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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창신학교 터 신사참배거부운동지(마산지역 항일운동의 거점)

도입

"여러분들은 4년 전 이 학교에 입학하여 … . 앞으로 이 사회에 나가서 살 때에 학교에서 배운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갖고서 …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하여 줄 것을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나라를 잃어버린 가련하고도 비참한 백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른 민족에 의해 지배를 당하고 그 명령에 복종하며 살아야 하는 슬픈 민족이 되었습니다. 왜 우리가 나라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겼습니까? 내 나라 내 강토를 왜 남에게 빼앗겼느냐 말입니다. 힘이 없었기 때문이요, 남에게 의지하려고만 하고 스스로 일어서려는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력한 탓이요, 민족 자주의 정신이 없었던 탓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학교에서 배운 나라 사랑하는 정신과 여러 가지 지식의 토대 위에 더욱 힘을 길러서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고, 우둔한 이 백성들에게 자주적인 민족정기를 불어넣어 주는 참된 민족의 지도자들이 되어주기 바랍니다."

 

이 글은 1911년 3월 22일 사립 창신학교 초등과 1회 졸업식에서 졸업생을 위한 손안로 교장의 격려사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회원동 415번지
현재 상태 멸실. 1990년 창신중학교가 봉암동 신축교사로 이전하면서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현재 한효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소위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세력 확대를 위해 전력을 가다듬고 각종 행사가 있을 때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37년 12월 17일 중국 난징[南京] 함락 보도가 전해지자 군국주의자들은 일본군의 사기를 돋운다 하여 야간의 제등행렬을 강요한 일이 있었다. 여기에는 마산 시내의 모든 학교와 관공서가 참가했는데, 구마산에서 출발한 행렬은 신마산 신사 입구까지 일렬로 대기하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창신학교는 차례가 되었으나 참배를 하지 않고 지나쳤다. 이에 일본 경찰은 교사들을 모두 경찰서로 연행하고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이후로도 창신학교는 동방요배, 일장기 경례, 신사참배, 교육칙어 암송 등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줄기차게 거부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던 전국의 기독교계 학교는 1936년경부터 신입생 모집중지, 폐교압력 등 일제의 교육탄압 수순대로 속속 폐교되었는데, 1939년 1월 창신학교는 조선 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신입생 모집을 금지한다는 공문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당국이 내린 신입생 모집금지 조치로 더 이상 학교를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폐교를 위한 행정상의 절차를 밟지 않을 수 없었다. 1939년 7월 14일 전교생과 모든 교원이 모인 가운데 폐교식이 진행되었다. 개교 이후 3·1운동을 비롯한 마산지역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창신학교는 32년 만에 교문을 닫았다.

창신학교는 1908년 상남동에서 개교하였다. 1924년에는 회원동 교사로 이전하였다. 1939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뒤에는 1948년에는 초급중학교로 재설립되었고, 1951년 농업고등학교로 개교한 고등학교가 1960년에 인문계 창신고등학교로 바뀌었다. 1990년에 현 봉암동 교사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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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일제는 1929년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일본경제가 타격받자 이를 위한 타개책으로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후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1942년 태평양전쟁으로 확대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전쟁 상황에서 일제는 한국에 병참기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병참기지화 정책과 함께 ‘내선일체’를 표방하면서 황국신민화정책도 병행하였다.

1937년 12월 일본 각의는 황국신민화정책을 위한 방침으로 조선 교육령의 개정, 육군지원병제도의 창설, 창씨개명의 실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의 결성 그리고 경찰주재소를 중심으로 한 각종 시국좌담회의 개최 등을 결정하였다. 이 시기 개정된 3차 ‘조선 교육령’에서 ‘국민’을 ‘황국신민’으로 고치고 천황중심주의를 표방하여 황국신민화정책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였다.


  • 질문1 일제가 경제 대공황을 벗어나기 위해 택한 방법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일제가 전쟁 수행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추진한 정책을 써 봅시다.
  • 질문3 일제가 추진한 황국신민화 정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써 봅시다.

