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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출신인 백산 안희제는 종전까지 국내의 임정 첩보의 총책으로 모든 임정 첩보원은 그를 찾았고, 그로부터 모든 활동이 시작되는 거점이었다. 그는 최초의 무역업인 백산 상회를 경영하기도 했고, 『부산일보』를 경영하기도 한 선각자이기도 했다. 이 같은 그의 재력이 모두 임시정부의 자금으로 옮아갔고, 그 재산을 모두 날린 후에도 종전까지 임정 첩보원의 활동비는 거의가 백산의 조달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위 글은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생존자들이 증언한 비록(秘錄) ‘김구와 임정 첩보원’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안희제 선생이 어느 정도의 독립운동 자금을 어떻게 보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그의 활동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가 구술로 전해지고 있다. 안희제 선생은 임정 첩보 36호의 총책으로 임정 운영자금의 60%를 조달했다고 한다. 백산상회가 벌어들인 거의 모든 돈을 운영자금으로 보냈기 때문에 상회는 항상 적자 상태였다. 그래서 모자란 돈을 모금하러 국내 갑부나 주요 기업가들을 많이 찾아다녔다.
한번은 안희제가 경주 갑부 최준에게 모금을 하려 했다. 당시 최준은 백산을 통해 헌금된 돈이 100% 독립자금으로 쓰인다는 것을 믿지 않고 반이라도 전달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해방 뒤 김구와 만난 최준은 안희제에게 전달한 돈과 김구가 받은 돈이 일치함을 확인하고 이미 저세상으로 떠난 안희제의 무덤을 향해 대성통곡했다고 전해진다.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3가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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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멸실 / 백산상회 건물이 있던 자리에 현재 프라임 원룸이 들어서 있다. |
백산상회는 안희제(安熙濟, 1885~1943)가 국외 독립운동지도자들과의 연락망과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해 고향의 전답 2,000두락을 팔아 기금을 마련해 이유석, 후한식 등과 함께 1914~5년경에 설립하였다. 상회의 명칭은 그의 호 백산에서 땄다.
백산상회는 설립초기에는 곡물, 면포, 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소규모 상회였다. 1918년 합자회사로, 이후 백산 무역 주식회사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것은 영남의 대지주 자본의 적극적인 참여로 가능하였다. 안희제 등 백상상회 관계자는 대다수는 조선국권회복단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다.
1921년 8월에는 자금난으로 경영위기를 당하게 되었으나 사장 최준(崔俊)이 소유재산 대부분을 투자해 경영에 매진했다. 1925년 이후 주주와 중역 사이에 자금 횡령 문제로 서로 고소하는 일대 분규에 휩싸여 사실상 영업 중지 상태에 빠지고 1928년 1월 29일 자진 해산하였다.
백산상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국내 보급 통로였다. 그고 임시정부의 경비를 조달해주기도 하였다. 백산 안희제는 독립운동을 위한 독립자금 조달과 독립 보급 등 국내의 주요 독립운동기지로서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던 것이다.
백산상회 해산 후 건물은 갑자(甲子)부동산 주식회사로 넘어갔고, 현재 개인 소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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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안희제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 1906년 민영환이 설립한 흥화학교를 다니고, 1907년에는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했다가 이듬해인 1908년 3월 양정의숙으로 전학한다. 이 시기 그는 국권회복운동의 한 갈래인 자강 운동에 참가한다. 1908년 3월에 조직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참가하여, 평의원으로서 지방순회 강연에 나섰다. 또한 1907년에는 의령군 의령면 중동(中洞)에 의신(宜新)학교, 1908년에는 고향 설뫼 마을에 창남(刱南)학교를 세운다. 그리고 윤상은과 더불어 동래 구포에서 구명(龜明)학교 설립에 참여하는데, 이때 윤상은이 설립한 구포저축주식회사에도 발기인 및 주주로 참여하였다.
안희제는 1909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계기로 그 해 10월에 서상일, 박중화, 김동삼, 윤세복 등 80여 명과 함께 비밀 결사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영남 지역 서른 살 안쪽 청년 민족주의자들의 결집체로서 그 구성원들은 교남 교육회 안에서 전투적 성향을 띠었던 인물들이었으며, 신민회와도 연결되고 있었다. 이것은 영남 지역을 무대로 한 여러 갈래의 비밀결사로는 시초라는 점에서, 그리고 일제 강점 이후 영남 지역을 무대로 한 여러 갈래의 비밀 결사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 단원들은 이후 안희제의 항일투쟁 내내 그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단은 전형적인 비밀 결사였으나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활동이 침체된다. 그렇지만 서북지방을 조직기반으로 한 신민회, 경상도지방의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 호서·호남지방의 대한독립의군부 등의 독립운동단체와는 달리 일제하 전시기에 걸쳐 노출되지 않고 활동하였다는 데서 주목된다.
