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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너희 나라와 통상을 절대 금하려는 것은 우리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아끼는 고운 뜻을 지키도록 하려는 것이다. 바라건대 여러분들은 절대 우리를 핑계대지 말고 돌아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란 놈과 각별히 더 의논하라. 그리하여 우리 동양으로 하여금 우의를 돈독케 하여 형제처럼 여기고, 서로 자주국가로서 그들 세력을 견지토록 하며, 깊은 원수를 풀어 만국에 원망 사는 일을 면하게 하라. 어찌 이것이 만전의 계책이 아니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의병들을 너희 나라 사람들은 폭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만국의 이목이 있으니 과연 의병인지 폭도인지는 변명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밝혀질 것이다. 만약 잘못을 고칠 생각이 없거든 산재해 있는 일본인들은 모두 돌아갈 것이며 억울하게 죽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이 글은 서병희가 작성하여 당시 함안군과 진주군 각처에 붙인 ‘이토 히로부미의침략 구상 포기 및 자주 국권 보장을 촉구하는 영남의진의 경고문’ 중 일부이다.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좌삼리 97번지(도로명 주소: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수서로 1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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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멸실, 원형은 멸실 되었고 공터로 남아있다. |
서병희는 서병권과 청주 한씨의 장남으로 양산군 좌삼리 97번지에서 태어났다. 13세까지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887년부터 1891년까지 서울에서 한의학을 배우고 돌아와 1902년부터 향리에서 한의업에 종사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한탄하고 1907년 2월 17일 서울로 올라갔다. 같은 해 7월 고종의 강제 퇴위가 발표되고 강태현, 송영근 등의 구국선언서와 국민결사대가 발족되는 등 전국의 우국지사들이 궐기하였다. 그 와중에 허위(許蔿) 의병장을 알게 되고 그의 부하가 되어 같은 해 10월 양주에서 13도창의군 결성에 참여하였다. 1908년 1월 13도 창의군의 서울탈환 작전에 허위의 결사대 300여 명의 선봉장으로 참여하였으나 일제의 선제공격으로 실패하고 허위의 밀지에 따라 경상남도에서 의병부대를 이끌고 활약하였다.
1908년 울산군 복안동에서 울산 수비대와 격전을 치룬 것 외에 경주군 산내면 저동에서 경주 일본군의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양산군 하서면의 이천산 속에서는 밀양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받아 교전하였고, 양산군 하북면 성천 마을에 투숙한 일본인 상인을 습격하여 참살하였다. 이후 의병장 박동의의 부장이 되어 일군 수비대와 교전하였으며, 1909년에는 함안, 합천, 칠원, 창원, 고성, 진주, 의령 등지에서 크고 작은 교전과 습격을 통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1909년 10월 11일 밀고에 의해 오후 7시경 구마산 주재소 순사 2명에게 체포되어 향년 43세로 순국하였다.
국권 상실을 끝까지 막기 위해 의병부대를 이끌고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읽기
읽기자료 1
서병희는 경남 양산 출신으로 고향에서 한의업에 종사하다가 일제가 침략을 자행하자 1907년 10월 허위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경기도에서 음력 12월말까지 활동하였다.
군대해산은 후기의병 항쟁의 불길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다. 전국 각지에서 고립적이고 외로운 항일투쟁을 전개해왔던 의병들은 해산군인들의 항쟁을 통해 점차 자신감을 회복하였다. 나아가 이들은 해산군인들의 투쟁역량을 바탕으로 투쟁방안을 전혀 새롭게 전환시켜 갔다. 무엇보다 먼저 이들은 각기 고립적으로 투쟁해왔던 방법에 대한 반성을 하였다. 이때부터는 도의 경계를 넘어서서 의진 간의 연합이나, 연계하는 투쟁전략을 펴나갔다.
이와 같은 노력은 13도 창의대진소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13도연합의진은 서울 공략을 목표로 서울진공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11월부터 서울로 진격하여 동대문 밖 30리에서 일군과 싸워 퇴군하던 1908년 2월 초순까지 서울 근교를 무대로 두드러진 활약을 벌였다.
