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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중앙에서 실직한 김법린 전 가족,허영호, 한보순과 불교계와는 딴 판이지만은 김범부 선생과 그 가족 등의 생활을 다솔사로 데려와 내가 맡았고 만해 선생의 생활상의 책임도 져야 했다.
어쨌든 다솔사는 이 같은 관계로 배일, 항일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들 인사들을 수용하는 데는 추수 3백 석이 될락말락 하는 다솔사의 주지인 나에게는 소위 약한 말이 짐을 싣는 격이 되었다. 거기에 친일파인 총독부 지지파인 중들과 맞서야 했고 동시에 권토중래를 계획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도쿄에서 박열 등과 더불어 싸웠던 경험의 소유자가 아닌가. 나는 패잔병 같은 처지의 이 식솔들을 집결시켜 투쟁을 하여야만 하는 어려운 지경에 서게 된 셈이었다. 내가 굴복하고 말면 우리 진용은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았다."
다솔사 주지였던 최범술의 자서전으로 『국제신문』에 연재되었던 「인생은 아름다워라」의 일부분이다.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86번지(도로명 주소: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다솔사길 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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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원형보존, 일부 낡은 건물이 보수되거나 새 건물이 건축되기도 했으나 대양루 등 주요한 건물은 원형 그대 보존되고 있다. |
만당(卍黨)은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대표적인 항일 비밀결사 단체이다. 만당은 1930년 5월 만해 한용운의 민족의식에 큰 영향을 받은 불교 청년들이 식민지 불교의 극복, 불교의 자주화, 불교의 대중화를 기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성격은 정교분립, 교정의 확립, 불교 대중화라는 만당의 강령과 법성을 지키고 민족을 구하겠다는 내용의 선언에서 자명하게 드러난다.
만당은 다솔사(多率寺)를 근거지로 하여 일제 침략 세력과 줄기차게 투쟁하였다. 국내뿐만 아니라 도쿄[東京]에까지 지부를 조직했는데, 도쿄 지부 책임자는 김법린이었고, 허영호, 장도환, 최범술 등이 지부 당원이었다. 만당은 표면 단체로 불교 청년 동맹을 조직하고 각지에서 청년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32년 봄에는 당세가 확장되어 80명의 당원을 확보하면서 활발히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당원으로서 엄수해야 할 서약으로는 비밀한사엄수(秘密限死嚴守)와 당에 대한 절대 복종, 두 가지였으며 모든 것은 기록을 남기지 않도록 규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삼엄한 사찰로 1938년 말 만당은 진주경찰서에 발각되어 검거되었다. 서울과 사천을 비롯한 진주, 합천, 해남, 양산 등지에서의 6차례에 걸친 일본 경찰의 검거 선풍으로 김법린, 장도환, 최범술, 박근섭, 박영희, 김범부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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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1920년에 창립된 조선불교청년회는 사찰령 철폐운동 및 불교계 통일기관 설립의 추진 활동을 전개하면서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당시 불교 청년들의 여러 활동은 조직 자체의 열악성뿐만 아니라 일제와 일제의 불교정책을 비호하는 주지계층의 억압과 반대 등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더욱이 1924년경에 이르러서 조선불교유신회는 해체되고 조선불교청년회도 간판만 유지하는 상태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1928년 초 일부 불교 청년들의 주도하에 조선불교청년회는 재기하였다. 재기한 불교청년회는 조직 개편 사업의 적극 수행 재정 기반의 확립 등을 내세우면서 불교청년운동을 진보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29년 1월 각황사에서 개최된 조선 불교 선교 양종 승려 대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불교계가 자주적인 종헌의 제정과 불교계 입법·의결기관으로서의 종회와 집행기관으로서의 교무원을 성립시키는 데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불교 청년들의 이러한 활동은 그 자체가 불교청년운동이 강화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고, 아울러 당시 불교계에서 불교 청년들이 차지하는 위상이 증대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재기한 조선불교청년회는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회원들 스스로 미흡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특히 각 지방에 있는 청년회가 중앙에 있는 조선불교청년회의 지회로 가입하지 않는 등 조직상의 문제가 많았다. 이것은 결국 청년회의 조직과 자금이라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기에 청년회 전체적인 운동 노선에 큰 장애로 등장하였다. 당시 불교 청년운동에서는 동지적 결속의 부재와 이에 따른 자금 문제, 그리고 통일정신의 박약이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 질문1 1920년에 창립된 조선불교청년회의 활동이 쇠퇴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1928년에 재기한 조선불교청년회의 활동 내용을 써 봅시다.