대동청년단이 조직된 1909년 10월은 이미 일제에 의한 한국병합이 기정사실화된 시기였다. 1909년 7월 극비리에 ‘한국병합 실행에 관한 방침’을 성안하여 각의에서 통과시킨 뒤 오직 그 시기와 기회만을 기다리던 일본정부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에 의한 이토 히로부미 사살사건과 함께 병합을 위한 구체적인 실무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결성된 대동청년단은 신민회와 함께 초기 항일독립운동의 선구적인 단체였다.
대동청년단은 당시 17세부터 30세 미만의 청년 80여 명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경상도 일원의 청년지사들이며, 신민회, 교남교육회, 달성 친목회, 조선국권회복단, 백산상회와 관련된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대동 청년단원으로 계몽운동이나 국권회복운동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사들은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청년지사와 선각자적 의식을 가지고 현실에 참여한 유림들이다. 이들은 상경하여 신식교육을 받았거나 계몽운동 단체에 참가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 질문1 안희제가 을사조약 후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서 했던 주요 활동을 말해보시오.
- 질문2 대동청년단이 결성되는 계기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대동청년단의 조직이나 활동에 관한 구체적인 모습은 뚜렷이 부각되지 않고 있다. 다만 윤병호(尹炳浩)는 대동 청년단의 단원으로 백산 안희제와 깊이 교유하여 백산상회의 지배인을 맡았고, 해방 후 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4년 죽기 직전에 남긴 회고 메모는 대동청년단의 전모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으로 생각된다. 그의 회고에서 그 단규(團規)와 단원을 알 수 있을 뿐이다.
"◇ 단규
① 단원은 반드시 피로 맹서할 것.
② 새 단원의 가입은 단원 2명 이상의 추천을 받을 것.
③ 단명(團名)이나 단(團)에 관한 사항은 문자로 표시하지 말 것.
④ 경찰 기타 기관에 체포될 경우 그 사건은 본인에만 한하고 다른 단원에게 연루 시키지 말 것."
대동청년단은 1913년 이후 본격적인 국내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1914년 안희제는 이미 활동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동래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였고, 서상일은 1913년 달성친목회를 재흥한 뒤 태궁상회를 설립하여 이를 거점으로 삼아 1915년 음력 1월 15일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였다. 이리하여 안희제를 중심으로 한 백산상회의 상업조직과 서상일을 중심으로 한 조선국권회복단의 비밀결사조직이 대동청년단의 중추적인 기관이 되었다. 백산상회가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과 인재육성을 위한 표면단체라 한다면, 조선국권회복단은 국내외를 연결하는 연락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백산 상회와 조선 국권 회복단원의 태궁상회는 상호간의 연락거점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동청년단의 단원들은 1910년대에는 대부분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으나, 3·1운동을 계기로 국외로 탈출하여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에 투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의열단의 단원으로서 의열 투쟁을 전개하거나, 국내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한 인물도 있었다.
- 질문1 대동청년단 단규의 주요 내용을 말해보시오.
- 질문2 대동청년단의 중추적 기관에는 어떤 것이 있었나요?
- 질문3 대청청년단의 단원들은 3·1운동 후 국외에서 어떠한 활동을 하였나요?
읽기자료 3
안희제는 1913년 초에는 국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의령에서 제지업을 하는 한편 이유석, 추한식 등 초량객주들과 더불어 부산 동광동에 백산상회를 세운다. 1914년 가을에는 고향의 전답을 팔아 백산상회를 전국적인 상업회사로 규모를 키웠다. 이 때 그는 나라 안팎 독립운동 단체에 대한 자금 조달과 연락책임을 맡게 되었다.