하지만 여러 의병부대의 연합작전이 원활하게 전개되지는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병희는 군사장 허위가 이끄는 300명의 선발대에 소속되어 공격의 최전선에서 싸우면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으나, 후발 의병부대가 약속한 기일 안에 도착하지 못하여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결국 퇴각하였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함으로써 서울진공작전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서울진공작전은 중지되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각각의 의병부대는 본래의 활동근거지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서병희도 허위의 명령에 따라 해산 군인 5명과 함께 경주로 이동하였다.
- 질문1 서병희는 13도 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써봅시다.
- 질문2 13도 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서병희가 해산 군인 5명과 함께 경주로 내려온 이유를 써 봅시다.
읽기자료 2
경남 동부지역인 양산, 울산의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서병희 의병부대가 활동하였다. 1907년 음력 12월말 서병희는 경상도에 내려가 의병을 일으키라는 허위의 명령에 따라 해산군인 5명을 데리고 경주로 이동하였다. 경주에서 윤정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다가 1908년 음력 5월 부대를 나누어 자신은 양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음력 8월 이후 다시 경남 산청에서 활동 중인 박동희 의병부대의 부장(副將)과 이학로 의병부대의 향관(饗官)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음력 2월 독립하였다. 당시 이학로는 진주출신으로 경남창의소 참모라 표방하며 활동하였다. 이처럼 그는 윤정의, 박동희, 이학로 등이 이끄는 의병부대와 연합하거나 긴밀하게 연계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서병희 의병부대는 경상남도 후기 의병의 대표적인 의진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 질문1 서병희 의병부대가 주로 활동한 지역은 어디인가요?
- 질문2 서병희가 독립적인 의병부대를 조직한 때는 언제 인가요?
- 질문3 서병희 의병부대의 의의를 써 봅시다.
읽기자료 3
1908년 2월에는 윤정의 의병부대와 합병하여 화승총 58정, 양총 2정, 군도 1자루로 무장한 68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울산군 복안동에서 울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다. 3월에는 경주군 산내면 저동에서 경주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5월에는 부하 5명을 인솔하고 경상남도 양산군 하서면 이천리 산에 잠복 중 밀양 수비대의 공격을 받아 패주하였으나 부하 5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양산군 하북면 성천의 여인숙에서 투숙하고 있는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2명과 그 하수인 3명을 습격하여 사살하였다. 8월에는 의병장 박동의의 부장이 되어 그 부장 이학로와 함께 의병 18명을 거느리고 산청군 두량곡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이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1909년 2월에는 산청군 덕산에서 이학노와 만나 부하 11명을 모아 각자 총기를 휴대하고 함안군 산외면 방목동 재류 일본인 집을 습격하여 불태워 버렸다.그 후 이학노와 헤어지고 독립 의병장이 되어 의병 29명을 거느리고 합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이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 4월에는 부하 11명을 인솔하여 함안군 군북시장에 가서 일본인 1명을 구타 부상케 하고 격문을 교부하여 수비대와 경찰서에 전달하였다. 6월에는 부하 30명을 인솔, 총 19정을 휴대하고 함안군 칠원주재소 및 일본 상인의 집과 한인 주치익의 집을 습격하여 순사와 상인 등 6명에 중상을 입히고 주재소에서 군도 한 자루와 지역의 부호인 주치익으로부터 엽전 800량을 거두어 갔다. 8월에는 부하 5명이 각자 총을 휴대하고 창원부 양전면 호라동 박진사댁을 습격하여 금 30원을 거두었고 9월에는 18명의 의병이 진주군 가좌면 호동에서 재무주사를 처단하고 권총 1정과 인쇄물을 압수하였다. 또한 11월에는 부하 23명을 거느리고 의령군 신반시장에서 재류 일본인 상점을 습격하여 사살, 방화하였으며 10월에는 10여 명의 의병이 고성군 개천면 덕성리 공주영수원(公鑄領收員)을 습격하여 금 2백 원을 압수하였다. 이외에도 1909년 여름 경 고성군 배동의 왼쪽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광산사무소를 습격하였고 창원부 웅천면 귀현동 김병선 집을 습격하여 금 30원을 거두었다.