읽기자료 2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은 일본의 신도를 강요함으로써 조선인들의 종교마저도 부정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형태가 신사 참배의 강요로 나타나고 있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이후 1925년 조선 신궁을 비롯하여 꾸준히 신사를 건립하고 참배를 강요해 왔던 일제는 대륙침략전쟁이 본격화하면서 조선인들의 정신을 통제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신사보급정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36년 8월 조선 총독부령 제76호로 ‘개정신사규칙’을 공포하면서 일거에 새로이 57개의 신사를 건립하였다. 이후 1938년 9월 시국대책조사위원회가 개최되면서 1925년에 231개였던 신사의 수가 1945년에 이르면 1,141개로 급증하였다.

신사를 중심으로 애국반을 편성하고 신사참배, 궁성요배, 일장기게양, 황국신민서사 제창과 근로봉사의 월례행사 등을 강요하였다. 각 가정에는 강제로 신붕(神棚)을 설치케 하였으며, 이세신궁의 부적을 강제로 배포하였다. 또한 감시대를 조직하여 매일 아침 배례를 잘했는지 사찰하고, 애국반원 중에 밀고자를 만들어 주민들의 동태를 보고케 하였다. 성적 여하에 따라 곡물이나 고무신 등의 배급에도 차이를 두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일본말을 한 마디라도 사용하지 못하면 면회를 시켜주지 않는 등 황국신민화정책에 열을 올렸다.

‘내선일체의 왕도’ 부여에 부여신궁을 건립하여 내선일체의 정신적 전당으로 만드는 계획을 세워 1939년 6월 완공하였다. 일제는 국민총력운동의 조직을 총동원하여 국민운동의 형태로 신사참배를 대대적으로 강요하였는데 조선 신궁 참배자 수만 1942년 260만 명을 기록하고 있었다.

일제는 일본민족이 우주 창조의 신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의 자손으로 일본 천황은 살아 있는 현인신(現人神)이라고 설명하면서 조선인들에게 이 신도사상 이외의 일체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수천 년의 문화·사상·종교 유산을 갖고 있던 조선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신도란 잡신을 숭배하는 유사 종교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신사참배 또한 일제의 폭력에 못이긴 형식적인 의례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일제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방법에 의존해서라도 정신동원을 하지 않고서는 조선에서 총동원체제를 유지해 나아갈 수 없는 실정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 질문1 신사의 수가 1945년에 이르면 1,141개로 급증할 정도로 일제가 신사 건립에 매진한 이유를 써 봅시다.
  • 질문2 일제가 세운 신사를 중심으로 한 황국신민화정책의 내용을 써 봅시다.
  • 질문3 일제가 섬기는 최고의 신(神)이 무엇인지 써 봅시다.
  • 질문4 일제는 일본 천황을 어떻게 신격화했는지 써 봅시다.
  • 질문5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대한 조선인의 입장을 써 봅시다.

읽기자료 3

일제는 강점 초기부터 기독교 세력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였다. 이유는 첫째로 천황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하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유일신을 숭상하는 기독교와 조화·공존할 수 없었다. 둘째로 기독교인들이 사내총독 암살사건, 105인 사건, 3·1운동 등의 민족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민족독립운동과 깊은 연계를 맺고 있었다. 셋째로 기독교는 선교사들을 매개로 영·미 등 서구제국과 연결되어 세계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걸림돌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분열과 회유정책을 통하여 한국 기독교를 식민지정책에 이용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강압정책은 신사참배 강요로 시작되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직후부터 관공서나 각급 학교에 천황의 사진을 나누어주고, 행사 때마다 배례를 강요하는 등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시켰다.

  • 질문1 일제가 기독교 세력에 대한 대책으로 부심한 이유를 세 가지만 써 봅시다.
  • 질문2 일제의 기독교 세력에 대한 탄압은 어떠한 형태로 나타났는지 써 봅시다.