- 질문3 1928년에 재기한 조선불교청년회 활동의 한계점은 무엇이었는지 써 봅시다.
읽기자료 2
만당(卍黨)은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대표적인 항일 비밀결사단체이다. 1930년 5월경 비밀리에 창립된 만당은 만해 한용운을 따르던 항일의식이 투철한 불교 청년들이 정교분립, 교정확립, 불교대중화를 강령으로 내세우면서 일제의 불교정책에 대한 저항과 민족불교를 지향하는 단체였다.
만당은 1930년 5월 경 조학유, 김상호, 김법린, 이용조 등 4인의 1차 결사, 조은택, 박창두, 강재호, 최봉우 등을 포섭한 2차 결사, 박영희, 박윤진, 강유문, 박금섭, 한성훈, 김해윤 등 불교전문학교 학생을 포섭한 3차 결사를 통해 결성되었다.
만당의 결성을 통해 이천만 동포들의 고뇌를 극복하고 자주적인 불교계의 교정확립과 대중 불교를 지향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만당의 결성은 동지들 사이의 단결의 부재, 통일정신의 박약이라는 1930년대 불교청년운동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결국 만당은 불교 청년들이 청년운동 및 불교계 전반의 교정을 당시 한국 불교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전위조직체라고 할 수 있었다.
만당 당원은 비밀엄수, 당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는 서약을 하고 생명을 바친다는 각오로 활동하였다. 만당 결사 자체가 비밀결사였기에 활동과 관련된 여러 기록은 남기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선언과 강령도 암송으로 전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일제의 식민통치하에서 비밀결사 자체가 허용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당은 매월 3번째 일요일에 정기 모임을 개최하여 교정 전반 문제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당원이 10명 내외일 경우에는 개인집을 이용하였지만, 당원이 증대되면서는 중국 요리집 혹은 소풍객을 가장하여 교외에서 모임을 가졌다.
만당 조직의 전모는 그 사정이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전하는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중앙에 본부를 두고 각 지방의 특수지구에 지부를 두었다. 그러나 중앙본부 조직이라든가 지부가 있었던 지방의 소재를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도쿄에는 특수지구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다른 지부 소재에 대해서는 추측건대 31본산 사찰과 관련하여 유추할 수 있겠다. 도쿄지부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며 불교청년운동을 하던 김법린에 의하여 1932년경에 조직되어 김법린, 허영호, 장도환, 최범술이 활동하였다.
만당은 교단 안정과 민족불교를 지향하는 강령을 정하고 교단개혁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었다. 이에 자주적으로 종헌을 제정하기 위해 개최된 승려대회를 비롯한 불교계 신흥의 배경과 청년들의 개혁의지가 결합되면서 만당의 활동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당시 당원의 입회는 기존 당원들의 만장일치 찬동으로 가능하였는데, 전체 회원이 80여 명에 달하고 각 지역에 지부 조직을 갖출 정도였다. 만당 당원은 초창기에 18명이었는데 점차 증가했다. 이들은 민족의식·항일의식을 소유하고 불교대중화에 관심이 많았던 불교청년운동의 핵심세력이었다. 조선불교청년회가 조선 불교청년총동맹으로 전환된 것도 만당 활동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질문1 만당은 언제 창립되었나요?
- 질문2 만당의 강령은 무엇이었는지 써 봅시다.
- 질문3 만당의 활동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4 만당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절차를 거쳤나요?
- 질문5 조선불교청년회가 조선불교청년총동맹으로 전환하는데 영향을 끼친 단체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만당의 당수로는 한용운을 추대하였으나 한용운에게는 통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만당 결사 자체도 통보치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만약의 경우 만당 결사 자체가 노출될 것을 대비하여 한용운에게 피해 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나 만당 주도자들은 만당의 제반 활동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중요 사건이 있으면 한용운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한용운에게는 만당 결성 직전에는 알리지 않았으나 그 후에 알렸거나,1933년 4월경 만당이 해소된 이후 전후사정을 한용운에게 알렸을 가능성이 있다.
