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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육군 제1훈련소(제주에서 육군을 훈련시키다)

도입

대한민국 남자로서 군대(특히 육군)에 가게 될 때 대다수가 들려야 했던 곳이 논산훈련소였다. 그래서 훈련소 하면 ‘논산훈련소’라고 할 정도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논산훈련소보다 더 먼저 세워져 6·25 전쟁 당시 큰 역할을 하던 훈련소가 제주도에 있었다. 제주 육군 제1훈련소가 바로 그곳이다. 제주도 서남쪽 모슬포항(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에서 모슬포예비군훈련장 방향에 6·25 전쟁 당시 육군을 훈련시켜 전쟁터로 보냈던 곳인 육군 제1훈련소가 있었다. 이곳은 강한 병사를 기르는 터전이라는 뜻으로 ‘강병대(强兵臺)’라 하였는데, 보통 모슬포훈련소, 대정훈련소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침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까지 후퇴하였으나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되찾고 압록강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북한군을 도와 중국군이 참전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을 1951년 1월 4일 서울에서 후퇴하며 수도를 다시 부산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전쟁을 치르는 동안 전투를 할 수 있는 군인을 길러 내기 위해 1950년 7월 11일 경상북도 대구에 25교육연대를 창설(創設: 기관이나 단체 따위를 처음으로 세움)한 것 등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훈련소를 세웠지만, 이들 훈련소로는 한계가 있었다.

서울을 다시 되찾는 것은 물론 북한군과 중국군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군인이 필요하였으며, 무엇보다도 빠른 시일 안에 훈련시켜 전투를 잘할 수 있는 군인을 길러 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제주도였다. 제주도는 6·25 전쟁 당시 비교적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던 비교적 안정된 지역이었으며, 따라서 체계적이면서 대규모로 훈련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에 1951년 1월 14일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에 육군 제1훈련소를 세웠다. 그리고 대구에 있던 25교육연대를 1월 22일 이곳으로 옮겨(그래서 육군 제1훈련소의 공식적인 창설일을 1월 22일로 보기도 한다) 제1훈련소로서의 일을 해 나갔다.

육군 제1훈련소는 1951년 1월부터 1955년 12월 문을 닫을 때까지 근 5년간 약 50만 명 정도의 신병(新兵: 군대에 새로 들어온 병사)들을 훈련시켜 전방(前方: 적과 바로 마주하고 있는 지역)으로 보냈는데,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와 맞먹는 숫자였다. 6·25 전쟁 기간 제주 육군 제1훈련소의 역할이 자못 컸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제주 육군 제1훈련소는 많은 시설이 사라지고 당시의 지휘소 본관 건물, 막사, 의무대 건물, 정문 기둥 2개 등이 남아 있을 뿐이며, 당시 훈련소 교회로 사용하였던 강병대(强兵臺)교회가 남아 있다. 그리고 육군 제1훈련소 맞은편에 당시 해병대 훈련소로 사용하던 시설이 남아 있고, 또한 일제강점기 대 사용하던 비행장과 지하벙커 등이 남아 있어서 이곳 모슬포 지역이 대규모 군사 시설이 있던 곳임을 말해 주고 있다.

한편, 제주 육군 제1훈련소가 있던 자리는 훈련소가 들어서기 이전 1946년에 육군 제9연대가 창설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은 ‘제주 구 육군제1훈련소 지휘소’라는 이름으로 2008년 10월 1일 등록문화재 제409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제주 육군 제1훈련소 맞은편에 있던 옛 해병대 훈련소도 2008년 10월 1일 ‘제주 구 해병훈련시설’이란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410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남제주 강병대 교회는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2517
현재 상태 원형보존 / 현재 본관 건물과 정문 일부(정문의 기둥), 훈련소 터 등이 남아 있다. 훈련소 본관 건물은 점점 자연 훼손되고 있다. 특별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군대는 조선 경비대와(남조선 경비대) 조선 해안경비대(남조선 해안경비대)에 의지하고 있었다. 조선 경비대는 1946년 1월 15일 남조선 국방경비대(조선 국방경비대, 줄여서 국방경비대)라는 이름으로 처음 만들어진 부대가 1946년 6월 15일 조선 경비대로 새롭게 만들어진 부대이고, 조선 해안경비대는 1945년 11월 11일 세워진 ‘해방병단(海防兵團)’이 1946년 6월 15일 조선 해안경비대로 확대되어 새롭게 만들어진 부대이다.