읽기자료 4

1901년 4월 20일 최초의 근대적 학교로 마산공립소학교가 개교한 이래 이후 마산에는 많은 학교가 잇따라 세워졌으나 식민지 교육의 일환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체계적인 민족교육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이러한 학교와는 별도로 주체적으로 체계적인 민족학교의 설립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마침내 1906년 5월 성호리교회당(현, 문창교회)에 이승규 가 중심이 되어 독서숙(讀書塾)을 개설하였다. 처음 10여명의 아동들을 모아 우리글과 우리역사를 가르치면서 시작된 독서숙은 차츰 인근의 청장년에 이르기까지 모여 들면서 점차 확대되어 갔다. 이리하여 1908년에는 학교 체제를 정비하여 창신(昌新)이란 학교명을 정하고 남녀공학을 실시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정규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1909년에는 모금 운동을 통하여 상남동에 경남 최초의 양옥으로 된 새 교사를 신축하였다. 당시의 교육은 우리의 국권회복과 근대화의 달성을 위해 실력을 배양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목적을 두었다. 따라서 교정에는 태극기가 휘날렸으며 교내의 활동에서도 정부를 공박하고 일제의 검은 손길을 통렬히 비난하였다.

일제 강점 다음 해인 1911년 메이지〔明治〕가 죽고 다이쇼〔大正〕가 일본 천황이 되자 일제는 시민과 학생들에게 축하행진 참가를 강요하였다. 구마산 불종거리에서 신마산 부청사까지 행진 중 일본천황 만세를 부르도록 강요하자 창신학교 학생들은 만세를 부르지 않고 걷기만 하였다. 이에 화가 난 일본경찰이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자 학생들은 일경을 하천으로 처박아 버리고 행진을 중단한 채 해산해 버렸다. 다음 날 무장 헌병 1개 소대가 학교에 몰려와 “주모자를 내놓지 않으면 전원 연행하겠다”고 협박하자 학생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우리 모두를 연행하라”며 강렬히 저항하였다.

912년에는 창신학교에 새로이 고등과가 신설되었고, 다음 해 4월 자매학교로 의신여학교가 개교됨에 따라 창신학교 여학생들은 그곳으로 옮겨 갔다.

창신학교는 1914년 5월 개교기념일 행사로 추산동 활터에서 많은 주민들이 모인 가운데 시국강연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연사로 등단한 안확은 교육을 통해서 민족혼을 배우고 일인들의 손아귀로부터 나라를 되찾도록 하자는 요지의 열변으로 참석한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처음 이렇게 시작된 연설회는 연중행사로 계속되었고, 이를 통해 주민들의 민족혼에 줄기찬 용기를 불어 넣어 마산지역의 3·1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창신학교는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는 젊은 학자이자 문필가인 이윤재와 김윤경을 교원으로 초빙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나라사랑의 정신을 심어줌으로써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날로 견고하게 성장해 온 창신학교의 민족의식은 마침내 마산의 3·1운동에서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중추적 역할을 다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창신학교는 1924년 상남동에서 회원동으로 학교를 이전하였다.

창신학교는 설립자의 사망과 일제의 압박으로 유지에 어려움을 겪던 끝에 1925년 호주선교부가 인수하고 교명을 호신학교로 바꾸었다. 그러나 일제 학무당국은 반일감정의 온상이 되고 있던 이 학교의 고등보통학교 인가를 해주지 않았다. 이에 학교당국은 어쩔 수 없이 일본인 교원과 친일파 교원을 채용하고 일어를 상용함으로써 형식적으로나마 황국신민화의 길을 따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학교의 변질은 재학생들의 불만을 고조시켜 강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1927년부터 1930년에 이르는 4년간 친일파 교원배척과 학교의 변질을 규탄하는 동맹휴업사건이 계속되었다. 특히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여파가 미친 1930년 5월 10일에 이르러 전교생의 시위가 발생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여파는 전국의 한국인 학생들에게 배일의 기상과 용기를 심어주었다. 마산의 민족주의 저항운동의 요람으로 알려진 창신학교 학생들은 일제의 차별교육정책에 대하여 항상 뿌리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30년 5월 10일 전교생들은 교정에 모여 친일파 교사를 즉시 축출할 것 등의 구호와 요구조건을 제시하며 2명의 친일교사를 끌어내고 이들을 앞세워 북마산역 쪽을 향해 시위행진을 벌였다. 성난 학생들은 이 친일교사들을 북마산역에서 화물열차편으로 일본으로 탁송해 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경들에 의해 나영철, 조순제, 한태일, 한기복, 최주오, 전제근 등 주동 학생 다수가 피검되어 마산검사국에서 미결수로 2개월 여의 감옥살이를 하였다.


