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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영덕 3·1운동의 출발점 영해 만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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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는 오랜 역사를 누려온 고장이이요 강산도 아름다운 겨레의 옛 터전이다. 푸른 동해의 기상을 받은 이곳 동포들 맑고 의롭게 사는 전통을 지켜왔었다. 지난날 왜적에 항쟁했던 3·1 운동 때 가장 치열하게 싸운 곳도 이곳이었다. 돌아 보건데 1919년 3월 18일 음력으로는 2월 17일 장날을 가려 영해를 중심으로 축산면 창수면 병곡면 수만 군중들이 지도자의 뒤를 따라서 죽음을 무릅쓰고 외쳤던 만세 소리는 동해의 파도소리 보다도 더 높았었다. 피 흘리고 숨지고 매 맞고 옥에 갇히고 수난 속에도 굴하지 않는 의사 열사들 우리 모두 그 영혼 앞에 위로를 드리고 그 뜻을 새겨 겨레의 갈 길을 삼으리라"

 

이 글은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의 ‘영해 3·1 의거탑’ 비문에 새겨진 글이다. 1919년 3월 18·19일 영해면 주민들이 성내리 시장에서 출발하여 영해주재소를 공격하며 3·1 만세 시위를 펼쳤다. 평화적으로 시작되었던 3·1 만세 시위는 일본인 경찰의 위압적인 자세를 계기로 폭력적 양상을 띠었으며,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영해의 3·1 만세 시위는 영덕군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출발점이었으며 주변 지역의 3·1 만세 시위에도 영향을 주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672-3
현재 상태 멸실 / 옛 주재소 건물은 없어지고, 그 터에 영해지구대 건물이 있다.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여 식민지로 만든 후 일제는 조선인 가운데 세력이 크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을 끌어들여 면의 운영자로 임명하여 말단 행정 구역인 면의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당시 면장은 헌병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법령이나 서류를 전달하고, 세금을 내도록 독려하며, 사람들의 이동과 움직임을 보고하는 등 식민지 정부 유지의 기초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농민들에게 각종 세금은 큰 부담이 되었다. 이 시기 농민들은 토지세, 호세(戶稅), 토지에 대한 부가세, 시장세, 연초세(담배세), 주세, 각종 조합비 등 여러 종류의 세금을 내야 했다. 따라서 농민들이야말로 식민 지배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한편,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의 개최, 미국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 선언, 러시아혁명의 성공 등 세계 개조의 물결이 몰려왔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한국민들 사이에서는 일제 식민통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아졌다. 특히 미국 등 서구열강들이 한국의 독립을 도와줄 것이라는 낙관주의도 작용하였다. 이에 더하여 1919년 1월 22일 고종 황제가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이것이 일제의 독살 때문이라는 소문이 널리 유포되어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고종 황제에 대한 추모와 반일 감정이 더욱 고조되었다.

3·1 운동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주요한 종교 교단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종교계 지도자들은 독립이라는 민족적 대의명분 앞에서 교단, 종파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민족적 대연합을 달성하였다.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은 3월 1일부터 4월 11까지는 매일 평균 10회 이상 일어났다. 3·1 운동은 중앙에서 지방으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점차 확대되어 5월 말까지 전국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났다. 시위 건수로는 2천 회가 넘었고, 참가 인원으로는 연인원 2백만 명이 넘었는데 이는 전체 국민 1천 9백만 명의 10%가 넘는 인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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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3·1운동의 제 1단계는 민족대표 33인이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대도시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된 단계이다. 민족대표 33인은 대체로 종교지도자, 민족자본가 및 신지식층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상하이의 신한청년당과 동경유학생들의 독립운동 움직임에 자극되어 운동을 각기 준비하였다. 독자적인 운동을 준비하던 학생층과도 막바지에 연결이 되었다. 운동을 주도적으로 준비한 이들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독립청원, 미국에 독립지원요청, 일본에 독립승인 요구, 국내에서의 독립선언을 통하여 독립을 획득한다는 방침을 채택하였다. 이 가운데 그들이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강화회의에 대한 독립청원과 미국에 대한 독립지원요청이었으며, 국내에서의 독립선언은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국내에서의 시위는 어디까지나 비폭력주의에 입각해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민중들에게 제시하였다.