1948년 7월 17일, 법률 제1호인 <정부조직법>에 따라 정부 11개 부서의 하나로 국방부가 설립되었다. 8월 하순에는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에 임시로 사용할 ‘군사안전에 관한 협정’이 맺어져 우리나라 국군 전체를 지휘하는 권한인 군 통수권이 미군에서 우리 정부로 넘어왔다. 군 통수권을 넘겨받음과 함께 조선 경비대와 조선 해안경비대는 모두 9월 1일부터 국군으로 부르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9월 5일 조선 경비대와 조선 해안경비대는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국방부 설립과 함께 국방부는 11월 30일 <국군조직법>을 공포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조선 경비대는 정식으로 육군이 되었으며, 조선 해안경비대는 정식으로 해군이 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해병대는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리적 여건과 여수·순천사건의 교훈에 따라 바다와 육지 양쪽 모두에서 실시할 수 있는 작전의 필요성이 높아 1949년 4월 15일 경남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창설되었다.

대한민국 공군은 1948년 4월 육군에 소속된 항공부대로 출발하였다. 같은 해 9월 초 조선 경비대와 조선 해안경비대가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바뀌자, 공군도 따로 독립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나타났다. 그래서 <국군조직법>이 공포된 다음날인 1950년 12월 1일부터 예전의 조선 경비대 항공기지사령부가 육군 항공사령부로 이름이 바뀌면서 공군으로서의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 후 육군 항공사령부는 1949년 10월 1일 국방부의 항공국과 합해서 공군본부를 만드는 것과 동시에 1,600명의 병력과 20대의 연락용 비행기로 육군에서 분리·독립하여 오늘날의 공군이 되었다.

이렇게 대한민국 육군을 비롯하여 해군과 해병대, 공군이 창설되었지만,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국군은 쉽게 무너지며 후퇴를 거듭하였다. 국군을 도와 유엔군이 참전하였지만, 북한군의 우세한 병력과 거센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낙동강까지 물러났다. 많은 군인이 죽어가는 가운데 싸울 병사가 모자라 급하게 훈련받은 학생들까지 학도병으로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되찾고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올라갔지만,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다시 후퇴하여 서울을 또 빼앗기기도 하였다. 서울을 되찾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보충할 군인, 무엇보다도 제대로 훈련받은 군인이 필요하였다. 이런 필요성은 전쟁 시작 때부터 강조되었지만,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고 38도선을 중심으로 길어지면서 더더욱 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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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해결해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는 군대를 세우는 일이었다. 당시 한반도에는 일본군·관동군·국민혁명군·팔로군·광복군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 국군준비대 등 사설 군사단체나 비슷한 군사단체가 여기저기 생겨 그 수가 무려 60여 개나 되었다. 이에 하나로 통일된 공식적인 군사조직이 필요하였는데, 통일된 조직은 우리나라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미 군정청에 의해 이루어졌다.

미 군정청이 발표한 <미 군정법령 제28호>에 따라 1945년 11월 13일 우리나라의 군대 업무를 담당할 공식적인 조직으로 국방사령부가 미 군정청 안에 처음 만들어졌다. 국방사령부 아래에는 군무국과 경무국을 두었는데, 군무국은 다시 육군부와 해군부를 두어 경비대 창설 준비를 해나갔으며, 경무국은 경찰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1946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현재 주소로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지역)에 1개 중대 규모로 남조선 국방경비대(조선 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남조선 국방경비대가 창설되면서 그동안 세워졌던 각종 군사단체는 거의 해산되었다.

국방사령부 안에 군무국와 경무국을 함께 둔 것은 미군정이 치안에 관한 일은 한곳에서 하는 것이 좋다는 견해에서 그리 한 것이었으나, 군대 업무와 경찰 업무는 성격상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서로 성격이 다른 업무를 하나의 기구 안에 묶어놓음으로써 적지 않은 모순과 마찰이 생겼다. 그리하여 미군정은 1946년 3월 29일 <미 군정법령 제64호>에 따라 국방사령부는 국방부로 바꾸고, 그 아래에 군무국만을 관리하게 하면서 군무국 밑의 육군부와 해군부는 그대로 두었다.