  • 질문1 창신학교의 모체(母體)는 무엇인가요?
  • 질문2 1911년 창신학교 학생과 일경이 대결을 벌이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3 1914년 창신학교 개교기념일을 즈음하여 열린 시국강연회에서 안확이 행한 연설의 주요 내용은 무엇인가요?
  • 질문4 1927년부터 1930년 동안 있었던 동맹휴업사건의 이유를 써 봅시다.

읽기자료 5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학생과 시민들에게 신사(현, 마산제일여고 자리) 참배를 강요하였다. 일제는 일본의 국경일이나 기타 경축행사가 있을 때마다 학생들이 단체로 참배토록 강요했지만 창신학교 학생들은 신사참배를 계속 거부해 왔다.

또한 중·일전쟁 당시인 1937년 12월 17일 일본이 중국의 난징〔南京〕함락을 기념하기 위해 일제가 축하 제등행렬을 벌이도록 마산 시내의 각급 학교와 관공서에 시달하였다. 이에 구마산의 각급 학교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대열을 지어 신마산에 있는 신사 앞으로 행진을 하였다. 일경의 감시 하에 모두들 신사 앞에서 머뭇거리며 억지로 머리 숙여 참배하는데 창신학교의 차례가 되자 학생과 교사들은 참배를 거부하였다. 그 순간 마산경찰서 구마산파출소장 시마다〔島田〕는 행렬을 제지하여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고 2시간 여 동안 계속 참배하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참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험악한 사태가 일어날 상황이었다. 학생들은 돌멩이를 주워 들고 “만약 우리 선생님께 불손한 언동을 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겁을 먹은 시마다는 인솔교사 현홍택으로 하여금 행렬의 해산을 종용하였고, 일단 현장은 더 이상 악화되지 않은 채 수습되었다. 그러나 일경은 그 날 밤 현홍택, 전성도, 조순제, 이현우, 양성록, 김수돈 등 여러 교사들을 강제 연행하였다. 이 사건으로 학교는 상황이 더욱 어려워져 호신학교는 폐교되었다.

이후 호주선교부는 호신학교를 복음농업실수학교로 개명하여 개교하였다. 학생들은 여전히 일제가 강요한 동방요배, 일장기에 대한 경례, 교육칙어 낭독, 마산신사의 참배 등을 거부하면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아울러 일제의 탄압으로 인한 재정적 압박, 호주선교회의 신사 참배 반대 입장과 그에 따른 폐교 결정으로 더 이상의 학교 경영이 어려워 1939년 7월 14일 폐교하였다.


  • 질문1 일제가 학생들에게 마산신사에 참배하도록 강요한 이유는 어떤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인가요?
  • 질문2 복음농업실수학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진 이유를 써 봅시다.
  • 질문3 1939년 창신학교가 폐교하게 된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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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창신학교 초대 교장인 손안로이다.

  • 질문1 손안로 교장은 어느 나라 사람일까요?
  • 질문2 손안로 교장의 교육 목표를 ‘도입’ 부분을 참고하여 써 봅시다.

시각자료 2

다음은 마산신사 사진이다.

  • 질문1 일제가 한반도 전역에 신사를 설치한 목적을 써 봅시다.
  • 질문2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창신학교 학생들은 어떻게 대응했는지 써 봅시다.

시각자료 3

다음은 창신학교 폐교에 대한 『동아일보』 1939년 2월 3일자 기사이다.

  • 질문1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폐교 이유가 무엇인지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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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 방법을 토론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대한 의의를 종교적 측면과 독립운동의 측면에서 조사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대한 기독교계의 대응을 조사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모둠별로 우리 고장에 있는 신사의 흔적과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사례를 찾아 조사보고서를 작성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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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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