3·1운동의 2단계는 3월 초순 학생과 상인 및 노동자층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3·1 만세 시위운동이 서울, 평양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전개된 운동의 초기 단계이다. 이 시기에 전국 주요 도시에서 운동을 이끈 사람들은 주로 학생과 젊은 지식층이었다. 노동자 상인층은 그들에 호응하여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상인과 노동자들은 만세 시위와 동맹파업, 철시, 전차 파괴 등의 방법으로 항쟁하였다. 3·1운동은 이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3·1운동의 제 3단계는 3월 중순~4월 상순 사이 운동이 전국의 각 농촌으로 확산되고, 주요 도시에서도 운동이 계속되는 단계이다. 이 시기 농촌의 운동을 기획하고 조직하는 과정에서 서당선생, 학교 졸업생 등 지식층이나 일부 중소지주 등 유력자층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농민층 내부에서도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운동의 모습도 결렬해져서 곳곳에서 유혈 충돌이 일어났다.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야만적인 수단으로 이를 탄압하려 하였다. 이에 맞서 시위 농민들은 농기구나 간단한 무기로 무장하고 면사무소, 헌병 분견소, 경찰서, 친일 지주 등을 습격하여 호적대장, 과세대장 등을 소각하는 등, 일제의 식민 통치 질서의 근본을 붕괴시켜 나갔다.

3단계에 접어든 이후 비폭력주의의 표방은 무너지고, 3·1운동은 민중들에 의해 폭력적인 저항으로 발전한 제4단계로 들어섰다. 이 시기의 격렬한 저항을 보인 것은 농민들이었다. 1910년대 일제의 식민지배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층이 농민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조선의 절대 독립만이 자신들의 살 길이라는 생각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 중 일부는 3·1 만세 시위에 그치지 않고, 주재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이를 접수하기도 하였다.

  • 질문1 3·1운동이 초기에 비폭력으로 출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 질문3 3·1운동이 농촌으로 확산되면서 폭력적 양상을 띠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영해 시위는 3월 18일 12시 경에 정규하, 남효직, 남세혁, 박희락 등이 태극기를 안고 시장에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시장에 모여 각각 태극기를 나눠가지고 오후 1시경 영해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의 신호탄을 터트렸다. 영해 시위는 주재소를 거점으로 하여 장소를 옮겨가면서 만세를 불렀다. 집결 장소를 중심으로 세 차례 정도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첫 번째가 주재소에서 만세를 부르고 영해공립보통학교로 옮겨 간 것. 두 번째는 공립학교를 부수고 다시 주재소 앞으로 이동한 것. 세 번째가 주재소에서 시장으로 이동하여 만세를 부른 후 다시 주재소로 돌아와 기물을 파괴한 때이다.

첫 번째 시위 모습은 주재소와 영해 공립보통학교를 중심으로 만세 시위를 펼치는 다소 평화적인 형태를 띠었다. 이날 정규하는 정오 조금 지나 준비한 대형·중형 태극기 각 1개씩과 소형 태극기 약 40개를 가지고 시장으로 잠입하였다. 시장에는 남효직, 남세혁 등 주동 인물이 모여 있었다. 정규하는 주재소 앞뜰에서 가지고 온 소형 태극기를 시위에 참가한 군중에게 나누어 준 후 자신은 대형 태극기를, 박희락은 중형 태극기를 들었다. 오후 1시 경 정규하, 박희락은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은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여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때 쌀시장 부근에서도 남세혁이 준비한 대형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이곳의 군중이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였다. 이 때 시장에 모인 군중은 약 3,000여 명이었다. 주재소의 경찰은 어쩔 줄을 몰랐다. 정규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만세를 외치면서 그곳 보통학교로 몰려가 교사와 학생들에게 독립의거에 호응할 것을 종용한 후, 훈도를 데리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두 번째 시위 장면은 다소 공격적인 성향을 보여주었다. 군중들이 주재소로 몰려가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호통을 치자 경찰들은 순순히 이들의 요구에 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군중들은 다시 시장을 누비면서 만세 시위를 전개한 후 다시 주재소로 몰려들었다. 이 때 영해주재소 일본인 순사부장 스즈키[鈴木鶴次郞]가 나타나 거만한 태도로 주동 인물들에게 해산을 명령하였다.