그런데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 측은 미군정 당국이 한국임시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국방부라는 기구를 조직·사용하는 데 대하여 항의하였다. 이에 한국 측에서는 대한제국 때의 군사기구인 우영·후영·해방영을 통합한 이름인 통위영을 따서 1946년 6월 9일 국방부를 통위부로 바꿈과 동시에 군무국을 폐지하고, 그 밑의 2개부를 조선 경비국과 조선 해안경비국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미 군정청은 국방의 개념을 국내 치안으로 바꾸기로 결정, 6월 15일 <군정법령 제86호>를 발표하여 국방부를 국내경비부로 변경하였다. 그럼에도 한국 측에서는 국방의 뜻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그대로 국내경비부를 통위부라 부르며 그대로 사용하였다. 국방부가 국내경비부로 변경됨에 따라 1946년 6월 15일 남조선 국방경비대도 남조선 경비대(조선 경비대)로 그 이름이 바뀌었으며, 또한 남조선 해안경비대(조선 해안경비대)가 창설되었다. 조선 해안경비대는 미 군정청의 인정을 받아 이미 1945년 11월 11일 창설된 해방병단(뒷날 대한민국 해군으로 이어짐)이 발전한 것이었다.

통위부는 미군정 시기에 설치된 조선 경비대와 조선 해안경비대를 한꺼번에 관리하는 최고 군사기구였으며, 미군정 아래에서 군 창설과 관련된 업무 대부분을 추진한 곳이었다. 통위부에는 오늘날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통위부장이 있었고, 조선 경비대 총사령부와 조선 해안경비대 총사령부가 설치되어 오늘날 육군과 해군의 기능을 가진 경비대를 지휘·통제하였다.

1948년 7월 17일, 법률 제1호인 <정부조직법>에 따라 정부 11개 부서의 하나로 오늘날의 국방부가 설립되었다. 다만, 실제 국방부장관 취임식과 국방부 창설은 그 이후에 이루어졌는데, 국방부 창설은 1948년 8월 31일 이루어졌으며, 미군으로부터 조선 경비대에 대한 지휘권을 넘겨받는 날은 9월 1일이었다.

군 통수권을 넘겨받은 것과 함께 조선 경비대와 조선 해안경비대는 모두 1948년 9월 1일부로 국군으로 부르기로 결정되어 9월 5일 조선 경비대와 조선 해안경비대는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바뀌었다. 국방부 설립을 시작으로 국방부는 1948년 11월 30일 <국군조직법>을 발표하고, 이에 근거해 조선 경비대는 정식으로 육군이 되었다.

  • 질문1 우리나라의 군대 업무를 담당할 공식적인 조직으로, 미 군정청 내에 처음 만들어진 조직의 이름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 질문2 미군정이 국방사령부를 국방부로 바꾸자 소련 측이 항의하였다. 이에 다시 이름을 무엇으로 바꾸었는지 써봅시다.
  • 질문3 우리나라 국군(육군)의 전신인 남조선 국방경비대가 창설된 곳에는 현재 어떤 기관(군대·학교)이 있는지 써봅시다.
  • 질문4 법률 제1호인 <정부조직법>에 따라 정부 11개 부서의 하나로 오늘날의 국방부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은 몇 년부터인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2

군대 창설과 함께 필요한 것은 전투할 수 있는 병사를 길러 내고, 이들을 지휘하고 군대를 이끌어갈 간부(장교)를 길러 내는 일이었다. 또한, 군대를 잘 유지하는 위해서는 끊임없이 병사를 훈련시키고, 특히 신병을 훈련시켜 병사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였다. 이에 신병을 훈련시켜는 훈련소 설치가 군대 창설과 함께 추진되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통위부의 조선 경비대가 1948년 6월 26일 경상북도 대구에 제1훈련학교(훈련소), 서울 용산에 제2훈련학교, 경남 진해에 제3훈련학교를 세워 제1훈련소에서는 미국 제6보병사단 병기교육단에 의한 경기관총, 2.36인치 로켓포, 57mm 대전차포 등을 사용하는 교육을 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자 싸울 병사를 길러 내어 전쟁터로 보내는 일을 담당할 훈련소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이에 국방부는 1950년 7월 11일 경북 대구에 제25교육연대를 창설하는 것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훈련소를 세웠다. 1950년 8월 14일 대구에 제1훈련소, 부산(경남 김해)에 제2훈련소 등을 창설하였으며, 8월 22일에는 부산 구포에 제3훈련소, 제주에 제5훈련소, 경남 밀양 삼랑진에 제6훈련소 등을 세웠다. 그러나 이들 훈련소로는 한계가 있었다.