서병희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는 2년간에 걸쳐 체포될 때까지 끊임없이 전투를 전개하면서 일본군 수비대를 괴롭혀왔다. 1908년 2월 19일부터 1909년 10월까지 경주, 양산, 산청, 합천, 창원, 진주, 의령, 고성 등 경남 일원에서 14차례에 걸쳐 일본수비대와 교전하여 사살하며 일본군 수비대와 일경을 교란시켰다.
- 질문1 서병희 의병부대의 주요 공격 대상은 무엇이었는지 써 봅시다.
- 질문2 서병희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기점은 언제인가요?
읽기자료 4
"일본 상인들에게 고하노라. 무릇 동양의 삼국은 옛날부터 솥발의 형세였으며 사람들도 같은 인종이다. 그러니 급한 일이 생기면 서로 구원하고 혼란이 있으면 서로 돕는 것이 과연 이웃에 사는 자들의 본의일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너희 나라는 무슨 외람된 생각으로 옛날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와 싸웠으며 그 끝이 어떠하였는가. 또한 갑오년에 청국과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이익은 모르겠으나 삼국이 틈이 생겼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동양의 두터운 우의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전쟁을 좋아하는 나라는 먼저 망한다는 것이 옛날 성인들이 남긴 경계이니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체로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며 그 강약은 일반인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간신들이 조정에 가득하고 정권은 이미 빼앗겼으나 초야에 있는 인민들의 충의는 아직도 남아있다. 충의를 능멸한다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듣지도 못하였고 보지도 못했으며 오직 너희 나라일 뿐이다. 눈앞의 욕심으로 대의를 손상하고 우리나라 조정의 무도한 무리들과 결탁하여 백성들을 살해하였다. 이에 우선의 동정으로는 하지 못할 것이 없을 듯이 여기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백성으로서 아무리 어리석은 남녀들이라도 임금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하는 때를 당하면 결단코 목숨 바칠 마음만 있고 살기를 즐기는 마음은 가지지 않는다. 이것은 천성적으로 그런 것이니 뉘라서 금지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위 내용은 1909년 4월 함안군 군북시장에서 일본인 1명을 실신시키고, 일제의 수비대장과 경찰서장에게 전달한 경고문의 일부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침략 구상 포기 및 자주국권 보장을 촉구하는 영남의진의 경고문’에서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만행을 규탄하고 일본인들의 귀국을 촉구하였으며 의병활동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 질문1 서병희 의병부대가 경고문을 작성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서병희 의병부대가 작성한 경고문의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5
서병희의 의병부대는 유격전에 적합한 전투조직으로 편제되었다. 의병장인 장관(將官) 아래에 소모(召暮)가 있고, 그 아래에 도포(都砲)와 파수장(坡守將), 연습장(鍊習將)이 있다. 연습장의 수하에는 수종사원(首從事員)과 집사(執事)가 있었다. 실제적인 전투조직으로는 분대장격인 일초십장(一哨什長)과 이초십장(二哨什長), 그리고 삼초십장(三哨什長)이 편제되어 있고, 이들 십장 밑에는 차지(次知) 이하 행동대원 8~10명이 분속되어 있다. 이 이외에 전라도 총각(總角) 4명 및 향관(餉官) 대원 3명이 배후에서 지원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부대조직원의 업무를 보면 소모는 의병을 모집하는 책임자이자 비서관이다. 도포는 부대의 무기를 구입, 보관, 관리하는 책임자고, 파수장은 부대의 안전을 책임지는 경계책임자로 짐작된다. 연습장은 대원의 훈련, 작전 등의 계획을 수립, 시행하는 책임자이고 수종사원은 작전 훈련 담당 교관이며, 집사는 그 아래 훈련 보조 요원으로 여겨진다. 다음으로 행동대원으로 분대장격인 일초십장, 이초십장, 삼초십장이 있고, 그 아래 차지는 이들은 부분대장인 듯하다.
