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본문영역

  • 도입
  • 역사적 배경
  • 읽기
  • 시각자료
  • 모둠활동

주요사적지 배움터

영남포정사 3·1운동 만세시위지(경남의 대표적 만세 시위지)

도입

진주성은 조선 후기 경상우병영이 주둔하던 곳으로 공북문 안쪽 언덕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근무하던 공간인 운주헌을 비롯하여 관덕당, 공진당 등 관아 건물과 무기고, 화약고 등이 있었다. 옛 관아 건물들은 구한말 병영이 폐지되고 전국이 13도로 개편될 때 경상남도 감영이 설치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도청이 부산으로 옮면서 옛 관아건물들은 허물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금 남아있는 옛 관아 건물로는 병영과 감영 문루였던 영남포정사가 남아 있고, 공식적인 누각이자 남장대였던 촉석루와 관아 누각으로 사용되었던 북장대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진주목사 김시민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일본군을 물리친 대첩으로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권율의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진주성 안에 있는 영남포정사는 1618년 건립되어 경상도 우병영의 관문으로 활용되었고, 1895년 진주관찰부, 1896년에는 경상남도 관찰사의 선화당 관문이 되었다. 이 때 영남의 정사를 선포하는 행정 중심지라는 의미의 영남포정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부로 옮겨 갈 때까지 그 정문으로 활용되었다.

1919년 3월 18일 진주지역의 만세 시위군중 3만 여명이 영남포정사까지 진출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73-11 번지
현재 상태 원형보존, 진주성 내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사적지이다.

1919년 2월 말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였다가 3·1운동을 목격한 김재화, 박대업, 정용길, 심두섭 등은 귀향 후 3월 초순 경에 김재화의 집에 모여 비밀회합을 가지면서 진주 3·1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때 이강우, 권채근, 강달영 등도 가세하였다. 3월 10일에는 시위를 촉구하는 격문을 시내 곳곳에 게시하였다.

3월 18일 12시 진주교회의 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시작으로 중앙시장, 재판소, 촉석공원, 매립지, 대안동, 촉석루 입구, 봉곡동 등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천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오후 4시경에는 시위 군중이 3만여 명으로 늘어난 가운데 경남도청 앞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까지 진출하였다. 일본 헌병과 경찰들은 시위대에게 잉크를 던져 검거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시위가 더욱 산발적이 되어 야간에도 만세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3월 19일과 20일, 21일에도 상가 철시와 함께 맹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18일부터 21일까지 4일에 걸쳐 전개된 진주 지역의 3·1운동은 기생, 걸인들까지 단체로 참여할 정도로 전 민족적 성격의 시위였다. 일부 일제 측의 기록에서 시위 군중을 8천 명 정도로 평가절하 하고 있으나 진주 장날을 이용하여 진주뿐 아니라 서부 경남 각지의 민중이 함께 항거하였다는 점에서 경남의 대표적 만세 시위라 하겠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읽기

읽기자료 1

당시의 진주읍은 군의 중앙에 위치하여 청주, 진산, 또는 진강이라고도 불리었다.

3·1운동 당시 이곳은 경상남도의 도청 소재지로 인구가 많았으며 진주장은 도내에서 가장 큰 장으로, 장날은 각처에서 1만 명 전후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1919년 2월 말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였다가 3·1운동을 목격한 김재화, 박대업, 정용길, 심두섭 등은 귀향 후 3월 초순 경에 이강우, 권채근, 강달영 등과 김재화의 집에 모여 비밀회합을 가지면서 진주에서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서로 맹약하고 그 시일과 구체적인 거사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먼저 3월 10일 새벽 시내 곳곳에 시위를 촉구하는 격문을 붙이고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비밀리에 배부하면서 인근 각 면과 학교, 사회단체를 통하여 군중 동원을 위해 대중을 규합해 갔다. 전국의 만세 운동이 치열해 가자 진주에서도 의거가 일어날 것을 예상한 일제는 더욱 삼엄한 경계를 펴 갔다. 일제는 각 학교에 임시휴교를 명하고 일본인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엄중 정탐하도록 하였다. 심지어는 타지방 학생들에게 여비를 주어 강제로 귀향시키는 비상조처까지 취하였다.


  • 질문1 진주에서의 만세 운동을 진주읍에서 전개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만세운동의 준비를 위한 회합 장소는 누구의 집이었는지 써 봅시다.
  • 질문3 지도 세력이 만세운동을 위해 첫 번째로 실천한 일은 무엇인가요?
  • 질문4 만세운동의 움직임에 대하여 일제는 어떻게 대응했는지 써 봅시다.