- 질문1 한용운이 만당의 당수로 추대된 이유를 써 봅시다.
- 질문2 만당이 한용운을 당수로 추대하고도 한용운에게 통보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4
만당 당원의 성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유학 그리고 프랑스 유학자가 다수 였다. 특히 일본 지역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만당의 당원들은 서구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둘째, 일본 유학으로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셋째, 3·1운동에 참여했거나 군관학교에 입교하고 승려대회를 주도한 인물이 참여하고 있었다. 항일의식 및 사찰령 철폐의식이 투철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중앙학림 및 중앙불교전문학교 출신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교육 및 포교 등의 불교의 대중화에 큰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위의 당원들 대부분은 조선 불교 청년회 회원 및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맹원이었다. 특히, 만당 당원은 그 핵심 간부였다. 이에 만당 당원은 민족 및 항일 의식을 소유하고 불교의 대중화에 관심이 많았던 당시 불교청년운동의 핵심세력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만당의 조직은 중앙에서 출발하여 점차 그 조직의 관장 범위를 지방으로, 나아가서는 일본까지 확대하여 불교계 교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통해서 불교청년운동의 모순이었던 단결력의 부재와 통일정신의 박약을 일정 부분 극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질문1 만당 당원들의 특징을 써 봅시다.
- 질문2 만당의 조직이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는 사례를 써 봅시다.
읽기자료 5
만당은 불교계 전체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불교청년운동을 진일보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 불교 청년 총동맹으로 전환시켰다. 이는 청년회의 지방의식으로 인한 동지 간 결속의 느슨함, 즉 통일정신 부재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만당의 전략에 의해 창립된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은 불교청년운동의 중심 단체로서 기능하였다. 만당 당원들이 자연 그 총동맹의 간부를 담당하였기에 만당은 총동맹을 움직이는 이면단체의 역할도 하였다. 총동맹과 만당은 불교계 교정을 확립하여 불교를 자주적이고 민족적인 방향으로 유도했다. 일제강점기 불교정책에 기생하는 주지층, 종헌실행 반대세력이 있어 그들과 치열한 대립도 전개하였다. 당시 불교계의 종헌실행 운동, 사법 개정운동, 종헌 반포 기념일 제정, 교정연구회 창립에는 만당 당원이 깊숙이 개입하였음은 그 증거이다.
- 질문1 만당이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총동맹으로 전환한 이유를 써 봅시다.
- 질문2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활동 사례를 써 봅시다.
읽기자료 6
만당은 1932년경에 이르러 내분에 직면하였다. 이는 당원 간에 교단 운영에 대한 상이한 현실인식에서 비롯되었다. 만당 내부에서는 이를 해소시키면서 조직을 재건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급기야는 1933년 4월경 자진 해소하는 노선을 채택하였다.
1933년 3월의 조선불교청년총동맹 전체대회에서 최범술이 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러한 제반 사태는 결국 만당의 몰락을 재촉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1933년 4월 경 당시 총동맹중앙집행위원장이며 만당의 당원이었던 최범술의 회고에는 당시 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1933년 4월 중순 어느 날 불교 청년회관 근처의 동해루라는 곳에서 만당의 당원들을 불러 모았다. 이 자리에서 만당의 해체를 제의했다. 도쿄에서 불령사를 통해 투쟁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이 같은 비밀결사가 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비밀결사는 잘못하면 총독부 당국에 의해 역이용 당하여 동지 간에 불화가 생길 우려가 있었다. 내가 해산을 주장하자 강유문, 박윤진, 박근변, 장도환 등은 ‘좋은 동지들의 첫 경사인데 아쉬운 감이 있다.’고 말했다. 반면 강재호, 조은택, 서원출 등 보성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분들은 나의 주장에 동의하였던 것이다. 그 리고 나머지 당원들은 모든 것을 나에게 일임한다고 의사를 표시했다. 나는 만당의 해산을 선언하고 청년총동맹간부들을 일부 개편했다."