주동 인물들이 불응하자 일본인 순사부장은 그들이 든 대형 태극기를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흥분한 군중들은 곤봉과 돌을 들고 주재소 안으로 밀고 들어가 집기를 부수고 일본인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훈사 2명의 모자와 대검(大劍)을 빼앗았다. 주재소 안의 유리창, 의자, 책상, 기타 기구는 산산조각이 나고, 서적, 장부, 서류 등도 모두 파기되었다. 일본인 순사부장은 군들로부터 몰매를 맞아 중상을 입은 채 넘어져 그의 제복 상의는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일본 순사 야마구찌[山口直一]와 진익조, 김여송, 권상식 등 한국인 순사보는 시위 군중들의 위세에 눌려 무기를 버리고 도망갔다. 군중들은 다시 공립보통학교로 몰려가 이곳 교원들이 애국심이 없다고 성토하고 교원을 찾았으나 모두 숨어버리고 나타나지 않자 군중들은 분개하여 그곳의 건물과 기구를 파괴하였다. 군중들은 다시 심상소학교로 몰려가 그곳을 부순 뒤 차례로 우편소, 면사무소로 몰려가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그곳마저 파괴하였다.

세 번째 시위는 정규하는 주재소 옆에 있던 높은 단에 올라가 연설을 한 후 군중과 더불어 다시 주재소로 몰려가면서 시작되었다. 군중들은 주재소 벽을 완전히 부수고 일본인 순사부장의 사택까지도 모두 파괴하여버렸다. 그 후 군중들은 부근 음식점으로 들어가 얼마 동안 휴식한 후 재차 시장에 집합하였다. 정규하는 이들에게 다시 연설을 하였다. 연설에 호응한 군중들은 또 다시 주재소로 몰려가 그곳에 걸려있던 경찰복을 전부 찢어버리고, 대검과 총기 4정 및 탄약 87발을 빼앗아 모두 파기하였다.

한편 이곳 주재소로부터 연락을 받고 영덕 경찰서로부터 일본인 서장을 비롯한 5명의 순사가 달려왔다. 이들이 군중에게 해산을 명하자 군중들은 격분한 나머지 이들을 포위하고 총기와 대검을 빼앗은 뒤 제복을 낫으로 찢고 곤봉과 주먹으로 두들겨 팼다. 그들이 기절해 버리자 시위 군중들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미즈모토 여관[水本旅館]에 감금하였다. 이날 밤 군중들은 밤새 독립 만세를 부르고 시내를 누비면서 시위를 하였다. 항일 의분에 불타 있던 군중들은 영해면 소재지를 완전히 장악한 흥분과 해방감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3월 19일 영해 장터에 다시 많은 군중들이 모여 18일의 열기를 이어갔다. 주재소 등 일제의 관공서를 완전히 장악했던 이들은 장터를 다니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오전 10시경 포항 헌병대가, 오후 5시에는 대구 조선군(한국주둔 일본군) 보병 80연대가 영해에 도착하여 진압 작전을 펼침에 따라 영해시위는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영해 시위로 인하여 피살된 사람이 8명이었으며, 1~7년 징역이 42명, 1년 미만의 징역이 9명, 집행유예가 28명이었다.

  • 질문1 영해에서 시위운동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2 영해의 만세시위 과정을 일어난 순서대로 정리해봅시다.
  • 질문3 영해의 만세시위가 폭력적 양상으로 변화되기 시작하는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4 영해 만세시위가 막을 내리게 된 이유를 말해보시오.