전라도 총각 4명은 각종 연락병의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으로 보이며 향관은 부대이동 때 앞뒤에서 길을 인도하는 병관이다. 이와 같이 50여명의 소규모 부대를 편제하여 유격전에 손색이 없도록 치밀하게 편성되었다.
- 질문1 도포(都砲)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전라도 총각 4명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 질문3 서병희 의병 부대 조직 구성의 특징을 써 봅시다.
읽기자료 6
서병희는 1909년 음력 10월 10일 함안군 칠원면 부곡리 민가에 화승총 10정, 양총 2정, 권총 1정, 칼 한 자루, 의류 등을 숨겨놓고 상인으로 변장하여 혼자 몸으로 세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김해군 한림면 유림정으로 간 사이에 일본 수비대에 의해 숨겨둔 장비는 압수되고, 부하 3명이 체포되었다. 이를 모르고 창원부 내서면 사율리로 은신하여 어물상을 계획하던 중 밀고에 의하여 10월 11일 구마산 주재소 순사에게 체포, 의령지구 수비대장에게 인계되어 취조를 받았고 향년 43세로 순국하였다. 서병희는 체포 후 취조 과정에서 대원들의 주소와 은신처를 묻자 “잘 모른다. 빨리 죽여 달라.”하면서 대원들의 신원을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 질문1 서병희 의병장이 체포되는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서병희 의병장의 기개를 엿볼 수 있는 문장을 찾아 써 봅시다.
읽기자료 7
후기의병은 1907년 후반부터 1909년 후반까지 약 2년 동안 일제와 더불어 전선이 없는 전쟁을 벌였다. 특히 1908년을 전후한 시기에 대략 10만의 의병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혈전을 벌이다 약 1만 5천명이 목숨을 빼앗겼다.
후기의병의 직접적 배경은 1907년 중반 잇달아 발생한 정치적 침탈에서 비롯되었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 7조약의 체결, 그리고 군대해산으로 말미암아 의병항쟁이 크게 고조되었던 것이다. 서병희도 을사보호조약과 고종의 강제 퇴위 과정 속에서 허위의 의병 부대에 합류하였다.
후기 의병 항쟁에서는 해산군인들의 역할이 돋보였다. 서병희는 13도 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 실패 이후 허위의 명령으로 5명의 해산군인과 함께 경상남도 지역으로 내려와 조직적으로 의진을 구성하였다.
또한 후기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은 유명한 성리학자를 비롯한 한미한 유생, 전 현직 관료, 농민, 보부상, 해산군인, 승려, 머슴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다. 이들이 계급과 신분을 초월하여 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서병희는 한의원을 운영하다가 의병에 투신하였다.
한편 후기의병은 의진 간의 진밀한 연계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일제의 탄압에 맞서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의진 간의 연계와 연합은 대체로는 도(道) 별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군량과 탄약을 서로 나누어 사용하거나, 연합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후기의병은 지역 주민과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장기항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들은 일제에 의해 생존권을 위협받던 주민 보호에 노력하였다. 당시 의병들은, “의병과 주민은 머리와 꼬리처럼 서로 이어져 있으므로 어려울 때는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는 바가 마치 부자 형제의 허물없음과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따라서 후기의병은 주민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 질문1 후기 의병 봉기의 직접적 원인을 세 가지로 써 봅시다.
- 질문2 서병희의 의병 부대에서 볼 수 있는 후기 의병의 특징을 세 가지 써 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성천 마을 전경이다.
- 질문1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성천 마을에서 벌인 서병희 의병부대의 활약을 ‘5. 읽기-3.서병희 의병 부대의 활약’에서 찾아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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