총동맹 간부진의 교체와 만당의 해소로 인하여 그 이전 불교청년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하던 김법린, 허영호, 장도환 등이 낙향하였다. 만당의 내분과 해소는 조선 불교 청년 총동맹의 조직 모순 그리고 전체 불교 청년운동의 약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 불교 총동맹에게도 미쳐 총동맹도 1934년경 뚜렷한 활동을 하지 못하는 침체의 상태로 전락하였다.
- 질문1 만당이 내분에 직면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만당이 자진 해소한 시기는 언제인가요?
- 질문3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활동이 침체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를 써 봅시다.
읽기자료 7
만당은 외형적으로는 해소되었지만 항일 저항의식을 갖고 있었던 당원들은 각처에서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지속하였다. 대표적인 거점이 경남 사천의 다솔사였다. 다솔사에는 불교청년운동의 주역이자 만당 당원이었던 최범술이 주지로 재직하였다. 최범술은 만당의 해소를 주장하여 관철시킨 당사자였지만, 그 해소는 전략적 차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만당 당원을 다솔사로 모이게 하여 그들 생계와 활동을 지원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법린이었다. 그리하여 점차 다솔사는 만당 당원들의 집합처가 되어 갔다. 만당의 상징적인 인물인 한용운이 다솔사를 찾기도 하였다. 이렇게 다솔사는 1930년대 중후반 만당 당원들의 집합처 성격을 띠면서 결과적으로는 배일·항일 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다솔사에는 만당 당원, 항일 인사, 민족지사, 사회주의자 등이 왕래하게 되었다.
- 질문1 만당 해소 뒤 만당 활동의 집합처가 된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2 주지였던 최범술은 다솔사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써 봅시다.
- 질문3 다솔사를 드나들었던 사람들은 누구였나요?
읽기자료 8
1938년에 접어들면서 만당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만당의 당원이었던 박근섭, 장도환, 김법린, 정맹일 등이 진주경찰서에 구속되고, 그해 10월에는 김범부, 노기용, 최범술이 경기도경찰부에 구속되었다. 한편 출옥한 최범술은 한용운과 상의하여 다솔사에서 신채호 유고를 수집하여 전집을 만들려고 하였다. 이 작업은 1942년 9월경 일제 경찰에 의해 최범술이 구속되면서 중단되었다.
한편 1942년 겨울 해인사 강원 원장인 임환경, 강사 이고경 등 다수의 학인들이 체포, 구금된 해인사 사건도 이면에는 만당과 연계되어 있었다. 즉 한용운, 만당과 연계된 최범술과 친근한 항일 의식이 있는 승려들을 체포하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고경 강백은 고문 후유증으로 입적을 하고, 끌려간 승려와 학인들은 일제의 가혹한 고문, 구속이라는 만행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렇듯 항일비밀결사체인 만당은 불교교단의 정상화와 불교 대중화를 기하면서 동시에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모슨을 극복하기 위해 활동하였다. 비밀결사운동이라 그 전모를 알기는 어렵지만 불교자주화를 추구한 것은 분명하였다. 이에 그 저변에는 민족불교 지향, 일제강점기 불교에 대한 저항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 질문1 최범술이 신채호 유고를 전집으로 만들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1942년 해인사 사건이 일어난 배경을 써 봅시다.
- 질문3 만당의 역사적 의의를 써 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일제강점기 다솔사 대웅전(현, 적멸보궁)이다.
- 질문1 일제강점기 다솔사 대웅전에 모였던 ‘만당’ 당원들이 나눴을 이야기를 상상력을 동원하여 써 봅시다.
시각자료 2

사진은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을 결성한 조선불교청년대회 광경이다.
- 질문1 조선불교청년총동맹 결성 배경을 써 봅시다.
- 질문2 조선불교청년총동맹 결성 목적은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3

사진은 한용운 환갑 때 심은 것으로 알려진 세 그루의 다솔사 황금 편백이다.
- 질문1 한용운의 회갑연을 다솔사에서 개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질문2 회갑연에 참여했을 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모둠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