 뒤 구좌면과 정의면에 형사대를 파견하여 시위대의 배후세력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1월 24일에 세화리 등 시위 주동지에서 청년 수십 명을 해녀 시위의 배후세력으로 검거하여 경찰서로 호송하려 하였다. 이때 구좌면 해녀 1,500여 명이 자동차를 습격하여 파괴하자 경찰관은 총으로 위협하였다. 급보를 접한 도내 각지 경찰관들이 무장을 하고 모여들어 남녀 100여 명을 검거하였다.

시위 해녀 500여 명은 구좌면 세화주재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경찰과 충돌하여 경찰관 1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순사의 모자를 빼앗고 제복을 찢었다. 이 시위에서 해녀들도 부상자가 생겼다. 이 날의 시위가 이처럼 격화되고 폭력화된 것은 해녀 주모자로 검거된 20여 명을 시위대의 힘으로 탈취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검거 해녀들을 석방하라고 밤까지 폭력시위를 전개하였다. 전라남도 경찰부에서는 24일 밤 응원경찰관 35명을 제주도로 급파할 만큼 해녀 시위는 격화되어 있었다.

1월 26(27)일 새벽 3시경 경찰관 40여 명이 우도에 피신한 해녀 30여 명을 체포하여 우도 부두에서 배에 태워 제주 본도로 압송하려는 때에 해녀 800여 명이 경찰들을 포위하고 잡혀가는 해녀들을 탈취하려 하여 경관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경관대는 공포 14발을 발포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경무국에서는 이 사건의 배후에는 제주도 지식 청년들의 사회주의 운동단체인 민중운동협의회가 조종하고 있다고 믿고 이들을 대거 검거하였다. 이제 경무국 당국에서는 해녀 시위를 생존권 쟁탈전의 문제로 보지 않고 사회 변혁적 운동으로 몰아가서 해녀 주동자는 물론 민중운동협의회 관련자로 지목되는 청년들을 대거 검거하였다. 해녀들은 자신들의 투쟁으로 청년들이 구속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1월 27일 구좌면 종달리 해녀 100여 명은 피검자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또 다시 벌였다.

3월 초에 이르러 해녀 시위 및 그 배후 조종세력 민중운동자협의회으로 검거되었던 약 100명 중 혐의가 없는 사람들은 석방되었다. 민중운동자협의회 관련자는 하도리의 김순종 등 9명, 세화리의 김갑천 등 8명, 연평리의 김성오 등 13명, 종달리의 한향택 등 8명 도합 38명이 검속되었고, 이중 12명은 최종적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형 확정을 받았다.

반면 혐의가 없는 사람들은 4월 중순부터 석방되었다. 4월 22~23일는 해녀 시위주모자 하도리의 부춘화, 부덕량, 김옥련 등 3명도 체포 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 질문1 1월 12일 2차 시위 날에 무장경관 수십 명을 세화리 장터에 급파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일제가 민중운동협의회의 회원을 검거한 이유를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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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세화 오일장터 전경이다.

  • 질문1 세화오일장터에서 해녀들의 시위가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2

사진은 제주 해녀 시위를 보도한 1932년 1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이다.

  • 질문1 제주 해녀 시위가 격화된 이유는 무엇인지 ‘읽기 자료 9.해녀 시위 격화와 항일운동으로의 진전’에서 찾아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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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세화리 해녀들의 요구 조건을 담은 성명서를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해녀 항일 시위 동참을 독려하는 포스터를 제작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세화오일장터 제주해녀 항쟁을 소재로 연극 시나리오를 작성하여 공연해 봅시다.
모둠활동 4
자기 지역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조사하여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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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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