안희제는 백산상회를 설립한 뒤 대구, 서울, 원산, 봉천 등지에 지점 또는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면서 활동 지역을 확대시켰다. 초기의 백산상회는 안희제가 설립한 소규모 개인상회였으나, 1917년에는 윤병호, 최준, 윤현태, 최완 등과 자본금 14만 원의 합자 회사로 경영하다가, 1919년 자본금 100만 원의 백산 무역 주식회사로 변경하였다. 백산 무역 주식회사의 경영진 및 주주의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 경영진
취체역사장 최 준
전무취체역 윤현태
취체역 안희제, 이종화, 조동옥, 허걸, 이우석, 윤병호, 정제원
감사역 윤상은, 문영찬, 김상원
◇ 주주
최준(경주) 2,000주, 안희제(의령) 2,000주, 윤현태(양산) 2,000주, 이종화(울산) 1,500주, 윤상태(달성) 1,000주, 안상상(의령) 1,000주, 최선호(산청) 1,000주, 조동옥(함안) 1,000주, 허걸(동래) 700주, 김홍석(의령) 700주, 이우석(선산) 700주, 이우식(의령) 600주, 윤병호(남해) 500주, 김용조(하동) 500주, 정재완(하동) 500주, 김상원(하동) 500주, 권오봉(창원) 500주, 김재필(동래) 500주, 김기태(진주) 500주, 이현보(거창) 500주, 문영찬(하동) 500주, 주기항(창원) 500주, 남형(고령) 우300주, 강정희(의령) 100주, 정제원(천안) 100주, 허만정(진주) 100주, 윤상은(부산) 50주, 김시구(부산) 50주, 지영선(부산) 50주, 최태욱(부산) 30주, 홍종희(함남 문천) 10주, 김석준(양산) 10주"
영남의 대지주와 실업인으로 조직된 백산상회는 자체 조직을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내의 각 유지들이 기탁하는 자금을 송달하는 일까지 맡아왔으며, 자금의 송달방식은 항상 장부상 거래의 형식을 취하여 일경의 수사를 피할 수 있었다. 백산상회는 독립 운동자금의 공급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외견상 부산 상업계의 대규모의 회사였으며, 또 대구, 서울, 원산, 봉천 등지에 지점 또는 연락사무소를 개설하고 있었다. 대구의 연락사무소는 태궁상회를 경영하는 서상일이 맡았고, 서울연락사무소는 미곡상 이수영, 그리고 안동과 봉천의 연락사무소는 해천상회를 경영하는 이해천이 담당하였다. 그 외에도 윤상태의 향산상회, 통영 서상호의 미곡상정미소, 원산의 원흥상회, 마산의 원동상회·환오상회가 연결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대동청년단의 거점인 백산상회의 상업조직은 경상도 일원과 서울·원산 등 전국에 걸쳐 있었고, 만주의 안동·봉천 등 해외까지 포괄되어 있었다. 이것은 당시 국내외의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조직으로서 상업조직이 광범하게 운용되었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3·1 운동을 전후하여 크게 발흥했던 부산지역 민족기업은 거듭된 공황과 일제의 민족 차별적 산업 금융정책으로 말미암아 급속히 쇠퇴해 갔다. 백산 무역 주식회사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1925년에는 중역, 주주 사이에 자금 횡령 문제로 서로 고소를 제기하는 일대 분규에 휩싸여 사실상 영업 중시 상태에 빠지고, 1928년 1월에 자진 해산되고 말았다.
- 질문1 안희제가 백산상회를 세운 시기는 언제인가요?
- 질문2 백산상회를 통하여 안희제가 민족의 독립을 위해 기여한 내용을 말해보시오.
- 질문3 백산상회가 연락사무소를 개설한 주요 지역을 말해보시오.
읽기자료 4
안희제는 1928년 전진한을 비롯하여 이시목, 함상훈 등이 이끌었던 협동조합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협동조합경리조합 이사장에 올랐다. 또한 자력사(自力社)라는 잡지사를 경영하여 월간잡지 『자력』을 발간하였다. 이 잡지는 협동조합운동사의 기관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협동조합운동사는 조선의 민족운동이 협동조합이라는 경제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정치운동으로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1926년 5월 재일 유학생들이 동경에서 조직한 단체이다. 그 강령은 “1. 우리는 협동, 자율정신으로써 민중적 산업 관리와 민중적 교양을 한다. 1. 우리는 이상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합정신의 고취와 실지 경제를 기한다.”로 정하였다. 이 단체는 1928년 4월 본부를 동경에서 서울로 이전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나 일제의 거듭된 단압으로 1931년 무렵 해체되어 버렸다.
안희제가 협동조합운동에 참여한 것은 1920년대 전반기 실력양성운동을 민족 자립 경제 건설과 근로대중의 실력 양성으로 연결하고자 했던 그의 비타협 민족주의 노선이 한 단계 더 심화된 것이기도 하다. 또한 협동조합운동이 신간회 운동과의 연관 속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으로 볼 때, 자신의 장점인 경제운동을 통해 정치 운동인 신간회 운동을 지원하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그는 1929년 9월 의령에서 만석꾼인 이우식의 자본을 끌어들여 일제시기 3대 민족지의 하나인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를 인수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해 9월 27일자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조석간 4면씩 하루 8면을 발행하였다. 이에 자극받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8면으로 맞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재력이 빈약한 중외일보로서는 그 경쟁을 견뎌내지 못하고 재정난을 겪게 되었다. 그 재정난을 해결 할 수 없어 중외일보는 1931년 6월 19일 종간호를 낸 후 9월 2일 해산을 결의하게 되었다. 그 후 노정일이 이 신문을 인수하여 중앙일보로 바꾸어 발행할 때 안희제는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 질문1 백산 무역 주식회사가 해산되었던 배경을 설명해보시오.