읽기자료 3

영해 시위를 처음 준비한 세력은 송천동 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력이었다. 권태원으로부터 3·1 운동의 정황을 전해들은 정규하가 기독교인들을 규합하면서 준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정규하, 박희락, 서삼진, 김치운, 남경문, 손영세, 김원발, 권유동, 장유학, 김성욱, 김상환, 김원수 등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여기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기독교인들만으로 영해 시위를 이끌어갈 수 없다고 판단하였고, 그래서 정규하는 영해지역 유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처럼 영해시위에 이 지역의 유림들을 동참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바로 이곳 원구동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기 전 이곳에서 전통적인 교육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들과 친문을 나누었던 관계였기에 가능하였다.

정규하는 먼저 인량동의 권상호를 찾아가 그 지역의 유림들을 만세 운동에 동참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어서 괴시동의 남효직, 남세혁, 권중엽, 권문경 등을 만나 3·1 운동의 정황을 알려주고, 그 곳의 유림이 참여할 수 있도록 설득하였다. 권헌문은 권태연의 권유로 이들과 함께 영해 시위를 준비하였다. 정규하로부터 부탁받은 이들은 각자 구역을 정하여 유림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유림세력을 규합하는 데는 영해 지역의 대표적인 문중을 주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영해 지역을 대표하던 영양 남씨, 안동 권씨, 대흥 백씨, 무안 박씨, 재령 이씨 등 5대 문중은 탄탄한 사회 경제적 기반을 다져놓고 있었다. 이렇듯 영해 시위는 처음 준비 단계부터 기독교 세력과 유림세력이 협력하였으며, 각자의 역할과 지역을 분담하여 시위 군중을 규합하였다.

한편 3·1 운동의 전개형태는 일반적으로 독립만세를 부른 평화적 만세운동과 공격적인 성격을 지닌 모습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3·1 운동은 비폭력시위, 즉 평화적 만세운동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3·1 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본격적인 만세 운동으로 전환하는 시기에는 공격적인 형태로 성격이 변했다. 그리고 각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식민통치의 최말단기관인 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을 파괴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영해면에서의 3·1 운동은 이 두 가지 양상을 모두 보여주면서 이루어졌다. 영해시위에서 공격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전에는 장터에서 먼저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장을 돌면서 만세를 부르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해주재소 순사들이 시위 군중들이 들고 있던 큰 태극기를 빼앗으려 달려들면서 공격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3월 19일 시위 진압 부대의 무차별적인 사격으로 인하여 8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16명이 다치는 불상사가 발생했던 것이다.

영해의 만세시위는 영덕군 지역에서도 가장 빠른 3월 18일에 일어났다. 이 만세 시위운동은 인접 지역에도 영향을 주어 영덕군의 남부 지역이 평화적인 형태의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던 데 반해, 영해를 중심으로 한 북부 지역은 공격적인 성격을 띤 시위의 성격을 보여주었다.

  • 질문1 영해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두 세력을 말해보시오.
  • 질문2 영해의 만세시위 준비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대표적인 집안을 말해보시오.
  • 질문3 영해의 만세시위에서 발생한 사상자는 모두 몇 명인가요?
  • 질문4 영면의 만세시위는 주변 지역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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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영해면 성내리에 조성된 ‘영해 3·18독립만세운동기념탑’이다.

  • 질문1 많은 비용을 들여가면서 이와 같은 조형물을 조성하는 이유를 말해봅시다.
  • 질문2 영해 사람 입장에서 이 기념탑을 보면서 갖는 느낌이나 생각을 정리해봅시다.

시각자료 2

다음은 영해 3·1 만세시위를 재현하는 행사와 관련된 사진들이다.

  • 질문1 영해 사람들이 영해 3·1 만세시위를 기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리하여 발표해봅시다.
  • 질문2 3·1 만세시위를 재현하는 행사가 현재의 영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말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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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을 나누어서, 3·1 운동 당시 폭력적인 방법과 비폭력적인 방법 중 어느 편이 적절했을지 찬반 토론을 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역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조사하여 사건의 내용과 그 의미를 정리하여 발표해봅시다.
모둠활동 3
본인이 영해 3·1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한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참여를 설득하는 내용의 글을 써서 발표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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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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