북한군과 중국군에 밀려 1951년 1월 4일 서울에서 다시 후퇴하며(1·4 후퇴) 부산으로 수도를 옮긴 정부는 서울을 다시 되찾는 것은 물론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군인이 필요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빠른 시일 안에 훈련시켜 전투를 잘할 수 있는 군인을 길러 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제주도였는데, 제주도는 6·25 전쟁 당시 비교적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던 안정된 지역이었으며, 따라서 체계적이면서 대규모로 훈련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에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현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육군 제1훈련소를 세우게 되었다.

제1훈련소가 세워진 곳은 모슬포항 등이 있는 지역으로, 제주도 남서쪽 끝 부분에 위치한 모슬포 지역은 항구 이외에도 일제강점기 일본군들이 사용하던 병영(兵營: 군대가 집단으로 머물던 곳)이나 병사(兵舍: 군대가 집단으로 살던 집), 알뜨르비행장, 지하벙커 등 대규모 군사 시설이 있던 곳이었다. 또한, 이곳은 통위부의 조선 경비대 군대가 늘어나는 가운데 1946년 11월 16일 제9연대가 창설된 곳이기도 하였다.

1951년 1월 14일 제주도 모슬포지역에 육군 제1훈련소가 세워져 대구에 있던 제25교육연대가 1951년 1월 22일 이곳으로 옮겨와(그래서 육군 제1훈련소의 공식적인 창설일을 1월 22일로 보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 제58군 병기부장인 오무라 슈[大村修] 대좌가 사용하였던 오무라 병영[大村兵舍(대촌병사: 오무라 헤이샤)]를 제1훈련소 본부 시설로 사용하며 제1훈련소를 이끌어갔다. 그리고 3월 21일에는 제주도에 있던 제5훈련소 등 다른 훈련소들을 제1훈련소로 통합하여 운영하였다. 그리고 1951년 3월 14일 서울을 다시 되찾은 이후 38도선을 중심으로 전투가 이루어지자 섬이 아닌 육지에 있는 훈련소가 필요하여 1951년 11월 1일 충남 논산에 제2훈련소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제1훈련소는 시설이 부족하여 10만 명가량 수용하기 위해 천막을 쳐 숙소로 사용했으며, 미국 육군의 교육과정을 모방하여 보통 16주 동안 소총병 기초훈련을 하였으나 급할 때는 기간을 줄여 빠르게 훈련하였다. 기초훈련을 마친 병사는 곧바로 전쟁터에 보내거나 육지에 있는 각 병과학교(또는 훈련소)로 보내졌다.

제주 육군 제1훈련소는 휴전 이후 육지와 너무 떨어져 있는 불편함 등으로 제2훈련소로 창설된 논산훈련소와 제3·5·6훈련소 등으로 모든 교육 및 훈련 부대가 옮겨가면서 1955년 12월 21일 문을 닫았다. 육군 제1훈련소는 1951년 1월부터 1955년 12월 문을 닫을 때까지 근 5년간 약 50만 명 정도의 신병들을 훈련시켜 전방으로 보냈는데,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와 맞먹는 숫자였다. 6·25 전쟁 기간 제주 육군 제1훈련소의 역할이 자못 컸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제주 육군 제1훈련소는 많은 시설이 사라지고 당시의 지휘소 본관 건물, 막사, 의무대 건물 등이 남아 있을 뿐이며, 제주조각공원을 지나서 산방산으로 가는 4차선 도로 양옆에 제1훈련소 정문 기둥 두 개가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서 있어 이곳이 훈련소였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리고 길 앞쪽에 당시 훈련병들의 종교시설로 사용된 강병대(强兵臺)교회가 남아 있으며, 맞은편에는 옛 해병대 훈련소가 남아 있다.

강병대교회는 ‘남제주 강병대 교회(南濟州 强兵臺 敎會)’라는 이름으로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으며, 제주 육군 제1훈련소는 ‘제주 구 육군제1훈련소 지휘소(濟州 舊 陸軍第一訓練所 指揮所)’라는 이름으로 2008년 10월 1일 등록문화재 제409호로 지정되었다. 맞은편에 있는 옛 해병대 훈련소도 2008년 10월 1일 ‘제주 구 해병훈련시설(濟州 舊 海兵訓練施設)’이란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제410호로 지정되었는데, ‘제주 구 육군제1훈련소 지휘소’와 ‘제주 구 해병훈련시설’ 등록문화재는 모두 현재 해병대대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외에도 2008년 10월 1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것으로는 김천 부항지서 망루(등록문화재 제405호), 경북 칠곡 왜관철교(등록문화재 제406호), 파주 영국군 설마리전투비(등록문화재 제407호), 연천 유엔군 화장장시설(등록문화재 제408호), 국산 1호 항공기 ‘부활’(등록문화재 제411호) 등이 있는데, 이렇게 많은 6·25 전쟁 관련 문화재가 한꺼번에 지정된 것은 드문 일었다.