읽기자료 2

이러한 삼엄한 상황의 변화 가운데 이강우를 비롯한 애국 청년들은 거사 일을 진주장날인 3월 18일로 정하고 일제의 눈을 피해 가면서 거사의 공작과 조직을 확대시켜 갔다.

그들은 사립 광림학교의 악대원(樂隊員)으로 활약하다 졸업한 천명옥, 박성오, 김영조, 이영규 등 4명에게 거사시 시위행렬의 선두에서 연주하도록 부탁하였다. 또한 김영조는 기독교회 측을 담당하고, 김재화, 강달영, 박지환 등은 각 사회단체를 담당하여 교섭키로 하였다. 그리고 진주 시내 다섯 장소에서 동시에 시위함으로써 효과적인 만세운동이 되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하였다.

3월 18일 각 지역으로부터 수많은 군중이 진주읍으로 운집해 들어왔다. 진주 장날이었던 3월 18일 12시 정각에 사전에 약속한 대로 진주교회 마당에 세워진 종각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신호로 중앙시장, 촉석루 입구, 재판소 앞, 봉곡동, 칠암동 강변, 공원, 대안동 등에 대기하고 있던 수천 군중이 일어나 학생들이 나눠준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 만세운동을 외치기 시작했다.

중앙시장에서는 박진환, 강주한, 한규상 등이 단상에 올라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격문을 배포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크게 외치면서 시가행진을 전개하였다. 재판소 부근에서는 이강우, 심두섭 등이 수천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너도나도 동참하여 큰 물결을 이루었다.

정준교는 공원, 김재화, 권채근, 강달영 등은 매립지, 정용길은 대안동, 강대창, 장덕익, 박영환 등은 촉석루 입구 쪽, 김영조, 김재홍, 전인회 등은 봉곡동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 군중이 일제히 여기저기에서 호응하니 독립만세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케 하였다. 군중은 악대를 선두로 애국가를 부르며 시위로 들어가 진주성 안쪽을 일주하였다. 일본 헌병과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행렬을 저지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소방차로 더러운 물을 퍼붓고 곤봉으로 군중을 난타하였다.

오후 4시경 시위 군중은 경상남도청 앞 영남포정사에 이르렀을 때 약 3만 명으로 늘어났다. 일본 헌병과 경찰은 중과부적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지 못하자 시위 군중 주동 인물의 의복에 잉크를 뿌린 뒤 해가 지면서 시위가 다소 산만해지자 잡아들이기 시작하여 관련자 약 3백 명을 검거하였다.

그러나 시위는 그대로 계속되어 야간에도 그치지 않았다. 시위 군중들은 각 단체별로 모여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펼쳤고 봉화를 올리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오후 7시에는 ‘노동독립단’이 나타나 시위를 전개하고 2시간 뒤에는 다시 ‘걸인독립단(乞人獨立團)’이 나타나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들고 의분에 넘친 어조로, “우리들이 걸식하게 된 것은 일본놈들이 우리의 생의 이권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지 못하면 우리는 물론 2천만 동포가 모두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라고 외치면서 보다 완강한 항일의 기세를 북돋았다.


  • 질문1 만세운동 거사 일을 3월 18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3월 18일 12시 종소리를 신호로 하여 만세 시위를 시작한 지역을 써 봅시다.
  • 질문3 시위 군중이 3월 18일 오후 4시경 경상남도청 앞 영남포정사에 이르렀을 때 몇 명으로 늘어났나요?
  • 질문4 일본 헌병과 경찰이 시위 주모자를 검거하기 위하여 택한 방법은 무엇인가요?
  • 질문5 만세 시위에 ‘노동독립단’과 ‘걸인독립단(乞人獨立團)’이 동참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써 봅시다.

읽기자료 3

3월 19일 진주읍내 상점은 모두 문을 닫고 철시하였다. 오전 11시 읍내에서는 약 7천 명의 군중이 봉기하여 악대를 선두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군중들은 도청과 경무부로 행진하려고 하였다. 일본 헌병이 총검으로 위협하고 또 시위 군중을 난타하여 부상자는 늘어갔다. 오후 3시 쯤 참다못한 시위 군중들은 투석으로 맞섰다. 그러나 정세가 불리하여 군중들은 일시 후퇴하였다. 이 때 ‘기생독립단(妓生獨立團)’ 일대가 태극기를 앞세우고 남강 변두리를 둘러 촉석루를 향하여 시위를 전개하자 일경이 달려들며 칼을 빼어 치려고 하였다. 이때 한 기생이 “우리가 죽어도 나라가 독립이 되면 한이 없다.”고 외치면서 태연히 전진하자 일경들은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생 6명이 검거되었다.