- 질문2 안희제가 협동조합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이유를 말해보시오.
- 질문3 중외일보는 왜 자금난을 겪다가 해산하고 중앙일보로 바뀌게 되었나요?
읽기자료 5
1931년 안희제는 경북 봉화에서 광산 개발로 많은 돈을 벌었던 김태원과 함께 발해의 도읍이었던 북만주 동경성에 토지를 사들이고, 1932년부터는 드넓은 땅을 개간하여 조선의 남부지방 농민 300여 호를 옮겨 살게 하고 개간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는 이곳을 발해농장이라고 이름하였으며, 발해 보통학교를 세워 교장 일을 맡았다. 그는 농장 경영을 통해 동포 이주민을 자작농으로 길러내어 생활을 안정시키고 실력을 양성하여 이를 기반으로 무력 투쟁과 연계하려 하였다. 또한 발해농장 경영은 협동조합운동의 연장이자 본격적 구현이라고 볼 수 있다.
안희제는 이때 대종교 포교 활동에 힘을 쏟는데, 이는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통해 만주 지역 조선인에게 민족의식을 북돋우고, 대종교를 독립운동의 정신적 중심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결국 발해농장 경영은 협동조합운동과 민족종교, 교육운동을 하나로 묶어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구축한다는 커다란 기획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가 만주를 강점하고 만주국을 세웠을 뿐 아니라 중일전쟁을 치르고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력과 경찰력을 이곳에 투입해 놓은 상황에서 그의 의도는 실현되기 어려웠다.
1911년에 대종교에 입교한 안희제는 1936년에 대종교 의결기관인 경의원(經義院) 부원장을 맡게 되었다. 대종교단에서는 1939년 7월에 만주국 정부에 교섭하여 교적 간행에 대한 승인을 얻어, 그 해 8월 대종교 서적 간행회를 조직했는데, 안희제는 회장이 되어 1940년에 『홍범규제(弘範規制)』, 『삼일신고(三一神誥)』, 『신단실시(神壇實記)』 등 여덟 가지의 책을 펴냈다. 또 해마다 네 차례 『교보(敎報)』도 펴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안희제도 항일 독립 염원을 숨긴 채 겉으로는 순종하는 것처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설립한 발해 보통학교는 친일 조직인 조선인민회에 넘겨져 동경성 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스스로 그곳 일본인 고위 군인, 경찰, 관료들과 교분을 쌓아야 했으며 아들 안상두를 궁방 청년단 간부로 입단시켜야 했다. 안상두의 주장에 다르면 당시 안희제는 발해농장을 비밀독립기지로 삼아 대종교 간부를 대동청년단에 들게 하고, 무장 봉기를 준비하고자 중국 구국군이나 우리 독립군과 몰래 연락을 했다고 한다.
대종교 총본사에서는 1942년 음력 10월 3일 개천절 경축식을 거행한 뒤 임시협의회를 열고, 만주국 정부와 조선 총독부에 정식 포교 승인을 신청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대해 일제는 11월 19일 대종교 간부 25명을 체포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이를 대종교에서는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 한다. 임오교변의 원인은 대종교 교인을 가장한 일제 헌병 앞잡이의 밀고 때문이라고도 하고, 조선어 학회 사건의 주모자 이극로가 대종교 교주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 속에 들어 있던 격문이 빌미가 되었다고도 한다. 안희제는 1942년 임오교변으로 투옥되어 아홉 달 동안 모진 고문과 옥살이 끝에 1943년 9월 2일 5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 질문1 안희제가 발해농장과 발해보통학교를 설립하여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안희제가 민족의 독립을 위해 택한 종교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안희제는 어떤 계기로 일제에 체포되었나요?

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백산상회 근처에 세운 백산기념관이다.
- 질문1 백산기념관을 관람하고 안희제의 독립운동 내용과 백산상회의 역할을 정리하여봅시다.
시각자료 2

다음은 용두산공원 팔각정으로 올라가는 길옆에 세워진 안희제의 흉상이다.
- 질문1 사람들에게 안희제의 행적에 대해 간단히 소개할 수 있는 안내문을 작성해봅시다.

모둠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