한편, 제주 육군 제1훈련소가 1951년 12월 문을 닫은 이후 논산 제2훈련소를 제외한 모든 훈련소도 문을 닫으면서 논산훈련소가 우리나라 훈련소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에 논산훈련소는 대한민국 남자가 군대 갈 때면 반드시 들리는 곳처럼 되었다. 논산훈련소는 초기에는 병기·병참 등 주로 특별병과훈련을 실시하였으나, 제1훈련소 해체 후에는 보병·포병 등 전투병과훈련에 주력하였다. 그 뒤 1960년 이후 각 사단에 신병교육대가 설치되면서 군사기초교육만을 담당하다가 1979년부터는 특기병 위주로 군사기초교육을 하고 있다. 흔히 논산훈련소를 연무대 또는 연무대훈련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부대를 세울 때 이승만 대통령이 ‘練武臺’라는 글씨를 써주어 그리 부르게 된 것이다. 1999년 2월 1일 논산 제2훈련소는 ‘육군훈련소’로 이름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질문1 육군 제1훈련소가 1948년 처음 세워진 곳은 어디인지 써봅시다.
  • 질문2 대구에 있던 육군 제1훈련소는 1951년 1월 22일 어디로 옮겨갔으며, 왜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는지 써봅시다.
  • 질문3 육군 제1훈련소는 휴전 이후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 써봅시다.
  • 질문4 휴전 이후 우리나라 훈련소를 대표할 정도로 유명해진 육군 제2훈련소는 어는 훈련소인지 써봅시다.
  • 질문5 제주 모슬포 지역에는 어떤 군사시설들이 남아있는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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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6·25 전쟁 기간 열린 어느 체육대회 모습이다.

  • 질문1 사진에 보이는 이들의 옷차림 등으로 보아 어느 기관(직장)에서 하는 체육대회라고 여겨지는지 써 봅시다.
  • 질문2 6·25 전쟁 기간에 이런 체육대회를 하였다면 이것은 단순한 체육대회가 아니라 어떤 성격의 체육대회라고 할 수 있는지 써봅시다.
  • 질문3 한참 전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때에 이런 대규모의 체육대회를 할 수 있는 지역은 어느 도(道)에서 가능하였을지 써봅시다.

시각자료 2

6·25 전쟁 당시 군인들이 생활하던 곳이다.

  • 질문1 주변에 돌이 많거나 돌로 담을 쌓은 것 등으로 보아 이곳은 어느 도(道)에 있던 곳인지 써봅시다.
  • 질문2 이곳이 육군 제1훈련소가 있던 곳이라고 할 때, 군복을 입고 걸어가는 이들은 어떤 일을 하던 이들일지 써봅시다.
  • 질문3 이곳이 육군 제1훈련소가 있던 곳이라고 할 때, 뒤쪽에 보이는 건물은 어떤 건물일지 써봅시다.

시각자료 3

현재 제주에 남아 있는 어느 건물의 모습이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문화재검색 ‘제주 구 육군제1훈련소 지휘소’

  • 질문1 건물의 중앙 문에는 ‘군수창고’라는 글이 쓰여 있기도 하다. 이곳은 무엇을 하던 곳이었을지 써 봅시다.
  • 질문2 이 건물이 육군 제1훈련소의 지휘소 건물이었다고 한다면, 현재 관리 상태는 어떤 상태인지 써봅시다.
  • 질문3 이곳은 6·25 전쟁 기간 제주도 주민과 맞먹는 50여만 명의 군인을 훈련시켜 전쟁터에 보낸 소중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사적지들을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해야 할지 자신의 의견을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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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제주 육군 제1훈련소는 2008년 10월 1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409호로 지정되었다. 이외에도 2008년 10월 1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적지 않았는데, 이들을 조사·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대한민국 남자라면 군대에 가면서 대다수가 들려 훈련을 받게 되는 논산훈련소에 관해 조사·정리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에 군대를 다녀오신 분을 만나 대한민국에서 군대(육·해·공군)에 가는 방법이나 그 과정은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고, 그 결과를 눈 등을 통해 친구들과 공유해 봅시다.
모둠활동 4
제주도 수학여행이나 가족여행을 갈 경우, 모슬포 지역에 남아있는 옛 군사시설들을 조사·정리하여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제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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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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