오후 4시 30분 일본 군경의 고압적인 탄압으로 후퇴한 시위 군중들은 오후 11까지 산발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약 100명의 군중이 검거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학생들이었다.


  • 질문1 상인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만세 시위에 참여했나요?
  • 질문2 일본 군경의 탄압에 시위군중은 어떠한 방법으로 대응했나요?
  • 질문3 만세 시위에 ‘기생독립단’이 참여한 의의가 무엇인지 써 봅시다.

읽기자료 4

3월 20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아침부터 모이기 시작한 수천 명의 시위 군중은 다시 악대를 선두로 애국가를 부르면서 진주 경찰서로 몰려갔다.

이때 일본 헌병대에서는 기마병을 출동시켜 시위행렬을 저기시키기 위해 온갖 힘을 기울였고 나중에는 소방대까지 동원시켰다. 이들은 총검을 휘두르면서 온갖 흉악한 짓을 다하였다. 시위 군중은 시위 강행을 일단 보류하고 물러섰다.

3월 21일에는 학생 강민호, 김경택 등 여러 명이 의거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검거되자 여기에 격분하여 학부형 등 가족이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4시부터 수천 명이 일어나 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6, 7명이 검거되었다.

그칠 줄 모르고 일어나는 군중들의 완강한 저항에 대비하여 일본군은 마산으로부터 헌병과 보병을 이곳으로 이동시켜 군대를 대폭 증원하였다. 이러한 삼엄한 상황 속에서도 대규모의 시위가 전개되었다.

진주군 금곡면의 면서기 김영재와 금산면 가방리 이교륜은 비밀 모의를 거듭하면서 대대적으로 군중을 규합하여 봉기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조선 총대장 박모씨가 조선 13도를 조직하려고 하니 만민은 여기에 기쁘게 복종하고 충절을 다하여 외적에게 모멸당하지 말자.”라는 내용의 ‘조선 독립 완문서’를 작성하여 3월 22일부터 23일에 걸쳐 법원지청 앞 등 여러 지역에 붙이고, 주변 지역의 면장과 구장들에게 ‘조선독립협력의뢰서’를 송부하여 군중을 거느리고 만세 시위에 적극 참가하여 독립을 달성하자고 호소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두 사람은 검거되어 김영재는 1년형을, 이교륜은 8개월의 형을 받았다.

4월 18일에 다시 읍내에서는 대대적인 항일 독립투쟁이 전개되었다. 오후 5시경 진주 법원지청에서 검거된 인사들을 분감(分監)으로 압송하는 도중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약 3천 명의 군중들이 의분을 참지 못한 끝에 들고 일어나 검거된 인사들을 구출하려 하였다.

강재순은 강한순, 허현, 이종락과 함께 3월 18일 진주 읍내 만세시위와 때를 같이 하여 정촌면 5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거사하였다. 이밖에도 당시 진주군 내에서는 3월 22일 수곡면 창촌리에서, 3월 25일과 31일에는 문산면 소문리에서, 4월 8일에는 일반성면 창촌리에서 각각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또한 진주농업학교 2학년생 문위동, 신영안, 김익조 등이 중심이 되어 1920년 8월 30일, 31일을 만세시위 일로 결정하고 준비하였으나 사전에 탐지되어 72명이 검거되었다.


  • 질문1 3월 20일 시위 군중이 목표로 삼았던 곳은 어디였가요?
  • 질문2 김영재와 이교륜이 작성한 문서가 무엇인지 써 봅시다.
  • 질문3 군중들이 시위에 참여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써 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진주성의 정문 역할을 하던 공북문이다.

  • 질문1 3·1 운동 당시 시위 군중은 공북문 앞으로 모여들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2

사진은 주요 시위지였던 매립지 원경(현, 인사광장 로터리 주변)이다.

  • 질문1 매립지 부근의 시위 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누구인지 ‘5. 읽기-2.3월 18일 만세 시위’에서 찾아 써 봅시다.

시각자료 3

사진은 일제강점기 영남포정사의 전경이다.

  • 질문1 3·1 운동 당시 진주 사람들이 영남포정사 앞으로 몰려가 시위를 전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노동독립단’, ‘걸인독립단’, ‘기생독립단’의 입장에서 시위 군중에게 배포할 성명서를 작성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3·1운동 주동자의 입장에서 만세시위에 활용할 연설문을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만세 시위로 일제에게 잡힌 인물들에 대한 모의재판 시나리오를 작성하여 시연해 봅시다.
모둠활동 4
모둠별로 우리 고장에서 벌어졌던 3·1운동의 사례를 찾아 조사보고서를 작성해 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31232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1  전화: 041-560-0405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21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